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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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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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0.
게시일자 2015. 04. 08.
동영상 길이 56:32
강의 중 인용 도서 맹자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Cq_mgZgA32w


참고 사항입니다.
『맹자』: 책 이름
맹자: 사람 이름
『중용』: 책 이름
중용: 철학 용어로서의 ‘중용’



진짜 원래 깔려 있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게 하면, 여러분,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맹자』는 지금 얘기하는 거예요. 사실 『맹자』는 이 얘기밖에 안 해요. 우리 안에 이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이 유전자가 그대로 터져 나오면 사단(四端)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인(仁)이 그대로 터져 나오면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인은 어떤 이데아냐면, 우리 안에, 제가 항상 알 그리죠. A라는 사람은 여기 있고요, A라는 에고는. B라는 에고는 여기 있고요. C라는 개는 여기 있고요. B라는 식물은 여기 있다고 치죠. 겉으로 보면 다 별개인데요, 개별 구체적인. B도 뿌리는 여기고요, C도 뿌리는 여기고, A도 뿌리는 여기고, B도 뿌리는 여기고, 한 자리라는 거예요. 한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 중심에서는 나와 남이 없지.” 하는 그 유전자가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그래서 이 유전자 때문에 분명히 A랑 B가 다르고, 더구나 식물하고 인간하고는 천지 차이인데도 식물이 시들어 가는 걸 봐도 기분이 안 좋아진다는 거예요. 그 순간에 저는 모르지만 이미 한번 “같다.”라고 생각해 본 거예요. 너무 찰나에 일어나서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거죠. 컵이 하나 깨져도 마음이 안 좋아요. 깨졌다는 것 자체가 안 좋아요. 전혀 관계가 없는 얘기인데 안 좋아요, 내 컵도 아닌데 어디 뭐가 좀 잘못된 걸 보면. 예전 어른들이 기왓장 하나만 깨져도 마음이 안 좋아지는 거는 둘이 아닌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이 유전자가 있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요. 그런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면 인간이 꼭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안 깔려 있다면 우리는 인을 할 수가 없어요.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면 억지로 깔아야 하는데요. 그건 뭐냐면, 되지도 않는 프로그램을, 기본에 원래 되어 있지도 않은데 그걸 하게 깔아서 돌린다고 되나요? 그래서 순자(荀子)가 좋은 말을 엄청 많이 했는데도요, 실제 순자는 되게 유학의 대가로 멋진 말을 많이 했어요, 도움이 되는. 뒤에 인정을 못 받는 게요, “성(性)은 악하다.”라고, “우리는 기본 프로그램이 원래 악하다.”라고 말을 해 버리니까 그다음 유학자들이 대우해 주고 싶어도요, 이게 거의 밥상을 발로 차 버린 격이라 대우를 못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머지 순자 얘기에는 엄청나게 좋은 얘기가 다 있는데, 그러면 이게 원래 악한 놈 위에다가 그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게 되어 버리니까 하나 마나 하는 짓이 되는 거예요. 개한테 어떻게 잘해서 말 시켜보겠다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개에게는 원래 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원래 우리한테 없다면 못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맹자』가 순자보다 훨씬 지혜로운 게, “너희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지 몰라도, 원래 우리가 안에 깔려 있는 프로그램은 되게 괜찮다”는 겁니다. “그것만 회복되면 끝나지.” “저는 어떻게 성인 될 수 있나요?”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걸 막지만 말라”고 하는 거죠. “제발 막지만 마라.” 혹시 불쌍한 사람 봤을 때 측은지심 올라오면 지금 선천 프로그램이 작동한 거예요. 그때 괜히 이해타산 해 가지고 “그건 아닌 것 같아.”라고 끊지만 말라는 거죠. “더 해 봐.” “한 번 더 해 봐.” “더 해 봐.” 그때마다 해 보면 이게 「사단 확충론」이에요. 인(仁)할 때 측은지심이 나오잖아요.

예(禮)가 있으면 남을 공경하거나, 공경지심·사양지심 둘 다 나옵니다, 『맹자』에는. 같은 얘기예요. 남을 사양하거나, 양보하거나 남을 좀 우리가, 선생님 앞에 서면, 어른 앞에 서면 왠지 좀 몸이 조심스럽잖아요. 그거예요. 이게 ‘주눅 든다’가 아니고요. 왠지 뭔가 좀 몸가짐을 딱 하게 되거든요. 주눅 들면 여기서 과한 거예요. 과해 버리면 주눅이 들고 그게 아니고 살짝 긴장한 정도의 경건한 상태. 긴장해도 안 되고요, 주눅 들어도 안 되고. 참나 상태에서 다 오는 거예요. 참나가 “나 잘났다.” 안 하기 때문에 남 앞에 서면 똑같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인데 나보다 만약에 더 이렇게 연장(年長)하거나 뭔가 더 있으면, 뭔가가 없어도요, 살짝 조심하게 돼요. 초등학생 만나도 살짝 조심하게 돼요, 우리가. 말 함부로 안 하게 되고요. 뭔가 살짝 조심하는 게, 뭔가 이렇게 오바 못 하게 막는 게 예(禮)예요. 어떤 적절한 선에서 멈추라는 거거든요. 참나는 적절할 때 멈춰요. 우리가 참나에 깨어 있지 못할 때는 오버(over)를 하거나 부족한데 깨어 있으면 딱 사심이 없으니까 “이쯤에서 딱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예(禮)예요. 밥 먹다가 딱 이쯤이에요. 알겠는데 더 먹게 되죠, 보통. 그러니까 참나는 안다는 거예요,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그래서 이건 그칠 때 딱 그쳐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모양으로 딱 모양새를 그쳐 줬을 때 사람이 이쁘더라는 거죠.

그래서 의(義)는, 참나에는 더러운 게 침입을 못 하거든요. 혹시 더러운 때가 묻었다면 반드시 제거하라는 거예요. 『성경』에 예수님은 진짜 세게 얘기해요. “눈이 불의를 저지르면 눈을 뽑아 버리라”고 되어 있잖아요. 제가 지난 주말에 읽어 드렸죠. “팔이 죄를 지으면 이걸 잘라 버리라”고. “두 팔 들고 지옥 가는 것보다는 팔 잃고 천국 가는 게 낫다.”라는 이런 식으로, 원래 우리 유전자에 이게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왕국은 제가 오염시킬 수가 없는 자리거든요, 우리 안의 그 자리는. 근데 왜 에고는 죄에 쉽게 오염되냐는 거죠. 오염을 막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의는 오염을 막는 거기 때문에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일어나요. 우리한테 의(義)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악한 걸 보면 피하고 싶고 여기서 발을 빼고 싶은 유전자로 작동이 있는 거지요. 아니면 내 안에 더러운 게 있으면 그 때를 빨리 벗고 싶은 거, 때를 벗기는 거.

이 두 개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사실은 함께 작용하면 잘 모르는데요, 둘 다 작용하는 거예요. 제가 만약 애가 물에 빠지는 걸 봐 가지고요, 제가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이 딱 일었는데 “도와주지 말까? 그냥 가던 길 갈까? 괜히 나 물에 뛰어들면 옷 젓는데, 그래도 하자.” 그러면 벌써 여기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 다 작용한 거예요. 도와주자고 하는 건 측은지심이고요. “하지 말까?” 할 때 “하지 말자!”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게 수오지심이에요. 수오지심은 측은지심의 강력한 협조자예요. 수오지심이 없으면 측은지심이 계속 유지되기 힘들겠죠. 그게 옳다고 지지해 주는 게 수오지심이에요. 그래서 인(仁)과 의(義) 중에는 인이 더 중요하죠. 인을 실천하는 데 의가 꼭 필요해요, 대신에. 인을 실천하는 게 의예요. 사랑을 실천하는 게 의예요. 사랑의 마음 자체는 ‘인’이지만 다른 길로 안 가고 꼭 그걸 내가 실천하겠다고 하는 건 ‘의’예요. 그래서 이렇게 이해해 보시고.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죠. “이건 맞는 것 같고 이건 아닌 것 같아.” 이걸 다 판단하고 있어요, 혼자서, 누가 안 시켜도.

