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5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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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금) 17:21 기준 최신판

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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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0.
게시일자 2015. 07. 08.
동영상 길이 1:24:27
강의 중 인용 도서 맹자, 중용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ZuLCvJGpJvA



[참고]
『맹자』, 『중용』: 책 이름
맹자: 사람 이름
중용: 철학 용어



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5강


지난 시간에 끝날 때 21절이죠. “군자가 성(性)으로 삼는 바가 인의예지인데, 우리 마음 안에 뿌리를 두고 있고, 밖으로 나오면 얼굴빛으로도 나타나고, 뒤태로도 알 수 있고, 팔다리에서 이게 행해진다.” ‘인의예지가 실제로 구현된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에 우리 공부가 다 있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맹자』 읽는 목적이 그거죠. 제가 『맹자』를 택한 이유가, 지금 공부 수준을, 우리 흥여회(興與會) 회원분들 공부의 수준을 확 한번 올려 보려면, 공부를 한번 점검하고, 우리가 그동안 이렇게 깨어있음을 얘기하거든요. 우리 몸과 마음 안에 있는 어떤 중심이 있는데, 이게 우리의 중심인데, 우리가 이제 중심이라고 하고요. 나와, 내 몸과, 내 몸도 조화를 잘 이루게 하고 남하고도 관계에서 늘 조화를 이루게 하겠다, 이 중심을 가지고요. 우리 안에 밝은 중심이 있고, 그게 실제로 표현돼 가지고 밖과 조화를 이루는 게 이제 우리의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이 중(中)을 봉우 선생님은 도(道)라고 했고 화(和)를 덕(德)이라고 하셨죠. 덕에는 두 개가 있죠. 수기(修己), 나를 닦는 게 있고요. 치인(治人), 홍익인간이죠. 남을 도와주는 게 있고요. 이 ‘치(治)’가 ‘다스리다’, 단순히 뭐 남을 억압해서 다스리는 ‘다스릴 치(治)’가 아니고요. 이게 원래, 이게(厶) 삽이거든요, 위에. 삽으로 구멍(口)을 잘, 이 물(氵) 흐르는 데에 구멍을 잘 뚫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물을 잘 터 줘서 물이 고이지 않게, 넘치지 않게, 물이 잘, 알아서 빠지게만 해 주면 ‘치(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관계도 문제 생기는 부분만 터 주면 돼요. 보면 사람들이 마음에 뭔가 이렇게 앙금이 쌓여서 곪아 가거든요. 다들 쌓여 가고 있는데 그것만 잘 터 주면 돼요. 없을 수가 없어요. 어떤 일부 성자나 일부 종교에서는 “에고라는 것 자체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하는 거는 “이기심만 없으면 우리 사회가 좀 살 만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얘기랑 똑같아요. 근데 그런 사람, 말하는 자신부터 이기심이 있죠, 자기 마음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그 성자도 그런 말 할 때는 다 자기의 주장을 하는 거지, 이기심 없는 사람은 우리한테 말도 할 수가 없어요, 에고가 없는 사람은. 그러니까 그런 말 하는 사람은 다 에고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우리한테 에고를 죽이라고 하는 사람은. 실제 죽인 사람은 우리한테 말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게 딜레마예요. 말하는 놈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고, 진짜 죽인 사람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우리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죠. 그러니까 그런 말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거죠. 실제로 어떤, 인간인 이상은 기본적인 에고가 있기 때문에 배고파도 내 배가 고프고 밥을 먹어도 내 배가 부르지 남의 배가 부르진 않거든요. 우리는 에고가 당연히 있고 욕망도 당연히 있어요. 그래서 에고가 원하는 게 있고요. 이런 욕망들을 잘 관리만 하시면 됩니다. 성인도 욕망이 다 있고 에고가 있거든요. 다만 그거를 이렇게 물꼬를 잘 터 가지고 고이지 않게 잘 관리하느냐? 늘 공정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시킬 수 있느냐? 아니면 위태위태하게 가느냐? 이제 그 차이죠. 그래서 “중심을 잡고 조화를 이루는 게 우리 덕이다.” 하면 “도가 이렇고 덕이 이렇다.” 그러면 문제는 이게 우리 공부의 큰 길인데, 왜 『맹자』가 좋냐면요, 이걸 이루는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깨어서 중(中)을 잡고, 움직이면 늘 사람들하고 조화를 이루겠다.” 그러면 말은 좋은데 “구체적으로 뭘 실천하면 이게 바로 이루어질 거냐?” 하는 그게 정확히 잘 안 잡히실 거예요. 그래서 『맹자』가 좋은 게요, 맹자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는 게요, 이게 사단(四端)이에요. 인의예지가 우리 마음 안에, 인의예지의 마음이죠. 인의예지가 꽉 찬 마음, 그 사단이 있기 때문에, 중(中)은 뭐냐, 사단의 뿌리죠. 인의예지가 어떤 원리의 형태로만 이렇게 씨알로 간직돼 있는 상태. 화(和)는요, 인의예지가 사단을 통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 거죠. 그래서 같은 거예요. 우리가 나무가 있고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면 이 씨알이 발아(發芽)해서 이 뿌리가 된 부분하고 올라가서 줄기가 돼서 열매를 맺는 부분하고 한 몸이거든요. 그래서 씨알이나 이 뿌리에 해당하는 부분하고 꽃·열매에 해당하는 부분하고는 하나라는 거예요. 이 하나로 연결되는 지점이 사단이에요. 사단(四端)을 제가 양심이라고 표현했죠. 그래서 요즘 『채근담(菜根譚)』에서도 제가 계속 미는 게 양심인 게, 양심 하나에는 도덕이 다 들어 있어요. 중화(中和)가. 양심을, 우리가 깨어있기만 해도, 왜 깨어서 中만 잡아도, 도(道)만 닦아도 좋은, 훌륭한 거냐? 왜냐하면요, 이 뿌리를 타고 나가면 당연히 덕이 이루어지게 돼 있거든요. 원래 하나이기 때문에. 도와 덕은 하나이기 때문에 둘둘 말아서 쥐면, 지금 불가에서 이렇게 얘기하죠. 둘둘 말아 쥐면 이게 뿌리고요, 펼치면 줄기. 그래서 요거 요거로 표현을 다 해요. 이게 형이상이고 이게 형이하예요. 딱 말아 쥐면 양심의 뿌리, 우리의 본성, 중(中)이고, 펼치면 덕이 되는 거죠. 근데 이놈이 하나라는 거죠. 하나가, 그 뭐죠, 과학자들이, 데이비드 봄인가 과학자가 하는 말이 “감춰진 세계랑, 우주에는”, 그 양자장 주장하신 분이 “펼쳐진 세계가 있다.” “우리가 아는 이 펼쳐진, 낱개의 세계가 있고,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감춰진 세계가 있다.” 근데 이 두 개가 형이상·형이하에 대응하죠. 우리 중(中)과 화(和)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돌돌 말면 중(中)이고 펼치면 화(和)라고 그러면 중·화가 별개로 인식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 공부하실 때 중과 화가, 앉아 있을 때는 깨어있고, 움직일 때는 뭘 해야 될지 잘 모르겠고, 앉아 있을 때 깨어있을 때는 정신이 맑고 고요한데 움직일 때는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는 거죠. 만나는 일마다 선악이 분명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그게 문제예요. 이걸 하나로 설명하는 아주 쉬운 단어가 사단(四端)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맹자』를 미는 거예요. 맹자 사단은 이걸 공부하시는 분만 알 게 아니라 누구나 알 거거든요, 사단은. 도둑도 알고 뭐 아주 파렴치한도 알아요. 측은한 마음이 있고, 그 사람도, 부끄러운 마음이 있고, 사양하는 마음이 있고, 옳다·그르다 하는 게 있다고요, 자기 나름. 그래서 이 사단의 뿌리가 中이고. 그러니까 깨어있을 때는 어떻게 깨어있어야 되냐면, 깨어있을 때도 내 안에 지금 깨어있다는 게 사단의, 사단(四端)의 뿌리를 내가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깨어있어야 되고요. 움직일 때는 사단을 실제로 밀고 나가서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실천하고, 부끄러운, 악(惡)이 미운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악을 바로잡고요. 또 옳고 그름을 가르고 싶으면 가서 자명할 때까지 파서 생각을 계속 정리해 가지고, 계속해서 3박자 사고를 해 가지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를 때까지 멈추면 안 돼요. 그리고 실제로 이걸 실천할 때는 남하고 사양하면서, 남을 배려 잘해 가면서 반드시 실천하고요, 조화롭게, 내 주장만 옳다고 하지 말고. 또 남은 남의 양심이 움직이잖아요. 저는 제 양심이 움직이지만 남은 남의 양심이 움직이니까 배려해 줘야 돼요. 남의 양심의 수준이나 이런 처지를 잘 배려해 주면서도, 서로 결국에는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길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걸 실현하면서도 남하고 배려를 잘 맞추는 선에서. 이런 식으로. 그럼 이걸 매일, 그러면 이게 안과 밖이 하나가 되거든요. 깨어있을 때는 중(中)을 잡고 움직이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게 사단 하나로 나간다는 거죠. 사단의 뿌리를 잡고 있고, 앉아 있을 때는, 다르게 말하면요, 움직일 때는 사단을 표현하는 거예요. 일단 이렇게 한번 얘기하고요.

