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6강
| 강의일자 | 2010. |
| 게시일자 | 2016. 07. 06. |
| 동영상 길이 | 1:07:13 |
| 강의 중 인용 도서 | 맹자, 중용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nBcZxkjOG2k |
28절이죠. 맹자가 말했다. “유하혜柳下惠는 삼공三公의 벼슬로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짧죠. “유하혜柳下惠는 불이삼공不以三公으로,” ‘이(以)’자(字) 나오면요, 이(以)자가 나오면 지금 ‘써 이(以)’자 나오면요, 이게 지금 우리 ‘쓰다’라고 똑같이 쓰시면 돼요, ‘쓸 용(用)’자로.
번역할 때 ‘뭐뭐로서~’ 하는데, 이 ‘~로서’가 이렇게 사용이죠, 용(用). 이게요, 글자의 원형을 보면 이거죠. 삽 들고 일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삽이나 그런 농기구를 들고 밭에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쓰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쓸 용(用)’자랑 같아요. ‘쓸 용(用)’자는 이게 담이죠. 목장에 이렇게 울타리 만드는 거예요. 울타리를 만들어서 다른 동물들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그런 데에 이제 쓴다는 거고요.
이거 농기구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제 둘 다 의미하는 건 다른데 같은 뜻으로 쓰여요. ‘쓰다’ 고대에는 이게 되게 중요했던 거죠, 울타리나 어떤 농사를 짓는 게. 가축을 보호하거나 아니면 이제 우리 가족을 보호하거나, 농사짓는데 이제 뭔가를 ‘쓰다’ 하는 뜻으로 쓰이죠.
여기서도 이제 “삼공三公의 벼슬을 써서” ‘뭐뭐로서~’ 삼공의 벼슬을 가지고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이게 이제 절개죠. 요 글자는 원래 이렇게 사람이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에요. 갑옷을 앞뒤로 이렇게 딱딱한 갑옷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낄 개(介)’자 ‘중개사’할 때, 여기 ‘사람 인(人)’자 더 붙이기도 하고 안 붙이기도 하는데 같은 뜻이에요. ‘중개하다’ 갑옷 사이에 몸이 낀 거랑 그런 의미에서는 ‘낄 개(介)’자로 ‘끼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끼다’·‘중간에 끼다’·‘중개仲介하다’. 2:31
근데 이 갑옷이 이게 딱딱하잖아요? ‘딱딱하다’나 ‘굳은 절개’를 상징하는 뜻으로도 쓰여요. 이게 이 경우는 절개죠. 갑옷 사이에 끼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절개.
“삼공三公의 벼슬로도 절개를 안 바꾼다” 요건 내용은 별 게 없으니까. ‘삼공三公’이 뭔지 알아야 되는데, ‘천억으로도 안 바꿨다’ 이러면 대단한 것 같이 보이는데 이제 ‘삼공’이 뭔지 모르면 이게 별로 안 와닿겠죠. ‘삼공’은 이제 옛날에 주나라 때 주례에서 유래한 건데, 조선시대로 치면 삼정승이죠. 정승급들이에요. 최고 반열의 벼슬이에요.
임금 바로 아래, 역할이 정승이랑 겹치기도 하고, 아주 명예직으로 될 때도 있고요. 역사상 위상은 계속 변하는데, 이 세 개입니다. ‘태사太師’라고 하고요. 태사. 이건 임금 가르치는 선생이에요. 강태공이나 이런 사람들이 태사였죠. 태사. 선생님 역할을 하던 분이고요.
‘태부太傅’ 거기 제가 ‘주’ 해놓은 거 없나요? 태부太傅, 이 사람은 이제 임금의 덕을 보좌해 주는 사람, 스승 역할이라면 좀 한 단계 아래죠, 덕은. 임금이 덕을 잘 베풀게 옆에서 계속 도와주는 보좌 역할을 해줍니다.
그다음에 ‘태보太保’, ‘보호할 보(保)’자죠, 이거는. 이건 ‘펼칠 부(傅)’자라 덕을 펼치게 도와준다는 거고요. ‘부(傅)’자고, ‘사(師)’자고, 이거는 ‘보(保)’자죠. 보(保)는 몸을 보호해 주는 거죠. 경호. 그러니까 임금의 신체를 보호해 주는 걸 목적으로 해서 이 사람들을 ‘삼공三公’이라고 그래요. 4:21
그래서 삼공이면 옛날 아주 임금 바로 아래, 실제 그 조선시대에는 삼정승, 그러니까 최고의 벼슬을 말해요. 유하혜한테 삼공 벼슬을 줘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선비의 지조를 꺾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4:41
그러니까 절개라는 거는 마음에다가 이렇게 단단하게 새겨둔 거죠. 아까 딱딱한 갑옷처럼 내 마음 안에 내가 이 『맹자』에서라면 그 ‘인仁’과 ‘의義’겠죠, 절개가. ‘인과 의를 지키겠다’하는 게 하나의 곧은 절개인데 이게 벼슬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앞서 사례에 그런 게 있었죠. 인의예지를 막 닦으면서도 벼슬을 내내 내심으로는 구하고 있고, 벼슬 주면 바로 절개를 버리는 이런 막장 선비들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이제 유하혜는 『맹자』의 앞부분에 보면 이제 거의 성인급으로 나오는 분이니까요. 나중에 또 나올 겁니다. 지금 저희가 뒤에서부터 하니까 앞에 유하혜가 또 성인으로 나오는데 백이·숙제랑 더불어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요.
29절 공부할 때 아주 중요한 절인데요. 맹자가 이르기를 “함이 있는 자는” 뭔가 함이라는 건 실천이죠. 공부를 ‘한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뭔가를 하는 걸, 이제 자기가 하는 걸 ‘위자爲者’라고 합니다. 위자爲者.
『맹자』에 나온 내용인데요. 앞에 나오겠지만, 안자가 한 유명한 얘기가 있어요. 유위자有爲者, 뭔가 함이 있는 자. 이건 ‘있을 유(有)’자고요. ‘있을 유(有)’자는 이겁니다. 이게 이게 손이고요. 제 강의를 계속 들으신 분은 이제 이게 손이라는 거는 그냥 아시겠고, ‘또 우(又)’자, ‘또 우(又)’자는 손이고요, 손에다가 이렇게 고기를 그립니다. 이게 고기 결이 있죠, 고기결. 6:06
이제 이거는 ‘고기 육(肉)’자죠. ‘고기 육(肉)’자를 ‘달 월(月)’변으로 쓸 때가 있죠. 이게 지금 다른 모양으로 변했지만 사실 ‘고기 육(肉)’자에요. 손에 고기 들고 있는 거예요. 고기 생겼다는 겁니다. 예전에 고기가 제사 지낼 때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고기가 있냐’하는 게 되게 중요한 겁니다.
또 이게 ‘있을 유(有)’자가 되는데 이게 이제 ‘있다’, ‘함이 있다’는 건요, 안자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순임금은 누구고 나는 누구인가? 유위자는 이와 같다.” 공부를 계속하는 자, 하고 또 하는 자예요. 뭔가 이렇게 작作을 하는 거죠. 6:46
봉우 선생님 말씀에 “행하고, 행의 어떤 결과를 내면 작作” 행을 해서 행의 결과물로 뭔가 작품을 자꾸 짓는 자, 행위를 해서 뭔가 자꾸 만들어낸 자를 이제 ‘유위자有爲者’라고 하죠. 뭔가를 하는 자. 그래서 공부하는 자는 이게 계속 도를 배워서 그걸 날마다 실천하는 자는, 실천하면서 뭔가를 자꾸 만들어내는 자는, 우리가 이게 명상하는 것도 실천이에요.