이것을 인간만 하는 게 아니고 동물도 다 있어요. 우리보다 수준이 낮아서 그렇지 동물도 자기들끼리, 가족끼리 친근해하는 거 알고요, 멈춰야 할 때 멈춰요. 서열 확실하거든요. 서열 넘어서면 난리 나죠. 딱 거기까지 멈춰요, 자기가 알아서. 수오지심, 자기들끼리의 어떤 의리를 실천하는 게 수오지심이고요. ‘옳다’·‘그르다’가 다 있어요. 자기들도 다 판단이 있어요. “이때쯤에는 이렇게 하고.” “애를 낳았을 때는 이때쯤에 이렇게 하고.” 안 배웠는데도요. 동물도 다 알고 있어요.

인간이 사실은 더 더뎌요. 왜냐하면 프로그램 자체는 좋은데, 동물은 안 배워도 웬만큼 다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많이 활성화돼서 태어나요. 그래서 때가 되면 다 알아요, 동물들은, 그렇게 많이 안 배워도. 왜냐하면 배울 여건이 아니거든요. 근데 인간은 한 30년 배우게 원래 예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활성화가 빨리 안 돼요. 몇 년을 가르쳐야 또 하나 나오고. 이게 아주 배양해 가는 맛이 있죠. 대신에 잘못 배양하면 형편없어지기도 하고. 동물은 아무리 못 배양되어도 개가 짓는 거 모르고 뭐 하는 거 모르지는 않는데, 인간은 아예 모르면요, 잘못 배우면 아예 짐승 수준까지도 내려가니까요. 그 이하까지 내려갈 수 있는데, 이게 인간의 장점이자 단점이죠. 이걸 활성화하는 데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거죠. 동물들은 구현할 게 얼마 안 돼요. 그러니까 기본적인 것만 딱 구현하면 되기 때문에 안 배우고도 금방 살아가는데, 인간은 엄청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뇌 용량 자체가 다르죠. 그래서 큰 대용량 뇌를 달고 나왔잖아요. 동물은 대용량 뇌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자연이 공정하게 분배한 거예요. 자연도 이 원리 하에 인간한테 대용량 뇌를 주고, 대신에 인간의 삶은 뭘 많이 먹어야 해요. 에너지를 엄청 많이 보충해 줘야 해요. 동물들이 다 인간의 뇌를 달고 있다면 지구에 남아날 게 없겠죠. (동물에게는) 최소 용량의 뇌를 주는 겁니다. 제 기능만 할 수 있게. 모든 컴퓨터를 다 대용량으로 만들 필요가 없죠. 모든 전자기기에 다 최고급 컴퓨터 사양을 달아서 내놓겠어요? “이거 쓸 때 이 기능만 되면 되겠다.” 핸드폰도 “난 이 기능만 필요하다.” 하면 그것만 딱 부착하면 되거든요. 자연이 다 그렇게 해 놨어요. 동물들 뇌가 그거에 맞게 다 맞춰져 있어요. 뇌가 보통 거의 활성화되어서 태어나요. 적절한 자극이 되면 다 알아서 해요. 인간은 알아서 안 한다고 봐야 해요. 그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많은 부분이 후천적으로 배워야만 가능해요. 자극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인간한테는 교육이 엄청 중요해요. 이렇게 전대(前代)의 책이 내려오죠, 대신에. 동물은 책이 안 내려오니까 그냥 원초적인 것밖에 표현을 못 하고 가는데 인간은 책만 잘 봐도, 지금 이 책만 잘 봐도 3천 년 동안 인류가 했던 것에서 남긴 알맹이들을 다, 한 1년 작정하고 먹을 수도 있어요, 빠르면.

이게 동물하고 다르고 이런 걸로 우리를 자극하지 않으면 이게 지금 대학까지 나오면 다 활성화되어야 맞는데,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그렇죠? 대학까지만 나오면 원래 활성화되어야 맞는데, 현재 교육 시스템이 못 살려 낸다는 겁니다. 할아버지 말씀이 초등학교만 나와도 이런 거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잡혀서 선악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거에 안 맞으면 악이에요. 선악이 별거 아니에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을 맞게 발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건 선이고요, 방해하는 건 악이에요, 다른 차원에서 보면. 선악을 여러 차원에서 얘기할 수 있죠. “모두가 좋으면 선, 나만 좋고 남들이 고통받으면 악.” 이건 결과 차원에서 하는 얘기고요. 어떤 동기나 결과 차원에서 하는 얘기고요. 이건 애초에 깔아져 있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발현되면서 이게 안 발현되면 악이에요. 근데 이게 똑같이 맞아요. 아까 여러 사람의 행복과 고통으로 본 선악 기준과 이데아의 차원에서 본 선악 기준이 결국 합쳐 놓으면 맞아요.

그러니까 이것보다 뭐가 더 쉽냐면 그게 훨씬 쉬워요. 우리가 옳고 그르냐 판단할 때 “이데아에 맞나?”보다, 사실은,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내가 저 사람 상황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그랬을 때 “아, 안 되겠다.” 그러면 “둘 다 좋은 방향으로 택해서 이렇게 하자.” 그러면 얼추 맞아요, 이렇게 판단한 거랑. 그렇죠? 사실 그 행동 안에 지금 다 들어가 있어요. “내가 저 사람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시비지심이 들어 있고요. 가정하고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측은지심을 전제해요. 둘이 아니라면 상상이 안 되거든요. 감정 이입을 해서 상상하는 건 측은지심이고 “이쯤 해서 내가 멈춰야겠다.” 하면 사양·공경지심이고요. 그걸 밀고 나가는 건 수오지심이에요. 다르게 하는 게 싫은 거죠.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거고요. 사실은 같은 게 작동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는, 『논어』에서도 공자님이 “계속 서(恕) 하라.” 그래요. “네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나한테 하지 말고, 받아서 좋았던 일을 해라.” 이 말이 쉬워서 그래요. “인의예지대로 해라.”라고 하면 어렵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너무 쉽거든요. 쉬운 걸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용』에서도 이 얘기가 나와요. 이게 ‘서(恕)’인데, 아까 그게 ‘서’인데, 서를 열심히 하는 게 충서(忠恕)예요. ‘충성’(忠)하고 ‘서(恕)’ 하는 게 아니고 ‘서에 충실히 하는’ 게 충서인데, “충서(忠恕)는 위도불원(違道不遠), 도랑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이게 도거든요. 인의예지 그대로라는 게. 그러니까 거리가 멀지 않다는 말이, 서(恕)하면 꼭 맞지는 않아도 얼추 맞아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서를 아주 잘하게 되면 딱 맞게 되겠죠. 『중용』의 그 구절도 이렇게 안 하면 풀 수가 없어요. “도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얘기를 왜 자꾸 하나?” “도가 아니라는 얘기인가?” “뭐 이렇게 하면 계속 도랑은 거리가 영원히 있단 얘기인가?” 이런 게 아니라 도를 바로 알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서를 꾸준히 하다 보면 도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대신에 처음에 꼭 맞지는 않을 거라는 거예요, 판단하다 보면. 그래도 하다 하다 하다 노련해지면 점점 이게 딱 돼서 측은지심이니 수오지심이니 이게 점점 발현이 정밀해지겠죠.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이렇게 하면 또 어떤 문제가 생기고, 이렇게 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더라.” “지난번에 이렇게 해서 내가 좋아해 줬더니 이런 문제가 생기더라.” 이걸 계속 시비지심으로 반성하면서 가다 보면 이거랑 똑같이 돼요.

