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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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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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0.
게시일자 2016. 09. 25.
동영상 길이 1:09:08
강의 중 인용 도서 맹자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7imtXjXaE4E



진심장 상(上)은 지난주까지 끝내고요, 진심장 하(下) 들어가겠습니다. 47절인데요. 맹자가 이르길 “맹자왈 불인재라” 재(哉)는 이제 말 끊어주는 거죠. “불인(不仁)하다. 양혜왕이여” 양나라 혜왕이여 인자하지 못하다, 이거죠. 인자한 사람은 “인자(仁者)는 기소애(其所愛)” 소애를 가지고, 사랑하는 바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마음으로” 이렇게 반영했습니다.

여기 소애(所愛)인데요, 이 ‘소(所)’자는 우리가 ‘장소 소(所)’, 무슨 ‘뭐뭐한 바’ 이렇게 들어가죠. 바, 뭐뭐한 곳, 이런 데. 여기 이 집이죠, ‘집 호(戶)’자인데 이게 문이거든요. 이게 문이고, 이렇게 해도 문이죠, 문. 이렇게 하면 문이고요. 하나만이면 문이 좀 작은 거죠, 이게 집을 상징한다면. 작은 문인데 이거는 뭐냐면 이렇게 이게 원래 이렇게 ‘도끼 근(斤)’자인데, 이렇게 생겼죠. 이게 도끼예요, 콕 찍는 거. 이게 지금 이렇게 변했는데, 이걸 어떻게 보냐면 이렇게 보면 쇳대죠. 이렇게 하나가 이렇게 돼 있고 이렇게도 그리거든요, 이걸. 1:21

여기는 도끼로 보는 게 아니고, 문하고 그 문을 잠그는 열쇠예요, 위아래를 딱 걸어놓은. 이 장소라는 건 어떤 문 닫아서 딱 잠가놓는, 어떤 창고나 어떤 집 이런 걸 말하게 된 거죠. 근데 이 장소인데 나중에는 이제 ‘뭐뭐한 바’ 이렇게 ‘뭐뭐한 것’ 이렇게 넓게 쓰입니다. 옛날 원형만 고집하면 안 돼요. 이게 원래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데서 나왔다는 거고요. 그 뒤에는 이게 넓게 쓰입니다. ‘뭐뭐한 바, 것’. ‘바’는 ‘것’이죠.

요즘 말로 뭐 하는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 간단해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기소애(其所愛)’. 사랑하지 않는 것 ‘기소불애(其所不愛)’, 사랑하지 않는 것에다가 미친다는 거예요.” 어렵죠? 이 ‘미칠 급(及)’자도 이래요. 이게 우리가 말하면 이게 사람이죠, 제가 항상 그리는. 사람인데 사람을 뒤에서 손을 잡는 거예요, 가서. 여기 이제 ‘미칠 급(及)’자 이게 이렇게 된 거예요. 이해되시죠? 뒤에 가서 사람을 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도달하다, 미치다’는 뜻이 된 거예요. 어디 가는 사람을 잡아서 딱 붙잡다, 내가 가서. 2:42

그러니까 사랑하는 게 어디에 도달하냐면, 사랑하지 않는 곳에 도달해요. “인자仁者는 (그러니까 제가) 정말 사랑하는 것을 대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던 것에까지도 다 도달하게 한다”라는 거예요, 인자(仁者)는. 불인자(不仁者)는 반대겠죠. “불인자(不仁者)는 사랑하지않는 그 마음을, 사랑하지않는 것을 가지고 사랑해야 될 것까지도 도달한다”라는 거예요.

근데 지난 시간에 (이거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부모님하고 3단계 나눴어요. 부모님하고 백성하고 동물이나 식물하고 있는데, 견마나 뭐 동식물. 이 등급이 이게 제일 사랑해야 할 거죠. 등급이 이렇게 나뉘죠. 그렇죠? 그러니까 부모님은 제가 사랑 안 할 수가 없죠. 백성은 사랑 안 할 수도 있고, 동식물은 정말 사랑 안 할 수도 있어요. 근데 ‘인자하다’는 건 방금 이렇게 보면, 어버이를 대하는 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모르는 일반 사람한테도 적용을 하고, 동식물에까지 적용해 보는 거예요. 이게 ‘인(仁)하다’는 겁니다. 3:45

불인자(不仁者)는 동식물 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역으로 어버이한테 대하는 거죠. 그러니까 불인자죠. 그래서 연결돼 있어요. 맹자의 이 세 가지 구도가 맹자가 평소에 자기가 생각하는 3등급이겠죠? 이걸 가지고 꼭 적용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이건 뒤에 보면, 이 단계로 얘기를 합니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거냐?” 공손추가 말하니까, “양나라 혜왕이 토지 때문에, (땅 때문에) 그 백성을 전쟁으로 문드러지게 하고, 전쟁에 크게 패해서 장차 다시 싸우려고 함에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서 무슨 수를 쓰다가 (제가 정확한 얘기 모르는데) 사랑하는 자(태자)를 죽게 했다는 겁니다.” 4:26

그러면 이 상황을 보세요. 반대죠. 물은 땅이죠. 이 땅 때문에 백성을 죽게 하고요, 더 나아가 자기 친자식까지 죽게 했다는 거예요. 그럼 이게 그 상황이죠. 우리가 돈 때문에 자식까지 죽게 했다. 이게 불인(不仁)한 극치예요. 돈은 물건인데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다 적용을, 자기 자식한테 적용한 거니까 ‘불인 하다’는 겁니다. 4:53

그래서 이걸 두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향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하는 바에 미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게 재미있는 게, 이런 발상이 똑같아요. 이 3등급이요, 불가(佛家)에서 자비관을 할 때 하는 게 있거든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하는데,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하는데, 제가 평소에도 강의할 때 많이 했던 건데 ‘자비희사(慈悲喜捨)’거든요.

자(慈), 남을 도움(사랑)에 이롭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이고요. 비(悲), 남의 슬픔을 같이 슬퍼해 주는 마음이고요. 희(喜),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해 주는 마음이고. 사(捨), 이건 평정심이거든요. ‘버릴 사(捨)’자라 마음에 있는 걸 다 버려버린 평정심을 말해요. 이건 뭐냐 하면 남이 나한테 고통을 가해도 내 마음이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자비(慈悲)가 단계별로 더 어렵다고 그랬죠. 그런데 이 네 가지를 다 해서 우리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초기 불교에서부터 나와요. 그러니까 소승불교도 사실은 대승적인 불교예요, 원래. 인도에서 부처님 가르침이 펴지다 보니까 이런 거보다는 본인의 열반에만 관심을 가져서 그렇지 부처님은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초기 불교 때부터 계속 강조하세요. 6:08

그래서 이 ‘사무량심(四無量心)’하고, 소승불교에서 주로 닦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계율 지키고, 선정하고, 지혜, 요게 합쳐지면 6바라밀이 나와요. 그러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이 6바라밀이, ‘보시’라는 건 ‘자비’, ‘사무량심(四無量心)’에서 나온 거고, 나머지 것들은 ‘팔정도(八正道)’나 ‘계·정·혜’에 다 있는 거죠. 6:31

‘팔정도’랑 ‘사무량심’을 합치면 ‘6바라밀’이 나와요. 대승불교의 덕목은 소승불교 덕목에 ‘사무량심’을 합친 건데, 원래 소승불교에 이미 있는 거니까 사실은 ‘6바라밀’도 새로울 게 아니죠. 대승불교에서 사실은. 초기 부처님은 다 얘기를 했는데 원형에는, 소승불교에서는 자기 본인의 해탈 위주로만 하니까 대승불교에서 부처님 초기 가르침 중에 이제 몇 개를 묶어서 새롭게 들고나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자비관’을 할 때, 이걸 수련한 걸 ‘자비관’이라고 하는데 ‘사무량심관’을 수련할 때는 먼저 선정(禪定)상태에 들어가요. 마음을 하나로 평정심을 유지한 다음에, 그 상태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는 거예요. 먼저 (여기 제 자료에 있죠) 나부터예요.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누구한테 그다음에 불러내보냐면 가족이나 애인을 불러내요. 이거죠, ‘친(親)’ 부모나 자식 간의 얘기잖아요. 이 ‘친(親)’, 친한 이를 불러내요, 친해야 할 사람. 7:29

그러면 사랑을 해주고 하는 게 쉽죠. ‘자(慈)’를 해주고, ‘비(悲)’를 해주고, 다 쉬워요. 나랑 제일 가까운 사람은 잘 되라고 해줄 수도 있고, 이렇게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뭔가 주고 물건을 그 사람이 슬퍼할 때 아파해 보고, 그 사람이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상상을 해보고, 축하해 줄 수 있는지 마음을 만들어보고, 이걸 계속 수련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힐 때 내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지 보고. 사실 이 정도 안 되고서 애인愛人(남을 사랑함)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 사람이 날 괴롭혀도 참아낼 용의가 있는지, 이거 확인해 보는 거예요, 일일이 다.