명상하는 것도 실천이고, 뭔가 책을 공부하고 있는 것도 실천이지만, 제가 우리 수련의 다섯 기둥이라고 노래하는 존심(存心) 마음 챙기고, 양기(養氣) 기운 기르고, 궁리(窮理) 사물의 원리를 하나씩 알아가고, 역행(力行) 알아낸 건 꼭 실천하고, 그다음에 우리가 이제 홍익인간(弘益人間) 내가 받고 싶은 걸 가지고 남한테 먼저 해주고, 내가 당해서 싫었던 거를 남한테 가하지 않고. 7:38
이것만 잘 지키면요, 이게 우리 선악善惡은 여기서 다 나와요. 선악은 어렵다고 하는데요, 선악은 절대 안 어려워요.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한테 베풀지 마라’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네가 받고 싶은 걸 먼저 해줘라’라는 거 이것만 알면 인간은 절대 선악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당한 피해자일 때는 선악을 명쾌하게 가르다가요, 가해자가 되면 선악을 항상 잃어버리죠. 그러니까 결국은 맹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우리가 선악을 못 가르지 선악은 항상 자명해요. 8:22
우리가 도로 달릴 때 ‘차가 차선 지켜야 한다’ 이거 모르는 사람 없는데, ‘신호 지키고 차선 지켜야 한다’ 이건 아는데 우리가 급할 때는 어길 수도 있죠. 생사가 위급할 때는 어길 수도 있는데 어겼다고 해서 그게 법이 아닌 건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흔히 꼭 선악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법률화가 안 돼 있으니까 필요에 따라 어기게 됐어도 더 급한 게 있어서 어겼다 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자꾸 법을 모호하게 흐려버리려고 그래요. “선악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교통 법규만 해도 우리가 분명히 더 급한 경우에는 어길 수도 있지만, 어겼다 하더라도 어긴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히 뭔가가 날아올 거고, 내가 생명 때문에, 우리 아내가 애를 낳으려고 그래서 교통 법규를 어겼다 하더라도 어긴 만큼은 분명히 국가에서 세금 내라고 올 거고, 내면 끝나는 건데, 자꾸 “나는 이게 선인지 악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나가는 거는 이해에 눈이 뒤집힌 거죠. 동물 차원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이해만 따지는. ‘법이냐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따지지 않고.
그래서 불법·합법 가르는 건 쉬워요, 선인지 악인지는. 내가 하는 행위로 인해서 누군가가 피해를 보고 고통을 봤다면 악惡인 거죠. 분명히 그 부분만큼 악이고 그 부분만큼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자기 욕심에 너무 눈이 이제 내가 가질 게 너무 많이 보이면 선악이 꼭 없는 것처럼 얘기를 해요. “선악이라는 게 어려운 것 같다” 9:43
요즘 책으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그런 딜레마에 자꾸 빠뜨린 내용들을 많이 얘기하는데, 어려운 얘기 하면 그게 어려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 좋자고 남한테 피해주면 악惡이고, 나와 남이 다 사는 방향으로 가면 선善인데요. 이게 아주 불변의 법칙이에요.
이거는 인간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양심으로서 자연법이기 때문에, 법의 기초는 ‘자연법’이거든요. 양심을 ‘자연법’이라고 그래요, ‘자연에 원래 존재하는 법’이라고 그래서. 자연법은 역지사지만 해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선인지 아닌지. 그래서 우리가 이거를 하자는 게 ‘홍인인간’이에요. 이걸 매일 실천하면 우리는 날로 밝아지고 선해져요. 자기가 한 행위가 우리가 선악을 가르는 게 어려워서 힘들진 않아요. 10:29
‘선 중에서도 어떤 게 더 최선일까?’를 알고 싶어서 어려운 거지, 선악 자체는 쉬운 거죠. 근데 선악 자체도 힘들다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큰일 나죠. 분명히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도 그게 악인지 모르는 건 심각한 거죠. 그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이 ‘유위자有爲者’라고 돼 있는데 이 ‘위(爲)’자는, 보세요! 이거예요. 이것도 손이죠? 아무튼 이런 거 나오면 다 손으로 아시면 돼요. 손이죠. 이 밑에 거는 발이 네 개 달렸죠? 어떤 동물인지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돼 있고 몸통이, 대가리가 이렇게 돼 있고. 11:11
이게 코끼리예요. 코끼리를 갖다가 손으로 잘 인도하는 걸 우리가 ‘할 위(爲)’자가 거기서 나왔어요. 뭔가 한다는 게요, 코끼리를 갖다가 우리가 손으로, 코끼리도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면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잖아요. 코끼리를 갖다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조련사가 부리는 모습에서 우리가 ‘할 위(爲)’자가 나왔어요. 11;29
뭔가 한다는 게 이제 ‘코끼리 부린다’하는 거에서 예전에 관념에서 나왔어요. 공부하는 것도 아무튼 저렇게 큰 코끼리도 이렇게 저렇게 마음대로 부리잖아요? 뭔가를 이렇게 자꾸 하는 것도 그렇지만 큰일도 할 수 있고, 우리가 요령을 알고 잘 덤벼서 해야 하는 거죠, 이 위(爲)라는 거는. 인간이 뭔가를 계획을 세워서 잘하는 걸 말해요. 계획을 세워서, 이거 다 하는 거예요. 존심存心도 하는 거고, 존심도 뭘 해야 하는지 요령을 알아서 그걸 해보는 거고요, 실제로. 이렇게 돼 있죠. 12:03
근데 “함이 있는 자는 우물을 파는 거랑 같아서” 이거를 이제 알아두시면 좋죠. “우물 파는 거랑 같아서 아홉길이면 꽤 깊이 팠는데도 샘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지한다면” 그렇죠. “불급천不及泉” 천泉에 미치지 못한다면, “거기서 멈춘다면 이는 우물을 버리는 거랑 같다.”
이해되시나요? 말을 하자면 공부하다가 포기하면 안 되겠죠? 어떤 임계점까지 못 갔다고 임계점 직전에서 포기하면 결국은 그걸 다 날린 게 된다는 거죠. 이게 우물인데 땅을 아홉길을 팠는데 여기에 지금 물이 있는데요, 여기까지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못하고 멈추면 이거는 우물 하나를 날려버리는 거니까 공부할 때 이런 마음으로, 지금 제가 공부하다가 요즘 왜 공부가 통 안 되는 것 같다, 약간 존심·양기·궁리·역행·홍익인간이 다 실천이 지지부진한 것 같다 하더라도 더 힘을 내서 결국은 맛을 보고 끝내야지, 중간에 포기하면 안 하니만 못 하게 되는 거죠.
여기서 지금 우물을 팔 때, 한자가 비譬로 나와 있죠. 비약굴정譬若掘井, 한자를 다 볼 필요는 없는데, 이번에는 내용들이 이렇게 짧은 게 많으니까 한자 공부 좀 해보고요. 이게 ‘비유하다’로 쓸 때도 있고, ‘피’로 쓸 때도 있는데요, ‘벽’이라고 쓸 때도 있고. 요놈이 발음이 여러 개로 불려요. ‘피’라는 발음도 가지고 있고요, ‘비’라는 발음, 원래 이제 ‘벽’이라고 많이 쓰죠. ‘임금 벽(壁)’자. 원래 ‘임금 벽(壁)’자인데 ‘비유하다’는 뜻으로 지금 방금 쓰였죠.
‘피하다’는 뜻으로 ‘피할 피(避)’자로도 쓰여요. 이거 이 두 개는 좀 이제 응용이죠. 실제로는 ‘임금 벽(壁)’자인데 이게 우리가 ‘주검 시(尸)’자는 사람 모습이에요.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있는 거 있죠? 사람이 몸을 이렇게 말고 있는 게 우리가 이제 이 ‘시(尸)’자인데, 이 경우는 좀 더 살벌해요. 14:4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목이 아래에 있어요. 여기 옆에 있는 ‘매울 신(辛)’자가 매운 맛을 보여준다는 게 이게 칼이에요, 원래. 이렇게 생긴 칼이에요. 원래는 이렇게 그리죠. 이게 ‘매울 신(辛)’자예요. 이 칼을 갖다가 이제 이 부분이 하늘로 솟구친다고, 여기에다 하늘을, 위를 상징하는 이 글자를 갖다가 점 하나를 더 찍어서, 이게 하늘로 향하고 있다라고 해놓은 건데요. 칼이에요. 14:42
칼로 목을 친 거예요. 그러니까 엄한 임금이나 법을 말해요. ‘지엄한 법’ 무서운 법이죠. 그러니까 이게 ‘비유할 비(譬)’자는 여기다 ‘말씀 언(言)’자를 넣어서 쓴 거거든요. 그러니까 임금한테 말할 때 어떻게 해야겠어요? 직접적으로 말 못하겠죠? 당신 잘못이라고 말 못하니까 돌려서 돌려서 말하는 게 이 ‘비유할 비(譬)’자 거든요. 돌려서 깨우치게 해주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거보다는.