그래서 『논어』에는 “평생 한 글자만 실천하면 뭐 할까요?” 그러면 “서(恕).” 그러거든요. 이 얘기를 해 주면 어렵거든요. 제가 ‘궁리(窮理)’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궁리도 이런 ‘서’가 깔려 있지 않고 안 된다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지만, 나와 남을 사랑해 가지고요, 사랑해야 지혜가 빨리 돌아요. “내가 저 사람이라면?” 이렇게 빨리빨리 하는 게요, 이것도 3박자거든요. 제가 『몰입』 책에 3박자 두 개를 예로 들어 놓은 게, 하나가 문제 해결할 때 사물의 양면을 보는 거고, 또 하나는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나와 남’의 둘이 양극단(兩極端)이죠. 이 둘을 충돌시켜서 이해관계를 빨리 조정하는 게 맞죠. 그러려면 “내가 저 사람이라면?”도 해 보고, 왔다 갔다 해 봐야 해요. 그 쉬운 예로, 방의 여기에 앉아서 이 방을 보는 것과 저기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예요, 느낌이. 그러니까 서로 각자 다른 방을 보면서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네 귀퉁이에 앉아 있다 보면. 그러면 이쪽 사람이 하는 말 이해가 안 될 수가 있어요, 내 방향만 고집하면. “야, 이 방 뭐 좀 어떻다.” 그러면 “무슨 소리야? 나는 어두운데.” 이쪽은 밝다고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둘이 막 싸우고 있는데 “야, 다 빠져 봐.” “아.” 그러면 싸울 일이 아니고 끝나죠. 그러니까 이게 지혜예요. “아.” 하는 게요, 입장만 바꿔 보면 끝날 일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게 인의예지에 맞아요, 실제로는. 이걸 실천하는 거예요. 실천하면서 배우는 방식이고, 아까 ‘서’는. 근데 실천하다 보면 이 원리가 자꾸 알아지죠. 그러니까 역으로 선천 프로그램이 작동해서 그쪽에 영향을 주는 게 또 생기죠. 그러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도(道)와 이게 하나가 되겠죠. ‘도’와 그런 덕스러운 ‘행동’이 하나가 되겠죠. 이런 얘기가 『맹자』 (이해)에 그대로 도움이 되실 거예요. 맹자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얘기해요. 그러니까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할 때 딱 이 얘기를 해요, 항상.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그리고 같이 꼭 따라오는 말이 “인간은 누구나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네가 부처다.”라고 하면, 유교는 이렇게 쓴다는 걸 아셔야 해요. “네가 요·순이다.”라는 거죠. 요·순이 그 정도 급이에요. 안에 계속 나와요. 너도 요·순처럼 될 수 있다, 계속. 불교로 치면 “너도 부처님이다.” “네 안에 불성이 있다”는 얘기랑 똑같은 거예요. “본성이 선하다. 너도 그대로만 하면, 선한 본성만 따르기만 하면, 네가 제발 그걸 막지만 않으면 너도 요·순이다.” 근데 이게 불교 들어오기 훨씬 전이죠. 인도에서 부처님이, 생존 시기가 부처님보다는 좀 아래겠네요. 똑같죠, 가르치는 게. 맹자 이전에 자사(子思)가 『중용』을 썼어요. 『중용』이 그러니까 그쪽 불교 나올 때쯤에 나온 거예요. 『중용』의 내용이 뒤지지 않아요, 저쪽 불경(佛經)에. 맹자는 『중용』을 공부하신 분이라 『맹자』 내에서 계속해서 『중용』을 인용해요. 『중용』을 같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계속해서 『중용』을 인용해요. 『중용』의 좀 ‘광빠(狂-)’세요. 맹자가 자사의 제자라고 보는데, 자사의 밑의 밑의 제자던가, 바로 직계의 제자든가. 손제자든가 제자던가 둘 중 하나거든요. 계속해서 『중용』을 얘기하기 때문에. 『중용』도 그러니까 다 같은 얘기겠죠.

맹자는 그래서 “우리 안의 본성이 선하다”고, 지금 나름 맹자학 강의가 되는데, 격물치지에서 맹자학으로 좀 가 보면 성선(性善) 얘기하고, “당신도 요·순이 될 수 있다.”라고 얘기하고요. “본성이 선한다는 게 무슨 소리냐? 나는 악한데. 증명해 봐라.” 하면 이렇게 증명해요. “당신 측은지심 있지?” 도둑놈도 사람 물에 빠지는 거 보고 히히덕거리면, 그 정도면 사이코패스급이죠. 일반 도둑도 그러지 못해요. 잡아 놓으면 경찰서에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게 일반인이고요, “아, 더 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 잡혔네.” 하면 사이코패스죠. 그거 아주 소수의 부류, 캄캄하게 막힌 사람 아니고는 도둑놈도 그런 거 보면 안 좋아해요. 도둑놈에게 “도둑놈!” 그러면 안 좋아하죠. 수오지심이 있어요. 얼굴 가리기를 원하죠. 당당하지 못해요. 누구나 이렇게 어른을 만나면 몸이 살짝 긴장하고요, 옳고 그름이 안 가려지면 잠이 안 와요. 답답해요. 그거 있잖아요. 얘기를 좀 해 주다 말면 답답하죠. 정답을 안 가르쳐 주고 넘어가 보세요. 그러면 아기들도 답답할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 “왜 그러냐?” 아기들도 계속 물어보잖아요. 버스 타고 가다 오면 아기들 어머니 죽이죠. 옆에서 “왜 그러는데?” “왜 그러는데?” 어머니 목소리 점점 안 좋아지고, 그래도 계속 “왜 그러는데?” 애들도 3박자를 다 할 수 있고요, 사실은 적당히 그때 3박자로 쳐 주기만 하면 변증법의 달인도 될 수 있고, 이미 인간 안에 원래 시비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해요. 당장 언어만 해도 인간이 원래 언어 능력이 있다잖아요. 없는 능력을 가지고 언어를 억지로 시키는 게 아니죠. 그러면 원숭이도 시킬 수 있어야 하죠, 사람 같이 말하기. 원숭이도 그나마 나아서 좀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뭐 아예 먹통이죠. 근데 우리 인간의 애는 원래 언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자극을 주면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죠. 이거 어떻게 하랴? 하는데 어느 학교에서 실제 애들은 원래 언어 능력이 거의 타고났다고 당연히 보는 거예요. 언어 능력만 타고난 게 아니고요, 도덕적 능력도 타고나는데,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건 도덕적 능력이에요. 그걸 어떻게 복원할 건지, 우리 안에 분명히 있는데. 측은지심 없는 사람 없고요, 시비지심 없는 사람이 없고, 사양지심 없는 사람 없고, 수오지심 없는 사람 없고요. 맹자는 ‘신(信)’은 얘기 안 했어요. 이 네 가지가 잘 돌아가는 게 신이거든요. 이 네 가지가 성실하게. 이건 ‘믿을 신(信)’인데요, 잘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요, 여기서의 신은 ‘성실’이라는 뜻이에요. 믿을 만하다는 거예요. 인의예지가요, 못 믿죠, 이렇게 되면. 어느 날 측은지심 하다 어느 날 안 해요. 그러면 우리가 못 믿죠. 그래서 이 네 가지가 항상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성실지심(誠實之心)이에요. 이게 항상 하지 않으면 안 좋아지겠죠. 수오지심이 생기겠지요. “그러니까 항상 하는 게 게으름 부리지 않고 항상 하는 게 옳다.” 하는 게 성실. 성실지심이라고 그래요, 이걸 사단(四端) 중에서, 후대 학자들은. 성학십도(聖學十圖) 보면 이게 성실지심이라고 들어가 있어요, 오행을 맞출 때는. 그래서 이거 없으신 분 없거든요. 성실히 한다고 해서 성실지심이 아니고요. “성실히 해야 하는데.”라고 누구나 그거에 대해서 (인정하죠). “뭐 불성실해도 되지.”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하려고 하는데 안 될 뿐이지요.