실제로 가면 또 다르니까. 그래서 계속 연습을 해야 하는 거예요. 이거를 연습 안 하고, 동물적으로 호르몬이 나올 때는 “와(잘 되네)” 하고 호르몬 끝나면 “안되네” 이러면 이게 인간으로서 좀 문제가 생기죠. 그런 식으로 해서 인간 간의 관계가 안 돌아가거든요, 이렇게 동물적으로. 8:06

그러니까 이건 명상을 해서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 호르몬을. 실제로 이걸 시뮬레이션을 계속하다 보면 잘할 수 있다는 거죠. 그다음 불러내야 할 게, 이제 가족 애인보다 한 단계 먼 친구예요. 친구를 불러내서 줘봐요. 또 그렇게 해봐요, 가족처럼 할 수 있는지. 그다음에 중생, 나랑 별 관계가 없는 중생이에요, 여기서는. 그냥 길 가는 사람 같은 사람들. 우리나라 국민들, 일단 가까운 사람부터 한번 해보는 거예요. 그다음에 세계 시민들 해보고. 그다음 나랑 중생은 별 의논이 없는 사람이고. 가족이나 친구는 가까운 사람인데 정반대로 아주 먼 사람이 있죠. 나를 화나게 한 나의 원수, 원수를 불러다가 그걸 할 수 있는지 해봐요, ‘자비희사(慈悲喜捨)’. 8:46

그 다음에 ‘시방일체중생(十方一切衆生)’그러면 이제 동물·식물까지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 중생한테 다 적용을 한번 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불교관인데, 맹자도 똑같은 방법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걸 3단계로 얘기했을 뿐이에요. 이 물(物)은 동물·식물이잖아요? 중생들이에요, 불교에서는. 불교에서 중생에는 광물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동물만은 불교 중생에서 ‘유정중생(有情衆生)’이라 그래요. 감정이 있냐 없냐인데 이 감정이, 식물도 사실 요즘 밝혀진 바로는 감정이 있죠. 그 런데 이 식물하고 광물은 흔히 ‘무정중생(無情衆生)’이라 그래요, 불교 기준으로. 요즘 보면 유정이죠. 그런데 이 무정이라고 하는 게 좀 더 동물적인 점까지 얘기했다고 그냥 보시면 되죠.

옛날에 유정(有情)이라고 말하는 거는 좀 더 동물 수준의 그런 지각이 있는 상태, 식물보다는 뇌가 달려있는 애들을 우리가 ‘유정有情’, 뇌가 없는 애들은 ‘무정(無情)’ 이렇게 봤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물(物), 가족·애인·중생·일반중생 그다음에 여기 민(民)에는 원수도 들어가겠죠. 원수, 그다음에 동식물까지 해보는 거 보면 불교나 지금 유교나 같아요. ‘자비관’이나 우리 인(仁)하자는 ‘인仁사상’이나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까지 한번 보시면 재밌을 내용이죠.)

그다음에 48절 가면요, “맹자가 이르길 춘추시대에” 이게 이 문장이 유명해요. “춘추무의전(春秋無義戰), 춘추시대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 춘추시대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각자 얘기하거든요. “내 전쟁은 더 명분이 있다. 인의예지에 맞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을 하는데, 아마 이 얘기도 이 앞에 질문이 없어서 그렇지 누가 분명히 “그래도 그 전투는(그 전쟁은) 좀 의로운 것 같아요”라고 얘기를 했을 거예요. 10:53

왜냐하면 그 뒷말을 보면 그런 뉘앙스거든요. 그러니까 맹자가 딱 자르는 거예요. “춘추시대에 의로운 거 없다. 오십 보 백 보다.” 이렇게 딱 잘라 친 거죠. “저것이 이것보다 선한 것은 있으나(彼善於此 則有之矣), (이 말에 보면 그 전의 대화의 뭔가, 어떤 전투 하나가 얘기가 된 거예요) “그것이 일반적인 다른 전투보다는 좀 선한 것이 있다.” 명분에 더 맞긴 하지만 뭐가 근본적으로 틀려 있냐면, 본래 이 정벌이라는 거는, (이게 춘추나 전국시대에 많이 나오는 말인데요)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걸 쓰는데요. 이 말입니다.

정벌(征伐)이라고 하는 게 있죠. ‘행(行)’자에 ‘바를 정(正)’자 요게 이쪽은 이게 길이거든요. 사거리를 말해요. 이거는 사거리입니다, 원래. 그다음에 이거에 갑골 문자는 ‘바를 정(正)’자는 이겁니다. 제가 이건 발바닥이라고 그랬죠. 뭔가 목적지를 향해 딱 가는 겁니다. 가서 이게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가서 정확하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이게 화살이죠,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이라고 보셔도 돼요. 이렇게도 써요.

화살이 날아가서 정확하게 맞는 것도 ‘바를 정(正)’이라고 해요. ‘화살이 정확하게 정곡을 찔렀다’라고 우리 ‘정곡(正鵠)’이라는 말이 다 화살 과녁에 집중해서 맞은 걸 말해요. 정(正)이나 곡(鵠)이나. 그래서 그럴 때 쓸 때도 있고요. 근데 이때는 그런 의미는 아니죠. 이때는 무슨 의미냐면 어느 성(城)이라고 보시면 돼요. 어떤 성(城)을 향해 가서, 어지러운 상태를 질서를 회복하는 걸 바를 정(正)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어딘가에 가서 바로잡다’라고 해야 돼요. 12:43

그래서 우리 말로 하면은 그냥 단순히 ‘바를 정(正)’이라는 느낌보다는 ‘바로잡을 정(征)’이에요. 뭔가를 ‘가서 바로잡을 정(征)’. 그러니까 보세요. 이 두 개가 합쳐지니까, 진짜로 길을 멀리 걸어가서, 행군을 해서 어디 가서 바로 잡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유엔UN, 우리나라 지금 전 세계 질서랑 비슷해요. 유엔을 통하지 않고 한 나라가 바로 가서, 어느 나라가 마음에 안 든다고 바로잡겠다고 가면 유엔에서 난리가 나겠죠. 이때도 그렇다는 거예요.

이때는 천자가 그렇게 중앙에서 통제하고 있던 때인데, 천자만이 정(征)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정벌(征伐)은 항상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어지러울 때 하는 건데, 자기들끼리 ‘서로 이렇게 정벌한다’라고 하는 거는 ‘가서 나는 바로잡겠다’예요. 우리가 흔히 ‘자기들끼리 정벌할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정벌이라는 개념이 정확하지 않아요. 그런데 원래 정벌은 이거예요. 질서를 다시 바로잡는 거예요. 회복해 주는 거요. 13:25

지금 천자 나라가 미국이라, 미국이 가서 마음대로 좀 바로잡고 하기도 하는데요. 이때는 천자 나라만이 할 수 있는 거죠, 그거를. 그런데 이때도 뭐냐면 지금 같으면 유엔을 통하지 않고 한 나라가 자기 힘세다고 막 바로잡겠다고 덤비는 게 국제 질서에 좀 문제가 있죠. 마찬가지로 이때도 천자가 움직이지 않는, 명분이 없는 그런 정벌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힘이 좀 세다고. 이때 패자들이 하는 거죠. 13:54

패자들이, 춘추오패들이 이렇게 막 정벌에 나선 거예요, 힘이 있다고. “이런 거는 동등한 나라끼리 서로 정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맹자는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춘추시대를 바라보실 때, 이런 맹자의 입장을 좀 참고해서 보시면 재밌을 거예요. 이 ‘정(征’)자 자체도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가서 바로잡겠다는 뜻이죠. 14:10

49절은 우리 민족(입장)에서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얘기죠. 이게 맹자가 본 족적은 동이족인지 중화족인지 모르겠는데 상당히 중화족 편을 많이 들어요. 은나라 망하고 주나라 들어설 때 주나라 편을 많이 드는데, 49절에 그 대표적인 얘기입니다. 유명한 얘기인데 “맹자가 이르기를” 봉우 선생님도 이 구절을 많이 비판하셨던 건데, 맹자가 동이족을 좀 이렇게, (본인)출신은 동이족인지도 몰라요. 이게 원래 자기(종)족이, 저기 중화(족)에 붙으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중화(족)가 더 좋다고 보고, 사상 문제도 있으니까. 보세요. 15:04

“진신서(盡信書)” “『서경』을 다 믿으면”입니다. 모두 다예요. 우리 천부경에서 무진본(無盡本), 무(無)가 모두(盡)의 근본(本)이다. 이렇게 할 때 여기서 ‘모두’로 풀 수가 있거든요, ‘진(盡)’은. “『서경』을 모두 다 믿으면,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하다(盡信書 則不如無書)” 『서경』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한 거예요. “나 『서경』 못믿어, 사실 『서경』 다 믿으면 안 된다. 다 믿지 않는다.” 특히 내가 무성편(武成篇)에서, 무성편(武成篇)이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쳐서 정벌하는 내용을 담은 거예요.