그래서 이 ‘비유할 비(譬)’자로 통용되기도 하고 ‘피할 피(避)’자로 쓸 때는요, 여기에다가 이제 우리 ‘쉬엄쉬엄 갈 착(辶)’을 써가지고. 이 글자 왜 이렇게 되어있게요? 이게 칼 들고 목 칠 것 같으니까 도망가는 거예요. ‘피할 피(避)’자예요. 튀는 거죠.
요 앞에까지 그대로 그리면 이렇게 되겠죠. 이게 ‘피할 피(避)’자가, ‘쉬엄쉬엄 갈 착(辶)’이 원래 도로잖아요? 사거리에서 아까 손가락에 반대되는 발가락, 길을 발로 실제로 밟으면서 떠나는 거죠. 왜 그러냐면 이렇게 목 칼로 맞을까 봐 이렇게, 목 잘릴까 봐 길 떠나고 있는 모습이에요. 이 글자가 지금 이렇게 됐죠.
여기 사거리를 갖다가 이게 발입니다. 손은 이렇게 쓴다면 발은 이렇게 발가락 세 개를 표현합니다. 발을 가지고 사거리 중에 한 부분이, 원래 제대로 그리면 이렇게 되겠죠, 사거리. 이게 이제 우리가 지금 ‘행할 행(行)’자가 됐죠. ‘행할 행(行)’자를 다 쓰면 사거리죠. 그중에 이 부분만 쓰면 병(幷)이 되잖아요. 16:20
‘행할 행(行)’자랑 ‘발 족(足)’자가 합쳐지면 지금 이게 이게 되죠. ‘행할 행(行)’ 이게 ‘발 족(足)’자의 변형으로 이렇게 여기가 이렇게 변형되죠, ‘그칠 지(止)’자가 있죠. ‘발 족(足)’자는 ‘그칠 지(止)’자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쉬엄쉬엄 갈 착(辶)’받침이 되죠. ‘쉬엄쉬엄 갈 착(辶)’이 되죠. 16:31
그래서 칼 맞을까 봐 먼 길 떠나는 게 지금 ‘피할 피(避)’자가 됩니다. 오랜만에 한자도 해봤는데 여기서는 지금은 이게 ‘임금 벽(壁)’자인데 ‘비유할 비(譬)’자로 쓰였어요.
비유하자면, ‘공부를 하는 거는’ 공부를 하는 거죠. ‘공부를 함이 있는 자는 비유하자면 우물 파는 거랑 같다.’ 예수님이 이런 말 많이 쓰죠. “하느님의 천국은, 하느님 나라는 비유하자면 누룩과 같다. 뭐를 하는? 씨 뿌리는 사람과 같다.”하고 이제 얘기를 시작하는 게, 돌려서 얘기하는 거죠, 바로 얘기하는 게 아니고. 17:12
30절에요. “맹자가 이르기를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타고난 본성 그대로 행하신 분이고, 탕湯왕과 무武왕은 몸으로 익혀 회복하신 것이다.” 이 두 양반들이 달라요. 위에 분들(요·순)은 성지性之라고 돼 있어요. 요·순은 이 ‘갈 지(之)’자죠. 이 ‘갈 지(之)’자가 아까 그겁니다. 시험 발가락을 땅에서 그려놓은 게 이거예요. 어느 출발선에서 이제 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출발선에서 발이 나갔다는 게 ‘갈 지(之)’자고요. 17:47
집에서 예전에 땅 속(땅을 파고 반지하로 살았으니까) 보통 이게 반지하 집 출구가 돼요. 이 출구에서 발이 하나 나온 게 우리가 지금 아는 이게 ‘날 출(出)’자가 돼요. 이거는 ‘갈 지(之)’자가 되고요. 어느 선에서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지금 이게 위에 긋고 이렇게 긋고 이렇게 긋고 이렇게 돼가지고 지금 ‘갈 지(之)’자가 된 거죠, 이게 단순화되면. 18:07
이거는 집에서 나온다는 ‘날 출(出)’자가 됐죠. 예전에 집이 반지하니까요. 예전에 이렇게, 지금 암사동 가면 집이 이렇게 돼 있죠. 그렇죠? 이게 ‘집 사(舍)’자의 원형이 돼죠. 밑에 ‘입 구(口)’자가 이게 반지하라는 소리예요. 땅 파고 살았다는 얘기에요. 땅 파고 산, 이 반지하의 출입구를 나올 때는 몸을 구부리고 나와야 돼죠. 그러니까 몸을 구부리고 집 밖으로 이렇게 나오는 모습이 지금 ‘굴복할 굴(屈)’자죠.
‘날 출(出)’자가 있는데 왜 ‘굴복하다’라는 거냐 하면 이게 입구를 나오려면 몸을 구부리고 나와야 돼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굴복할 굴(屈)’자가 ‘날 출(出)’자인데, ‘날 출(出)’자는 암사동 그 움집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고, 몸 구부리고 사람이 나오는 모습이다. 이건 ‘날 출(出)’자고.
그럼 해지면 발이 반대로 되겠죠. 해지면 집으로 들어간다. 이게 지금 ‘각각 각(各)’자에요. 근데 같이 놀다가 해지면 다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더라는 거예요. 이 입구가 꼭 입은 아니에요. 구덩이를 말해요. 구덩이도 있고요. 상식으로, 암사동 한번 가보시면 실감이 날 겁니다.
‘성지性之’, 그래서 본성 그대로 가더라는 거죠. 요·순(堯·舜)은 본성은 그대로 가고 그 탕·무(湯·武)왕은 ‘신지身之’, 몸으로 이렇게 가더라. 그러니까 이 말이 어려운 말인데요, 힌트가 이 앞에 똑같은 구절을 맹자가 이렇게 얘기해요. 그때는 ‘반지反之’라고 그래요. 탕·무는 ‘반지反之’, 요·순은 ‘성지性之’. 20:00
‘반지反之’가 우리가 회복하자죠. 이 ‘반지反之’ 보세요. 이 ‘반(反)’자 이거예요. 이렇게 하면 이게 절벽이거든요. 밑에 손이, 그러니까 산을 이렇게 기어 올라가고 있는 모습. 그러니까 내려오는 건 편한데 올라가는 건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게 역逆한 모습이에요.
반反, 반지反之 떨어졌다가 기어오르는 거거든요. 돌아온다. 그래서 탕·무는 본성을 갖다가 ‘다시 돌아가서 회복’한 사람이고, 요·순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본성이 안에, 이 정신에 확연히 드러나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그대로 실천하셨을 뿐이라는 거죠. 20:30
그러니까 이게 이제 우리가 흔히 어디서 말하는 거죠? 『중용』에서는 이거를 다르게 이야기 하죠. ‘성지性之’를 『중용』에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라고 그래요. 『논어』나 『중용』에도 똑같이 날 때부터 아는 사람. ‘신지身之’는요 학이지지(學而知之), 아니면 곤이지지(困而知之). 20:49
곤이지지(困而知之)는 나무가 이 울타리에 갇혀 있죠. 아주 곤란한 상황이에요. 나무라는 거는 목기운이라는 게 막 뻗어나가야 하는데, 못 뻗어나가게 딱 구속되어 있어요. 요즘 우리 애들 학교처럼, 딱 이렇게 감방에 가둬놓듯이 이렇게 자라는 애들을 가둬놓으면 구속이 되어서 곤란한 상황이죠. 21:06
곤란한데 곤란한 중에 깨닫는 게, 아주 몸을 갖고 고생을 하다 깨닫는 게 있고. 그런데 배우라고 하면 쉽죠. 학교에서 이렇게 지식을 전수받고 그대로 아는 게 있고. “네 안에 인의예지 있어”하는 얘기 듣고, 진짜로 배운 대로 실천해 봤더니 인의예지 있는 걸 확인하는, 이게 이제 ‘신지身之’죠. 21:21
근데 생이지지(生而知之)는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가 우리 안에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제가 항상, 이거 그림을 항상 기억하세요. 이게 우리 성性입니다. 우리 안에는 분명히 이런 동서남북과 같은 나침판이, 나침판이나 잣대 같은 게 있어요. 이 자리에서 인예의지를 명확히 판가름, 갈라줍니다. 이게 맞냐? 틀리냐?