그러면 이게 측은지심도 그렇고 다 그래요. 할 수도 있고 해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도심은 미미하고 인심은 위태롭다”는 게 우리 마음은 항상 위태로워 가지고 욕망에는 되게 취약한데, 이런 거 좋은 거 하는 거에 대해서는 되게 짜죠. 잘 안 해요. 최대한 보류해 보고 또 보류해 보고. 다른 일들은, 유혹적인 건 딱 얼씬하면 바로 집행하는데. “사재(私財)를 다 써서라도 해라.” 바로 명령이 떨어진다면, 이런 일은 최대한 “진짜 그래? 한 번 더 알아 봐. 진짜 거기 돈 써도 되는 거야?” 되도록이면 안 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끝내 안 할 핑계가 찾아지면 안 해요. 뭐 이렇게 “도와주십사.” 하고 해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다가, 인심(人心)이 자꾸 검색을 하죠. “핑계가 없나?” 하다가 딱 그럴싸한 걸 하나 딱 찾으면 이제 틀어막죠. 근데 이거 막지 (말라는 거죠.) 맹자가 여기 전체에서 얘기하는 건 되게 쉬워요. “사단을 확충해라.” 이걸 어떻게든 확충하라는 거예요. 우리 원래 프로그램이 좋고,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필연적으로 이런 사단(四端)의 마음이 올라오는데, 싹이 올라오는데 올라올 때마다 잘 관심과 물을 주고 키워 내기만 하면 성인 된다는 거예요. 너무 쉽죠. 맹자는 이게 너무 쉬운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얘기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불교로 치면 다 불성(佛性)이 있는데, 안 가르칠 수가 없잖아요. 다 부처인데. 똑같아요. 맹자가 볼 때는 “다 요·순인데 왜 저렇게 막 살지?” 이거예요. 다 요·순인데. 특히 임금들이요. 임금만 요·순 만들면 백성은 그냥 알아서 편해지는데. 찾아가서 꼭 얘기를 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당신이 조금만 안에 있는 프로그램 계발하면 되는데, 하면 되는데, 능력도 있고 다 할 수도 있고 다 있는데, 단, 관심이 없어요.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아요, 이게. 이 도심이 신기한 게,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밝혀 보면, 도심이 신기한 게, 하면 맛이 기가 막혀요, 인심보다도 오히려. 근데 신기한 게, 딱 안 하게 돼요. 그렇죠? 최대한 깨어있으면 정말 기가 막힌데, 안 하게 돼요. 신기하죠? 인심 같으면 그 정도 맛봤으면 뭐 자다가도 일어나서 해야 하는데, “좋은지는 알겠는데, 혹시 재밌는 거 없나?” 하고 인심을 찾아요. 먼저 인심에서 꼭 (찾습니다). 이게 누구나 다 앓고 있는 통병(通病: 일반적인 폐단)이에요. 이래서 안 되는 거예요. 맹자 말처럼 그렇게 좋은 게 왜 안 되느냐? 도심이 미미하다는 게, 맛이 없는 건 아니에요. 실제로 먹어 보면 진짜 “이게 진짜지!” 할 때는 그래요, 먹을 때는. 잠깐 끊고 나면, 다시 하려고 하면은 뭔가 더 빠른 자극을 찾는다는 거죠, 인심에서. 그게 좀 약해요. 신기해요. 인간 뇌가 좀 그런 것 같아요. 좋은 건 잘 안 깔려요, 회로가. 나쁜 것은 스쳐도 깔리는데요. 좋은 거는 잘 안 깔리게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챙겨 먹었으니까 어쩔 수 없죠. 이 조건을 극복해야지요.

그래서 모든 다섯 가지 돌아가는 것(인의예지신)의 근본이 ‘깨어있는 것’인 이유가, 깨어있지 못하면은 그거를 안 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인심으로 가요. 깨어있지 못한 분은 그냥 가요, 인심으로. 반성 없이 가요. 그런데 깨어 있으면 “아, 안 되는데….” 하면서 가요. 그런데 깨어있음이 좀 더 강해지면 안 할 수도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모든 힘이 깨어있으면서 시작돼요. 근데 깨어있음만 가지고는 약해요. 궁리도 도와줘야 하고, 에너지도 도와줘야 하고, 실천하는 습관도 들여 줘야 해요. 이게 갖춰질 때 이제 지켜낼 수가 있어요. 우주는 원래 하나예요. 우주는 원래 이걸 다 갖고 있어요. “왜 우리는 다섯 개를 쪼개서 배웁니까? 우주는 안 배워도 하는데요.” 우주가 본성 그대로 하는 게 우주예요. 우주는 이 다섯 가지가 그냥 돌아가요. 그리고 우리가 말한 수련의 다섯 기둥도 그냥 돌아가요. 우주는 그냥 사랑하고요. 우주는 그냥 우주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어요. 자기 안의 일로 다 알고 있고요. 에너지가 부족할 리도 없고요. 깨어있지 않을 리도 없고. 에고가 없기 때문에 다 해요. 인간이 우주를 닮으려다 보니까 우리는 다섯 개로 과목을 나눠서 배워야 하는 거예요. 요게 하나로 합쳐져야 끝나요, 결국에는. 이게 물 샐 틈 없이 합쳐져야 해요, 낱개로 배웠지만. 이걸 목표로 공부하시면…. 『중용』에서 말하는 그런 경지가 ‘정성 성(誠)’ 자 ‘성(誠)’의 경지죠. 이게 잘 되는 것을 『중용』에서…. 「진심장(盡心章)」 좀 봐야 하는데. 시간 얼마나 됐죠? (대답: 20분….)

‘말씀 언(言)’ 플러스 ‘이룰 성(成)’ 해서요, 이게 ‘말씀’들이에요. 말이라는 게 어떤 메시지가 있잖아요. 이게 메시지들이에요. 하늘의 메시지. “사랑하라.” “절도 있어라.” “정의로워라.” “성실해라.” “우주를 꿰뚫어 봐라.” 이게요, 이런 말들이 그대로 일어나요. 그래서 “성자(誠者)는 천지도야(天之道也).”라고 그래요. ‘하늘의 도(天之道)’인데요. 인간은 성자(誠者)라고 안 하죠. 성지자(誠之者)라고 그래요. “성지자(誠之者)는 인지도야(人之道也)라.” 인도(人道)라고 그래요. 하늘은 원래 ‘성 자체(誠者)’고요, 인간은 ‘성하게 되는 게(誠之者) 인간의 도(人之道)’. 그러니까 인간은 별 수 없고요, 성하게 안 된다는 거예요, 자연적으로 두면. 그냥 두면 안 돼요. 저게 하나도 실현이 안 돼요.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노력할 거냐? 우리가 수련의 다섯 기둥을 정한 거예요. 이걸로 노력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저거를. 원래 우리가 갖고 있으니까. 그런 그냥 『맹자』 전반(全般) 얘기라고 한번 들으시고요.

이걸 가지고 좀 연구해 보세요. 이건 달빛이에요. 개념으로 들어갔을 때는 달빛인데 그걸 잘 쪼면 햇빛이 밖에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내 안의 햇빛이 탁 나오는 거예요. “맞아!” “그렇지!” 하게 되면, 이게, 할아버님(봉우 선생님)이 얘기하실 때 자명함·확신을 갖고 얘기하시잖아요. 이건 할아버지의 자명함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랑 상관이 없어요. 할아버지가 하신 얘기는 다 우리한테 가설에 불과해요. 내 양심이 밝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다 각자의 양심 밝기가 제일 중요해요. 지난 주말에도, 제가 그래서 각자 한 분 한 분이 한 나라의 군주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얘기예요. 저 나라의 양심 계발 정도를 존중해 줘야 해요. 나한테 아무리 자명하다고 “맞으니까 무조건 나만 따라 이렇게 해!” 그러면 저쪽은 노예 상태가 돼요. 양심이 더 어두워져요.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도와주는 건, 이런 책이나 이런 적절한 말로, 3박자 사고에 맞게 문답법을 써서 깨닫게 해 줘야 해요. “이러면 어떡하겠어? 도둑놈이라고 해도 도둑이라고 하면 좋아할까?” (이렇게 하면) “도둑이 도둑이라고 하면 싫어해!”(라고) 내가 말하는 것보다 더 밝아지겠죠. “좋아할까요?” 그러면 “아니, 내가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이렇게, 원래, 시간이 있다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계속 저쪽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오게 하는 거예요. 저쪽이 좋아야 끝나니까, 여자 꼬실 때처럼. 내가 억지로, 내가 나만 좋다고 이럴 수 있는 게 아니고, 저쪽이 저를 좋아해야 끝나잖아요. 그러니까 나와야 끝나요. 잘 꼬드겨 내는 게 기술인 거예요. “3박자로 쳐 주면 잘 나오네.” 3박자는 양극단을 쳐 주니까요. 양극단을 치면 중앙이 잘 보여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보여요.