“나 무성편(武成篇)에서 솔직히 두, 세 가지 대쪽만 취할 거다.” 대쪽이니까 이거죠, 옛날 죽간. 중국 영화 요즘 보면 이 죽간 엮어서 책 만들잖아요. 대나무 한 쪽이에요. 요게 이제 두 쪽, 세 쪽이죠. “내가 두, 세 쪽만 믿겠다.” 이게(죽간) 글이 길게 쓰여 있어요. 우리 생각보다 좀 많이 쓰여 있어요. 16:07

그러니까 이 죽간이 한번 순서가 바뀐 게, 한 번 줄이 끊어졌다가 줄이 끊어졌다가 다시 엮이는 과정에 순서가 잘못 간 것들도 있어요. 이런 게 고증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들인데, “내가 두, 세 쪽밖에 못 믿겠다, 솔직히” 왜 못 믿겠냐라고 하면, “인자한 사람이 천하에 적수가 없으니, 지극한 인자함으로 주 무왕이 너무 성인인데, 지극히 인자하지 못한 은나라 주왕을 정벌을 하는데, 어찌 피가 절굿공이를 떠다니게 할 정도가 된단 말이냐” 16:45

『서경』 무성편武成篇을 바로 보시죠. (거기 있죠. 제가 번역해 놓은 건데요) 『서경』 무성편(武成篇)에 이 구절을 지금 비판하신 거예요. “갑자기 새벽에 수(은나라 주왕 이름)가 그 군대를 숲처럼 거느리고 목야에 모였다. (이게 목야의 전투인데요, 매우 유명한. 은과 주가 맞붙은 일인데) 우리 군대에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까 주나라 군대에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는 거예요. 17:10

“앞에 무리들이(은나라 앞에 있던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들고 뒷사람을 공격하여 배신하였으니,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떠다녔다. 무왕이 한 번 갑옷을 입자 천하가 크게 안정된다.” 이 자체도 되게 편파적이죠. 이런 전투가 있을 리가 없죠. 이 자체도 편파적인데, 맹자는 이것도 불만인 거예요. 17:30

성인이 전쟁을 하는데 피가 얼마나 흐르면 절굿공이가, 무거운 절굿공이가 이렇게 떠다니려면 피가 얼마나 흘러야겠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못 믿겠다는 거예요. (이게 맹자가 좀 오버하신 거 같은데, 그런 부분은 좀 이게 인의예지에 맞는 건지 의문이 듭니다.) 17:48

중국 얘기 좀 세죠. 전투를 그때 『봉신연의』나 이런 데서 보면, 이때 처절하게 싸운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 유리하게 둘러대는 건데, 이런 마인드가 지금도 남아서 막 동북공정도 이런 마인드로 역사 바꾸는 게 이 친구들은 아주 쉽죠, 말을 갖다가 안 믿기게 해버리죠. 진짜 그럴 싸하게 하면 믿을 텐데. 18:15

그 강성하던 은나라를 주나라가 싸워서 몇 년 만에 이겨도 잘한 건데, 이렇게까지 칠 필요는 없는데요. 맹자의 이런 마인드를 이제 50절에 보면, 맹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과하구나 하는 걸 잘 느낄 수 있어요. 어떤 마인드로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18:37

50절이에요. 맹자가 “어떤 사람이 나는 진을 잘 친다.” 진은 이제 군사의 대오를 이렇게 정비하는 거죠. “대오를 갖추는 걸 내가 아주 잘한다. (군사 배치를 되게 잘한다) 나는 전쟁을 잘한다고 한다면 이는 크게 죄를 짓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전쟁 잘하고 하는 걸 싫어하죠.

“나라 임금이 인자한 걸 좋아하면, 임금이 인자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다.” 이런 것도 유명한 얘기죠. 인자무적(仁者無敵) 이런. 실제 인자무적 이런 얘기가 나올 텐데 여기서는 이제 “인을 좋아하면 천하의 적이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9:40

“탕왕이” 탕왕을 예를 들었는데, 이 탕왕 이야기는 양혜왕편에 다시 나오니까 나중에 또 보시죠. “탕왕이 남쪽을 향하여” 향하면서 이렇게 정벌을 나서면, 이때는 또 달라요. 은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킬 때 얘기입니다. 탕왕이, 당시 하나라가 아주 정치를 못 하니까 거랑(탕왕)이 이제 쿠데타를 한 거죠. 쿠데타를 해서 제후국이던 은나라가 남쪽을 향하면 북쪽 백성들이 원망하더래요. “왜 우리를 빨리 먼저 해방시켜주지 않는가?” 동쪽을 향하면 서쪽 백성들이 “왜 우리를 뒤로하시는가?”라고 원망을 하는데, 무왕이 은나라 정벌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20:12

“가죽 전차가 300냥이고, 용맹스럽고 날랜 병사가 3천 명이었는데 무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까 백성들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천하에. “내가 백성들 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은나라 지도부만 내가 치겠다. 다른 백성들은 걱정 말라고 했다는 거죠. “그러자 마치 짐승이 그 뿔을 땅에 대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백성들이 다 감복했다는 거죠, 빨리 우리를 정벌해달라고. 20:40

이게 맹자가 좀 지나치게 소설을 쓰고 있다고 보죠. 천하에 이런 일은 없죠. 왜냐하면 무왕의 인자함으로 그렇게 은나라에다가 했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죠. 정벌이라는 게 또 이 얘기입니다. 정벌이라는 거는, 보세요. 아까 가서 바로잡는 거니까 포인트는 이거죠. ‘바를 정(正)’자랑 같은 글입니다. 이 정이나 이 정은, 사실. 그렇죠. 가서 바로잡는다는, 가다는 말이 원래 ‘바를 정(正)’에 있거든요. 이게 발이기 때문에, 밑에 있는 게. 그래서 “정벌이라는 건 바로잡음이다. 각기 자신을 빨리 바로잡아달라고 원하니 어찌 전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근데 이런 부분 가면 『맹자』가 또 그런 부분을 보여요. 공자님이랑 입장이 아주 달라요. 공자님은 은나라 왕족 출신이라, 이렇게 은나라 왕족이라 치우치게 본다는 게 아니고요, 은나라 편도 충분히 감안해서 얘기를 하시거든요. 그런데 맹자를 보면 너무 이렇게 좀 치우쳐서 얘기를 하는 거죠, 사실.

여기서 가죽 전차 300양(兩)이라고 해서 양(兩)이라는 말을 썼는데요. 이걸 이제 한 양(兩), 두 양(兩)이죠. 그 양(兩)이죠. 수레를 이걸 쓴 이유가 이게 둘을 의미하잖아요. 한 수레에 바퀴가 둘 달렸거든요, 옛날 중국 수레가. 그래서 양(兩)이라는 단위를 쓴다는 거고요.

50절 보면 아시겠죠? 이게 『맹자』 전편에 걸쳐 계속 나와요, 이런 얘기가. 맹자는 옛날 성인들의 세계에 대해서 좀 많은 동경을 갖고 있고, 이렇게 됐을 거라고 좀 미화해서 보는 게 있어요. 은나라를 이렇게 까려는 것보다 맹자는 그게 강한 것 같아요. 그렇죠. 동이족을 막 까려는 마인드보다, 이 당시 군주들한테 성인들 식으로 하면 전쟁을 안 해도 평화 세계가 올 수 있다는 이 얘기를 좀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인들이 전투에서 피 흘리고 한 이런 얘기들을 아주 싫어하고, 이렇게 얘기를 해야지 당시 전국시대의 군주들이 ‘그럼 나도 인(仁)을 하면 전쟁도 안 하고 쉽게 천하를 정복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을 하게 아마 이렇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똑같은 논리로 이렇게 동이족이 싫었다면 은나라 탕왕도 부정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탕왕에서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하고 싶어 하고, 하(나라)에서 은(나라)으로 바뀔 때도, 은에서 주(나라) 바뀔 때도 똑같이, ‘성인이 움직이면 인자함으로 천하가 알아서 기복한다’ 이거를 고대사에서도 꼭 적용을 시켜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좀 이해해 주시고요. 23:26

51절, “맹자가 이르기를, 목수와 수레바퀴와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남에게 그림 재는(컴퍼스입니다) 컴퍼스와 자를 줄 수는 있으나 기교 있게 해줄 수는 없다.” 복희씨 그림 보면, 복희요아 그림 있는 거 있죠? 이렇게 이렇게 뱀으로 서로 꼬여져 있죠. 복희요아에는 한쪽은 남자가 ‘컴퍼스’ 들고 있고, 여자는 이렇게 ‘자’를 들고 있거든요. 이게 이제 직각, 직선 재는 거죠. 근데 이거는 이제 ‘컴퍼스’죠. 옛날에도 이걸로 그림을 동그라미 이렇게 그리고, 그래서 ‘컴퍼스와 자’, ‘규구(規矩)’라고 그래요. 24:12

‘규(規)’는 컴퍼스고요. ‘구矩’는 이제 자죠. ‘혈구지도(絜矩之道)’할 때 이 구(矩)입니다. ‘종신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할 때 구(矩)고요. 요거요. ‘화살 시(矢)’자에 이렇게 돼 있는 거 있죠? 요게 이겁니다. 이게 화살처럼 곧다는 거예요. 곧은 거 잴 때 쓴다는 의미고요, 이거는. 요쪽이 뭐냐면 이 자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으로 이렇게. 자를 이렇게 들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화살같이 곧은 직선 잴 때 쓴다는 거예요. 직선 잴 때 쓰는 자를 이렇게 들고 있는 모습. 이게 아마 손잡이일 수도 있어요, 제가 직접 확인을 못 해서. 손잡이인 것 같아요. 자를 잡는 손잡이. 아시겠죠? 25:10

이 얘기가 이 『장자』중에 외편에 있죠. 천도 편에 나온 얘기가 있는데, 유명한 얘기인데 이 얘기랑 참 통하는 얘기라 제가 한번 같이 『장자』도 한번 맛 좀 보게요. 한번 실어봤습니다. 『장자』 천도 편 가면, 제나라 황공이 대청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요.

먼저 51절 내용 한 번 정리하고 가면, “아주 유능한 목수도 남한테 컴퍼스나 자는 이렇게 줄 수 있어도, (그 컴퍼스나 자만 가지고 아주 아름다운 바퀴나 어떤 집을 짓는 게 아니잖아요?) 그 기술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이거는 노하우를 얻어야 하잖아요, 본인이 노력을 해서.