다르게 한번 얘기해 볼게요. 이 사단 부분을 잘 아시면 공부하실 때 아주 도움이 되실 겁니다. 지금 우리가 파야 될 부분이 여기 특히 사단 하나예요. 『맹자』 전체가 사단 하나거든요. 그래서 오늘 할 내용도 마찬가지고, 사단을 갖다 확고하게 머리에다 안 집어넣고 내가 몸으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맹자』를 읽으면 다 의미가 없습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다 그냥 “아, 이건 인(仁)이고 이건 의(義)고. 아, 이건 예(禮)고.” 맞추기 잘해요. 짝 맞추기는 잘하게 되는데 나랑 하등 관계가 없거든요. 근데 보세요. 유교의 제일 심법이, 사단은 『맹자』가 처음 얘기했지만, 밝히기는, 유교의 심법이요, 도심(道心)하고 인심(人心)이 있는데, 사람 마음하고 도의 마음인데, 도심이 우리가 아는 양심이죠. 이놈은 항상 위태롭고 도심은 항상 미약하다는 거예요. 좋게 해석하면 ‘미묘’하고요. 뭔가 미묘한 게 있고, 나쁘게 말하면 ‘미약’해요. 세력이 약해요, 실제로, 인심에 비해서. 이 두 개가 싸우는 게, 투쟁하는 게 우리 마음 상태예요. 근데 인심이 강하죠. 훨씬 강하고, 대신에 위태로워요. 그러니까 위태롭다는 얘기는요, 인심 자체가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얘기예요. 악하기만 하면 위태롭다고 안 하겠죠. “인심은 오로지 악하다.”라고 얘기하겠죠. 이 인심은요, 우리가 여자 좋아하는 마음, 음식 좋아하는 마음, 뭐 권력, 뭐 사랑받고 싶은 마음, 나 자랑하고 싶은 마음, 나를 위한 마음은 다 들어가요. 이게 ‘에고를 위하는 마음’이에요. 에고를. 그러니까 ‘사람 마음’이죠, 그게. 그래서 주로 뭐냐 하면 이익을, 이거는 ‘이익을 위주로 하는 마음’이고요. 도심은 ‘선을 위주로 하는 마음’인데요. 이거를 이제 인심과 도심을 극명하게 비교해 보면 인심은 나한테 이로운 건 좋아하고 해로운 건 피하는 마음이에요, 간단하게 말하면. 그래서 반대로 도심은 선한 건 좋아하고 악한 건 미워하는 거. 그래서 기준이 다르죠. 도심은 나와 남을 다 고려하고 있고요, 인심은 나만 고려해요. 그래서 제가 이걸, 경제학에서 효율성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주로 인심이거든요. 그래서 이거를 ‘이기적 효율성’ 아니면 이제 ‘소아적(小我的)인 효율성’, 나만, 여기까지만 ‘나’로 보는 효율성이고요. 효율성을 따지는 마음. “그래서 효율적이냐?” 이게 효율적이냐 아니냐만 따지는 거예요. 이게 현대 경제학에서는 이 인심을 가지고 모델로 하기 때문에 이게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부분이죠. 근데 우리가 따지는 진정한 합리성은요, 서양에서도 고대에는 다 이게 합리성이었어요. 근대에 와 가지고 이게 ‘합리’라는 말로 포장이 된 거지, 이건 합리적인 건 아니에요, 실제로는. 욕망에 이성(理性)이 진 거죠. 실제 이성이 순수하게 “너 이성(理性) 좋아하는 것만 해 봐.” 그러면 도심 따라갑니다. 이게 진짜 합리성이죠. 이걸 우리가 대아적(大我的) 합리성이라고 해요. 효율성. 대아적(大我的)인 합리성을 따르는 마음이죠. 효율성. 예전에 서양에서도 합리(合理)라는 건 로고스(logos)에 맞는다는 거거든요. 자연의 질서에 맞는다는 거예요. 자연의 질서가 아니거든요, 이거는, 나한테 유리한 거지. 그러니까 욕망과 이성의 싸움에서 이성을 따르는 게 합리적이라는 건데, 이거는 이성이 욕망한테 진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유리한 것만, 이성이 욕망의 시녀가 돼 가지고 합리화시켜 주는 거예요. 욕망이 잘못한 거 있으면 변호해 주고, 욕망이 “뭐 가져 와라.” 그러면 어떻게 가져올지 빨리 연구하고. 뭐로 연구하느냐? 수학과 과학으로 요즘 연구해서 따 내요. 이 근대 문명이 아주 인심 위주의 문명이에요. 그래도 중세에는, 중세가 옳다는 건 아닌데요, 도심을 위해야 한다는 게 많이 남아 있었는데, 춘추(春秋)에서 전국(戰國) 오면서, 춘추도 그래요, 춘추시대에 중국도요, 『맹자』가 다루는, 춘추시대에도, 좀 이따 나오겠지만, 그래도 도심 위해야 된다는 건 알아요. 근데 명분만을 위하고 실제로 아무도 위하지 않아서 문제였는데, 전국시대에 내려오면요, 대놓고 인심을 추구해요. ‘이(利)’. 그래서 맹자가 첫 장부터 “이익 얘기 좀 하지 마세요.”라고 한 게요,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그래도 이익 얘기하면 창피한 줄 알았는데, 수오지심이 그래도 있었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내려오면 아예 다 까발려서 이익을 얘기하니까 “뒤지지 않겠다!”가 돼요. 그게 요즘 시대랑 똑같아요. 요즘이 전국시대 수준이에요. 춘추시대만 못하죠. 그땐 그래도 명분을 내세웠는데 요즘은 대놓고 이익을 얘기하는 시대로 또 가고 있어요.

이런 게 있는데요. 이렇게 봤을 때 우리가 양심만 따르면 답이 나온다는 거죠. 우리 안의 도심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 밝은 거예요. 원래 밝아서 잘 밝혀 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인심은 우리가 잘 다스려야 되는 문제고요. 인심은 우리가 잘 치(治)해야 되는 거고 도심은 밝혀야만 되는 거고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도심이 양심이고, 양심이 사단이라고 보자면, 우리는 이 사단과 우리 욕망이 싸울 때 합리적인, 가장 합리적인 사단을 따르는 걸 자꾸 연구해야겠죠. 이걸 연구하는 방법이 『서경』에서 말하는 게 정일집중(精一執中)인데요. 이건(精) 정밀하다는 뜻이고 일(一)은 ‘한결같다’예요. 하나만 목표로 한다는 겁니다. 인심·도심 다 챙기려고 하면 힘드니까 오로지 사단 하나만 연구하고 오로지 사단만 정밀하게 파라는 거예요. 그러면 오히려 인심도 살 길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중(中)을 잡을 수가 있다.

中이 뭐냐면 인심이 하나도 없게 없애자는 게 아니에요. 아까 얘기했지만 우리는 에고를 없앨 수가 없어요. 단, 이 인심이 도심을 넘어서는 월권이 되는 부분은 우리가 막을 수가 있지요. 이 도심이 옳다고 한 범위 내에서 인심 추구하는 건 죄가 아니에요. 성인도 당연히 하는 거기 때문에. 근데 우리가 도심이 뭔지 모르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요, 일반 우리, 지금 현대에 있는 국민들도 모두 다 중(中)을 잡을 수가 있어요, 실제로는. 욕망이 없어야 중(中)을 잡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디 인도 명상에서 하는 것처럼 “에고를 죽여야만 선(善)이다.” 그러면 에고 안 죽인 사람들은 필경 악(惡)으로 흐르겠지만, 우리 기준으로 보면 욕망은 없앨 수가 없는 거예요. 성인도 있는 거고. 그럼 뭐 해야 되느냐? 사단을 갖다가 정확하게, 사단을 갖다가 늘 위하고 사단을 정밀히 연구하다 보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정확히 나와요. 선악의 기준이 나오고, 이 대아적(大我的)으로 뭐가 옳은지, 그러니까 나한테 뭐가 옳은지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봐서 이게 옳은지 그른지가 나와요. 이게 사단을 밝히는 중에 나오는 게, 우리가 역지사지하는 게 사단을 실천하는 거거든요. 역지사지 안에는 사단이 다 들어 있어요. 상대방의 입장에 역지사지해 보는 것 자체가 측은지심이고, 감정 이입해 보는 게, 거기서 공정한 마음으로 역지사지를 해야 되거든요. 시비지심으로 해야 돼요. 맑은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자명한 걸 찾지 않으면, 에고의 마음으로 역지사지를 하면 엉터리 역지사지가 나오죠. 대아적(大我的)인 마음으로 역지사지를 해야 정확한 역지사지가 나와요. 내 에고의 자료를 참고해서 상대방의 에고를 읽어 내야 정확한 거지, 내 에고가 주가 돼 가지고 “내가 이게 너무 좋으니 쟤도 여자를 좋아하겠지.” “내가 돈이 너무 좋으니” 이런 식으로 역지사지해서는 엉터리가 나오고요, 자기 편견과 욕심이 투영되니까. 그런 게 아니라 선명한 마음으로 시비지심으로 따져 보고 측은지심으로 추적해 보고 사양지심과, 뭐죠, 수오지심으로, 다른 방식으로, 내 욕심 부리는 게 너무 싫어서 역지사지를 하는 것 자체가 수오지심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역지사지 하나에 사단이 다 들어가 있어요. 역지사지를 자꾸 하다 보면 이게 정밀해져요. 그래서 선악의 기준이 정밀해지니까 남한테 이걸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이 말을 하더라도 어느 선에서 멈춰야 될지가 정확히 나온다는 거죠. 그게 우리 마음 안에서 다 나온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도심에서. 도심은 원래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가 잘 몰라요. 그래서 정밀히 연구한 사람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인심(人心)도 마찬가지예요. 실제로 우리 마음 안에 어떤 욕심이 있는지 잘 몰라요. 겪어 보고 아는 거예요. 겪어 보고 “아, 나는 이런 경우에 이렇게 반응하더라.” “돈을 보면 이렇게 반응하더라.” 이렇게 룰(rule)이 나와요. 마찬가지로 도심도 그렇게 연구하시라는 거예요. 자꾸 도심을 밝혀 보신 다음에 “나는 이럴 때는 어떻게, 내면에서 양심의 소리가 이럴 땐 뭐라고 하더라.” “이럴 땐 뭐라고 하더라.” 찾아 내 가지고 너무 자명한 거, 시비지심이 옳다고 한 것부터 자꾸 3박자로 충돌시키면 모르는 것까지 알아져요, 자꾸자꾸. 그래 가지고 언젠가는 우리가 도심에 대해 전체 내용을 알아야 돼요. 인심에 대해서도 우리가 30평생, 제가 40평생 살면서 제 인심에 대해 이해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어떤 식으로 제 욕망이 움직이는지를. 그것만큼, 그 정성 여기다 쏟는 것만큼 더, 그 이상 도심에다 쏟아 줘야죠. 그래야 도심이 밝혀지죠. 그래서 결국은 도심이 밝혀져야 인심이 제어가 되고, 인심도 위태로움에서 안정을 찾아요. 인심 죽이라는 말이 없어요, 유교에는. “위태로우니까 안정시키라”고 돼 있죠. 애가 불안에 떨고, 인심은 좀 철없는 마음이라 불안에 떨고 막 요동하고 욕망에 휘둘리고 죽겠다고 하니까 도심이 밝아지면 이놈이 편안해져요. 엄마한테 의지한 자식처럼, 교사한테 의지한 학생처럼 이제 길이 나오고 자기가 살 길이 나오니까 안정을 찾아요. 그러니까 이게, 이 위태로운 인심, 철없는 아이를 그냥 방치하면, 도심(道心)의 부모가 신경을 안 쓰면 범죄자도 되고 아주 사회에 흉악한 그런 인사도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한번 보세요. 그래서 결론은 사단(四端)이에요. 사단 하나만 파면 우리는 유교의 제일 근원을 다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중·화도 팔 수 있고 인심·도심에 나온 정일집중도 할 수 있다는, 사단 하나만 정밀히 파면. 이거를 제가, 여기까지는 유교 얘기고, 몇 시, 몇 분 흘렀어?

지금 18분이요.