그러니까 아까 『논어』에 그런 구절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논어』도 막 의식해서 일부러 치는 거예요. 예전 고인(古人)들이 변증법의 달인들이에요, 3박자의. 시 쓰는, 한시(漢詩) 같은 거 보면 절묘해요. 안을 치면 밖을 치고, 자연을 치면 또 마음을 치고 해서 탁탁 쳐요. 그래서 화자(話者: 말하는 사람인데, 여기에서는 ‘듣는 사람’이 더 맞는 단어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안에서 그 느낌이 팍 나타나게 만들어요. 강요하는 게 아니고요, 그 말을 쭉 듣다 보면 안에서 뭔가가, 느낌이 터져 나오게 유도하는 거예요. 이게 기술이에요. 그래서 『논어』에서도 “군자는 위엄 있되 관대하다.” 두 개가 안 맞는 말이죠. “위엄 있되”라고만 가르치면 딱 이렇게 각 잡고 있겠죠. “관대하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 충돌이 나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위엄 있되 관대하다.” 거기에 답이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정반대의 말을 써요. 가운데에 ‘말이을 이(而)’ 자 써 가지고 정반대 말, “뭐뭐하되(~而~) 뭐뭐하다.” 아까 그 ‘매장 문제’·‘화장 문제’가 이렇게 나왔으면, 아까 뭐 했죠? 아, 제사의 문제. “제사는 지내야 하되 가정이 깨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 사이에 답이 있죠. “제사 문제 때문에 싸우다가 가정이 깨져서는 안 되는데, 제사 지내는 건 되게 중요하다.” 그러면 답은 이 사이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양극단을 빨리 설정하고 가운데로 몰아가야 답이 나오지, 이 극단 설정을 잘못해 버리면 한참 애먼 데서 찾게 돼요. 그분이 수색 범위를 아예 애먼 데서 지정해 버리면 거기를 죽어라 찾아도 안 나오죠. 딱 범위만 잘 잡고 몰아 들어가면 여기 딱 있다는 거예요, 안에서. 이게 이제 궁리(窮理)의 기술이에요. 정확하게 범위를 설정하고 잘 몰아가는 거죠. 그리고 범위를 설정하고 몰아가다가도, 몰아가다가 안 나오면 다시 빨리 또 범위 조정을 해서 또 양극단을 빨리빨리 조정해가면서 몰고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아!” 할 때까지, 원하는 걸 잡아낼 때까지 그렇게 잘 밀고 들어가요.

그러니까 혼자 무슨 의료 보험 문제,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요, 「100분 토론」 보시는 게 나은 거예요. 정반대 주장에서 저희 살겠다고 막 싸워 대는 걸 보고 있으면 뭔가가 딱 잡혀요, 상(象)이. “아, 이래야 하는 것 같다.” 혼자 하는 것보다 낫죠. 둘이 싸우는 걸 구경하는 게 훨씬 잘 잘 잡혀요. 이 부분은 얘가 맞는 것 같고 이 부분은 얘가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러면 진짜는 뭘까?” 두 개 엉터리로 조합하시라는 게 아니고요. “원래는 어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잘 던졌을 때 답이 잘 떠올라요. 이게 이데아(idea) 알아 내는 비법이에요. 그래서 고인들은 그거의 달인이에요. 이게 ‘중(中)’이라면 ‘과’하고 ‘부족’한 게 다 나오거든요. 중도가 답이거든요, 부처님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면 양극단이라는 게 과한 거랑 부족한 거예요. 전쟁이 났다. 도망간다. 비겁하죠. 근데 혼자 팔 들고 만 명이 있는데 뛰어들어서 용감히 싸운다? 이건 좀 오버죠. 그래서 용기라는 게 나오죠. “비겁도 아니고 만용도 아닌 그 상태, 거기에 답이 있겠구나.” 하고 찾아 들어가면 뭔가 있겠죠. 그래서 양극단을 빨리 설정하시면 가운데가 잘 잡힙니다. 근데 ‘비겁’과 ‘더 비겁’과 ‘덜 비겁’ 사이에서 막 추적해 들어가면 비겁밖에 안 나오겠죠. 그러니까 양극단 설정이 잘못되면 애먼 데 가요. 진보와 보수를 충돌시키거나, 이렇게 좀 크게 해야죠. 그래야 상이 잡히죠. 이게 한 귀퉁이에서 이렇게 놀아 가지고는 안 잡혀요. 왜 같이 머리를 써도 남들이 더 빨리 알아내냐? 본능적으로 그걸 잘 잡는 사람이 있어요, 범위를 빨리. 이 정도에서 답이 안 나올 것 같아서 이렇게 딱 몰고 들어가면 나와요. 또 이 범위를 상정하고 그 안에서 또 세부 범위를 나눠서 지혜롭게 들어가시던가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면, 내가 지금 저기까지를 보고 싶은데 내 실력은 여기까지밖에 안 된다면, 일단 여기까지 충돌시켜서 나온 결과물 가지고 그 힘으로 또 충돌시키는 거죠. 그래서 계속 올라가야 해요. 여기서는 다 답인 것 같은데 한 번 더 들어가면 또 답이 아닌 게 나와요.