‘내가 남이라면 어떻겠는가?’ ‘남한테 내가 할 땐 어떻게 하는 게 상대방이 잘 받아들이겠는가?’ ‘서로 조화를 이루겠는가?’ ‘이게 정의가 맞냐? 아니냐?’ ‘이걸 정의로운 행동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거냐?’ 이런 거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누구나 갖고 태어났는데 누구는 ‘성지性之’고 왜 누구는 ‘신지身之’냐?
이게 활성화돼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이쪽은 뭐냐 하면 비활성화죠. 비활성화, 활성화가 안 된 채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래서 들어야 해요. “네 안에 인의예지가 있대~” 해야 겨우 “그런가?”아는 사람이 태반이죠. 22:27
그런데 누군가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인의예지를 실천해요.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안 배웠는데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센스가 아주 탁월하신 분들은 이걸 요즘 식으로 얘기를 하면 이게 ‘영적 지능’이에요. 계제랑 직결돼 있는 건 요거예요.
우리가 다중지능이라고 그래서 음악 지능 · 공간 지능 · 언어논리 지능 · 수학 지능 따지는 게 여러 개 있어요, 지능들이. 자연 친화 지능 · 인간 친화 지능 · 자기성찰 지능 이렇게 따지는데, 제가 다중지능 이론에 빠져 있는데 아주 중요한 지능이라고 보는 게 영적 지능인데 이게 계제거든요. 22:57
뭐냐 하면 인의예지를 잘 아는 지능이에요. 이게 도덕적인 거나 사물의 본질을 깊이 꿰뚫어 보는 지능이 있어요. 그냥 머리 좋은 사람이, 하버드대 뭐 어디대 나온 사람이 왜 도덕적으로 엉망인 짓을 하고, 사리 판단을 그렇게 못 할까? 그러니까 인의예지에 너무 안 맞는 행동을 한다 할 때는 그 양반은 언어나 논리, 수학 지능 · 수리 지능은 좋은데 영적 지능이 형편없는 거예요.
근데 영적 지능까지 같이 가지고 계시면 그건 아이큐 좋은 걸로 아주 멋지게 쓰겠죠. 그러니까 다른 지능들을 아주 멋지게 쓸 수 있게 해주는 건 영적 지능이에요.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게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지능이에요.
봉우 할아버님이 “호흡하면, 수련하면 머리 좋아집니다”할 때, 그 머리가 첫째로 영적 지능이에요. 다른 머리도 좋아지겠지만 부수적이고, 첫째로 영적 지능이에요. 인의예지를 잘 알게 돼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인의예지를 몰라서 이 세상이 몇천 년간 난국이지, 인의예지 밝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진짜로 나왔다면 이렇게 안 왔겠죠. 24:03
그냥 머리 좋은 거는 계산기능이 좋은 거예요. 계산과 논리. 그런 문제점이 있죠. 이 영적 지능에 대한 나머지 지능이 산란한데,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요·순은 여기서 ‘성지(性之)’라고 그러면 요·순은 인의예지가 완벽하게 지금 다 밝혀져서 나왔느냐?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 무리하게 볼 필요 없죠.
뭐냐면 모차르트가 음악 지능이 꽤 높게 태어났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안 배워도 아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모차르트는 안 배워도 그거에 음을 들으면 알아요. 공간 지능이 좋은 사람은 안 배워도 입체적으로 공간을 봐요. 신체운동 지능이라는 게 다중 지능인데 그거 좋은 사람은 어려서 남이 하는 거 보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어요, 춤을 추든지 뭘 해도. 이건 안 배워도 아는 게 지능이에요.
지금 현재 교육학적으로도 안 배워도 남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게 지능이에요. 그러면 요·순은 영적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었겠죠. 그러니까 안 배워도 인의예지를 금방 그 미묘한 것까지 맞출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탕·무는 그거보다는 좀 자질이 더 떨어졌다고 보는 거죠. 25:02
근데 이제 재밌는 게, 맹자한테 그럼 공자님은 어떤 분이냐라고 물어보면 맹자가 볼 때는 공자님도 아마 요·순 못지않은 분이니까 ‘성지性之’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논어』에 보면 공자님이 “나는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고 학이지지(學而知之)다”라고 얘기하시는데, 공자님 본인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신다).
근데 남이 볼 때는 지능이 탁월한 게 꽤 있다고 보면 생이지지(生而知之)라고 볼 수도 있죠. 근데 본인이 볼 때는 ‘나는 탁월한 것보다 노력한 게 더 많은데’라고 생각하면 본인의 입장에서는. 요·순도 본인입장에서는 학이지지(學而知之)라고 할 수도 있어요.
맹자가 볼 때 요·순은 거의 이 사람들은 머리가 많이 밝아져 태어난 사람이다. 탕·무는 몸으로 회복하신 거다. 익혀가지고, 공부를 해가지고. 그럼 오패五霸는 어떨까요? 오패는 밑에 있죠. 춘추春秋時代 오패五霸를 말해요. 재완공·진문공·초장왕·오왕 함녀·월항 구천. 유명하죠. 구천이나 함녀나.
그리고 이제 전국시대에서는, ‘칠웅(七雄)’이라고 그래요. 오패五霸 칠웅七雄이라고 하는데요. 전국시대는 칠웅七雄은 이문우·제2왕·연소왕·초회왕·한소우·조무령왕 마지막에 진시왕으로 끝나는데요. 춘추시대랑 전국시대의 차이가 있어요. 뭐냐 하면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아직 완전히 무시받지는 않을 때예요. 26:17
조금씩 역사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텐데요. 보세요. 주나라는 봉건사회이기 때문에 천자의 나라가 있고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데가 있어요. 지금 우리 경기도라는 말이 고대에 나온 말인데 경기도가 천자가 직접 관장하는 나라예요. 직영 나라이고 여기에 수많은 제후국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 주나라가 원래 은나라 때는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는데, 봉건제가 확고해진 이유가 은나라를 치고 주나라가 들어섰잖아요? 근데 주나라가 이 지역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힘이 없어요, 중앙집권을 할. 곳곳에 은나라 유민들이 이렇게 백성들이 산재해 있으니까 자기 성씨나 아주 개국공신들로 제후를 봉해줘서 이렇게 일종의 분권을 해서 통치를 해요.
그때 이게 이제 봉건제인데, 주나라가(천자가) 그러면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제후들을 통솔해야 하잖아요? 이게 이제 무너질 때가 춘추시대예요. 춘추시대는 이제 뭐냐면 아까 말한 오패五霸들이 치고 나와서 이놈들이 이제 오패五霸로 치고 나온 거예요, 이 중에 센 것들이. 27:26
얘네들이 주도를 하는데도 천자를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받들 때가 춘추시대예요. 그러니까 명목상으로 그래도 인과 의을 얘기해요. “우리 천자께서 계시니까 우리가 잘하자.” 이런 식으로 명분을 들이대는 게 춘추시대고, 전국시대에는 전국시대의 칠웅七雄들은 이제 천자를 무시해요. 27:48
이제 내가 천자하겠다고 덤비는데 누가 천자하느냐? 공자님은 춘추시대라 논의가 여기까지 안 가는데, 맹자는 전국시대라서 초장부터 “야 너희들 이익 좀 너무 따지지 마라!”고 막 말이 나가는 이유가 천자 먹으려고 서로 막 싸우고 있으니까 맹자가 볼 때는 “천자의 덕을 갖춰야 천자가 돼지, 너희들이 무슨 천자냐, 천자깜이 되냐?” 이제 이렇게 보는 시각이 있어요.