이 얘기입니다. 공부도 똑같은 얘기인 게, 인의예지가 하나의 자예요. 우리가 항상 얘기하지만, 요즘도 제가 노래를 부르지만, 이게 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재는 자예요, 인·의·예·지(仁義禮智). 그러면 이게 제가 항상 얘기하지만, 이게 북이고, 동이고. 인간관계 동·서·남·북을 재는 자거든요. 그래서 이 자만 있으면 내가 중심에서 전·후·좌·우 어디든 다 잴 수 있어요.

지금 인仁을 할 때인가? 의義를 할 때인가? 예禮를 할 때인가? 지智를 할 때인가? 이걸 다 잴 수 있다는 거죠. 이 자는 얘기해 줄 수 있죠, 맹자가 얘기해 줄 수 있지만. 이거를 아주 재주 있게, 솜씨 있게 쓰는 거는 그 사람이 양심을 극도로 개발해서 도에 정밀해졌을 때 되는 거라 그 기교는 해줄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얘기가 지금 아주 적나라하게 실린 게 『장자』 천도 편인데요. 제나라 황공이 대청에서 책 보고 있는데, 윤편이라는 목수가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연장을 내려놓고는 “감히 묻겠습니다. 공께서 읽으시는 건 어떤 말씀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성인이 어디 계십니까?” 그러니까 공이 이르기를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그러면 임금은 죽은 사람 찌꺼기 보고 있는 거다”라고 딱 친 거예요.

그러니까 황공이 “내가 책 보는데 왜 네가 와서 시비냐?” 왜 네가 시비냐 하다가 “설명을, 이거 하면 괜찮으나” 이때는 분위기가 좋죠. 설명이, 이유가 타당하면 괜찮다는 거예요. 이게 당시 유세객들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행사해요. 처음에 세게 나가요, 말을. 왕의 혼을 쏙 빼놓은 다음에 설명을 해서 목숨을 부지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상을 받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그런 데에 많죠, 춘추전국 시대에 내려오던 얘기가. 이것도 이제 그런 형식인데요. 27:37

“설명할 수 없으면 넌 죽을 거다.” 윤편이 말하기를, “신은 신의 일로, 제가 하는 일로 관찰해 본 겁니다. 수레바퀴를 하나 깎더라도 느슨하게 하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좀 급하게 하면 빠듯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바퀴가. 바퀴의 미묘한 딱 맞는 상태를 만들어내기 어려운데 느슨하지도 않고 급하게 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손의 기술을 얻어야만 하며 (손이 아주 재주가 있어야 되고, 이 손기술을 일단 얻기가 쉽지 않고요) 그다음에 마음에 감응하는 바가 있어야 됩니다.” 심법이, 마음에서 또 정신 집중하는 법도 알아야 됩니다.

이게 아주 좋은 말인 게요, 제가 TV에서 무형문화재나 이런 분들, 장인들 찾아가서 만드는 과정을 보고 이렇게 인터뷰하는 걸 보면 다 똑같은 얘기를 해요. 이분들이 다 몰입의 달인들인 게, 만들면서 정신이 들어가야지(정성이 들어가야지) 말은 조금씩 다르지만 몰입의 아주 극치를 얘기해요. “그게 안 들어가면 물건을 망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그냥 손기술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손기술이 있어도 정성을 쏟아붓고 만드는 거랑 그냥 정신이 딴 생각을 하면서 만드는 거랑은 제품의 질이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물건이 안 나와” 이렇게 얘기해 버리시더라고요, 전문가들이. 그 얘기입니다. 28:57

그러니까 우리 도(道)도 마찬가지겠죠, 도(道)도 어떤 테크닉도 익혀야하지만 거기에 요령도 알아야겠지만, 아주 정신을 갖다 모을 줄도 알아야 하는 거죠. “그래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기술이 존재하지만, 신의 자식에게도 가르쳐 줄 수가 없으며, 신의 자식도 또한 신에게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부모·자식 간에도 주고받을 수 없는 그런 노하우가 있다는 거죠. 심득한, 자기만이 얻은.

“이 때문에 제 나이가 70인데 아직까지 제가 이걸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분명히 전하고자 하여도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 읽으시는 것은 죽은 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이렇게, 요 얘기랑 닮았죠.

맹자는 압축해서 얘기했죠. “‘자’는 줄 수 있지만 기교있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이게 이제 『장자』의 천도 편이랑 내용이 좀 통합니다. 공부도 이심전심(以心傳心) 해야 한다는 거죠, 이게. 이 ‘자’는 얘기해 줄 수 있는데, 이거를 자유자재로 적용하려면 마음이 실제 밝아야 하잖아요. 성인의 마음이죠. 제가 ‘써 이(以)’자가 ‘활용하다’로, 이거 지금 용用이랑 같은 뜻이라고 했죠. 이 마음을 써가지고 이 마음을 전달해 준다는 거죠. 전지.

마음과 마음 간에 서로 주고받은 게 있어야만, 마음을 써서 저 마음에다가 이렇게 전달해 주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 마음이, 이 목수의 마음이 자식한테 그대로 이렇게 다운이 되면, 복사가 되면 좋을 건데요, 이게 마음이 그대로 복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자님이 인의예지를 아주 절묘하게 맞추고 있는 그 미묘한 노하우를 우리가 그대로 복사 받으면 바로 하겠죠. 그 런데 이심전심(以心傳心)이 힘들죠. 그러니까 이걸 받으려면 제가 거기에 걸맞은 기교를 익히고, 제 스스로 끝없이 스스로의 마음을 바꿔서 노력을 해야겠죠. 그러다 보면 두 마음 상태가 거의 유사해지면 서로 간에 이제 확인할 수가 있죠. 사실 주고받을 수는 없는 거죠. 그렇게 복사가 되는 게 아니죠. 다만 확인하는 거예요.

저쪽에서 이런 노하우들을 전수해 줘서 제가 그거를 가져다 열심히 따라온 사람은,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라는 확인을 해줄 수가 있죠. ‘네가 얻은 게 내가 얻은 거다’라고 확인해 주면 복사가 된 거랑 똑같죠. 유도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걸 얻게. 유도해 주고 그 마음을 얻게 만들어주는 거죠. 그러면 그게 이제 마음의 복사죠. 31:33

52절은, “맹자가 이르기를, 순임금은 마른 밥을 먹고 푸성귀 먹을 때” 52절을 보면 재밌는데요, 중용이랑 내용이 통하는 거예요. (이게 중용을 하나 제가 갖다 놨는데) “마른 밥 먹고 푸성귀 먹을 때” 아주 빈궁할 때죠. “빈궁하게 살 때는 장차 죽을 때까지 그러실 것 같더니, 천자가 되시자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문고를 타시며 두 여자(아황과 여영, 요임금의 두 딸이죠) 두 부인을 놓고, 아주 이렇게 화려하게 임금이 돼서 사실 때는 본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시더라” 여기서 말한 메시지를 잘 느껴보세요.

이게 뭐냐면요, 가난하면 가난한 게 천직인 양 또 가난함을 즐기고 사시더니, 부자가 되니까 또 원래 내가 부자인양하고 사시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어디에 있든 그 처지에 항상 순응해서 거기서 만족하고 사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중용』에 나온 사상인데요. 보세요.

“군자는 자기의 현재 지위에 바탕을 두고 행동하고, 자신이 처한 이치 바깥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귀한 처지에 처해서는 부귀한 처지에 맞게 행동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처지에 처해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처지에 맞게 행동한다. 오랑캐가 돼서는 오랑캐에 맞게 행동하고, 환난의 처해서는 환난에 맞게 행동하니, 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스스로 만족함이 있다.” 32:54

이해되세요? “그래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은 윗사람을 끌어내리려 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바로잡을 뿐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며,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는 위로는 하늘을 원망 안 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원망 안 합니다. 남을 원망 안 하고, 내 자리에서 내가 인의예지 할 수 있는 거에 최선을 다하고 있나만 하나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현상계라는 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또 위치가 바뀌겠죠? 가난했다가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부자였다가 가난할 수도 있는데, 부자이다가 가난해져도 부자였던 시절 그리워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또 원래부터 가난했던 것처럼 산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부자가 되면 또 원래부터 부자였던 것처럼 또 산다는 거예요. “내가 가난했을 때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내가 그 한을 풀겠다.” 이렇게 덤비는 게 아니라 그냥 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간다는 게, 이게 일반인이 하기 힘든 거잖아요?

“군자가 할 수 있다”라고, 늘 깨어있어야 하고, 자신의 그 에고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순임금의 덕행으로 나와 있습니다.

53절이요. “맹자가 이르기를, 내가 지금 이후로 남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 무거운 것임을 알겠다. (맹자가 이때쯤에 뭔가 발심한, 크게 와닿는 내용이 있었던 거겠죠. 크게 깨달은 게요) 남의 아버지 죽이면 남 또한 나의 아버지를 죽일 것이며, 남의 형을 죽이면 남 또한 나의 형을 죽일 것이다.” 이런 일은 으레 일어났던 일이겠죠. 당시 복수를 서로 하니까요. 법이 다 통제를 못 해주니까, 지금 같으면 복수도 개인 복수가 금지돼 있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개인 복수가 어느 정도 인정이 됐습니다. 완벽하게 인정이 안 돼도 피치 못할 사정에 대해서 감안해 주거든요. 34:57

그래서 남의 아버지를 내가 죽여버리면 그 사람 또한 내 아버지한테 복수를 하려고 할 거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이렇게 업이 돌아가는데 (업보죠) 업보가 돌아가는 걸 안다면 “내가 직접 우리 아버지·형은 안 죽였더라도 한 사람은 중간에 끼고 했을 뿐이니까 살인 교사한 거랑, 내가 죽인 거랑 똑같다. 내 부모나 내 형·동생을 결국엔 내가 죽인 거네” 하는 이렇게 인과를 좀 뭔가 이때쯤에 크게 느끼실 만한 일이 있어서 아마 하신 얘기겠죠. 내가 지금 이후로는 이걸 절실히 느꼈다 하는 이런 일이 있었겠죠.