예. 이게, 『맹자』도 중요한데, 이게 중요해서. 지금 공부하신 분들은 이게 지금, 지금 깨어있을 때도 “내가 그냥 고요하네. 편안하니까 깨어있다.”라고 하지 마시고요, “내 마음이 참 공정하고 인(仁)하고 의(義)하고 예(禮)하고 지(智)하구나. 내 안에 인의예지의 싹이 다 있구나. 내가 요것만, 깨어있을 때 이 마음만 밖에 나가 실천하면 양심이 이루어지고 사단이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겠구나.”까지 가야 돼요. 그래서 맹자는 이 맛을 봤기 때문에 사단 하나를 갖고 얘기하는 거예요. “만물이 개비어아(皆備於我).”라고 그래요. 나올 거예요, 이 부분도. “만물이 다 내 안에 갖춰져 있구나.” 이래요. 내 안에 뭐 무슨 신통한 게 있는 게 아니라요, 맹자 말은, 사단도 오행으로 만든 거잖아요, 오행의 원리대로.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서요, 오행의 원리대로 우리 마음이 돌아가는 게 사단인데, 이게 하느님 마음이고, 우리 안에 있는 거 보고는 “천지만물의 근본 원리가 다 내 안에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구체적인 실증으로는요, 우리가 사단만 밝히면 천지만물하고 다 수작할 수가 있어요. 법을 봐도 이 법이 옳은지 그른지는 인의예지로 다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 하는 모든 짓은요, 이게 참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하는 게, 이 자리가요, 인간이 하는 모든 짓은 이 사단 안에 다 들어와요. 사단이 밖으로 나가서 다 “옳다.” “그르다.” 선악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냥 제가 하는 얘기인데, 들으시고, 실제로 그런지는 여러분이 확인하셔야 돼요. 선악의 기준을 사단에서 다 끌어낼 수 있는지. 시비지심이에요, 사단 중에 특히 시비지심이, 시비지심은 자명한 걸 자명하다고 하고 자명하지 않은 걸 아니라고 그러고 아는 걸 안다고 그러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마음이에요. 여러분, 이 마음이 없으면 여러분 공부 자체를 못 해요. 2 더하기 2가 4인지를 도저히 납득을 못 해요, 시비지심이 없다면. 어떨 땐 맞다고 했다가 어떨 땐 틀렸다고 할 거예요, 이게. 근데 우리는 알아요. “이런 느낌과 이런 조건이면 맞다.”라고 하는 거. 이거예요, 간단한 게 “요거랑 요거 같냐? 틀리냐?” 하면, 여러분, 아주 어린 친구도 이거 놓고 “이거랑 이거 같냐?” 그러면 같다고 안 할 거예요. 알아요. 이게 시비지심이에요. “두 개가 똑같냐? 다르냐?” “이게 이거냐?” 이것도 “맞다.” “틀리다.”랑 똑같은 거예요. 시비지심이에요. 이게 이거냐고 했을 때 아니라고 할 겁니다. “다르다. 이게 이거 아니다.” “이게 이거냐?” “맞다.” 이게 시비지심이에요. 그냥 알아요. 이 마음이 없다면요, 이것도 구분 못 한다면 우리는 천지만물의 법이건 경제건 정치건 하나도 구분 못 하는데, 이걸 안다면요, 우리가 2초 호흡에서, 2초+2초 호흡에서 3초+3초 호흡으로 나갈 수 있으면 1분, 2분, 10분 호흡도 다 똑같은 걸 알 수 있듯이, 시비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요, 눈앞에 2 더하기 2가 4라는 거 알 정도 지력이면요, 이대로만 잘 쫓아 나가면 천지만물도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옳은지 그른지.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얘기를 이제 종합으로 하나 하고 『맹자』로 바로 들어갈게요. 하나만 더 제가, 우리 공부할 때 자료 삼으시라고요. 제가 「수련의 다섯 기둥」 해 놓은 게 있어요. 존심(存心), 마음, 깨어있음이죠. 기운 기르기, 양기(養氣). 궁리(窮理), 원리 탐구하기. 역행(力行), 행으로 실천하기. 그다음에 우리가 홍익인간. 이게 크게 말하면 혈구(絜矩), 유교에서는 서(恕) 하라는 거죠. 역지사지,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 내가 대접받고 싶으면 남을 대접해 주기. 그러니까 사랑을 실천하자는 거예요. 기독교로 말하면 사랑이고요. 이걸 하자는 거죠. 이 네 개를 잘 닦아서요. 근데 이걸 잘 보시면요, 사단 하나로 제가 한번 밀고 나가 볼게요. 존심(存心)은 어떤 거겠어요? 아까 한 얘기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이거는 지금 뭐냐면, 공부를 끝없이 막 이제 넓게 하시겠지만, 『맹자』를 다 보시더라도 이게 안 돼 있으면 안 된 거예요. 이게 내 안에서 안 돌아가면. 실제 작동을 해야 돼요. 이 메카니즘이 돌아가야 돼요. 깨어있으면 사단의 뿌리를 잡고 있는 거예요. 이건 사단의 뿌리, 이게 지금 다 사단으로 얘기할 거니까요, 앞으로. 사단의 뿌리를 잡고 있는 거예요. 중심. 깨어있다는 거는 사단의 딱 중심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깨어있을 때도 평안한가 고요한가만 볼 게 아니라 인의예지의 뿌리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이 마음을 밀고 나가면 참나의 자명함을 밀고 나가면 시비지심이고, 참나에서 에고 위주가 아닌 그 마음을 밀고 나가면 사양지심과 측은지심이 나오고요, 참나가,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 참나를 그대로 지상에서 구현하면 수오지심이 돼요. 그렇죠? 이 씨를 잡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되고요.

양기(養氣)는, 『맹자』에도 나오지만 사단(四端)을 도와주는 기운이죠. 사단과 짝이 되는 기운이에요. 그래서 어느 정도냐면, 양기는, 우리가 기르면, 양기는, 거친 기가 아니라 아주 맑은 기기 때문에 그거는 사단하고 반드시 짝을 이뤄요. 그래서 맹자는 뭐라고 했냐면 수오지심을 실천할 때 기운도 같이 배양되고, 우리가 기운이 쪼그라들면 도심도 쪼그라든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단의 어떤, 사단의 기운과 토대죠. 사단을 아주 지원해 주는 원군 역할을 해요. 요 기운이, 그래서 우리가, 군자가 가져야 할 그 포스(The Force)는 사단(四端)을 진짜로 자꾸 실천하면서, 사단이 쌓여, 몸에 실천하던 게 쌓여 가지고 생기는 기운이에요. 우리가 마음을 한 번씩,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마음에 아주 유쾌한 짓을 자꾸 하는 거예요. 그러면 몸에 그만한 맑은 기운이 감돈다는 거예요. 선(善)을 자꾸 해 버려 가지고 도심이 정말 기분 좋아하는 거, 우리 『대학』에도 나오고 『맹자』에도 나오지만, 자겸(自慊)이라고 나와요. 「성의장(誠意章)」에. 자기를 속이지 않아서 선을 진짜로 좋아하고 악을 진짜로 미워할 때 오는, 스스로 오는 뿌듯한 만족감이에요. 이게 도심의 기쁨이죠, 어떤. 호르몬도 좋은 호르몬이 나와서, 아주 선을 실천했을 때 아주 기분 좋은 그 느낌, 그 느낌을 계속 맛보시는 분은 에너지가 달라진다는 거, 실제로. 그게 「호연지기장」에 나와요. 『맹자』 나중에 보시고요.

궁리(窮理)는 뭐냐면 사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아는 거예요. 왜 사단이 옳은지부터 측은지심은 과연 어디까지가 측은지심인지. 왜 그러냐면요, 보세요. 우리 사단이 안에서 밀고 올라올 때는 순수할지 모르지만, 우리 마음 안에서 느끼는 사단은 이미 왜곡돼 있어요, 에너지에, 우리 에고에. 에고를 통해서 사단을 느끼니까요. 그러니까 측은하지 말아야 할 거에 측은하기도 해요.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사람이 아주 무슨 자기 뭐 키우던 개 죽었다고 사람 죽은 것보다 막, 그건 당연히 슬픈 일이지만, 사람 죽은 거랑 이 가치가 뭔가 안 맞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수오지심에 뭔가 자극을 받죠. “저건 아닌데.” 하는 거. 내 거 뭐 하나 없어진 건 아주 측은해하면서 남은 뭐 사람 죽어가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이럴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측은지심이 뭔가 왜곡돼 있을 수가 있어요. 두 번째로, 시비지심도 옳고 그름이 잘못돼 있을 수가 있어요. 명확히 “옳다!”라고 하는데 뭔가 아닌 경우가 있어요, 남이 볼 때. 그다음에 사양지심도 사양하지 말아야 할 건데 막 사양하는 게 있어요. 그건 해야 되는데, 자기가. 의리에 맞는데도 사양할 수가 있어요. 또 뭐 있죠? 하나 안 했는데. 수오지심도. 수오지심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거를, 선(善)을 부끄러워하고 악(惡)을 당당하게 여길 수도 있잖아요. 그럼 뭔가 사단 같은데 아닌 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공부를 시작부터 제대로 해야 돼요. 역행(力行)은 사단을 실천하는 거고요. 홍익인간은 뭐 그 사단 자체죠. 사단의 어떤 완성이죠. 이렇게 봤을 때 왜 근원부터 잘 닦아야 되냐면, 우리가 맑은 마음으로, 그러면은 왜 깨어있어야 되는지가 나와요. 자꾸 깨어있어야 사단의 수원(水源), 사단의 근원지를 잘 보고 있어야 나왔을 때도 사단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가 쉬워요. 우리 욕망으로 나오는 사단, 그러니까 이 존심(存心)은 없고 양기(養氣)도 없이 그냥 내 마음에 일어나는 측은한 마음을 사단이라고 생각하고 연구를 했다가는 에고의 마음을 오히려 연구하게 되겠죠. 도심이 아니라. 그러니까 도심에서 진짜 올라온 놈, 그거 맞는지. 분명히 올라온 놈은 맞는데, 측은지심이 올라온 건 맞는데 올라오는 과정에 불순물이 묻으니까 그건 털고 볼 정도로 봐야 궁리가 된다는 거죠. 이해되시죠? 그래서 자꾸 깨어서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해 보고, 깨어서 기운도 기르고, 자꾸 이게 불순물 묻은 건지 아닌지 해서, 사단에서 왜 이게, 사단이면 이게 왜 옳은 건지를 자꾸 연구해 보시다 보면 궁리가 엄청 늘겠죠.

이렇게 해서 생긴 사단에서 궁리는요, 인의예지에 대해서 아주 박사가 되기 때문에, 인의예지에서 아주 전공을 하게 되는 게 인의예지의 이데아예요. 그렇게 되면 인간사의 어떤 문제가 와도 인의예지에 맞게 풀어 나갈 수가 있다는 거죠. 인간사를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근데 인의예지에 맞게 풀어 나갈 수는 있어요. 인의예지에 대해서는 정통했기 때문에. 이게 성인(聖人)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성인은 다른 거 많이 아는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예로, 왕양명의 『전습록』에 이 얘기가 나와요. 가볍게 한번 읽어 볼게요. 한번 들어 보세요. 이 부분이 지금 오늘 아마 『맹자』 전권을 다룬 것만큼 중요한 얘기예요. 자료에는 없는데요, 『전습록』 그냥 한번 제가 간단하게만 읽어 볼게요. “성인이 무소부지(無所不知), 성인이 모르는 게 없다는 거는 단지 천리(天理)를 알 뿐이다.” 천리가 인의예지예요. “인의예지에 대해 잘 알 뿐이다.” “무소불능(無所不能), 못하는 게 없다고 하지만 그거는 인의예지를 잘 실천할 뿐이다. 성인의 본체가 명백하여” 성인은 본성이 광명해 가지고 어디다 갖다 놔도 어떤 일에서든지 인의예지를 찾아낸다는 거예요. 처음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요. 일 돌아가는 건 모르시겠죠. 성인도 동사무소에 오늘 출근하시면 일 배워야죠. 일 배우는데, 배우는데 안다는 거예요. “아,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이런 게 탁탁 나온다는 거예요. 배우면, 들으면, 처음 만난 사람이랑 얘기를 해도 “아, 이건 아니지.” 하는 게 탁탁 나온다는 건 어디서 나오느냐? 인의예지에서 나옵니다. 내면의 사단(四端)에서. “그래서 천리를 다 실천할 뿐이다.” “아니다.” 뭐가 아니냐면 “본체가 광명해진 뒤에 천하 사물을 다 꿰뚫어 보고” 투시를 해 가지고 다 꿰뚫어 보고, 신통력이 생겨 가지고 모든 걸 다 능하게 막, 하늘도 날아다니고, “이걸 말하는 게 아니다.” “성인의 전지전능은 그런 게 아니다. 천하 사물의 그 곡절(曲折)” 지금 컴퓨터, 뭐 요즘 아이폰, 아이패드, 스마트폰 뭐 그런 거 나오는데 그런 거를 “초목(草木)의 이름들, 무수한 동물들” 뭐 이런 이름들을, 그러면 끝도 없는데 “불승기번(不勝其煩), 그걸 다 셀 수가 없는데 성인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인이 그걸, 부처님이 스마트폰 알아서 부처님 된 게 아니에요. 몰라도 부처님이죠. 그러니까 이걸 구분하라는 거예요. 지금 각자의 시비지심에다 명확히 한번 말을 걸어 보세요. 부처님은 뭐로 부처님 됐고 공자님은 뭐로 공자님 됐나? 스마트폰, 컴퓨터, 자동차, 운전만이 아니라 그 부품들 다 알아야 성인인가? 전지전능하다면 그것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착각에 빠져요. 그렇죠? 근데 인간의 수명이 1000살 2000살 하면 모르겠는데요, 100년씩 다른 거 전공해 볼 수도 있겠지만, 한창 머리 쓰는 게 한 30년 40년밖에 안 돼요. 우주가 그렇게 하라고 해 놓은 게 아니죠. 그래서 이 왕양명도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성인도 알 필요가 없는 건 성인도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되는 게 있으면 성인도 스스로 물어봐서라도 알아낸다, 남한테.” 모르면 물어보는 게 천리라는 거예요. 인의예지에 맞다는 거예요. 왕양명이 이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공자님이 예전에 어떤 제사 때 참가하셔 가지고 매사를 물어보셨다고 돼 있으니까, 후에 선비들이, 송나라 선비들이 공자님 감싸 주느라고 “아시면서도 일부러 물어보셨다.” 이렇게 주(註)를 달았어요, 『논어』에. 그러니까 왕양명이 “그건 너무 공손이 지극한 거다. 그건 아니다. 그건 예(禮)에 맞지 않다.” 자기가 볼 때는 “통하지 않는다.” “성인이 다 알 필요가 없다. 모르면 물어봐서 하면 된다. 모르면 물어보는 게, 천리가 거기 있다. 인의예지가 다 있다.” “하지만” 이 얘기가 포인트예요. 반전인데 “하지만 천리만 알고 있으면 모든 제도나 법률도 거기에서 나온다.” 이해되시죠? 우리가 인의예지를 안다고 해서 법전이, 육법전서가 한눈에 들어오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인의예지를 알고 있으면 육법전서를 쓸 수는 있다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이런 경우엔 이런 게 옳지.” “이런 경우 따져 보니 이럴 땐, 내 양심이 말하는 바에 의해서 판결하자면 이럴 때는 몇 년 형(刑).” “이럴 때는 무슨” 이게 양심에서 하나하나 나온다는 거예요. 왜냐? 다 사단으로 만든 거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이 가장 흡족해하는 것들을 만든 게 우리 문화와 제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단만 잘 밝히면 지금 문화와 제도 중에 잘못된 것은 다 고칠 수 있다는 겁니다. 컴퓨터를 모르고 다 몰라도. 그렇겠죠? 컴퓨터를 몰라도 컴퓨터를 잘 쓰는 사람은 이 컴퓨터의 질서에 순응해 주는 사람이 잘 쓰겠죠. 그러니까 사단이 확충된 사람이 무슨 물건을 써도 잘 쓸 수밖에 없어요. 시비지심이 있거든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근데 조금 물건이 말 안 들으면 주먹질하고, 그냥 인심으로, 공정한 분노가 아니라 그냥 욕망의 분노가 일어나고 이 물건을 합리적으로 대처를 못하니까, 다스리지 못하니까, 치(治)를 못 하죠. 물꼬만 터 주면 되는데 그걸 못 트니까 막 이렇게 더 오히려 일을 망치는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사단이 깨어있으면 그런 일 안 난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까지 한번, 우리 공부하실 때요, 참고하시라고 한번 얘기해 봤습니다. 좀 요점은 잡히세요? 얼마나 한 거죠?