이 전국시대의 모토는 부국강병이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최고로 키워서, 지자체장들이 다 누구든지 서울을 먹을 수 있는, 어떤 그런 상황이 된 거죠. 경기도를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돼서 이제 지금 명분도 이제 그런 거 없어요. 이제 오로지 약육강식. 28:27
그래서 오패五霸때는 “오패五霸는 빌린 것이다.” 오패는 춘추 때잖아요. 오패는 그래도 인과 의을 얘기해요, 인과 의을. 그런데 빌렸다는 게 자기는 할 생각이 없어요. 포장만 포장만 인과 의로 포장을 해요. 근데 “오래도록 빌려서 돌려주지 않으니 어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이 말이 어렵죠. 이거를 이제 오해해서 ‘인과 의로 포장도 오래 하다보면 자기 게 된다’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이제 이거는 그게 아니죠.
뭐냐 하면 인과 의를 포장을 항상 하고 다니니까 자기는 꼭 자기가 오패들이 스스로 인자仁者 인 줄 알고 있다는 거예요. 옷을 항상 그렇게 입다 보니까 마치 자기도 그런 양 착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실제는 전혀 아니면서. 맹자는 비판하는 거예요. 29:07
요·순(堯·舜)은 인의예지를 본성 그대로 행하신 분이고, 탕·무(湯·武)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 공부해서 행하신 분이고, 오패(五霸)는 이거 빌려 입고만 있고 공부할 생각은 아예 없기 때문에, 얘네들이 근데 실제 더 무서운 게 자기들이 진짜 인자仁者인지 의자義者인지 착각까지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착각까지. 아시겠죠? 29:31
그 『논어』에,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논어』에 나오죠. “생이지지(生而知之)가 가장 으뜸이고,” 태어날 때부터 좀 알고 온 사람이 제일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고, 아주 곤란하나 배우는 자는 그 다음이다.” ‘곤이학지(困而學之)’ 아주 곤란한 지경, 이게 곤이지지(困而知之)급인데 그래도 공부하는 사람, 그러니까 이게 아주 몸으로 고생해야 굴러봐야 안다하는 정도급인데 “그래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그다음 세 번째인데, 최악의 존재가 있는데, 아주 곤란하면서도 진짜 불러야 조금 알까 싶은데도 배우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백성 중에 가장 하등이다.”했는데 왜 이걸 해놨냐면은 혼란한데도 안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오패五霸급들은. 30:21
오패五霸 7웅들은 보니까 인의예지 진짜 공부해도 될 것 같지 않은데 공부까지 아예 안 하고 있다는, 손 놓고 있다는 거죠. 그렇죠. 이제 『중용』에 그러면 이 생이지지(生而知之)는 어떻게 공부하고, 학이지지(學而知之)는 어떻게 공부하냐를 한번 알아보려면요, ‘주경’의 생이지지 편이 있어요. 거기를 보시면 이렇게 구분해요.
생이지지(生而知之)라는 얘기를 하고, 학이지지(學而知之)를 얘기한 다음에, 생이지지(生而知之)는 행하는 걸 뭐라고 얘기하냐면 『중용』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안이행지(安而行之), 생이지지(生而知之)에 맞먹는 거예요. 아까 이거는 생이지지(生而知之)는 지(知)를 말하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행하는지를 얘기하고 있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행하는지를 거기서는 ‘이이행지(利而行之)’라고 그래요. 이거 보세요. 이거 탕·무(湯·武)는 이렇게 있겠죠. 요·순(堯·舜)은 이렇게 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달라요. 생이지지(生而知之)는 본래 아는 사람은 인의예지가 활성화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안이행지(安而行之)예요. 너무 편해서 하는 거예요. 인의예지를 하는 게 너무 편해서. 31:33
근데 학이지지(學而知之)는 인의예지가 안에 있다는 걸 들었지 지금 정확히 활성화가 안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이행지(利而行之), “인의예지를 하면 참 이롭겠구나!” “얘기를 들어보니까 인의예지를 내가 하면 진짜 좋겠구나!” 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나한테) 좋겠구나!” 해서 하고 있으면 학이지지(學而知之)고, “오! 나 이렇게 하는 게 너무 편해서 한다” 그러면 생이지지(生而知之). 31:48
그 다음 31절 보세요. 공손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이라는, 이윤이 이제 은나라 탕왕湯王 때 제갈량이죠. 은나라 탕왕이 은나라 세울 때 제갈량이에요. 이윤을 못 만났으면 은나라를 못 세웠어요. 은나라 탕왕이 이윤을 얻어서 이제 하나라를 물리치고 은나라를 만드는데 태갑太甲은 탕왕 손자예요. 태갑이 탕왕 손자인데 태갑이 좀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태갑이 정치를 잘 못하고 깽판을 치니까 이윤이 보다가 도저히 못 보겠어서 태갑을 내쳐요. 내치고 정치를 이렇게 이제 섭정을 하다가 태갑이 깨우치고 도의 길로 들어서니까 다시 불러다 임금을 맡겼다는 고사가 있는데, 그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책, 중국에서 되게 옛날에 예전에 나온 책으로 책은 오래된 책인데 쇼킹한 책이고, 사기보다 더 먼저 나온 책인데 쇼킹한데, 거기에는 ‘이윤이 태갑을 물리쳐 태갑이 열받아서 이윤을 죽였다.’ 거기에는 이제 다 그런 식이에요.
우리가 아는 요·순·우 이런 것도 선양으로 이루어졌다고 된 걸, 거기에는 다 죽이고 아들한테 왕을 주려고 하니까 죽이고 뺏었다, 이런 식으로 된 살벌한 역사책이 하나 있는데 『죽서기년竹書紀年』이에요. 증산도에서 순임금 욕하려고 주로 인용하는 게 『죽서기년』 많이 인용해요. 거기 보면 순임금이 요임금을 가둬뒀다. 단주랑 못 만나게 했다. 이런 기사입니다.
좀 센 책인데 거기에는 맹자랑 이야기가 달라요. 근데 이제 맹자보다는 다음(이후) 책이죠, 그게 이제. 한나라 때 아마 나온 책인데 『죽서기년』은. 센 책 보고 혹시 인터넷에 이야기 나올 때 혹시나 그게 『죽서기년』이라는 거 알아두세요. 센 내용들이 나오면.
근데 이제 맹자는 그렇게 안 보죠. 이제 공손추 때 이때 이 얘기는 “이윤이 내가 천명에 순종하지 않은 것을 보고” 태갑이 도저히 천명을 따르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냥 볼 수가 없어서, 인과 의를 실천을 안 하니까 태갑을 동궁(동쪽에 있는 공전이에요), 동궁 동땅에 있는, 동쪽이 아니라 동지역에 있는 거기(이제 탕왕의 묘가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거기로 추방하니까 백성들이 아주 기뻐했어요. 34:07
그런데 태갑이 어질어지자, 현명해지니까 다시 돌아오게 했더니 백성이 또 기뻐했어요. “어진 자가 남의 신하가 됨에” 이제 공손추가 비꼬는 말이죠. 어떻게 임금이 어질지 않다고 그렇게 추방할 수 있냐,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윤이 현명한 성인급의 신하라고 유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태갑을 그렇게 임금을 현명하지 않다고, 내가 못 보겠다고 내치고 다시 불러들이고 이게 가능합니까? 라고 이렇게 말을 하니까 맹자가 얘기를, 답은 간단해요. “네가 하면 안 되고 이윤이 하면 돼” 이제 이거예요.
이윤이 뜻이 있다면 가능하다. 이윤 정도의 인과 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이걸 한다면 가능하고, 그 수준이 안 되는 사람이 그걸 하면 찬탈이다. 그러니까 에고로 하면 찬탈이고, 순수하게 도심으로 하면은, 도심으로 하는 거랑 에고로 하는 거랑은 전혀 결과가 다르겠죠.