이것도 꼭 죽고 살고 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자식 키우고 이제 가족들을 상대할 때, 내가 한 잘못으로 인해 가족한테 이렇게 업이 돌아가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책임도 있다는 걸 좀 깨닫자 하는 것 같습니다.

54절에요, “맹자가 이르기를 옛날에 관문을 만드는 건, 이제 성을 쌓고 거기에 문을 만드는 거는 장차 포악한 외적이 침투하는 걸 막으려고 한 거잖아요? 그런데 요즘에 관문 만드는 거는” 이때 막 관문을 한참 만들었나 보죠, 세금 거두려고요. 통행세 받으려고요. 이게 이제 전국 시대가 오니까 각자 나라마다 이제 성벽을 쌓아놓고 서로 부국강병으로 열을 올릴 때니까요. 돈·세금 이런 문제가 아주 심각했던 거죠.

“출입한 자들한테 세금을 거두려고 관문을 세운다. (포악하게 하려고 이제 관문을 세운다. 이렇게 얘기하죠) 예전에는 포악함을 막으려고 관문을 세웠는데 요즘은 장차 포악함을 행하려고 관문을 세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부분이 있고요.

55절에, 맹자가 이르기를, “자신이 도를 행하지 않으면” 이게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랑 연결이 돼 있는 내용이죠. “나부터 도를 행하지 않으면 처·자식에게도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인의예지를 즐겨 하지 않으면 처·자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앞 얘기가 하나가 끝납니다. 요 얘기랑 뒷얘기랑 좀 달라요.

뒷얘기는 “내가 남한테 명령을 하고, 이렇게 무슨 일을 시킬 때 인의예지에 맞게 하지 않으면, 처·자식에게도 그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얘기는 좀 다르죠. 아까는 나부터 하지 않으면 우리 처·자식도, 가족들도 내 말을 안 들을 거란 얘기고요.

두 번째는, 남한테 그렇게 인의예지에 맞지 않게 명령하는 걸 보면, 너희 처·자식도 그렇게 얘기하면 안 할 거다. 이런 얘기입니다. 좀 뉘앙스가 다르죠. 뒤에 얘기는 ‘치국 평천하’에서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제가(齊家)’도 안 돼서 그렇다는 얘기고요. 37:52

앞에 얘기는 ‘수신(修身)이 안 되면, 당연히 제가(齊家)가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뒤에 얘기가 좀 다르죠. 뒤에 얘기는 ‘치국 평천하가 엉망인 거는 제가(齊家)가 안 돼서 그렇다’는 얘기고요. 앞 얘기는 ‘제가(齊家)가 안 되는 거는 수신(修身)이 안 돼서 그렇다.’ 이렇게 다른 뉘앙스가 있다는 겁니다.

결국에는 내가 도를 행하지 않아서 다 일어난 일이죠. ‘수신(修身)이 본(本)’이라는 겁니다. 치인은 수신(修身)이 본(本)이다’라고 『대학』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인의예지를 잘 모르면, 인의예지를 한다고 하면 어렵지만 제가 요즘 항상 강조하는 게 인의예지라고 생각하면 어려우니까 사단(四端)이라고 생각해 보자는 거죠.

내가 남을 측은하게 여기지 않고, 잘못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요, 옳고 그름을 정확히 따지고 명백하지 않게 가지고 있고, 의문스러운데 안 풀고 있는 거예요, ‘시비지심을 확충擴充 안 한다는 거’는요. 그다음에 ‘사양지심을 확충 안 한다는 건’ 뭔가 사양할 일인데도 사양하지 않고 그냥 거만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한테 당장 유리하다는 이유로 남한테 양보해야 할 것도 자기가 다 챙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측은해하지 않고요.

‘확충한다’는 게 참 중요한 일이죠. 그래서 사단을 확충하는 거는 도를 행하는 거고, 확충하지 않는 건 도를 행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내가 양심을 항상 확충하면서 살고 있다 보면 처·자식도 당연히 거기에 감응하게 돼 있고, 처·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제가 뭔가 명령을 하고 요구를 해도 그게 이루어질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확충擴充’이란 말을 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나중에 또 나오겠지만, 『맹자』에서. 이제 ‘선(善)으로 넓을 광(廣)’자죠. ‘넓힐 확(擴)’자인데 이게 선(善)이거든요. 선(善)으로 넓게 만드는 겁니다. 선(善)으로 넓힌다는 얘기고요.

충(充)은 이제 채우는 거죠. 꽉 채우는 건데요. ‘시비지심을 확충한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시비지심을 확충한다’ 시비지심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거거든요. 사단은 갖고 있는 양심이거든요. 양지양능(良知良能)이죠. 보세요.

타고난 지(양지良知)와 타고난 능력(양능良能)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이건 배울 필요가 없어요. 이건 사실은 학습할 게 아닙니다, 원래 있는 거지. 요게 이제 시비지심이고요. 양능良能이, 측은해 하는 능력 · 사양하는 능력 · 부끄러워하는 능력입니다(수오의 능력입니다). 그렇죠? 4단 중에 이 3개는 양능이고요, 요거는 지혜거든요. 그래서 요놈을 확충하면요, 우리 제가 요즘 얘기하는 수련의 5기둥이 다 이루어져요. 40:38

그래서 이거 ‘확충한다’는 건 뭐냐면 시비지심, 시비지심 갖고 예를 들어보죠. 제가 이걸 보면 어린애들도 이걸 보면 알아요, 물이 커피가 들어있는 컵과 빈 컵이 다르다는 걸 알죠. 이거 두 개는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옳은 거죠. 이걸 “같아”라고 여기면 잘못된 건데, “같지 않다”라고 하는 거는 시비지심이 있는 거예요. ‘확충한다’는 건 시비지심이, 이거 구분만 해가지고는 우리가 인생살이를 못 하니까, 우리가 학습을 통해(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확충을 시키는 겁니다.

더 많은 ‘거리’들을 줘요. 그러면 이걸 구분할지, 아니면 “이걸 구분해 봐라! 이걸 구분해라!” 해서 자명한 거 또 자명한 거를 찾아서 계속해서 이렇게 넓혀가는 겁니다. 사고의 폭을 넓혀가고, 이 시비지심의 내용물들을 넓혀가는 거죠. 근데 왜 ‘시비지심을 확충한다’라고 얘기하냐면, 결국에는 시비지심이 커진 것뿐이라는 거예요, 별게 아니라.

시비지심 외에 다른 걸 더 첨가해서 뭐가 되는 게 아니고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이 ‘잠재성’(이건 잠재성입니다) 양능이라는 건 다 잠재성이에요. 양지양능이라고 하지 전지전능이라고는 안 하죠. 양지양능의 목표는 전지전능이에요. 모두 다 꿰뚫어 알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41:53

그래서 근데 인간은 (전지전능의 존재는 신이고요) 인간은 양지양능의 존재예요. 그러니까 전지전능으로 갈 씨(앗)를 가졌지만, 이거를 ‘확충하냐 못 했냐’에 따라서 되고 못 되고로 나뉩니다. 전지에 가까이 가려면 끝없이 확충해야 돼요. 아는 걸 더 늘려야 해요.

근데 뭐가 옳고 그른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그 잣대는 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계속해서 내용물을 채워나가는 거예요. 영역을 넓혀 나가는 거고요.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게 확(擴)이고요, 충(充)은 내용물을 아주 확실한 걸로 계속 채워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맹자』를 읽는 것도 시비지심을 지금 이 한 30분 통해서 더 확충한 겁니다. 모르던 걸 더 알게 됐잖아요. 그런데 이걸 알게 된 거는 본래 가지고 있는 시비지심의 작용일 뿐이거든요. 시비지심이 그 영역을 더 넓혔을 뿐이에요, 별게 아니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거는 항상 내 안에 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자료를 갖다 대면, 아는 내용들이 더 풍부해지고 넓어지는 거죠, 영역이. 42:52

그래서 이렇게 확충하지 않으면 수신(修身)이라는 건 없다는 거죠. 측은한 마음도, 측은해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있지만, 이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는 거, 이걸 가족만 측은해 하지 말고 이웃 사람까지, 나아가 사물까지 이걸 넓혀가는 작업이 필요한 거고요. 수오지심도 그렇습니다. 부끄러워하는 게, 몇 개만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할 게 많은데 그걸 매일매일 찾아서 부끄러워해야 돼요. 그래야 내가 밝아지니까. 확충하는 겁니다.

56번은요, 이게 얘기가 이런 얘기죠. “맹자가 이르기를, 이익에 주밀한 자(周于利者)는” 주는 ‘두루 주(周)’자죠. 보세요! ‘두루 주(周)’자입니다. 이게 ‘쓸 용(用)’자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렸는데, ‘쓸 용(用)’자는 담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이거는 영토입니다. 내 목장입니다. 내 목장에다가 담을 설치하는데, 사방에다가 다 설치한다는 걸 지금 상징하는 거예요. 한 방향만 그려놨지만, 사방에 다 설치한다는 거예요.