33분이요.

『맹자』가 중요한가요? 근데 이 원리를 가지고, 뼈대잖아요, 뼈대에다 살을 자꾸 입혀 보면 지금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맹자』라는 게 하나의, 이게 수학, 방금 제가 말씀드린 거는 어떤 수학의 풀이의, 수학 문제를 푸는 아주 기본 요령이라면, 이거는 『수학 정석』이라고 보시면 돼요. 진짜 들어가서 한번 풀어 보자는. 여기서 안 풀리면요, 이 『맹자』나, 앞으로 어떤 책들을 보실 때 그렇게 보셔야 돼요. 어떤 책이든지요. 이런 고전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현대서라고 하더라도요, 볼 때 저 같으면 이렇게 봐요. 제 시비지심이 이걸 맞다고 하나 안 맞다고 하나. 그리고 여기서 어떤 게 선이고 악인지를 내가 가릴 수 있나? 이걸 계속 실험해 봐요. 그러면 책 보는데 어떤 책을 보든지, 이 책이 설사 악(惡)인, 잘못된 게, 오류투성이라 하더라도요, 제가 그 오류를 잡아내는 과정에서 제 지혜가 항상 길러져요. 시비지심이 길러지고 선악이 뭔지 선명해지고, 그 사단의 마음이 더욱 강화돼요. 이래서 인의예지가 중요하다는 게 더 나와요. 이런 식으로 책을 보세요. 『맹자』 보실 때도 마찬가지예요. 『맹자』를 보고 “맹자는 맹자고, 나는 나고.” 이렇게 해서 보면 안 되고, 이거 볼 때 『맹자』 한 구절을 정확히 보고, 내가 이걸 “맞다!”라고 여긴다는 거는 내 시비지심이 밝아진 거예요. 그만큼 확충된 거예요. 그만큼 확충된 시비지심은, 시비(是非)라는 건 선악을 안다는 거니까 제 행동거지를 다 변화시켜요. 뭐가 “옳다!”라고 알면 변해요.

아무리 수행 잘하고요, 마음 잘 닦아도, 궁리가 잘못돼서 개념이, 시비지심이 오류가 나 버리면 하는 행동이 다 틀어져요. 이 시비지심이 무서운 게 이거예요. 선비들이 뭐라고 하냐면 “궁리가 잘못되면 백행(百行)이 다 틀어진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열심히 하는 선비일수록 더 틀어져요, 개념이 잘못돼 있으면. 자기가 “옳다!”라고 한 걸 계속 추진했기 때문에 매사가 다 틀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궁리에서 실제 나아가 가지고 진짜로 맞는지 한 번씩 확인해 보시죠.

우리 22절부터 하면 되죠? 백이(伯夷)는 예전에 우리 동이족 고죽국(孤竹國)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왕자인데 나라 버리고 이렇게 절개 지킨다고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 먹다가 돌아가신 분이죠. 백이·숙제(伯夷·叔齊). 그래서 공자님도 『논어』에 보면 “인(仁)한 사람이다.” 인이라는 게 사랑인데, ‘남녀 간의 사랑’ 그런 사랑이 아니죠. 개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仁)이라고 하는 거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에요. 보편적 사랑. 그러니까 나의 이기적 효율성을 안 따지고 대아적(大我的) 효율성을 따라서 그걸, 더 높은 걸 사랑하는 거죠. 휴머니즘에 강하신 분들이 ‘인(仁)’이라고 붙여져요. 나와 남을 둘로 안 보니까. 그래서 이 백이가, 근데 이런 성자도요, 주왕(紂王)을 피해서, 은나라 마지막 왕이죠, 주왕을 피해서 북해 바닷가에 살 때 문왕이, 주 문왕(周 文王)이 흥기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어찌 귀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듣기로 서백(西伯)이” 서쪽의 우두머리란 뜻이죠. 주나라가 은나라의 서쪽에 있었어요. 제후국이거든요. 그래서 서백이라고 그래요. 서백이, 『봉신방』이나 이런 데 보면 잘 나오는데,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노인을 잘 봉양한다’에서요,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실제로는. 보세요. 노인이 잘 봉양받을 정도라면 복지 수준이 장난 아니겠죠, 그 나라가. 왕도 정치가 잘 됐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고아가, 만약에, 반대로 바꿔도 똑같아요. “그 나라는 고아가 잘 대접받는다. 내가 거기 가야겠다.” 어떤 고아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그 나라의 복지 수준이 훌륭하다는 거예요. 왕도(王道). 임금이 인(仁)한 정치를 한다는 거예요. “보편적 휴머니즘을 가지고 정치를 하더라.” 강태공도 똑같아요. 강태공이 주왕을 피해서 동해 바닷가에 숨어 살다가 문왕이 흥기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어떻게 안 갈 수 있겠냐? 거기 가면 노인을 잘 봉양한다더라.” 하고 천하의 노인들이 그리 모여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얘기는 달리 말하면 이거죠. 임금이 노인만 잘 봉양하고 이렇게 역지사지를 해 가지고 정치를 하면 강태공이니 백이니 하는 그런 노인들도 오고, 만약 젊은이를 잘 대접하면 아주 유능한 젊은이들이 오겠죠. “그럼 그 나라가 날로 부강해질 거 아니냐?” 하는 것도 담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무슨 덕이냐? 정전제(井田制)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왕도 정치는 곧 정전제예요, 맹자한테. 제가 『대학, 인간의 길을 열다』의 뒷부분에 ‘왕도 정치’ 할 때 정전제를 갖다 그대로 해석해서 실어 놓은 게 있거든요, 『맹자』의. 이 부분이랑 거의 내용이 겹칠 거예요. 정전제에 대해서 몇 군데에서 얘기를 하는데 비슷한 내용이에요. 맹자의 머리에는 이게 딱 그려져 있어요. 뭐냐 하면 정전제는, 예전에 혹시 그 만화 영화 『12국기』 보신 분 있으면 그분들은 아실 텐데, 캡쳐를 떠다가 자료 화면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 일본 작가가 연구를 많이 해 가지고 정전제에 대해서 되게, 『맹자』에 나온 글보다 훨씬 자세하게 잘 그려 놨더라고요. 근데 정전제(井田制)는 이거예요. 이게 마방진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 마방진이 이거죠. 여기가 1. 가운데에 5황극이 있었고. 5, 이렇게 황극이고요, 5가. 통치를 표시할 때 X를 그렇게 쓰거든요. 5황극이고, 6수(水). 원래 1·6수(水) 2·7화(火)인데 이 낙서에서는 오행 상극으로 얘기하니까 7이 이쪽으로 와요. 여기가 3, 7. 3·8목(木) 2·7화(火). 2·7화(火) 1·6수(水). 여기가 수죠. 2·7화(火) 3·8목(木). 이 수 자체는 하도(河圖)에서 옵니다. 4·9금(金). 하도에선 원래 이게 다 뭉쳐져 있어요. 딱 다섯 개로만. 이게요, 3·8목(木) 2·7화(火) 4·9금(金) 1·6수(水) 5·10토(土), 이게 선천 하도인데, 낙서(洛書)로 올 때 10은 형이상학적인 수라고 해서 10은 빠져요. 9만 써요. 10은 일단 빼 버리고. 보세요. 여기 한 군데 모여 있던 놈들을 흩었죠, 지금. 8방으로 쪼개다 보니까 흩었어요. 그래서 특이점은, 여기는 한 군데 모여 있던 애들을 둘로 흩었다는 거. 그리고 하나는, 2·7과 4·9가, 화와 금이 서로 자리를 바꿨다는 거. 그래서 이걸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고 그래요. “후천에서는 금과 화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이게요, 왜 그러냐면요. 여기에 화가 오는 게 맞고 여기에 금이 오는 게 맞는데, 실제 돌리다 보면, 불이 너무 뜨거워지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금 기운이 가서 불 자리에서 불을 좀 식혀 줘요. 그리고 가을은 너무 추워지면 안 되니까, 여름철에 그 양기가 가을철에도 좀 더, 좀 더 작용을 해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금화교역이 돼야 후천이 더 잘 돌아가더라.” 이렇게 해 놓은 건데, 이거 만드는 법은, 여기서 여기가 왜 나왔냐 보면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게요, 보세요, 정중앙에는 양수(陽數)가 오고 있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홀수와 짝수를 나눈 거예요. 홀수는 이렇게. 아니, 짝수는 좀 틀어진 측면에서 보좌해 주고, 정 가운데 십자가, 이게 ‘양십자가’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그어진 거를 양수로 이루어진 십자라고 해서 ‘양십자가’라고 그러거든요, 동양에서. 이렇게 한 걸 ‘음십자가’라고 그래요. 음십자가는 음이기 때문에 반만 먹는다는 거예요. 이게 그대로 동양에서는 5를 의미하고 이건 10을 의미해요, 수리적으로. 그러니까 수리적으로도 맞는 게, 이렇게 이렇게 합치면, 이렇게 이렇게 합치면 10들이 나오죠. 가운데 5 빼고요. 근데 요놈들은 합치면 분명히 요놈들도 10이 나오는데 반만 먹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동양에서 이게(㐅) 5의 고자(古字)예요. 여기다 이거(二), 둘로 쪼개졌다고 해서 이걸 더 쓰기도 해요(𠄡). 아시겠죠?