근데 이걸 도심으로 한다는 거를 이해 못하면은 말장난 같이 보일 수도 있어요. 근데 도심으로 한다는 거는 같은 일을 해도 과보가 다르겠죠. 그러니까 이걸 아는 분들이 들으면 “진짜로 내가 사심 없이 했는가?” 같은 일도 그래요. 누구한테 누가 충고를 해주기 힘든 게, 이렇게 하라고 그래도 그게 어떤 마음으로 그걸 할지를 모르니까 사람에 따라서. 같은 말도 내가 사심을 가지고 말을 해버리면 틀어져 버리거든요, 일이.
근데 같은 말도 도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순수하게 하면 일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변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이 되게 중요하죠. 그 이윤伊尹의 마음이 아니고는 그거 안 된다. 여기서도 지금 이윤의 뜻이라고 하지만 뜻이라는 건 마음이에요. 광범위하게 그냥 마음으로도 쓰고요. 35:53
보세요. ‘갈 지(之)’자니까 똑같죠? 마음이 뭔가를 향해 지금 출발해서 딱 가는 겁니다. 거기에 이제 ‘마음 심(心)’자죠. 이게 뜻이에요. 마음이 가는 거. 그게 지금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돼서 이렇게 쓰여졌어야 되는데 지금 이게 이렇게 돼버렸어요. ‘선비의 마음이 뜻이다.’ 이렇게 아는 경우가 있는데 이제 그 잘못된 경우고. ‘지(之)’자의 원래 모습은 이거예요. 마음이 가는 거. 36:20
그러니까 지之라는 거는 우리 마음은 뭔가를 향해 가죠. 뭔가를 향해 갈 때 우리가 마음을 ‘뜻 지(志)’자를 써요. ‘이윤伊尹 뜻’, 이윤伊尹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있겠죠. ‘지(志)’는요, 지향하는 바고요. ‘의(意)’랑 틀려요. ‘의(意)’는요, 마음에 음(-)이 하나 일어난 거예요. 파동이 하나 일어난 거, 이런 저런 생각들이 일어난 거죠. 36;41
이 ‘의意’랑 ‘지志’의 차이는 ‘의意’가 확정되면 ‘지志’라고 그래요. ‘의意’가 이제 어떤 뭐냐면 뜻을 정하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단계는 우리가 ‘의意’라고 하고. 근데 같이도 써요. 마음이 이리저리 간다라고 봐서 같이 쓰기도 하는데 ‘의意’와 ‘지志’를 구분하자면 우리가 이렇게 하죠. 37:05
‘입지立志’라고 그러지 ‘입立’이라고는 안 하죠. 그걸 생각해 보세요. ‘입지立志’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입지立志’라고 할 때는 왜 꼭 ‘지(志)’자를 쓰는지, ‘의(意)’자를 안 쓰고. ‘의(意)’는요 이런 저런 생각하는 걸 말하거든요. 지(志)도 이렇게 쓸 때가 있어요. 마음이 여기로 가고 저기로 갈 수도 있잖아요? 근데 이제 둘이 구분해서 쓸 때는 ‘입의立意’라고 안 하고 ‘입지立志’라고 할 때는 뭐냐면 ‘마음이 딱 갈 바를 정했다’라는 거예요.
‘의(意)’ 단계를 거쳐서 이것 저것 따져보다가 ‘나 이렇게 할래!’라고 정한 걸 지(志)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입지立志를 했냐?’ 할 때는 방향을 정한 거예요. 근데 이윤伊尹의 뜻은 뭐냐하면 뜻이 확고하니까 이 ‘지(志)’자를 써주는 거예요, 의(意)라고 안 하고. 37:55
이윤伊尹은요, ‘자나 깨나 인仁과 의義를 실천하겠다’라고 마음에 새긴 사람이라서요. 아시겠죠? 이거 꼭 기억하세요. 왜 이제 인仁과 의義만 얘기할 때가 있냐? 인仁이 있고요, 의義가 있고, 예禮가 있고 지智가 있는데, 『맹자』에 나와요. 나중에 할 거예요. 38:18
『맹자』에서도 인(仁)과 의(義)를 가장 중시하는 게, 이게 우리가 춘추(春秋), 공자님 춘추도 이거예요. 상 주고 벌 주고. 봄기운은요, 상 주는 거예요. 잘했다 껴안아 주고. 가을은요 잘못했으면 냉정하게 비판하고 뭐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얘기하잖아요. “눈이 잘못했으면 눈을 뽑아라. 두 눈 들고 지옥 가는 것보다 눈 하나 가지고 천국 가는 게 낫다.” 38:42
이 정신이 의외예요. 냉롱하게 치는 정신,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인간의 인도(人道)에서는. 인간의 기운, 이 네 가지 중에서. 이게 음양의 제일 대표예요. 지(智)와 예(禮)는 뭐냐하면 지(智)는 인(仁)과 의(義)를 정확히 아는 거예요. 인(仁)이 뭐고 의(義)가 뭐고. 그래서 지금 인(仁)을 해야 되는지 의(義)를 해야 되는지 정확히 아는 게 지(智). 38:55
그거를 실천하면 예(禮)가 돼요. 그거를 예(禮)도 결국 내용은 인(仁)과 의(義)거든요. 우리가 만드는 무수한 예(禮)는 인(仁) 아니면 의(義)예요. 인(仁)을 표현하든가 의(義)를 표현하는 거. 그쵸? 그러니까 두 개만 들어 얘기하면 인(仁)과 의(義)를 얘기해요. ‘인(仁)과 의(義)에 뜻을 두고 있다’하면 인의예지를 다 뜻 두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아시면 되고. 39:12
밑에 이제 32절 보죠. 공선추가 잘 물어보는 제자인데요. 또 물어봤냐면 『시경』에 “군자들이여 공밥 먹지 마라.” 이런게 『시경』에 있어요, 시가. 왜냐하면 이때 군자들은요 정치가들이에요. 당시 사회 지도층들. 사회 지도층들이 백성을 위해서 일을 해야 의미가 있는 건데 일을 안 해요. 그러니까 ‘공밥 먹는다’라고 이렇게 비판을 한 노래가 있어요.
근데 이제 공손추가 그걸 들고 나와 가지고 “솔직히 군자들이 경작을 안 한다면서 농사를 안 짓고 밥을 먹는다. 무슨 이유냐?” 근데 맹자 때 이런 얘기, 질문이 『맹자』 전체에 걸쳐 많이 나오는 걸 보면 그때 아직 사(士)라는 존재들이, 되게 그러니까 이 군자들의 존재가 상당히 뭐랄까 사·농·공·상 중에서 사(士)가 (정신 노동자들이죠 실제로는) 농·공·상하고 다른, 농사 짓는 사람들은 쌀을 갖다가 수확하고, 공인들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들은 이걸 갖다 팔아가지고 실질적인 뭔가 일을 하는데, 사(士)들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 라는 의문이 계속 있어요. 이때만 해도. 40:18
그래서 공밥 먹는 사(士)는 잘하면 되게 농·공·상들이 살만하게 정치도 만들고, 가야 할 비전도 제시하고, 솔직히 뭐 농사법이나 공업 기술도 향상시켜주는 거, 다 사(士)가하는 건데, 일을 안 하기로 작정하면 사실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사(士)라는 거죠. 일을 안 하기로 작정하면 그러니까 이 사(士)라는 건 상당히 위험한 존재이기는 해요. 사회에서 이런 질문이 자꾸 나오고. 40:43
공무원들이 일을 안 하고 사실은 월급만 가지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백성들이 피를 보는 거니까. 왜냐하면 이런 노래가 나온 배경을 이해해야 되는 게, 사·농·공·상이 지금 이제 사기업에 속해 있는 이런 또 노동자들은 애매해요. 예전에 말한 순수 사(士)는 아니죠. 사(士)랑 지금 섞인 거죠, 많이 개념들이. 41:12
순수 사(士)를 가지고 얘기하면 이 사(士)가 농·공·상들을 다 이렇게 지도해 주는 리더인데 리더로서 밥을 먹기 때문에 사실은 이 사람들이 정전제(지난번에 했지만) 해가지고 이거 공전으로 농사를 지어서 이 사(士)한테 바치는 거거든요. 이거 농인들이 먹고. 그렇죠. 그러니까 백성들이 이건 세금이죠. 10분의 1세를 내가지고 먹여 살려주는 존재가 사(士)인데, 이 사(士)가 도대체 하는 일이 뭐지? 하는 의문이 자꾸 생긴다는 거예요.