이래서 이게 지금 합쳐져서 이렇게 글자가 되는데요. ‘두루 주(周)’자가 된 겁니다. 담은 두루 설치해야지 한 곳만 비어도 안 되죠. 큰일 나죠. 담이 한 곳만 비어도 큰일 납니다. 감은 한 번 설치하면 그 전체 둘레를 다 해야 하죠.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대주천(大周天)’할 때, 주천할 때도 ‘두루 주(周)’, ‘원주율’할 때도 주(周). 이렇게. 44:20

주역도 이제 주(周)나라 때 역(易)이라 ‘주역(周易)’ 그러지만 이제 이 의미를 읽어주는 분들이 있어요. ‘우주에 두루 적용되는 그런 역(易)이다’ 이렇게 해석해 주는 분들이 있어요. 이게 주(周)라고 하면 ‘주밀하다’예요. 치밀하게 하나도 안 빠뜨리고 넓게 이렇게 빙 둘러치는 거죠. 이익에 대해서 그렇게 주밀한, 한 사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익을 연구한 사람은 우리가 보면 이제 뭐죠? 이재(利財)에 아주 밝은 분이죠. 44:45

우리가 보면 ‘소인은 이익에 밝고 군자는 정의에 밝다’라고 할 때 보면, 이제 아주 소인인데 요즘 경제학에서 보면 아주 합리적인 인간이죠, 소아적인 효율성을 아주 극대화하는. 나한테 이로운 거는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아는 사람이라고 치자면, “그런 사람은 흉년도 그 사람 못 죽인다는 거, 아무리 흉년이 와도 뭐라도 해서 뭔가 먹고 있을 거라는, 그 상황에서도 이재(利財)를 불리고 있을 거다”라고 해서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겠죠.

그렇듯이 “덕에 그렇게 주밀한 사람(양심에, 인의예지에 그냥 해박한 사람 · 인의예지에 해당되는 건 하나도 안 빠뜨리고 다 알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악한 세상이 와도 그를 어지럽힐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사악한 세상에서도 선을 다 찾아내고, 악은 악이라고 다 꿰뚫어 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지럽힐 수는, 선악을 혼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세상이 힘들어도 선악(善惡)에 헷갈리는 거는 일반 사람이죠. 왜냐? 그러면 이거 보면 아시겠죠. 덕에 주밀하지 못해서 그래요. 뭐가 덕이고 선이고 악인지를, 뭐가 양심에 맞고 안 맞는지를 평소에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세상이 힘들어도 헷갈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시면 되고요.

아무튼 여기까지 보면 이제 재밌죠. ‘주밀하다’는 게, 담을 빙 둘러쳐서 담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면 멧돼지가 들어오고, 동물이 빠져나가고 하겠죠. 이렇게 우리가 덕(德)에 대해서 이렇게 한번 정밀하게 파보자 하는 거죠. 이게 ‘도심(道心)은 미미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로운데 정일하게 파면, 도심을 아주 이렇게 정밀하게 파고, 주밀하게 파고, 도심 하나에 아주 일이관지(一以貫之)를 하면 중(中)을 잡을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이거랑 같은 얘기죠.

“주어덕자(周于德者)는 사세(邪世) 불능란(不能亂)이나” 같은 얘기예요. 언제 어디서나 중(中)을 잡을 수가 있죠. 중(中)이라는 건 선(善)이거든요. 왜 그러냐면요, ‘정일집중(精一執中)’할 때 이 중(中)은 원래 글자가 이겁니다, 옛날에. 제가 화살표 한 번 그렸었는데요, 아까하고 똑같아요, ‘바를 정(正)’자랑. ‘화살이 적중했다’ 할 때 쓰는 거예요. 적중(的中)이에요. 적(的)이 과녁이고요. 과녁을 꿰뚫었다, 정확하게 한가운데로. 그러니까 이게 중(中)이라는 거는, 중(中)에 정 반대가 두 개가 있습니다. 과하거나 부족하거나. 47:16

미흡하거나 모자라거나 오버하거나. 오버나 미흡함이 없이 딱 맞는 게 중(中)이거든요. 이게, 이 중(中)만 선(善)이거든요. 그 과·부족은 둘 다 악(惡)이겠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게 이거예요. ‘과한 거는 부족한 거랑 똑같다’라고 하는 게 둘 다 악(惡)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 중(中)을 걷는 게 우리 목표고, 인의예지 중에 중(中)이 뭐다 하는 실천 지침들을 정해놓은 게 예(禮)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인의예지가 사람마다 다 이 중(中)에 대한 감각이 다를 테니까, 평균적으로 사회에서 이건 좀 중(中)으로 알고 지켜줬으면 하고 정해놓은 것들이 예(禮)예요. 예절들은 대게 중(中)이에요. 48:02

그러니까 어른 만났는데, (과한 경우예요) 땅바닥에 엎드려서 막 인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공경심을 표현해요. 부족한 경우는 고개만 까딱해요. 그러니까 예(禮)라는 거는 이제 어르신 만나면 고개를 얼마나 숙이고, 자기 맞수를 만나면 살짝 목례를 해주고, 뭐 이런 내용들이 예에 정해져있는 건데, 이거 다 중(中)이에요. 중(中)을 추구하는 거예요.

군대에서도 경례 한번 해주면 되지, 이렇게 하면 이게 이건 좀 모자란 거죠. 과한 거는 여기서 막 모자 벗고 엎드려 90도로 절하고 그러면 이건 좀 과한 거고요. 그러니까 ‘과부족 하지 마라’라고 해놓은 게, 그러니까 예라는 것도 중(中)의 감각이 없이 쓰면 잘못돼요. 형식만 남아서 ‘예절에 어떻게 하라고 돼있어’ 그래서 그것만 자꾸 지키면 중(中)이 아니라는 거죠.

『맹자』에 한 번 나왔었죠. ‘중(中)을 하나 설정해 놓고 집착하면 그것도 다 잘못된 거다.’ 이 중이라는 건, 그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계속 이동해야 하거든요. 상황에 맞게 그 자리에서 제일 중(中)을 찾는 거죠.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고요.

“맹자가 이르기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대 수레의 나라가”(제후 나라입니다, 천대면. 만대가 천자 나라죠. 여기서는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죠) 천대 수레를 동원할 수 있다고 해서 이제 보통 ‘천승지국’하면 이제 제후 나라인데요. “천대 수레의 나라를 사양할 수 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요, 사양했다는 또 명성을 누리고 싶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해낸다는 겁니다. “하지만 진실로 그러한 사람이, 진실로 명예를 단순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진짜 인의예지에 안 맞아서 사양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한 그릇 밥과 한 그릇 국에도 안색이 드러나는 법이다.” 안색이 드러나는 법이고, 속마음이. 아시겠죠? 49:58

천승지국 사양하고 왔는데요, 국 한 그릇 때문에 얼굴 붉히고 이런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짜로. 진짜로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아주 작은 거에서 속마음이 확 드러난다는 겁니다.

58절이요. “맹자가 이르기를, 인자한 자와 어진 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나라가 텅 비게 되고” 나라에 (이제 임금은 예전에 세습이니까) 신하 중에 인현(仁賢)(아주 인자한 사람과 어진 사람)을 데려다 신뢰해서 등용해 주지 않으면 나라가 텅 빈 것 같다는 겁니다. 이게 마찬가지인 게, 종교계도 똑같이 종교계도 진짜 고승이나 고덕들이 없으면 텅 빈 것 같이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이렇게 믿고 의지할 만한, 자문을 구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텅 빈 것 같이 되고, 이게 정치할 때 세 가지 중요한 요점입니다.

“예절과 정의가 없다면, 정치를 행할 때 위아래가 어지럽게 되고” 맨 하극상에 이런 쿠데타에 이런 일만 일어난다는 거죠. 『맹자』 1장에서 나왔던, ‘서로 이익을 가지고 투쟁하는 때가 된다’는 거죠. 예절과 정의가 없으면 이익만이 난무하겠죠. 나한테 이롭냐 해롭냐에 따라서 수많은 이익 집단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이렇게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할 테니까, 정치가 개판이 된다 이겁니다. 요즘 세태랑 무관하지 않겠죠. 51:34

요즘도 나라가 텅 빈 국회, 국회를 보면 텅 빈 것 같을 수 있죠. 사람이 없다면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국민들 입장에서도요) 요즘은 이제 민주 시대라 국민들이 임금인 거잖아요, 국민주권 시대니까. 우리가 임금이라는 입장에서 한번 봐보면, 백성의 입장에서 나라가 텅 빈 것 같고, 예절과 정의도 안 세워져 있고, “정사(올바른 정책이 적용돼서 이렇게 실제 작용하는 거죠, 정사라는 건) 정치인데 올바른 정치가 없으면, 재용이 늘 부족하다.” 돈이나 물자가 늘 부족하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재화나 서비스죠. 여기에 늘 부족하다.