(근데 이게, 동양은 이게 마방진이고,) - 문맥에 맞지 않으니 자막으로 넣지 않는 게 좋을 듯요

이게 서양에 건너가서 마방진이 된 거예요. 동양의 낙서가 더 기원이에요. 이게 어떻게 합쳐도 10이 되니까 신기해 가지고 이걸 확대해서 막 써 먹기도 하는데, 정전제는 이 원리예요. 밭을 이렇게 아홉 개로, 이 전체가 1리(里)예요. 이렇게 해서 ‘1리’일 거예요. 1리·1리를 해 가지고요, 가운데는, 여기는 비워 두고 나머지 밭을 여덟 집한테 나눠줘요. 그게 여기에 나오는 거예요. 그게 100무(畝)씩, 100이랑씩 줘요. “100무의 토지를 집한테 주고” 여기 5무(畝)의 집은요, 이거 외에 별도예요. 이거 외에 각각 집을, “5무의 집을”, 이게 땅 넓이예요. 이게 ‘이랑 무(畝)’ 자인데 ‘밭 이랑’ ‘다섯 이랑’ 이런 부분이죠. “의 집을 주고 거기다가 뽕나무 키우게 하고, 뽕나무 담장 아래에다” 뽕나무 키우는 게 중요해요. 이건 이 사람, 이걸로는 그렇고. 아무튼 뽕나무를 키우게 하는 것의 목적은 뭐냐 하면 누에를 해 가지고 옷 해 입으라고. 비단 해 입으라고요. 그러니까 집에서 뽕나무 키우게 하고, 이게 왕도 정치의 포석이에요. 그러니까 어렵지 않다는 거예요, 왕도 정치가, 『맹자』 입장에서는. 마을 단위로 각 집에다가 뽕나무, 5무 집을 짓고 뽕나무 키우게 하고, 그러면 “아낙네가 누에를 치면 노인이 족히 비단 옷을 입을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각 집마다 다섯 마리의 암탉과 다섯 마리의 암퇘지를 기름에 번식의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이게 또 무식해 가지고 그냥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때를 놓치지 않게 한다는 건요, 번식할 때를 꼭 지켜서 그때는 번식시키고 먹게 시킨다는 거예요. “이걸 각 마을 단위로 교육을 시키고” 새마을 운동이죠, 거의. “그러면 노인이 고기 못 먹을 리가 없다.” 맹자가 이렇게 고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노인들 때문이에요. 뒤에 나오는데, 노인들은 고기 안 먹으면 배가 안 부르다는 거예요. 그리고 노인들은 비단을 안 입으면 춥다는 거예요, 몸이. 거기까지 배려한 거예요. 비단과 고기. 그래서 노인이 족히 고기를 먹지 못할 일이 없을 거다. “100무(畝)의 토지를” 보세요. 한 집에 배당된 게 100무의 토지예요. 이걸 잘 경작하고, 이제 여기서 이거를 갖다가 이 토지는 어떻게 하냐? 이거를 여덟 집으로 또 나누겠죠, 이렇게. 간단하게 보면. 그렇죠? 여덟 집이 또 나오고, 이 가운데에다가는 또 각 이걸 둬요. 뭐냐 하면, 농사지을 때 여기에 사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딴 데 살아요. 와 가지고 머물 움막 같은 것도 지어야겠죠. 그런 것도 짓고 해서, 여기서 이걸, 이 가운데 공간은 비워 두고 생각해 보세요. 각기 모여 가지고, 집들을 갖다가, 여기 논밭을 같이 경작하면, 거기서 요만큼만 세금으로 내면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되겠어요? 10분의 1 세가 되죠. 세금 수준이 10분의 1 세에 해당하겠죠. 제도가. 여기까지를, 여기 아홉 개에다 여기까지 하면 열 개잖아요. 열 개 중의 하나를 내는 격이니 10분의 1 세가 되게 돼 있어요. 이해되시죠? 이런 식으로 굴리면 이게 농사만이 아니라, 이게 적이 쳐들어오면 이대로 그대로 뭐냐 하면 예비군이에요. 민방위이자 예비군. 그러니까 이게 병농일치(兵農一致)라고 그래요. 중국에서 이상으로 추구하는 농촌 시스템이에요. 저 단위로 농사를 짓다가 적이 침투하면, 농한기 때는 그러면 이 단위 수가, 이 여덟 집이 모여서 군사 훈련을 같이 한다는 거죠. 군사 훈련을 같이 해 가지고 이 마을 단위로 그대로 군사 체계가 되게. 이해되시죠? 향토 예비군, 이게 이제 왕도 정치인데 이 얘기를 살짝 하는 거예요. 앞에서, 1장에서 자세히 했거든요. 살짝 하면서 “이른바 주 문왕이 노인 잘 봉양한다는 거는 토지와 집을, 토지는 100무씩 집은 5무씩 주고, 뽕나무를 심고 가축 기르게, 가축은 몇 마리씩 기르게 시키고 처자식을 잘 인도”해요. “인도하여 노인을 잘 봉양하게 가르치고” 이 ‘봉양하게 가르친다’ 하는 것에서 교육이 들어가요. 이것만이 아닌 게, 교육까지 들어가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효제(孝悌)를 가리켜요. 효도하라. 이 예를 든 게 『대학, 인간의 길을 열다』에 보시면 나올 거예요. 『맹자』 「1장, 양혜왕」에 나와요. 뭐냐면 “노인들이 짐 들고 가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러니까 효와 제를 가르쳐서, 이렇게 봉양하게 가르치면, 마지막에 교육이 빠져 버리면 이거 다 갖춰 놓고도 잘못되겠죠. 이게 사단이 확충이 안, 사단이 옳은지를 몰라 버리면 사람들이 선악을 모를 테니까 큰일 나죠. 그러니까 이게 왜 왕도냐 하면 형이하는 다 갖춰 주고 교육을 요구하니까 왕도예요. 그냥 어려운 형편에 “우리 정신력으로 이겨 내자.” 하면 왕도가 아니죠. 왕도는 충분히 먹고 살 만하게 해 주고 도덕을 가르치자는 거예요. 그래서 “50세가 되면 비단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고, 70세가 되면 고기가 아니면 배가 안 부른다.” 그러니까 이걸 ‘춥고 굶주림’이라고 하는데 문왕의 백성 중에 추위에 떨고 굶주린 노인이 없었다는 거는 왕도 정치가 잘 구현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강태공이나 백이도 그쪽으로 옮겼다. 이게 문왕 때 얘기예요. 백이는 입장이 달라요. 강태공은 무왕을 도와서 은나라 치는 데에 협조했지만, 백이의 입장은요, 문왕 때는 있었지만 무왕이 은을 치자 백이가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 먹고 죽어요. 주나라(周)에 반대한 거예요. 단순히 주왕(紂王)에 반대해서 수양산 들어간 게 아니고. 주왕은 그냥 피해서 북의 바닷가에 살았는데, 무왕이 주를 하니까, 이 백이의 족속이 원래 고죽국이라는 게 우리 옛날 고구려로 불릴 정도로 이쪽, 우리 쪽이에요. 그러니까 그것 “주나라, 내가, 밑에서는” 은나라한테 반역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백이는 반역자에 대해서는 아주 싫어했던 거예요. 그래서 수양산 가서 굶어 죽으니까 공자님이 백이에 대해서 어진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 문왕한테 간 걸로 어진 사람이 된 건 아니에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맹자가 “노인 봉양한다.” 하나를 얘기할 때도 왕도를 지금 바탕에 깔고, 주 문왕이 왕도를 잘하니까. 근데 이런 글은 공자님 글에는 안 보이죠. 맹자 글에만 보여요. 이렇게 주문왕 칭찬할 때 이렇게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거는. 맹자의 입장은 좀 달라요. 주나라 위주예요. 은나라보단 주나라. 공자님은 은나라 왕족이라 은나라 위주로. 주에 대해서, 현실 정치가 주로 되니까 존중은 하되 은근하게 사이를 둬요.

뭐 이렇게 궁금한 거 있습니까? 이해 안 되고 그러면 바로 얘기해 주세요. 들으시는 분들도.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 길어서 안 보신 분도 많겠지만, (보시는) 분들의 속을 긁어 줄 정도의 시원한 질문들을 던져 주면 좋죠. 이 질문도 참 잘 던지면 좋죠. 나로서도 더 생각해 보게 되고요.

대충 그래요. 여기서는 왕도 정치에 대해서 맹자가 주 문왕을 칭찬하면서 왕도 정치가 어떤 거라는 것도 대충 얘기를 좀 드러내고 있는 편이고요.

23절에 대해서 맹자는 “논밭을 잘 다스리고” 맹자가 하는 논리를 잘 따라가면 정치에 대해서 상당히 이렇게, 좀 이렇게 기준이 설 거예요. 관(觀)이, 정치를 보는. 올바른 정치가 뭔지 보는 관(觀)이 서실 텐데 “논밭을 잘 다스리고 세금을 적게 거두면 백성들은 당연히 부유해진다.” 그렇죠? 수확, 농사 잘 짓게 최대한 도와주고 농지를 개량, 정비를 해 줘야 되면 정비해 주고 길을 내 줘야 되면 내 주고, 다 갖춰 주고 세금은 적게 거두면 백성들이 부유하게 된다. 이때랑, 물론, 지금이랑은 형편이 다르다고 얘기할 부분도 있겠지만 근본 원리는 안 달라요. 그렇죠? 먹는 거 많이, 플러스 많이 해 주고 마이너스는 줄여 주면 당연히 백성은 부유해진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렇게 해 주면 다른 비용이, 국가의 비용이 덜 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머리를 잘 굴려야 될 문제지 “아, 그거 옛날이나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농사지을 때나 하는 거다.” 이렇게 보시면 안 되고 원리를 보세요. 왜 이게 옳은지에 대해서, 내가 왜 이걸 옳다고 생각하는지 내 마음을 한번 보세요, 어떤 원리가 있는지. 인의예지의 원리에 맞으니까 그러거든요. “먹는 걸 때에 알맞게 하고” 이 ‘때’가 그거예요. 또 똑같아요. 번식의 때를 무시하고 막 이렇게 잡아먹게 하면 안 돼요. “쓰는 것을 예절에 맞게 한다면” 사치 못 하게 하고요, 허레허식 못 하게 하면. 그렇죠? 요즘 결혼식 같은 거 다 허례가 너무 심하죠. “이렇게 힘든데 막 그렇게 과소비를 해야 되나?” 싶게 경쟁적으로 서로, 사람들이 막 경쟁하게 되면 써야 될 돈 이상을 써요. 이걸 국가가 좀 안정시켜 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재화를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죠. 플러스를 늘려 주고 마이너스를 줄이니까. “백성은 물과 불이 아니고는 생활하지 못하나” 예를 보세요. 재밌죠. 물과 불이 아니면 못 살아요, 우리가. 물이 있어야 살고 불 때야 살거든요. 겨울에 추워서 어떻게 살아요? 음식도 불 아니면 어떻게 해 먹어요? 그런데 저녁에 남의 집 문 두드리고요, 옛날에, 불씨를 구하는 거예요. 우리 집 불 피워야 하는데 불씨를 구하거나 물 좀 달라고 하면 안 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 지극히 풍족하니까.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면 콩이나 곡식도 이 물과 불처럼 소유하게 한다.” 많이. “그래서 물과 불처럼 콩과 곡식이 흔해지면 백성들이 어찌 인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 쏠 거라는 거예요. 우리도 항상 마음이 그렇죠. “내가 좀만 더 있으면 잘 쏠 텐데.” 잘 쏘고 싶어도 이 미래가 불안하고 당장 그 앞길이 막막하면 사람들이 비축하기 마련이잖아요. 이러려면요. 사회가 엄청 안정적이어야 돼요. 미래가. “내가 펑펑 써도 늙으면 또 늙는 대로 답이 있다. 내 자식은 자식대로 답이 있다.” 싶어야 이걸 쓰지, 어떻게 써요? 내 자식이 또 못살 수도 있고 밀릴 수도 있고 하는데, 자식 것까지 다 비축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복지가 잘 이루어지면 그럴 문제가 사라지겠죠. 그러니까 그런 이상(理想), 왕도 정치를 생각하는 거고요.