지금 사회도 똑같아요. 공무원들이 과연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을까? 알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정신 노동자들은 정신 노동이라 “나 너무 힘들어”해도 사실은 몸으로 한 게 안 보이면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41:54
그래서 조선시대가 지금 시대랑 조선시대가 다른 게 이거예요. 예전에 김용옥 교수가 이런 말 했지만. “성리학이라는 거는 조선시대 공무원 철학이다.” ‘사(士)철학’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조선시대에는 공무원 철학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철학을 최소한 공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겠다는 걸 늘 일깨울 수가 있었는데, 지금 시대는 뭐가 없죠.
공무원들이 양심껏 살아야겠다는 걸 생각하게 하는 철학이 없어요. 철학이 없다는 건 심각한 거예요. 인간은 어떤 이념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실은 안 움직이거든요. 필요 이상으로 이해만 따지게 되고 되게 동물 차원에 머물러요.
그런데 아주 옳은 어떤 명분을 봤을 때 사람이 또, 도심이 작동해요. 그러니까 인간이 뭔가 종교에도 가입하고 하는 게 뭔가 좀 더 큰 데 참여하고 싶으니까 그런데에. 그래서 특히 사(士)는 그걸로 사는 사람들인데 이게 심각하죠. 이런 철학이 없다 하는 거. 당시도 비슷했겠죠. 42:53
근데 맹자가 생각하는 사(士)는 안 그렇죠. 진정한 사(士), 맹자가 추구하는 사(士)는 뭐냐하면 “군자가 이 나라에 거처함에 (군자가 그 나라에 살면) 그 임금이 군자를 쓰면 편안하고 부유해지고 존귀해지며 영화로워지고 (나라가 이렇게 잘 되고) 그 자제가, 임금 자제들이 군자한테 배우면 효성스러워지고 곤경스러워지고 충성스러워지고 믿음직스러워진다. 그러니까 공밥을 먹지 않는 것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군자가 원래 제대로 작동하면 진짜 농·공·상 이상으로 큰 자리죠. 그러니까 사(士)를 제일 위에다 놓죠, 농·공·상보다. 그렇죠? 이게 일본 사무라이 시대에는 이 사(士)가 무사죠. 그러니까 일본은 무사들 맨 칼 갈고, 이제 주군을 위해 이제 할복할 거 연습하고, 검술 연습하면 되는데 조선시대는 문인 사회잖아요? 문반들 위주의 사회라 조선시대는 이 철학이 없으면 무사는 칼이라도 잘 쓴다지만 평생 검술이라도 연습한다 치지만 그럼 문사는 뭐 할거냐? 철학 안 하면 할 게 없어요. 43:40
늘 정신을 갖다가 영적 지능을 높이면서 일깨우지 않으면 진짜 쓸모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맹자는 “그렇지 않다. 잘 쓰면 이렇게 된다.” 그렇죠. 44:00
33절은 “왕자 점墊이 묻기를,” 제왕 제나라 왕의 아들인데요. “선비는 무엇에 종사합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선비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라고 하니까 “맹자가 이르기를 뜻을 숭상한다”라고 하였다. “왕자 점이 이르기를 무엇을 일러 그렇게 돼 있나요?” 뜻을 숭상한다를 이거 이렇게 바꿔보셔야 돼요. “고상하게 한다”로. “뜻을 숭상한다” 그러면 어떤 뜻을 숭상하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아까 뜻이 뭔지 알았으니까 뜻을 갖다가 일반 이런 이해관계, 물욕에다가 두는 게 아니고. 44:42
물욕·식욕·권력욕·명예욕 뜻은 어디라도 둘 수 있잖아요? “나는 권력을 지향하기로 입지(立志)를 했어.” 그쵸. “나는 돈을 많이 벌기로 입지를 했어.” 그러면 선비는 뭐냐? “나는 인과 의를 진짜 한번 실현해 보기로 했어. 내 몸을 통해 인仁과 의義를, 하늘의 인과 의를 내 몸을 통해 완전히 구현해 보기로 뜻을 세웠어.” 이게 뜻을 고상하게 한 거죠. 높은 데다 뜻을 뒀다는 뜻이에요. 45:10
‘뜻을 숭상한다’ 그러면 뜻이 완벽한 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뜻을 고상하게 해서. 그럼 도대체 뭐가 뜻을 고상하게 한다는 겁니까? 인과 의, 거기에다 뜻을 두는 거예요. 인자함과 정의에 뜻을 둔 거예요. 45:22
단 한 명이라도 인과 의를 정의를 내려줘요. 단 한 명이라도 무고한 사람 안 죽이는 게 인자함이다. 그러니까 역지사지해봐 가지고 내가 “왜 사람이 이렇게 해야 되나요?”라고 사이코패스는 물어볼 거예요. 사이코패스는 ‘내가 즐거우면 몇 명 정도는 죽여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결정적인 차이는 이거예요. 군자와 이런 에고이스트의 차이는, 군자는 ‘내가 그 입장이라면’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을, 황금율을 한번 해보는 거예요. 내가 그 입장이라면, 무고한데 사람들이 와서 나를 죽이면 안 좋겠죠? 그러니까 내가 피해자라고, 상대방이라고 생각해 보면 선악은 바로 나와요. 욕이 나오면 악한 부분이 있는 거예요. 그렇죠? 아주 악이던가, 악이 조금 있던가, 10%로 악인가? 20% 악인가? 차이는 있겠지만 입장 바꿔보면 바로 알아요. ‘나라면 욕 나오겠다’하면 그건 악이 있는 거예요. 46:00
그래서 그걸 안 하는 게 인자함이고. 정의는 요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나왔는데 정의는 간단해요.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지 않는 게 정의다’ 그러니까 내 거 아닌 건 절대 안 갖는 게 정의죠. 그러니까 그걸 취하는 건 정의가 아니죠. 이걸 ‘분배의 정의’라고 하는데요. 이게 여기에는 많은 게 들어있어요. 46:24
내 것이 아니면 이제 이 사람 건데, 남의 걸 취하지 않는 게 정의라는 거는 이걸 취하면 (이거 뭔 말을 하려고 하냐면) 의義도 인仁의 지배 받아요. 인仁이 최고예요. 공자님이 인仁만 얘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46:41
맹자가 의義를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공자는 인仁을 중시했고 맹자는 의義를 중시했다.” 이렇게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게 아니에요. 맹자는 의義는 인仁을 실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맹자가 의義를 중시했다는 거는, 맹자는 인仁의 실천을 중시했고, 공자님은 인仁이라는 것 자체를 포괄적으로 많이 얘기하신 것 뿐이에요. 그 인仁과 의義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에요, 단순하게. 47:00
의義는 인仁의 실천이에요. 의義는 뭐냐면 인仁이 아닌 것들을 아주 미워하는 게 의義예요. 오로지 사랑이에요, 사랑. 모든 걸 줄이면 사랑 하나예요. 사랑인데 이게 그냥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죠. 보편적인 사랑이에요, 인류에 대한 휴머니즘. 이 휴머니즘 사랑에서, 내가 이 사람 물건을 가져오면 인仁에 안 맞죠? 인仁에 안 맞으니까 정의는 안 하는 거예요. 그걸 안 하는 게 정의예요. 47:31
그러니까 의義도 결국은 인仁으로, 다 사랑으로 역지사지만 해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정의인지 불의인지. 그렇죠. 내 거 누가 가져가는게 싫다면 나도 남의 거 안 가져가야 정의라는 거예요. 아주 간단해요. 선악은 항상 자명해요. 이거를 내 욕심에, 어떻게든 이걸 갖고 싶은 마음에 본인이 막 이렇게 합리화하고 호도하는 거예요.