『사서집주』에 왜 그렇게 되는지 얘기해 놨어요. 이게 옛날 군주가 볼 때도 그렇고, 지금 민주가 볼 때도 정치가 이렇게 개판이면 괴로운 거죠, 결국에는 당사자들이 괴로운 건데. 『사서 집주』에 보면 왜 재용이 부족하게 되느냐? “생산함에 방도가 없고” 뭔가 생산을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도가 없고요. “취함에 한도가 없고” 세금 걷을 때 한도가 없이 걷는, 뭔가 이렇게 무절제하게 걷고 있고요, “사용함에 절도가 없다.”

또 과소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과하게 세금을 걷고, 또 걷어야 할 사람한테 안 걷어요. 또 돈 많은 사람들은 세금도 안 내요. 탈세하고, 또 탈세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그 월급쟁이들한테는 돈 칼같이 걷어가고. 이게 ‘취함에 한도가 없다’는 거예요. 뭔가 이게 절도가 없어요. 도를 정해놓고 걷어야 되는데, 한도를. 52:54

또 사용할 때는 애먼 데에다가 팡팡 써요. 애먼 데다가 잘 쓰고, 또 써야 할 때 쓰자고 하면 또 어떻게든 이유를 대서 발을 빼려고 하죠. 이런 이유 때문에 안 된다. 그것 관련해서 제가 『대학』에 대학 마지막 글이거든요. 이거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같은 내용인데요.

요즘 세태랑 참 보면 정말 이게 옛날에 써 놓은 글이지만 참 맞다 싶어서 한번 쭉 읽고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재화를 생산하는 데는 도가 있다. (대도가 있는데) 생산하는 자가 많고 먹는 자가 적으면” 지금은 놀고먹는 자가 많고 생산하는 자가 적은 사회죠.

“생산하기를 빨리하고 소비하기를 더디게 하는” 소비도 뒤지지 않게 잘하고 있고. 나름 행복한 사회죠. 이렇게 해서 굴러간다면 행복한 사회인데요. 여기도 뭐가 행복한 지, 쓰는 거 좋고 먹는 게 좋은지 몰라서 이러는 거 아니죠? 장기적인 성장을 해가는 사회를 만들려면 이래야 되지 않겠냐 이거죠.

“그러면 재물이 항상 풍족할 것이다. 인자한 자는 재물을 써서 자신을 일으키고,” 재물을 갖다 남한테 베풀어서, 재물보다 자신의 덕을 더 아끼는 거예요. 여기서 몸뚱이가 아니고 덕입니다. 앞하고 뒤 얘기가 좀 틀려요. 54:09

그러니까 재물을 별로고, 자기가 더 귀한 줄 알아서 자신의 덕을 밝히고요. “불인(不仁)한 자는” 아까 맹자랑 한 얘기랑도 비슷한 흐름은 비슷하죠. “불인한 자는 재물을 더 사랑해요, 자기보다도. 자기 몸 죽여가면서도 돈을 얻겠다는 일념에, 돈에다가 자기 일생을 바친다”라는 겁니다.

이게 도심과 인심의 차이죠. “윗사람이 인자함을 좋아하고서 아랫사람들이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랫사람들이 정의를 좋아하고서 그 맡은 바 임무를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창고의 재물이 윗사람의 재물이 아닌 경우가 없다.” 54:45

제가 예전에 『대학, 인간의 길을 열다』 때는 이걸 이렇게 번역을 안 했습니다. “백성들의 창고에 있는 재물이 백성들의 재물이 아닌 경우가 없다.” 이렇게 했어요. 왜냐하면 신하들이 백성 창고에 있는 돈을 안 훔치니까요.

근데 요즘 생각에는 그게 밑에 구절하고 맞아서 그렇게 풀었는데요, 다산 선생님도 그렇게 봤고. 근데 그냥 원문 그대로 보면 이 단락에서는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상관이 인자하니까 아래 부하들이 다 정의로워서 함부로 돈 안 쓴다는 거죠. 윗사람 돈을 함부로 빼다 쓰지 않는다.” 이렇게 일단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용은 다 좋은 얘기인데요, 둘 다.

“맹헌자가 말하기를(孟獻子曰)” 여기 다른 얘기거든요. 맹헌자가 말하기를, (요즘 뭐죠? ‘통큰치킨 사태’에 딱 맞는 내용입니다.) “말을 기르는 자는 닭 돼지를 키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 해먹으라고요. 왜냐하면 말을 키울 정도면 되게 부자거든요.

똑같은 얘기로 “얼음을 쓸 정도 집 안이면” 옛날에 아주 부잣집이잖아요. “그런 집은 소와 양을 기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 쓰라고 배려한다는 거죠. “백대 수레의 집이면” 대부 집이거든요. “대부의 집은 취렴(聚斂, 백성의 재물을 갖다가 이렇게 함부로 거두는) 신하를 기르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게 낫다.”

그러니까 아까 위 경우랑 비교해 보면 윗사람 창고에서 돈 훔쳐 가는 놈이 낫다는 거죠. ‘백성들 돈 훔치는 놈보다는 차라리 내 돈 훔쳐라’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일러 국가는, 이익(利)은” 이익은 나만 좋은 겁니다. 사익이에요. 그러니까 정치가가 얘기한다고 해서 공익이 아닙니다. 정치가 개인의 사익이죠. “정치가 개인의 사익을 이롭게 여기지 않고, 국민 전체의 공익을 이롭다고 여긴다”는 요즘 똑같은 얘기죠.

그러니까 이게 우리나라가 정치가, 잘못 임금을 뽑을 때도 잘 알고 뽑아야 하는데, 뭐냐 하면 사익을 잘 챙기는 사람을 착각한 거죠. ‘저렇게 돈을 잘 버니까 내 돈도 잘 벌어주겠지’하고 뽑는다는 거죠, 임금으로. 그러면 그 사람은 공익을 한 번도 챙겨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정의는 모르는 사람이고 이익에 밝은 사람인데, 정의에 밝은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거예요.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까 이거 두 개는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하나는 에고의(인심人心의) 차원이고 하나는 도심道心의 차원인데, 사람들이 ‘저 사람이 돈을 잘 벌 줄 아니까 내 돈도 벌어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는데, “남의 돈 벌어주는 거는 정의 개념이 있어야만 한다는 거다.” 이거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라는 거죠. 57:36

“국가의 장관이 되어서”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장관이면 아주 책임자인데요. “재용에 힘쓰는 자는” 정치가 잘 되면 아까 재용이 풍족하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재용에 풍족하게 하라고 “재용에 능하다는 소인을 갖다가 업무를 시작하게 보통 하게 되는데, 저 소인이 아무리 돈 불리는 데 능하다고 해도 반드시, 그 장관이 함부로 사람을 들여 써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그 소인들을 국가를 다스리게 하면 큰일 난다. “온갖 재해가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온 국민을 상대로 자기 재산만 모을 테니까요. “이것을 일러 비록 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니” 그 사람도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은 정의 개념이 없는데요. 대아적 효율성을 모르는데요, 소화적 효율성만 알지. “이런 걸 일러 국가는 이익을 이롭게 여기지 않고 정의를 이렇게 여긴다고 한다.” 요즘 상황에 다 나오는 내용들이죠. 이런 거 보면 참, 이게 자명하잖아요. 누가 봐도 시비지심에 맞죠. 자명한 얘기예요. 58:41

시비지심이 여기까지 확충돼서 보면 맞는 얘기인데, 안 지켜지는 거 보면 2천 년, 지금 2500년이 흘러도 안 지켜지는 거 보면, ‘인간도 좀 어지간하다’라는 생각이 참 들죠. 한 개인의 마음에서 도심(道心)이 미미하고 인심(人心)이 위태롭듯이, 한 나라 국민의 마음의 총량을 계산해 봐도 아마 그럴 것 같아요. 깨어있는 사람은 미미하고요, 그것도 뉴타운이니 뭐니 하고 또 돈 들고나오면 또 찍어줄 것 같거든요. 우리 에고의 마음이 그 위태로운 한에는, 항상 위태롭다는 게 그거죠. 취약해요, 너무나 그런 욕망에, 그런 문제에.

59번 보시죠. “인자하지 못한 자가 나라를 얻는 경우는 있다. 그렇지만 인자하지 못하고 천하를 얻는 자는 있지 않다.” 여기서 천하를 얻는다는 거는, 천하 백성들의 어떤 마음을 다 얻는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러긴 쉽지 않다. 일시적으로 그런 형세를 내긴 해요. 히틀러니 뭐니 하는 거 보면 뭔가 이렇게 좀 그럴싸하게 하는데, 오래 못 가죠. ‘얻었다’라고 하기는 그렇죠, 금방 무너지는. 진시황도 자기 아들까지도 못 가잖아요. 아들 때 바로 무너지잖아요.

오래 못 가죠, 이런 일들은. 그래서 이걸 안정적으로 얻었다고 그러면 그거는 뭔가가 그만한 대아적인 그런 정의를 안다는 거죠. 그걸 모르고선 절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진시황 망하고 나서 진시황이 법가나 이런 이익만을 제시하는, 국민들을 이롭냐 해롭냐로 몰고 가다가 2대만에 망하고 나니까 그 뒤로 중국은 2천 년간 그 지혜를 살려서 늘 유교를 제일 앞에다 걸죠. 그래서 정의를 얘기하지 않고선 국민들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1:00:17

60절과 하고 끝내겠습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백성이 가장 귀하고” 이게 유명한 겁니다. “백성이 제일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고, 임금이 제일 가볍다.” 이런 얘기 때문에 맹자가 요즘 루소 못지않은 옛날 민주 사상가로 항상 거론되죠. 유교는 이렇게 파격적인 게 원래 있어요. 요즘 뭔가 잘못되면 다 유교 탓이라고 하는데, 그건 인간의 에고 탓이죠, 대부분.