24번이 아주 어려운 글이더라고요. 주자도 해석을 이상하게 하고. 이런 말 하면 건방지지만. 다산 선생님도 그렇고 이 부분 해석에 대해 되게 힘들어하셨어요. 이게 좀 앞뒤 말도 안 맞는 것 같고요. 앞 구절하고 뒷 구절 떼어 놨잖아요. 두 개의 단락이 너무 따로 노니까 옛날 분들이 “여기 뭔가 좀 잘못된 게 있나?” 할 정도로. 주자주(朱子註)를 봐도 이해가 잘 안 되실 거예요. 근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요, 그렇게 이해 안 될 건 아니에요. 보세요. “맹자가 이르기를 공자님께서 동산(東山)” 여기 동산, 뒷동산 그런 게 아니고요. 한자가 안 들어가서. 한자 좀. ‘동쪽 산’입니다. 노나라(魯) 동쪽에 있는 산이겠죠. “동쪽 산에 올라가서” 태산(泰山)보다는 작은 거죠. 그러니까 올라가 가지고 이게 딱 보니까 노나라가 작아 보이더라는 거예요. 근데 태산에 올라가서 딱 보니까 천하가 작아 보이더라는 겁니다. 태산이 더 높으니까요. 여기 보니까 계단이 어마어마해서 일찍 포기했는데 케이블카가 있다고 하는데 언제 한번 우리 다 같이 ‘공자님 유적지 탐방’ 해서 곡부(曲阜)나 맹자 고향 추현(鄒縣), 이렇게 돌고 오는 코스가 있긴 하던데 가면 태산도 거기 코스에 있더라고요. 케이블카로 해서. 그렇게 되면 혹시 가서 천하가, 진짜 보면 계단이 까마득하게 올라가는데 예전에 왕들이 거기서 어떻게 제사를 지냈는지 모르겠는데 밑에 애들이 받치고 올라갔는지. “그러므로 바다를 본 자는, 이래서 바다를 본 자는 그만 못한 것을 물로 보기 어렵다.” 바다를 보고 왔는데, 이 뭐죠, 천(川) 보여 주면서, 강도 아니라 천급 보여 주면서 “어떠냐?” 하면 이건 뭐 물로도 안 보이겠죠. 바다를 본 사람이 한강만 봐도. 바다 보고 한강 보면 천지 차이인데 마찬가지로 성인의 문하(門下)에서 성인의 말을 듣고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 말 들어도 말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이게 말 같지가 않다는 거예요. 그렇죠?

목사 말 듣고

목사님, 여기 학당에서 다른 건 몰라도 자신하는 게 학당에서 한 반 년 노시면 목사님 말 못 듣죠. 왜냐면 “이게 뭐 말 같아야 이거 듣지.” 막 이런 마음이 생겨요. 아, 이거, 기독교에서 보지는 않겠죠? 여기까지 한 단락이 끝나요.

그리고 다른 얘기가 시작되는데, 중간에 좀 빠졌는지 갑자기 좀 생뚱맞은 얘기가 나오니까 이게 많이 당혹스러운 글이었는데 잘 읽어 보면 메시지가 분명해요. 왜냐면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갑자기 이 얘기가 나와요. “반드시 그 여울을 봐야 한다.” 여울이 이런 데예요. 물이 가다가, 폭포만큼은 아닌데요, 이게 뭐지, 급락하는 데, 약간 탁 떨어지는 데, 그러니까 물이 가다가 그 부분에 물살이 세겠죠. 한번 관절이죠. 그러니까 한 관절을, 가다가 탁 달라져요. 높낮이가 달라지면서 물살이 세지는데 “여울을 잘 봐야 한다.” 여기에 힌트가 있다는 거예요. 그 위의 얘기랑 좀 관련은 있는데 이게 어떻게 보면요, 따로 있던 글이 두 개가 좀 비슷하다고, 물을 얘기하고 하니까 이게 통하는 메시지가 있어서 갖다 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하나로 합쳐 놨는지도 모르겠는데, 중간에. 예전에는 이런 일이 많은 게요, 죽간(竹簡)에 쓰여 있기 때문에, 글이, 죽간을 막 이렇게 옮겨 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왜냐면 유사한 부분을 갖다 묶어서 내가 공부하기도 하고 막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어떨 때는 주(註)가 지금 경(經)에 올라와 있는 것도 많아요. 실제 『노자』도 그런 비판이 많아요. 누가 이 『노자』 죽간을 보다가 “어, 이 부분은 마음에 들어”서 자기대로 좀 더 풀어서 그 죽간을 더 넣어서 볼 수도 있잖아요. 근데 후대에 보면 이게 지금 어디까지가 경(經)이고 어디까지가 주석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원래 지금 원 『노자』는 요만한 분량이라면 지금 배 이상 불어났거든요.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많이 확장됐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가 막 『봉우수단기』 보다가 한문으로 막 몇 줄씩 더, 밑에다가 좀 더 써 놓고 해 버리면 이게 나중에 어디까지가 원본인지 모르니까 이렇게 이렇게 불어나는 거예요. 약간 그런 맛도 있어요. 근데, 보세요. 메시지는 좋아요. “해와 달에는 밝음이 있어서 빛을 용납하는 틈이 있으면 반드시 들어가서 비춘다.” “흐르는 물의 물건 됨이, 가득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다.” 말들이 다 좀 살벌하죠. 뭔가 와닿지 않죠. 근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뭔 말이냐면 햇빛은 틈이 하나만 있어도 들어간다는 거예요. 반드시 들어가고 끝나지, 안 들어갈 수는 없어요. 마찬가지로 물도, 흐르는 물도 땅에 파인 데가 있으면 그거 반드시 메꾸고 가야지, 메꾸지 않고는 못 나아가요. 그렇죠? 여울을 보라는 게 그거예요. 물의 한 관절이죠. 하나를 다 채워야 여울을 넘어서 다른 또 그다음 물로 향해 나아가겠죠. 그렇죠? 그렇듯이 “군자가 도에 뜻을 둠도 하나의 관절을 완성해야” 이 “불성장(不成章)하면 불달(不達)”이라는 걸 다 다르게 풀었어요. 이건 우리 식으로 푸는 거예요. “하나의 관절을 반드시 완성하지 않으면 통달하지 못한다.” 나아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풀어야 맞는다고 봐요, 지금 제 생각에는. 그 메시지잖아요, 앞의 메시지가. 이 얘기가 거기 왜 나왔냐? 보세요. 내가 성인의 말을 하도 듣다 보니까, 뭐 다른 분들이 막 설교하고 설법하는 걸 못 듣겠다고 해서 내가 성인의 경지가 된 건 아니죠. 그렇죠? 이 뒷부분이 보강돼야 앞의 게 살아요. 약간 다른 데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났던 대화 같은데, 이걸 하나로 엮어 놓은 사람 마인드는, 통한다고 보는 건데, 우리가 볼 때는 통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거 계제(階梯) 하나하나 관절 다 뚫어야 된다는 얘기예요, 밑의 얘기는. 대나무를요, 이거 안 뚫고 여기는 못 간다는 거예요. 눈앞에 있는 관절을 끝까지 가서 뚫고 뚫고 뚫고 해야 올라가는 거지, 그러니까 성인이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성인 되려면 결국에는, 움푹 파인 데가 있으면 물이 다 채워야만 나아가듯이 한 관절 한 관절 다, 지금의 미션을 다 공부해야 우리가 결국 갈 수 있다는 걸, 그러니까 앞의 얘기만 보고 아마 거만해질까 봐 밑의 얘기를 붙여 놓은 것 같아요. “그래도 너 계단 하나씩 올라가야지” 갑자기 2분 호흡 막 얘기 듣다가 “아, 내가 2분 3분 얘기 들었더니 20초 이런 거 하는 사람 만나면 시시해.” 그런데 본인은 정작 한 10초나 하고 있고 그러면 “너도 2분 가려면 그거 다 거쳐 가야지 하나도 건너뛸 수 있는 게 없다.” 하는. 이해되시죠? 그렇게 보면. 제가 그렇게 봐야 이해되는 것 같아요. 다른 식은 좀 이상하고, 풀이가.

실제로 이 성장(成章)이라는 게, 다산은 이거를 무슨 “임금 곤룡포를 아홉 장을 해 가지고 만들고” 뭐 이런 걸로 이해하는데, 이 장(章)자가, 보시면, 이게 원래는 이거예요. 이게(辛) 위로 이렇게 치솟아 오르는 거고, 말(曰)이라, 말을 갖다 밝히는 거예요. 실제 이 두 개가 합쳐진 거라. 보통 그래서 “내 뜻을 밝힌다.” 이런 거예요, 뭔가 확 확연하게. 그러니까 ‘밝음’ 이런 뜻인데, 이게 하나의 원 뜻인데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썼던 ‘한 관절’이라고 푼 거는, 이건 예전에 갑골문이나 전서(篆書), 이전의 그 뜻이고, 전서 이후로 오면 이게 이렇게 쓰여요. 여기가 음(音)이죠. 음악이죠. 10(十), 완성이죠. 10은 끝이거든요. 어떤 한 악보 중에, 한 악보가 끝날 때 장(章)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우리가 지금 이 의미를 쓰는 거예요. ‘밝다’라는 의미로 쓰는 게 아니고, 우리가 1장 2장 3장 할 때 챕터(chapter)로 쓰는 거예요, 지금 저 장을. 음이 하나가 끝났다. 음악이 하나가 끝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악보, 한 관절로 써요. 그래서 저는 이 뜻으로 푼 거예요. 장(章)을 ‘화려한 무늬’ ‘밝히다’라는 뜻으로 푼 게 아니고. 주자나 이런 분들은 이걸 ‘밝히다’라고 푼 거예요. “확 밝혀야만 우리가 뭐가 된다.”라고 했다면 저는 ‘한 마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그걸 다 완성을 시켜야 그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있다.” 이해되시죠?