태양이 이제 저기서 뜬다 해도 어느 날, 언젠가 태양이 한 번 사라지겠죠. 그럼 이게 연도를 더 키우면 지금 자명한 게 자명하지 않을 때가 또 오겠죠. “3천 년간 이랬어. 저 별은 3천 년간 항상 저 시각에 저기 떴어.” 했더니 3001년째 안 뜨면서 “아, 3천 년 단위로 도는구나.” 이제 공식이 다른 게 나와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양극단을 계속 충돌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동안 충돌한 것에 만족하고 “이젠 더 안 해 봐도 되겠어.” 이러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또 모르거든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개별 구체적 세계라 보편 추상적인 것을 쉽게 단정하면 안 돼요. 우리 전대에 수많은 사람이 알았던 진리가 지금 진리 아닌 게 너무 많아요. 주자(朱子)가 어떻게 얘기했냐면요, 주자가 계제(階梯)가 4계(四階: Level 4)이신데 달을 보고요, 달에 비친 그것을, 옛날에 인디언들도 그게 지구라고 알았거든요, 달에 비친 그림자가. 근데 이제 그림자를 보신 게 아니라, 달에 그 땅의 형상이 있잖아요, 육지의. 지구에 이렇게 빛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고요, 그러니까 대륙이 여러 개 있다고 생각 안 하시고, 몇 개의 대륙이 물 위에 떠 있는 거예요, 거대한 물 위에. 그러니까 태양이 밑에서 미치면 어떻겠어요? 물 부분은 그림자가 안 지겠죠. 육지 부분만 그대로 그림자가 달에 이렇게 땅 모양으로 비친다고 생각했어요, 송나라(宋) 때. 송나라 때의 일류 학자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시대의 제약이 또 있어요. 지금 우리가 아는 거요, 나중 가면 “야, 그때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걸, 그런 터무니 없는 걸 왜 이렇게 했대?”라고 할 수도 있어요. 더 자세히 알게 되면, 중력에 대해서. 중력에 대해서 지금 끝난 게 아니에요. 아인슈타인이 안 게 뉴턴 것보다 좀 더 정밀해진 것뿐이에요. 우리가 보는 건 개별 구체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에 보편 추상적인 걸 바로 볼 사람이 없거든요. 추리해서 알아내죠. 근데 데이터가 더 늘어나고, 우리가 모르는 체험이 생기고,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더 철학적인 이해가 깊어지면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과학자들도 원래는 철학까지 해야 해요. 과학자들이, 요즘 과학은 특히 철학의 영역으로 많이 들어가는데, 철학을 계속 안 배우고 버틴다는 것은 계속 터무니없는 소리가 양산되는. 철학에서 엄청난 아이디어가, 좋은 아이디어가 많은데도 이걸 안 쓰고, 나는 과학에서 그 원고만(실제로 이렇게밖에 안 들리네요) 쓰겠다고 하면서 얘기하는데, 철학자들이 볼 때도 비논리적인 얘기를 할 수가 있거든요, 실제로는. 그러니까 “양극단을 충돌한다”는 게 이거예요. 과학과 철학을 충돌시킬 정도가 되면 더 거물이시죠. 사물의 이데아가 더 잘 보이지요. 과학적, 형이하학적으로 실험해 보시고 형이상학적으로 그림을 그려 가시면 훨씬 잘 보이겠지요. 원래 옛날 고대 철학자들이 이걸 같이 했어요. 그래서 근대 과학도 다 철학자들이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분과가 되어 버린 거예요. 대학교 과가 나뉘었어요. “나는 과학만 잘하면 된다.”가 돼 버린 거예요. “나는 철학만 잘하면 된다.” 둘 다 사실은 양극단 충돌 안 하기 때문에 둘 다 공부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고대 같이 다 배우라는 건 아니지만, 내 전공으로 배우시되 이쪽 분야까지 자꾸 충돌시켜 보시는 분이 더 나아요, 훨씬. 위대한 경제학자인데 인문학을 쫙 꿰어요. 훨씬 그 말에 우리가 존중하겠죠. “『중용』에 이렇게 되어 있지 않냐? 그래서 경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그러면. 근데 그 말이 맞아요, 『중용』을 실제 공부해 본 사람이 봐도. 근데 엉터리면 안 하느니만 못하죠. “저분 한문 해석을 잘못했네.” 이러면 서로 민망해지지만.

그래서 우리 홍익학당 같은 게 저는 앞으로 인문학자들 여기 다 공부하라는 게 아니고요, 경제인, CEO, 사업가, 정치가, 예술인, 누구나 와서 여기서 견성(見性) 기본으로 하시고, 이런 인문학적 소양 이건 인간이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인류 3천 년의 지혜잖아요. 이거 배우시고 사업하시고 뭐 하시고 하면 사람 부리시고 할 때, 사람들 모아서 꼬드겨서 뭔가 일을 하나 만들어 내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 마음 이해도 못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되겠어요? 공산주의가 사유재산만 없애면 될 줄 알았어요 다 선해질 줄 알았어요. 이걸 모른 거죠. 인간은 원래 원천 프로그램이 있는데, 사유재산만이 아니라 일체(一切)의 인심을 유혹하는 것 때문에 안 돼요, 저게. 그래 가지고 사회주의, 사유재산 싹 쓸어 버리고 사회주의 만들었더니 그 계급으로 또 막…. 그게 너무 유혹이 오죠. 당 간부 되어야 하고, 또 황제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 자리에 오르고 나니까 눈 뒤집히고, 아방궁 만들어 놓고 즐기고, 그러면 그게 사유재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 아닌 거죠. 우리 에고에 있는 인심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고, 그걸 극복할 방법은 도심 밖에 없는데. 사회주의라 하더라도 도심 강화, 거기서 뭐라고 이걸 불러야 할까요?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당 간부들은 저 도심 개발을 철저히 해야 해요. 노동자들의 대변인이 되려면 진짜로, 노동자 개체를 초월할 정도로 의식 수준을 올려 놓지 않으면 북한이나 소련이나 중국이나 다 더 가죠. 자본주의보다 더 무섭게 돌아가지요. 그러니까 다 망해 버렸잖아요, 못 버티고. 망해야 할 나라가 안 가고 버티고도 있고 그랬는데, 거의 신앙의 힘으로 버티죠, 거기도 무슨. 그러니까 저희가 만약에 홍익인간 사회, 대동사회(大同社會)를 만들고 싶다면 막연히 대동사회가 될 건지부터 얘기해 봐야 해요. 맹자도 대동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데 인간이 가능한지도 얘기해 봐야죠. 왜냐하면 이게 개한테 말을 가르치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솔직히 일찍 노선을 좀 바꾸는 게 옳죠, 더 현실적인 노선으로. “누구 하나가 너무 많이 못 먹게만 막자.” 이런 정도로 간다든가. 근데 원대하게 막 지상천국을, 이화세계(理化世界)를 만들자고 했다면 당장 나한테 물어봐야 해요. “나는 거기 시민이 될 자격이 있나?” 답이 있으셔야 해요. 이화세계가 된다고 나도 덩달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사회주의 될 때 그랬어요. 해방되고 막 토지 분배하고 할 때는 “지상천국이 여기다.”라고 하고 했거든요. 근데 좀 지나니까 안 좋아지기 시작하잖아요, 점점. 그러면 “대동사회가 이루어졌을 때 나는 과연 당당한 거기 시민 자격이 있나?” 거기 지도자는 차치하고요. “정상적인 시민 자격은 되나?” 그러면 쉽지 않을걸요? 애먼 짓 안 해야 하는데요, 그 사이에서. 남한테 피해 주는 일은 일단 안 하고 살아야 할 텐데 그럴 자격이 있나? 그러면 이 공부 안 하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를 낼 가능성을 자기한테 봐야 해요. 성인들을 보신 거예요. “된다!”라고 하신 게요, 자기들은 보신 거예요. “이렇게만 하면 요순 된다.”라고 하신 건데 되게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죠, 그런 분들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건가?

제가 항상 말씀드린 게 대로(大路)예요. “군자는 대로행(大路行).” 무슨 차로 할까요? 저희 차는 마티즈인데 여기 운전자가 있죠. 내비게이션을 이렇게 틀어 놓고 있죠. 뚜껑이 열린 차라고 하죠. 그래서 이제 여기는 기름통이 있다고 치고요. 가다가 소로(小路)가 있어요. 중도개로(中途改路: 중간에 길을 바꿈)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이제 여자도 기다리고 있고요. 여기는 돈, 여자, 권력 다 기다리고. 쭉 가면 여기는 이제 우리가 홍익인간의 대도(大道), 제가 ‘대아적(大我的) 효율성’이라고 부르는 게 있습니다. 여기는 ‘이기적 효율성’이 아주 충만한 데겠죠. 이기적 효율성이 나쁘지는 않아요. 나의 개인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마음이에요. 현재 경제학의 기본 전제, 경제적 인간,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하죠. 이건 합리적이라고 봐요, 현재 경제학에서는. 나한테 득이 되면 하고 득이 안 되면 안 하는 거죠. 이래야 경제학에 따른 모든 공식을 쓸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 정도 월급을 올려 줬는데 더 일을 안 할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공식을 짜면 너무 어려워지죠. 일반적으로는 좋아해서 한다고, 덤빈다고 보고 짜야 되니까. 이기적 효율성이 좋은데 너무 이것만 추구하는 길이죠. 여기는 그래도 이기적 효율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추구하면서도, 대아적 효율성이라고 제가 부르는데요, (대아적) 효율성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기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길이에요, 이 대도는. 이게 군자의 길인데, 예전에 『대학』에서는 의(義)라고 불러요, 『논어』랑 『대학』에서는. 여기를 이(利)라고 불러요. 이로움만 추구하는 단계죠. 나한테 이롭냐 해롭냐만 판단해요. 그러니까 이게 왜 좀 창피하냐면요, 동물도 이건 하거든요. 동물들도 나한테 이로운 건 하고 아닌 건 철저히 피해요. 개도 하고 원숭이도 하고 다 해요. 근데 이건 뭐냐면 인류 전체에 이롭냐 해롭냐 따지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제가 대아적 효율성이라고 그래요. 특히 정치가는 이러지 않으면, 이런 분은 철저히 국민으로 남아 줘야죠. 이런 분이 정치가 하겠다고 남 위에 올라가면 난리가 나죠. 『논어』의 나라 망치는 법이 ‘굽은 자’ 즉 이기적 효율성만 추구하는 자를 들어다가 대아적인 사람들 위에 놔두면 나라가 망쳐져요. 지금 우리나라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아적인 사람을 들어다가 이기적인 사람 위에다 놓으면 밑에까지 밝게 되는데, 이렇게 놓으면 밑에까지 다 도망가겠죠, 그 나라에 살기 싫어서. 그래서 이게 군자의 길이고요.