기독교도 그렇고 이슬람에도 그렇고요. 인간 에고랑 만나면 다 어그러집니다. 인간의 욕망이 범인이지, 어느 사상이 단순히 범인이라고 몰기 힘들어요. 어떤 사상도 변질시키거든요, 욕망은.

그래서 “백성이 제일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고 임금이 가볍다.” 이 관계를 한번 보시죠. 맹자는 좀 파격적이죠. 백성이 제일 위고요, 사직(社稷)은 보세요. 요게 제사 지내는, 재단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이제 하늘에서 이 두 개면 ‘위 상(上)’자죠. ‘위’라는 뜻입니다. 요즘 이렇게 쓰지만. 위에서 밑에다가 이렇게 복을 내려주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재단을 설치하고 기도드리는 모습도 되고요, 위에서 복을 내려주는. 그래서 제사나 귀신을 의미합니다, 이게 붙으면. 다 제사나 귀신인데요. 토지신한테 제사 지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토지신이에요. 1:0132

우리가 회사(會社)라고 할 때 이 사(社)를 쓰는 이유가, 토지신한테 제사 지내려면 일정 영토를 가진 모임이에요. 인간의 모임 중에, 보통 나라 단위에요, 이게 나라 단위인데. 그 뒤로 작은 모임도 어떤 일정 지역을 점유하고 거기에 이제 회사를 차려놓고, 우리가 그 회사도 하나의 작은 소(小) 나라 같은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이 모이면 이 ‘사(社)’자를 써줍니다. 원래는 나라 단위에요.

일정 영토를 가지고 그 영토를 담당하는 신한테 제사 지내는 거예요. 사람들이 모여서. 그게 사(社)고요. 직(稷)은요, 이게 원래 ‘기장 직(稷)’자인데, 요게 이제 곡식을 담당하는 신입니다. 곡식신. 그러니까 우리가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고 우리 흔히 하는데, 종묘(宗廟)는 임금들 조상 모시는 제사고요, 사직(社稷)은 조선의 사직단(社稷壇, 지금 사직공원 있죠. 거기에 사직단이 있는데) 사직단은 땅한테 제사 지내는 거예요, 영토와 곡식한테.

그래서 이 사직(社稷)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영토나 곡식 합쳐져서요, 이 두 개를 합쳐서 그냥 ‘나라’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백성이 나라보다 귀하다”라는 얘기입니다. “나라보다는 임금이 덜 귀하다” 이해되시죠?

이거 보시면 간단해요. 임금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면 임금을 바꾸면 되죠. 임금을 바꿔야겠죠. 근데 이 “나라가 위태로울지라도 백성이 더 귀하다”라는 거예요. 백성에게 도움이 되려고 나라가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백성이 제일 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 제일 가볍다.” “이 때문에 백성을 그래서 구민(丘民)이라고 했는데,” 언덕에 사는 백성들 이랬는데 아주 산과 들에 사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아주 일반 백성들이죠. “백성들에게 임명된 사람은 천자가 되고” 그러면 이때도 보면 민주죠. 예전에도 선거를, 국민들이 직접 선거를 해서 안 뽑아서 그렇지, 옛날 감각도 요즘 민주랑 똑같아요, 맹자가 말하는 거는.

그럼 어떤 식이냐? 요즘은 우리가 투표를 직접 하니까 “대통령은 우리가 뽑았다”해서 우리가 ‘민주’, 대통령은 우리가 주주면 대통령 경영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때도 똑같은 마인드예요. 그런데 이때는 그러면 백성이 주인이라는 걸 뭘로 증명하느냐? 백성들이 반발 안 한 것 자체가, 백성들이 그 천자, 그 경영자를 용납해 준 것 자체가 민주라는 거예요.

선거 과정을 거쳤냐 안 거쳤냐지, 마인드 똑같다. 백성들이 그 천자를 천자로 받아들여줬다는 것 자체가 백성들이 안 받아주면 천자가 못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민심은 천심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반발한다는 건요, 하늘이 거부하는 게 되기 때문에 천자가 못 되죠. 그래서 이런 감각이 이미 있습니다.

백성은 주주고요 이때도, 천자는 경영자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세요. 주주고요, 회사고요, 경영자라고 보시면 돼요. 경영자가 제일 천하죠. 회사가 더 귀하고, 주주들이 더 귀하다는 거예요. 이때는 이제 직원이면서 주주라고 생각하셔야죠. 직원이면서 그 회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귀하다는 거예요. 회사에 다니는 그 사람들이, 회사보다도.

회사야 또 모양을 바꿀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이 더 귀하다는 개념입니다, 지금.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백성한테 임명을 받은 사람이 천자가 되고, 천자한테 임명받은 사람이 제후고, 제후한테 임명받은 사람이 대부가 되니까 (대부는 저 아래죠)”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바꿔 임명한다.” 제후가 회사를 위태롭게 하면, 임금은 제후도 임금입니다.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제후가 임금이죠. 사직을 위태롭게 바꿔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원리 때문에. 1:05:22

또한 우리가 사직은 하나의 또 영토와 곡식을 상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직단에서 제사 지내는 모시는 신들이잖아요? 종묘사직을 담당한 그 신들한테 제사를 우리가 열심히 잘 지냈어요. 제사 때 짐승도 제대로 바쳤고, 곡식도 제대로 올렸고, 때도 딱 맞게 제사 지냈는데, 만약에 가뭄이 들고 홍수로 물이 넘치면, 사직을 바꾼다는 거예요. 좀 신전을 새롭게 꾸미고, 뭔가 이렇게 변화를 준다는 겁니다.

그거 보면 백성이 더 귀하다는 거 알 수 있지 않냐 이거죠. 백성한테 혹시 해로운 일이 일어나면 사직, 이제 제사 지내는 신전을 담장도 허물고 새로 사직단 다시 바꾸고, 단을 다시 세우고 한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제 이게 맹자의 유명한 얘기입니다. “임금이 사직보다 가볍다. 백성은 사직보다 무겁다.” 그래서 남명 선생의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보면 ‘태일군(太一君)’이 있고요, 그 옆에. ‘죽음으로써 사직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쓰여있어요. ‘임금은 죽음으로써 사직을 지켜야 된다’ 1:06:33

그러니까 보통 뭐냐면 ‘이 정신이 깨어있어서, 늘 이 몸뚱이가 하나의 나라라고 한다면, 정신이 늘 깨어있어서 이 생명을 잘 관리해야 된다.’ 이런 의미입니다. 사직(社稷)은 그 나라를 말합니다. 그래서 정신이 깨어있어서, 그 ‘신명사도’에서는 나라가 그 마음이죠.

아무튼 그 마음이 일단 나라니까 ‘마음과 몸을 잘 관리해야 된다’ 이런 것처럼 임금이 자기가 도저히 자신 없으면 더 어진 사람을 데려다가 올리고 자기 내려가야겠죠, 이 원리라면. 그래서 이게 중세 시대나 고대나 중세에는 세습으로 나라를 유지하다 보니까, 잘 안 지켜졌지만 요순시대처럼 그렇게 선양하는 것도 이런 원리 하에서 이해가 돼야 맞겠죠.

그래서 지금도 똑같다고 봐요. 지금도 그 삼성가처럼 아들이 계속 경영돼야 한다 이런 게 현실적으로는 곡절이 많겠지만, 이상적으로만 얘기해 보자면 유교에 맡기게 되면 더 유능한 경영자한테 주고 물러나야 맞아요. 그걸 아들 안에서, 아들딸 안에서만 그걸 고르면 얼마나 한계가 있습니까. 그래서 유능한 사람한테 물려주고, 자기는 대주주로 남든지 이렇게 뒤로 물러나고 유능한 사람한테 주고 하는 게 유교의 원래 이상이죠.

그런데 이게 되려면, 신화도 그렇고 임금도 그렇고 대아적이 돼야 해요. 왜냐하면 저쪽에서 사기 칠 거 생각하면 못 주죠. 신하로 전문 경영인 하나 뒀더니 걔가 이제 또 마음대로 해 먹으려고 덤빌까 봐, 사람이 사람을 서로 못 믿기 때문에 못 주는데, 유교적으로 되려면 서로 공부가 돼서 마음이 밝아져서 서로 알아볼 정도 되면, 그때 돼야 아마 요순처럼 믿고 주죠. 순한테 주고, 순이 또 오한테 주고.

단군들이 예전에 주고받던 시스템이 이제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보고요. 그래서 전문 경영인한테 주는 이유는 사직보다 임금이 더 가벼우니까요, 회사가 필요한 이유는 나라가 필요한 이유는,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하고 더 풍족하게 해주기 위해서니까 가장 귀하다는 겁니다. 사람이 제일 귀하다.

요즘 이것도 알아요, 양심은 있어서. 광고할 때 꼭 얘기해요, “사람이 귀하다” 실제가 아니라 그렇지. 그러니까 도심은 귀하다는 건 다 알아요, 안 지켜서 그렇지. 그래서 다시 한번 또 이걸 한번, 아는 분들부터 각성해서 좀 본인의 도심이 밝아져야만 이 말이 와닿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잣대는 다 있어요. 아까 줄이나 자는 다 있는데 컴퍼스나, 마음으로 진심으로 그걸 실천할 사람이 없죠. 그래서 자기 마음부터 잘 관리를 해서 밝혀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