「고린도전서」 한번 보세요. 제가 나중에 인용하려고 하나 해 놨는데 이 말이 참 멋있는 말이에요. 이게 우리 수행이 한 단계 한 단계가 나갔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할 수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저는 이 말이 항상 떠오르거든요, 점수(漸修)를 얘기하면. “업이 지워졌냐?” 업장이 하나하나 버려져야 되잖아요, 우리가 한 단계 나아갈수록. 이 느낌을 한번 잘 이해해 보세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완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이 부분은 아까 “태산에 올랐더니 천하가 작아 보이더라.”랑 통하죠. 그다음 뭐냐면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자, 어린이의 방식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이게 업장(業障)이 끝난 거예요. 우리가 초등학교 때 거 지금 안 하잖아요. 버려진 게 많죠. 그런 식으로 우린 계속 성장해 가고 있다고요. 이런 식으로 수행이 성인의 경지에 갈 때까지 똑같아요. 성인의 경지가 되면, 내가 뭐 7단이 되면 “5단 때 하던 거, 왜 내가 그때 그랬나 몰라.” 하는, 이렇게 하나하나 버려지면서 우리가 성장한다는. 여기서 더 완벽한 걸 향해 나아간다는 거. 그래서 성인의 문하(門下), 뭐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아 보이고”도 이런 사람이 누리는 경지라야 진짜지, 이렇게 한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내 게 안 되죠. 그래서 하나하나 버리고, 한 단계 한 단계를 이루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개가 만나야 말이 아름답죠. 앞의 말도 좋은 말인데 안고수비(眼高手卑)만 걸릴 수가 있죠. 앞의 것만 얘기 들으면. 그렇죠? 실제 나아가는 법을 써 놓은 거예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진짜 나아가야지.” 하는 거죠. 공자님은 이 경지를 나아갔기 때문에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아 보인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25절은요, 이것도 유명한 구절이죠. “맹자가 이르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善)을 행하는 이들은 순임금의 무리이다.” 맹자한테 요순은 거의 부처예요. 부처. 불경에서 부처님. 불교 같으면 여기 “닭이 울면 일찍 일어나 선을 행하면은 그 양반은 이 불도(佛徒)다. 부처님의 제자다.”라고 하겠죠. 그러니까 맹자한테 순임금은 아주 부처님만큼 존경스러운 성인이에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 행하는 이들은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도척은 춘추시대 때 아주 잔인했던 도적이죠. 사람 죽여서 날마다 회를 쳐 먹었다는 유명한 사람인데 『장자』에 보면 또 도인처럼도 나오고 막 그래요. 워낙 유명한 도척이라 이걸 가지고 우화를 많이 지어 낸 거예요. 유하혜(柳下惠)라는 성인인데요. 맹자가 성인으로 보는 사람 중에 하나예요, 유하혜가. 그 유하혜의 동생으로 나와요. 그래서 『장자』인가, 『장자』 예전에 보면 공자님이 유하혜한테 “동생 내가 좀 만나서 상담해 줄까?” 막 이러니까 유하혜가 “하지 마라.” 했는데 가서 얘기했다가 아주 깨지고 돌아오는, 도척한테. 도척이 아주 도를 아는 도둑같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주 잔인한 그런 도적인데요. 도둑의 대명사가 되니까 써 먹은 거예요, 그냥. 도둑의, 거의 우리 임꺽정처럼 대명사가 돼 버린 거예요. 아무튼 도척이라는 거 “순임금과 도척이 나뉘는 바를 알고자 한다면 다른 거 없다. 이롭냐, 선하냐의 차이다.” 똑같죠? ‘선하냐’는 대아적(大我的) 효율성, ‘이롭냐’는 이기적 효율성. 만약에 이 이로움이요, 천하에 이로운 거면 달라져요. 이건 대아적(大我的) 효율성이 되기 때문에 이거는 선이 돼요. 이거 잘 이해하셔야 돼요. ‘이롭다’는 그냥 악(惡)이 아니에요. 우리가 홍익인간이라는 거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건데, 그럼 그거는 악이냐? 그건 선이에요. 왜냐하면 널리 인간 모두한테 베푸니까요. 근데 좁게 “나한테만 이롭게 하겠다.”라고 하면 이거는 이제 악이죠. 아니, 그것도 악은 아닌데, 악이 될 소지가 너무 많죠. 그게 선을 위배하는 순간 악이 돼요. 이거예요. 제가 배가 너무 고파요. 그래서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 순전하게, 아주 순수하게 제 이익을 위해서 한 거예요. 물건을, 그러니까 음식을 사다 먹었어요. 근데 이게 동욱이 거였네. 그러면 이게 너무 배가 고파서 제 거 다 먹고 동욱이 것도 몰래 먹고 뭐, 그럼 이게 약간 달라지죠. 여기서부터는 악이에요. 왜냐하면 남한테 직접적 피해를 줬기 때문에. 그렇죠?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의 이익을 희생시켰죠. 이러면 악이 돼요. 안 그런 선에서 하면, 그러니까 이것도 결국 인의예지에서 나오는 거예요. 인(仁)을 넘어섰잖아요. 측은지심에 위배됐고 수오지심에 위배됐고 시비지심에 위배됐기 때문에, 사양지심에 위배됐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악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냥 내가 먹고 싶어서, 뭐 배고파서 먹는 거, 이것도 인심인데, 도심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죠, 그걸. 근데 크게 보면 도심 안에서 그걸 먹은 거죠. 남의 건 안 먹었으니까 나름 양심을 지키는 선에서 해결한 거예요. 그래서 양심을 지키는 선에서 인심을 해결하는 건 괜찮아요. 이건 성인들이 하는 거예요. 성인도 인심이 있기 때문에. 근데 소인들은 남의 걸 희생시켜, 그러니까 양심을 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실현하죠. 이 차이가 있죠. 얼마 했죠?

한 시간 5분이요.

한 15분 갈까요? 한 한 시간 20분? 30분? 스마트폰은 안 좋은 게, 꺼져요. 핸드폰들은 켜져 있었는데, 시계가. 조금만 더 하죠.

26절이요, 26절도 아주 재밌는 내용이죠. “맹자가 이르길” 양자(楊子)라는 분이 유명해요. 양주(楊朱)라고도 하는데요. 양주·묵적 그러면 맹자한테는 아주 지탄의 대상들이죠. 묵자(墨子)는 ‘묵(墨)’ 자. ‘먹 묵(墨)’ 자로, 묵형(墨刑)을 받아서, 묵형 그러면 뭐 이렇게 예전에 얼굴에다 뭐 새기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하는데, 양자(楊子), 이름은 주(朱)고요, 그래서 양주(楊朱) 그러고 이건 묵적(墨翟) 그래요. 이름이에요, 이거는. 적(翟). 자(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잖아요. ‘양 선생님’ ‘묵 선생님’이란 뜻이고요. ‘자(子)’는 좋은 의미로 쓸 때는 이거죠. 우리가 예수님이 인자(人子)라고 하듯이 ‘사람 아들’ 할 때 사람의 아들이 뭐 별로 좋은 건 아니죠. 사람도 아니고 사람의 아들이 그렇긴 한데 그때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이 자(子)는 좋은 의미예요. 그냥 단순한 아들이 아니죠. 되게, 뭐냐면 어떤 화신(化身) 정도. 되게 잘 구현하고 있는 사람을 뜻해요. 아주 잘난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아들도 그냥 아들이 아니라 남자 중, 그러니까 이 자(子) 자를 붙여 주는 것도요, 아주 그, 우리가 천자(天子) 그럴 때도 그렇고 ‘하느님의 아들’ 근데 단순한 아들이 아니죠. 하느님의 뜻을 잘 대변하는 사람을 말하죠. 그러니까 자식이라는 게 그런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내 뜻을 잘 계승해서 훌륭하게 표현해 주는 사람.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살았으면.” 했던 거를 아주 잘 구현해 주는 사람을 말하고요. ‘천자’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잘 구현한 아들. 약간씩 뉘앙스는 다르지만 이렇게 우리가 군자(君子) 할 때도 그래요. 임금(君) 노릇할 정도의 어떤 그런 사람이에요. 임금의 자식이라는 건 아니고, 임금 노릇할 정도의 그런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뜻해요. 그러니까 훌륭한 자식이라고, 자식, 훌륭한, 사람으로서 되게 훌륭한 존재를 뜻할 때 자(子) 자를 붙여 줘요. 그러니까 양주·묵적인데, 이 두 개가 아주 극단적으로, 왜 이걸 같이 쓰냐면요, 맹자는 중(中)을 잡고 싶어서 그래요. 둘이가 중(中)에 어긋난 양극단의 대표자들이에요. 양자(楊子)는 『열자(列子)』에 나와요. 『열자』에 「양주」편이 있어요, 아예. 그러니까 이 사람도 나름 대학자인데 평생 주장했던 게 뭐냐면 위아(爲我). ‘위할 위(爲)’ 자, ‘나 아(我)’ 자. “명예고 뭐, 명예 지키다가 죽는 것보다 내 생명이 소중하다.” 그러니까 이 생명이요, 이 사람들도 나름 학자니까 애먼 게 아니라 자기 정기신(精氣神)이에요. “내 정기신 손상 입히는 짓은 절대 안 하는 게 옳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름 이해는 되죠. 정기신이 워낙 귀한 줄 아니까 내 정액 내 기운 내 정신 내 터럭 하나도 다 내 정기인데 “이거 뽑아서 천하를 위한다고 해도 난 안 하겠다.” 천하보다 내 정기신. 천하의 인민을 위해 내 거 쓸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런 분들은 나름 마인드가 그런 게 있었겠죠. 천하는 좀 환(幻)이라고 봤겠죠. 거짓된 거. “내 정기신만이 정말 소중한 거고 내가 이걸 잘 지켜야 한다.” “천하도 각자 알아서 다 그렇게 해라.” 이거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라.” 그래서 천하 일로 막 명예, 명예, 뭐 충신이란 말 얻으려고 막 헛되이 죽고 이러는 거 아주 싫어하는 거예요, 이게. 명예, 뭐. 요즘은 이런 분들 많이 있죠? 내 거 지키는. 근데 단순하게 내 거 지켰으면 학자는 못 됐겠죠. 근데 학자 정도 대접받으려면 나름 논리가 있어요. 이런 논리를 세웠어요. 묵자는 정반대, 겸애(兼愛). 이 겸(兼) 자가 벼 두 개를 손으로 쥔 거예요. 이렇게. 그렇죠? 이걸, 손이 이렇게 포크인데, 이렇게 해서 ‘벼 화(禾)’ 자 두 개를 이렇게, 삼지창으로 이렇게 내 거로 하는. 사랑(愛). 사랑은 이렇게 손이죠. 손. 원래 이렇게 물건을 주고받는 건데요. 이쪽도 손. 삼지창은 다 손이거든요. 근데 여기다 ‘마음 심(心)’ 자 하나를 더 써 가지고 ‘마음 심(心)’ 자가 없으면 ‘받을 수(受)’ 자고 ‘마음 심(心)’ 자를 넣으면 마음을 주고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건 마음을 주고받는 건데. 겸(兼)해서 사랑하니까요, ‘나와 남을 똑같이 사랑한다’예요. 묵자랑 맹자랑 차이는, 맹자는 “내 가족은 나한테 은혜가 더 있기 때문에, 더 깊이 해 줘야 되고, 백성들한테는 그만큼 해 주고,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는 그만큼 해 주는” 거예요. 같은 사랑이지만 상황에 따라 표현이 달라야 된다는 입장이고, 묵자는 달라요. 무조건 똑같은 사랑이에요. 아버지나 길 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대해야 된다는 거예요. 다 사랑해요.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게 양극단이에요. 묵자는 너무 사랑이 지나치고, 양주는 너무 자기 사랑이 지나치고, 묵자는 너무 남 사랑이 지나쳐요. 그래서 이 중간에 답이 있겠죠, 도가 있으면. 그거예요. 그래서 “양자는 자신만 위하여, 취하여, 터럭 하나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더라도 이를 하지 않았다.” 이 말은 좀 극단적인 사례겠죠. 꼭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는 얘기 안 했을 텐데, 그 사람 주장을 밀고 나가면 이렇게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맹자가 볼 때. “묵자는 똑같이 사랑함을 주장하여 천하를 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이거 아주 유명한 문장이에요. “정수리를 갈아서 발끝까지 대더라도 한다.” 「묵공(墨攻)」이라는 영화 보면 아시겠죠? 남의 일이잖아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에요. 남의 성 가서 도와주겠다고. 묵자가 추진한 일, 묵자의 『묵공』 만화에도 잘 나오지만, 영화나, 조직이 하던 일이, 전쟁이 나는 곳이 있으면 약자 편 가 가지고 막 가서 도와주는 거. 그래서 전술이나 이런 기계들이 많이 발달돼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실제로. 소규모로 가 가지고 대군들하고 싸울 때 도와야 되니까, 단순하게 병법만이 아니라 그런 어떤 무기나 이런 것도 연구를 많이 한, 집단도 독특한 집단인데 그런 걸 연구하는 집단이에요, 강력한 하느님 사상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지도부부터 저 아래까지가 저기 예전에 사회주의 하는 거랑 똑같아요, 공산당 하는 거랑. 집중제예요. 저 맨 리더만이 하느님하고 통해요. 그러니까 리더가 “하느님한테 이렇게 들었다.” 하면 그게 밑으로 상명하달이에요. 완벽하게 위랑 아래는 똑같아야 된다는 주장이에요. 말단 세포부터 심장까지는 하나로 움직여야 된다는. 그래서 강력한 전제적인 조직이에요. 근데 목표는 겸애(兼愛)예요. 그러니까 사랑으로 뭉친 아주 무서운 집단, ‘템플 기사단’ 뭐 이런, 이런 나름의 아주 종교적이고 아주 광적으로 될 정도로 그런 신앙이 있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조직이었어요. 이해되죠? 그래서 묵자 쪽의 조직은 『묵공』 거기 나오지만 겸애예요.