그래서, 여기는 ‘+ 이기적 효율성’도 있습니다. 나한테 도움 되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이 길은요 이제 그거 좀 놓은 거예요. 대아적인 거 놓고 가는 길들이 있어요, 소로들이. 그리 빠지시면 안 되고요. 이 길은 홍익인간의 길입니다. 다섯 가지 기둥 중의 하나죠. 늘 이건 어떤 차원에서 하냐면요, 행(行)도 있지만 뜻이 항상 “이 길을 가겠다!”라고 간절히 원하시고 하는 게 좋지요. 행적인 부분도 있어요, 실제로는. 이것만의 특징은, 어떤 뜻을 품고 이 길을 가시겠다고 목표를 분명히 세우시라. 실제 이 길을 걸으시라는 거고요. 수련의 다섯 기둥 중에 일단, 저희가 공부할 때, 아까 제가 양기(陽氣)가 중요하다는 게, 항상 이 에너지, 양기 에너지 부분은 꽉 차 있어야 해요. 이게 안 차 있으면 먼 길을 떠날 수가 없어요. 일단 채워야 떠날 수가 있죠. 불안하잖아요, 가다가. 첫 번째로 이걸 먼저 채우세요. 이건 실천적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이에요. 채우고, 그다음 두 번째로 운전자가 정신이 바짝 깨어 있어야 해요. 존심(存心). 이건 평상시 지금, 이 순간에도 들어가야 할 겁니다. 지금 자기 호흡 바라보시고 정신을 예리하게 만드세요. “모른다!” 해서 깨어나세요, 다른 관심이 있어도. 깨어있을 때 무슨 좋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아니고요, “모른다!” 하시고요, 내 정신 자체에만 관심 가져 주시면 돼요. “세상 거 다 모르겠고, 내 정신 지금 온전한가? 잘 있나?”만 보세요. 정신이 좀 밝아지시죠? 이제 드라이브할 준비가 된 거예요.

근데 이 깨어있음이 나에 대한 깨어있음이죠. 깨어있음이 하나 더 필요해요. 존심(存心)의 또 다른 측면인데요, 깨어있음은 알아차림이죠. 알아차림이기 때문에, 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보세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나?” 한번 알아차려 주세요. 생각·감정·오감을 다 알아차리셔야 해요, 실제로. 진짜로 제대로 깨어있다면. 안으로만 깨어있으면 다 잊어버리고 되면 되는데요, 우리가 밖을 향해 깨어있을 때는 그것까지 알아차리셔야 해요. 이상한 생각을 안 하고 있는지. 보통 깨어있음이 약하다는 게 그거예요. 밖으로까지 퍼져 나가질 않아요. 지금 제가 알 그려 놓고 말씀을 많이 해 드리죠. 제가 설명해 드리면. 이 알을 확고히 하는 방법이에요. 이 알만 푹 빠져서, 주변을 잊어버리고 푹 빠지는 것도 깨어 있음이지만 제대로 깨어 있으면 주변이 다 보여요, 이제. 알아차려져요. 생각·감정·오감이 알아차려져요. 몸을 어떻게 하고 있나 알아차려 보시고요. 이게 ‘대상을 향한 몰입’이죠. 제가 아까, ‘나를 향한 몰입’이라면 이번엔 대상에 대해서 깨어 있어 보세요. 감정은 울고 있나? 웃고 있나? 찜찜해 있나? 긴장해 있나? 보통 스트레스, 보통 우리 현대인들이 울화가 있어서 여기가 좀 굳어져 있어요, 느껴 보시면. 생각이 여기를 맡고, 감정이 여길 맡고, 에너지가 여기를 맡았기 때문에 감정에 문제가 있으면 여기가 좀 굳어져 있으실 거예요. 뭔가 답답한 게 있을 거예요. 그러면 “괜찮다. 괜찮다.” 하시면서 풀어 주면서 깨어 있으셔야 해요. 머리 – 생각, 감정 – 에너지. 아직 존심 차원이에요. 아직 구체적인 건 안 들어갔어요. 깨어서 해결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결되겠죠, 여기서. 그다음에 생각을 먼저 바라보세요.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옳으냐?”라고 물어보세요. “자명한 것들이냐?” “지금 내가 여기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자명하냐?”부터 “내가 생각하는 게 자명하냐?” 지금 나한테 당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게 지금 생각할 거리냐?”부터 다 한번 물어보세요. 그러면 뭐가 일어나냐면, 이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을 정확히 보는 게 돼요. 내비는 궁리죠. 내가 갈 길이 보이고요. 내비의 특징이, 여기 서 있어 가지고는 여기까지밖에 길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바퀴가 여기까지 굴러가야 그다음 길이 보여요. 내비로 생각해 보세요. 궁리는 항상 아는 게 더 많아요, 사람들이. 공자님도 그러잖아요, 『논어』에서. “내가 문(文)으로는 누구한테 뒤지지 않지.” 공자님이 자기 유일하게 자랑하신 거예요. “그런데 행하는 걸로는 나는 아직 얻지 못했다.” “다는 못한다.”라고 얘기하세요. 항상 사람은 아는 게 더 앞서요. 개념이 더 멀리까지 뒤지고 다니거든요. 내비랑 똑같아요. 내 앞뒤까지 보여줘요. 근데 그 앞뒤를 보고 싶으면 거기까지 가야 해요. 좀 나가야 해요. 나가지 않으면 앞의 것이 안 보여요. 그러니까 항상 내 위치를 궁리로 보고 있지만, 내가 걸어가야만,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그다음 게 보인다는 거예요. 아는 게 내가 행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다는 거. 아는 게 내가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뭐 다들 그러다 보면, 안고수비(眼高手卑: 눈은 높은데 실력은 낮음)가 걸리는 거죠. (그건) 아는 거고, 행하는 건 다른데. 그래서 진짜 행한 것까지가 진짜 아는 거죠, 원래는. 궁리를 하고. 이게 한 단계, 하나하나가 지금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리냐면 따로따로 배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즉각 일어나는 일이에요. 지금 여기 앉아서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게 옳은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자명한 것들인지, 아니면 막연한 데서 헤매고 있는 거 아닌지, 답도 없는 걸 자꾸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시고 교통정리를 좀, 정리할 거 정리하시고 하는 것도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거.

그래서 답이 섰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니면 “더 마음을 내서 책을 봐야겠는데.” 하세요. 그게 역행(力行)이에요. 궁리에서 정확히 답이 나오면 바로 실천하세요. 시간 들이고 “나중에 해야지.”는 안 돼요. 생각나는 거 있으면 바로 하세요, 웬만하면. 나중에 할 건 나중에 하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거는 바로 하세요. 호흡도 그래요. “공부해야 하는데. 저녁에 하지.” 이러지 말고, 시간 있으면 그때, 생각났을 때 바로 하세요. 그때가 최적기예요, 공부하기에. 마음 동(動)했을 때 해야지, 마음 싸늘히 식은 뒤에 저녁에 갑자기 마음을 열려면 안 먹어져요. 그러니까 웬만한 것은 즉각 즉각. 이렇게 하는 게 옳다는 것을, 머리를 설득시켰으면 나머지 감정과 오감을 하는 게 역행이죠. 아, 생각도 들어가겠죠. 마음 먹고 하는 것, 궁리 차원이 아니라, 의지를 내고 감정을 조절하고 몸으로 하는 건 다 행(行)에 들어가요. 뭔가 하는 거니까. 그래서 마음으로 알아낸 걸 다 해요. 근데 이 전체적인 게 홍익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그러니까 이걸(홍익, 대아적 효율성) 배양하려면 이것만 더, 역행 중에서 이 부분을 따로 떼어서 얘기할 수 있어요. 아까 행 부분도 있다고 한 게 그거예요. 뭐냐면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 이런 건 홍익의, 그냥 바로 실천이죠. 실천 중에 홍익적인 것의 실천을 자꾸 해 보시라는 거죠. 서(恕)를 실천하고 하는 거. 이런 건 수련의 다섯 기둥 중에서 행에도 들어가지만, 홍익을 하는 거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거죠. 대아적(大我的)인 쪽으로 자꾸 이렇게 모든 걸 몰고 가는 것, 이걸 지금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호흡, 단전에 기운 채우시고, 자신의 숨결을 바라보며 기운 채우시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깨어나시죠, 알아차리시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올바른지 한번 점검해 보시고, 옳은지 자명한지. 자명하지 않은 게 있으면 빨리 찾아요, 자명하게. 그리고 바로 실천하세요. 내린 답 중에 지금 해야 할 것은 바로 하시고. 그리고 이게 늘 대아적인 걸 지향하게 하세요. 남의 입장을 항상 배려해 주시고. 실천적으로 남의 입장을 항상 배려해 주세요. 역지사지해 주시고. 저 사람이 지금 문제에서는, 지금 나 혼자 묻는 게 아니라 만약에 남하고 제가 대화하고 있다면요, 깨어 있고, 남하고 대화하는 중에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옳은지?” 점검해 보고, 옳을 때 말하고. 하나 더, “저 사람 입장은 지금 어떨까?”까지 생각해 주시면 다섯 기둥이 그대로 일어나서. 다섯 기둥이 일어난다는 건요, 중심이 잡혀 있고 주변과 적절하게 조화를 잘 이룬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다시 돌아오세요, 중심으로. 싹 돌아오셔서 다시 깨어 있으세요. 다 잊어버리시고 호흡, 에너지 충만하게 하면서, 그러면 방금 하나 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다시 녹으면서, 내 안에서 불순물이 떨어져 나가면서 내 안에 있는 선천 프로그램이 더 작동해요. 그렇죠? 한 번 해 봤기 때문에 그 경험으로 인해서 내 안의 것이 더 밝아져요. 더 쉽게 일어나요. 이 과정이 안 일어나면, 잘 안 일어나고 계속 단절돼요. 어느 선에서 자꾸 멈추면 다섯 기둥이 원활하게 안 돌아가고, 알기까지는 알았는데 해 보지는 않는다면, 그러면 선천 프로그램이 덜 작동해요. 지금 이 다섯 기둥도 결국에는 선천 프로그램을 빨리 작동시키기 위한 비법이에요. 이게 안에서 점점 살아 돌아가기 시작하면 이제 꼭 좋아서가 아니라 부득이(不得已)하게 하게 되는 거예요, 안 할 수가 없어서. 안에서 막 이제 프로그램은 작동하니까요. 양심을 어길 수가 없어서 그냥 하는 거예요, 좋고 싫고를 떠나서, 처음에는. 그러다가 점점 편해지고 거기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죠, 나중에. 계속 재미없는 길이라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이게 안 와닿아도, 양심이 막 하라고 하면 하게 돼요. 너무 밝아져 버리고. 나중에 에고도 양심과 이제 거의 하나가 되겠죠. 왜 그런지 충분히 납득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를 설득해서 거기까지 몰고 가면 계제가 7단(七段)이 돼요. 에고가 다 설복됩니다. 알아야 할 걸 다 알고요.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먹는다고, 이렇게 한 자리에서 이렇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7계(七階)가. 다 해 보고 편안해질 때 되는 거예요. 모든 문제 다 겪어보고, 어느 상황에서도 참나가 자기를 안 잃고 항상 상황을 지배할 때, 에고를 리드할 때, 이제 더 이상의 그 에고의 거부가 이제 현저히 약해져서, 이제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샛길 나갈 정도로는 에고가 더 이상 힘이 없어졌을 때. 에고 힘을 다 빼 놔야 그게 돼요. 그래서 에고가 “님 뜻대로 하세요.”라고 나올 때. 그러니까 예수님이 7단이신데 계속 기도할 때 보면 그러잖아. “나랑 아버지는 하나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그러니까 에고가 거의, 거기서 ‘나’라는 건 에고예요. ‘아버지’는 참나고. 에고랑 참나 사이에 거의 벽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기도할 때 “내 뜻대로 말고” 그래도 아직 뭔가 있어요. “그래도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라고 에고가, “딱히 나한테 해 보라고 그러면 또 딴 생각이 있긴 한데, 될 리도 없고, 그냥 알아서 하세요.”라고 거의 포기한 상태, 자아를. 그랬을 때 선천 프로그램 인의예지가 그대로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럴 말을 할 만해요. 그 정도로 공부하시라는 거예요. 7단이면 할 수 있어요. “나를 보면 이데아를 할 수 있지 않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내가 움직이는 방식, 내가 사랑하는 방식, 이게 다 지금 인의예지 그대로 지금 움직이고 있다. 에고가 거의 의견을 잘 안 내기 때문에, 에고가 돕기만 하지 이 흐름을 바꾸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지금 모든 말과 행위가 인의예지 프로그램이 그대로 나온 거니까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다.” 이런 말이 나와요. 그건 황극을 이룬 사람한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인데. 그렇죠. “나를 보는 자는 알 수 있다.” 지금 참나가 내 안에서 그대로, 전혀 가림 없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일정 한계는 있지만 그대로. 7단도 한계는 있죠.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는 지금, 지구에서 인간이 해야 할 것에 대해서 거의 답을 내신 분이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목표로 가시는 거예요. 수련의 다섯 기둥이 어느 경지에, 달인이 되시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겁니다. 깨어 있고. 궁리(窮理), “나는 옳은가?” 행할 때는 꼭 그걸 물어봐야 해요. “에고로 행하나? 대아적으로 행하나?” 그러면 두 개가 다 돼요. 대아적이면서도 역행(力行)으로 가서 바로 나갈 수가 있고. 그래서 이 다섯 가지를 얘기하지만, 내가 크게 항상 물어보는 게 “깨어있나?” 지금 물어보시라는 게요,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게 100% 옳은가? 자명한가?” 하나는 행할 때 “나 유리하게 하지 않는가? 살짝 욕심 보태서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물어보시라고 하는데요, 다섯 기둥이랑 이렇게 맞게 되어 있죠. “에너지는 충만한가?” 여기까지 물어보면 더 맞겠지만, 이런 거 자꾸 물어보시고 점검하시면 매 순간 공부가 나가요. 이렇게 공부는, 한 시간 뒤에 수련할 시간 잡아놓고요, 룰루랄라 놀고 계시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공부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거죠. “난 중심 잡고 있나?” “에너지는 충만한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옳은가? 자명한 것들인가? 막연한 것들인가?” 답을 모르는 것도 빨리 찾아보셔야 해요. 인터넷에서 뒤져서 자명한지 찾아내야 해요. 그 습관이 좀 붙으시면 좋아요. 책 보실 때, 지혜가 잘 안되는 분들 특징입니다. 보다가 모르는 단어 나오면 대충 넘어가요, 그냥. 영 지혜가 안 늘어요, 책을 하나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