근데 이제 자막(子莫)이라는 노나라 현자가, 이 두 개가, 아무래도 이 두 개가 극단이라는 건 티가 너무 나잖아요. 그래서 절충 “나는 중(中)을 잡겠다.”라고 집중(執中) “나는 이 중에 이 가운데, 나를 위하는 것과 남을 위하는 것의 중을 걷겠다.”라고 주장했는데 “그것도 중심을 붙잡았다는 주장은 도에 가까운데” 들어 보면 사실은 그 사람도 “저울질함이 없이 오직 하나만 붙잡는 거랑 똑같다.” 오로지 중만 붙잡고 있다는 거예요. 딱 중을 하나 정해 놓고 이것만 지키면 된다는 거. 근데요, 이거랑 똑같아요. 여기의 중심은 여기 같죠? 근데 어떨 때는 여기, 이게 중심이 될 수도 있고, 이게 흔들릴 때는 자꾸자꾸 중심을 옮겨야 되겠죠. 만약에 이게 가만히 고정돼 있다면 여기겠지만, 실제 현상계는 진공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게 이렇게 쏠리면 이때는 이리 옮겨 줘야 되고, 중심을, 계속 옮겨 줘야 돼요, 이걸 균형을 잡으려면. 그래서 현상계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순간순간 인의예지가 귀신같이 막 돌아가야 돼요, 계산이. 이거는 처음에는 어렵지만 인의예지가 점점 정밀해지다 보면 바로바로 균형이 나온다고요, 이때는 이렇게. 이게 ‘저울질’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무게를 재다 보면 이쪽이 무거워지면 이쪽으로 좀 옮겨 주고, 옛날 저울은 옮겨야 되죠, 중심을. 자꾸 중심을 옮겨야만 해서 두 개가 딱 맞는 중심을 찾아 내면 그게 값이 되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저울질하는 게 없다면 이것도 역시 하나만 붙잡는 거랑 똑같다.” “난 가운데만 붙잡겠다”고 한 것도 똑같다는, 잘못되기는. 그래서 요즘에 딱 통할 말이죠. “난 하나만 붙잡는 게 진짜 밉다.” 맹자는 밉다는 거예요. 미워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거죠. 왜냐? “도의 적이 된다.” 도의 적이 왜 되냐? “하나만 일으키고 100가지를 없애기 때문이다.” 이게 ‘빠’들의 문제점이에요. 빠들이 지금 이거예요. 하나에 꽂혀 버린 사람들은 “우리 예수님 외에는 뭐, 부처님 뭐 아 그건,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부처님은 사람인데 어디.” 이렇게 돼요, 이렇게. 성인이 다 “성인들은 그래도 인류 중에 참 화려한 꽃을 피우신 분들이니까 다 배울 게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접근하는 게 아니라, 딱 하나에 꽂히면 나머지는 싹. 그러니까 하나에 눈이 이렇게, 시야가 좁아져 버린 사람들은 도의 도적이 되기 때문에 “나는 너무 밉다”는 거예요. 강력한 수오지심을 표현합니다. “밉다, 나는.”

이 맹자의 행동도 잘 보세요. 이 표현도, 감정도, 인의예지에 지금 맞게 돌아가요. 이 “밉다.”가 맹자의 사사로운 미움이었다면 이건 인의예지에 안 맞죠. 그렇죠? 이 미움이 우리가 봐도 “공정하다.” “맞다.”라고 싶으면 시비지심에 맞을 때는 우리의 공분(公憤)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분노한 게 공분인지 나의 사사로운 분노인지, 그게 일어날 때 잘 보라고요. 그래서 너무 개인적인 것 같으면 좀 이렇게 죽일 줄도 알아야죠, 깨어서. 공분일 때는 막 내가 불탈 필요는 없죠. 감정이 격해서. 감정이, 공분이라 하더라도요, 사단(四端) 중에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거기에 내가 너무 휘둘리면 그때부터는 안 좋아요. 선생님이 제자를, 사랑의 매를 때리겠다고 들었는데 때릴수록 화가 나기 시작하면서 “아, 이건 됐고” 하고 이제 뺨 날아가고 막 발차기, 복장지르기 날아가고 하면 그때부터 이거는 아니죠. 출발은 사단인데 잘못될 수도 있어요. 마음챙김이 실패했을 때. 분노가 분노를 낳거든요. 그러니까 특히 왜 ‘사랑의 매’ 이런 게 중요하냐? 그러니까, 어렵냐면, 기쁨은 기쁨을 낳고 분노는 분노를 낳아요. 그러니까 분노를 일으켜서 뭔가 일을 할 때에는 정말 깨어있어야 돼요. 이 분노가 함부로, 불이 함부로 붙지 않도록. 교사 하다가 성질 버린 사람들 많이 있을 겁니다. 처음에 사랑의 매를 때리다가 점점 자기가 주체 못 할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우리도 뭐 이렇게 애나, 우리가 동생이나 후배 가르칠 때도 그렇잖아요. 가르친다고, 좋은, 선의의 충고였는데 확 내 가슴을 덮게 하는 어떤 반응을 맞이해서 확 타오르면, 그때부터는 공분이라고 하기 좀 힘든 영역까지 간다고요. 선생님들이 특히 이렇게 많이 하니까 지금 매를 아예 근절시키자고 나오는 것, 그것도 참 좀 이상한 발상이고, 두 개의 딱 중(中)을 잡는 게 좋죠. 각자가 자기의 양심을 밝혀서. 왜냐하면 그냥 없애 버려서는 일이 돌아가지 않으니까. 대안을 내 놓고 없애야 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때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잘 가르치는 게 목적이니까 거기에 도움 되는 대안이 있다면 하면 되죠. 그러니까 대안이 없는데 만약에 일방적으로 무장 해제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이것도 사단으로 보면 다 따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단이 기가 막힌 게, 자명한 거, ‘옳고 그름’ 해서 자꾸 따져 가면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도 다 판단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하나하나 잘 따져 가 보시면. 됐죠?

그러니까 다산은 이거를, 양주를 너무 욕하는 걸 아주 싫어했어요. 왜냐면요, 다산은 “양주가 뭐 거기까지 갔겠냐? 묵자도 인(仁) 아니냐?” 그러니까 양주는 의(義)에 가깝고. 이게 다산 선생님 생각인데, 맞는 얘기예요. 나한테 관심을 쏟는 거니까, 보세요, 의(義) 자가 이거예요. ‘나 아(我)’ 자에다가 ‘아름다울 미(美)’, ‘선할 선(善)’ 자의 뿌리가 된 양(羊). 그러니까 나를 아름답게 하는 게 선이고 “양주가 의(義)에 좀 지나쳤지. 의에 과했지.” 묵자는 남과 나를 똑같이 보는 게 인(仁)이잖아요. “인이 좀 과했지. 그래서 인과 의의 중만 잡으면 되지. 좀 너무 과하게, 이건 맹자가 약간 말할 때 더 극단을 가 봤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써 봤지.” 하는 거죠. 실제로 이런 부분이 있어요. 중을 잘 잡는 분은 어떤 때는 양자의 모습을 할 때도 있어요. 『중용』이나 『맹자』에도 나오죠. 독선기신(獨善其身) 그러죠. 어떤 때는, 『중용』에도 나오잖아요. “세상을 피해 은둔해도, 은둔해서 세상이 날 몰라 줘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사람은 성자라야 가능하다.” 『중용』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그 얘기는 지난 시간에 했죠, 그건. 뭔 얘기냐면 어떨 때는, 무도(無道)한 시절에는 도를 지키기 위해서 또 어떤 위아(爲我)의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근데 위아가 아니라 위도(爲道)죠, 사실은. 도를 위하는 과정에서 겉으로 볼 때는 딱 자기만 지키겠다는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어요. 독선기신, “나 하나, 일단 나 하나라도 선하게 하자.” 할 때가 있고, 때를 만나면 겸선천하(兼善天下) 천하에 도를 펼치기 위해서 천하를 돌아다닐 때도 있고요, 공자님처럼. 안자처럼 그 누추한 거리에 혼자 앉아 도 닦는 사람도 있고. 어떤 때는 수레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순임금처럼 아예 임금이 돼 가지고 다스려야 할 때도 있고. 같은 도인데 맛이 다 다르죠, 때에 따라서. 그러니까 중(中)을 잘 잡는 사람은 이렇게 천변만화해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아까 자막처럼 딱 하나를 고정해 가지고 “적당히 남 위하고 적당히 나 위해서 살면 이게 도.” 이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해되죠? 시간이 됐나요?

한 시간 20분 했는데요.

그런가요? 27번까지만 하고 그냥 끝내죠. 28번부터는 다음 주에 또 하죠, 뭐. 너무 많이 하면 소화 안 돼요. 27번 안 어려워요. 근데 되게 중요한 얘기예요. 우리가, 공부하는 분들이 들으면, 마음공부하는 분들이 좀 들을 만한 말인데, “맹자가 이르기를 굶주린 자는 먹지 말아야 할 것도 달게 먹고 목마른 자는 마시지 말아야 할 것도 달게 마신다.” (예를 들어) 이게 썩은 물이에요. 근데 너무 목마르니까 제가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고여서 썩은 물도 막 욕심 나더라고요, 실제로 갈증을 느끼니까. “왠지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 이게 맹자가 지적한 상황이에요. 너무 몸이 위기에 몰리면 그거라도 먹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흙탕물이라도. 그래서 먹어 버렸단 말이에요. 그럼 이거는 음식의 올바른 도가 아니죠. 몸을 원래 배양하려고 먹는 건데 몸을 해치는 걸 먹어 버렸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을 다시 자세히 보면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를 입혀서” 이렇게 된 거라는 거예요. 눈에 뭘 씌워 가지고 일어난 일이라는 거예요, 이게. 그렇죠? 흑막을 내려서 일어난 일인데, 이 해를 어디다 많이 입혔냐? 입과 배에도 입혔어요. 입도 썩었고 배도 썩겠죠, 먹으면. 근데 몸이 썩는 것도 그렇다 치고, 문제는 마음까지도 해를 입혔다는 거예요. 헛것이 보여서, 그게 좋아 보였으니까. 눈도, 마음이 뒤집힌 거죠, 한 번. 우리 저혈당 증세 오면 이게 마음까지도 초조해지고 흔들리죠. 사물에 휘둘려요, 너무 배고파서 후달리게 되면, 팔다리가. “사람이 능히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로움을 마음의 해로움으로 삼지 않는다면 남에게 미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말이 좀 어려운데 이해돼요? 몸이 이렇게 후달릴 때 딱 깨어 가지고 마음을 붙잡아서 마음에는 절대 해가 입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언제 남에게….” “왜 나는 좀 모자랄까?”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부 아주 잘하고, 잘할 사람이다. 남한테 “왜 공부가 나는 남만 못하나?” 이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잘될 거다.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게 단순히 기갈(饑渴)만 그런 게 아니겠죠. 맹자 예전의 논리 있잖아요.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 그거 보면 비슷한 논리예요. 일반 사람은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정신까지 휘둘려서 먹지 말아야 할 돈 막 이렇게 먹어 버린다는 거예요. 그렇죠? 남의 거. 그러니까 사흘 굶어서, 뭐죠, 안 훔치는 사람이 없다고 그러면 사흘 굶어서 도둑질을 나서면 이게 그 마음까지도 이미 썩어서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맹자는. 몸 썩은 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썩어 버렸다는 거예요. 양심이 좁혀지고 인심으로 꽉 차. 그래서 이럴 때 할아버지, 그때 봉우 선생님 「영육합일론」 그때 올려 놓으신 것도 이 얘기죠. 그때 말씀드렸던, 어떤 청년이 질문하니까 할아버님이 “몸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몸의 괴로움을 정신의 괴로움으로 오해하지 마라. 정신은 행복할 수 있다. 그랬을 때 몸의 고통도 중화된다. 서로 하나이기 때문에 정신의 행복이 는 만큼 육신의 고통은 줄어든다.” 이런 식의 합일론을 주장하세요. 이해되죠? 우리가 그거예요. 이렇게 행복, 내면에 희열이 올라오면, 깨어있음으로 인해서, 깨어있음 아니고는 이거 못 이겨요. 깨어서 희열이 올라오면 잠시 몸의 고통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 관리를 못 하면 물욕에 계속 지게 되죠. “일반 사람은 이러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선비나 군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항산이 없을 때 항심이 없는 사람은 일반 사람이지만,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지키는 자는 선비다.”라고 그때 한번, 우리가 처음 『맹자』 읽을 때 읽었죠. 선비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이렇게 한번 참고해 보시죠.

예, 오늘 27절까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