선악을 자꾸 뭉개는 건데, 실제로는 측은지심으로 인해서 다 설명이 돼요. 측은지심에 위배되는 걸 안 하는 게 의義예요. 정의예요. 측은지심을 그대로 실천하는 게 정의고요. 이해되시죠? ‘분배의 정의’는 너무 당연한 얘기예요. 48:00
남이 내 거 가져가는 게 싫으면 나도 남의 거 안 가져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죠? “어느 곳에 거쳐야 하는가? 인자함이다. 어느 길을 걸어야 하는가? 정의다.” 그래서 맹자는 이걸 하나로 생각해요. 맹자는 인仁을 우리가 거쳐해야 할 집으로 생각하고요. 48:15
보세요. 맹자는 인仁을 집으로 생각하고, 의義를 길로 생각해요. 그러니까 두 개를 따로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대립도 아니에요. 집과 길이 대립이 아니죠. 우리는 항상 인仁에 살아야 되니까 집과 같은 거라는 거예요. 우리는 자나깨나 집에서 살아야 되니까, 인仁은 집이고.
우리는 항상 길을 걸어야 되니까, 길을 걸을 때는 의로운 길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해되시죠? 항상 인仁에 살아야 된다. ‘내가 집에 살다 가끔 길에 나가지’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요. 항상 우리가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인仁은 집이고, 길은 우리가 항상 걸어야 하는 거니까 의義는 길에 가깝다는 거예요. 48:50
그래서 뭐냐면 결국은 이걸 합쳐서 얘기하면 ‘인仁한 마음으로 의義를 행하라’는 거예요. 집과 길에 비유는 조금 오류 가능성이 있는 게, ‘내가 집에 있다가 가끔 길에 나오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한 번 더 얘기하자면, 집이라는 건 마음을 설명해요. 길은 우리 행을 상징해요. 길을 걷는 거잖아요? 행하는 거. 집은 우리가 거의 편히 쉬는 거. 49:24
그러니까 우리는 늘 인仁에 쉬고 있어야 돼요.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인仁에 쉬고 있는 거예요. 나와 남을 안 가르는 상태잖아요, 깨어 있으면. 인仁에서 쉬고 있고, 우리가 움직일 때도 늘 인仁에서 살아야 돼요. 인仁에서 한 번도 벗어나면 안 돼요. 인仁에다 집을 짓고 아예 뿌리 내리고 살아야 돼요.
대신에 움직일 때는 정의를 가지고 인仁에 맞나 안 맞나를 따져가지고, 아닌 거 치는 게 정의예요. 아닌 거 뭐라고 하는 게 정의고. 인仁을 지키는 게 정의고. 그래서 ‘움직이면 늘 정의로워야 되고, 마음은 늘 인仁해야 된다’ 이게 이제 맹자식 인의관仁義觀이에요. 인仁과 정의관. 이해되죠? 그래서 우리는 늘 인仁에 거처하고 늘 인仁을 따라 걸어야 된다. 정의를 따라 걸어야 한다.
“인자함에 거처하며 정의로 말미암으면” 거처하는 건 집이고요, 말미암는 건 늘 그길로만 다니는 거예요, 대로로만. 정의는 대로로만 다니면 “개인의 일이 갖추어진다”. 개인의 일이 갖추어진다는 거는 뭐냐면 이 개인이라는 거는 (지난 시간에 나왔지만) 나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잘 다스릴 정도의 큰 사람이에요. 50:38
그러니까 이 선비가 단순히 나 혼자만 이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지막에 살짝 얘기해 준 거예요. 이 정도 훈련된 사람이 만약 정치를 맡으면, 나라를 맡으면 정치도 잘하지 않겠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사士가 단순히 자기 혼자 몸 닦는 사람이 아니고 뜻만 막 고상하게 한다는 게 혹시 오해할까 봐. 이 사람이 움직이면, 이윤伊尹이 돼가지고 하나라도 은나라를 세우는데 이렇게 그 작용은 무궁하다는 거예요. 실제로 쓰임이 큰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51:07
그러니까 사士라는 건 여기까지예요. 인과 의를 실제로 세상에 구현할 수도 있는 사람들까지.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우리가 인의예지 지금 우리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수련의 다섯 기둥을 날마다 닦아서 인과 의를 계속 가슴에서 넘치게 만들어서, 이게 실제 세상도 그렇게까지 만들 정도의 존재가 돼야 우리 선비라고 하는 거죠. 51:28
이게 선비는 원래 도끼에서 온 말이에요. 예전에 이렇게 도끼, 이런 건 항상 도끼 날이에요. 도끼. 그러니까 예전에는 원래 무사 개념에서 좀 온 것 같아요. 이 도끼 중에 제일 으뜸 도끼를 ‘임금 왕(王)’자가 되고요. 사람 원래 ‘임금 왕(王)’자는 같아요, 갑골문에서는.
그러니까 제일 우두머리라는 뜻이고요, 왕은. 선비 중에 제일 우두머리라는 거죠. 그러니까 무사 개념인데 이제 후에 오면서 다른 개념이 붙여져요. 갑골문은 이랬다고 해도 “사士는 원래 무사야‘ 이렇게 얘기하면 좀 무식한 거예요. 왜냐하면 문자라는 건 의미가 자꾸 달라지니까. 52:17
그래서 고대는 이걸 사士라고 했는데 후대에 오니까 머리가 중요하게 되잖아요? 정보, 나름 춘추전국시대 정보화 시대가 온 거예요. 정보 아는 사람이 더 중요해지니까 이때의 사士의 의미는 선비들은 이렇게 썼어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이렇게 쓴 사람도 있고, 이것보다는 실제로 뭐냐면은 많이 쓰이는 게 이거예요. ‘10개를 모아서 하나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 ‘1당 10’ 이렇게도 쓰였어요.
그러니까 사람들마다 의미를 여러 개 걸어서 쓴 거예요, 이 글자. 원래는 무사해서 온 건데. 이해되죠? 우리가 ‘삼국지’할 때, 이렇게 쓰죠. 그렇죠? ‘말씀 언(言)’자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하죠. 뜻이 이거 지금 이해돼요? 지금 ‘삼국지’ 아까 ‘뜻 지(志)’자로 이게 이해가 안 되죠? 이건 이걸로 쓴 거예요. 10개를 모아서 하나로 결론을 내렸다는 거예요. 53:02
우리가 박물지니 무슨 향촌마다 지가 있어요. 이거는 뭐냐면 마음 심은 이건 의미가 없고요, 여기서는. ‘여러 10개의 자료를 모아서 하나로 결론을 내렸다’는. 여러 자료를 모아서 이거 만든 문서를 지志라고 붙여요. 이때는 이게 ‘뜻 지(志)’자에서 그 의미만 가지고 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53:21
그러니까 이 선비라는 존재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10개의 정보를 모아서 명확한 하나의 결론을 뽑아낼 수 있는 사람. 무사로 할 때는 1당 10, 혼자서 열명. 이런 식으로 고대의 의미를 부여해서 썼어요. 그러니까 의미 부여하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어떤 식으로 썼느냐가 중요하니까. 53:39
우리가 비둘기는 뭐로 의미하자 하고 쓰면 그 시대는 그걸로 다 통용된 거니까, 그 시대 걸 이해해야 되니까. 방금 정도 얘기면 사士에 대해서는, 거의 사士의 원상은 거의 지금 보신 거예요. 53:53
34절 보죠. 맹자가 이르기를 (이거 없네. 하나 출력해도 되는 일단 거기 여기 다 있는 거니까.) 맹자가 이르기를 (좀 이따 받아가) 진중자陳仲子는 유명한 사람이에요. 진중자陳仲子가 제 나라 사람인데 앞에 한 번 나와요. 여기 재유학당 책에 나오죠. 등문공 하편 10장에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냐면 맹자가 “야 그렇게 살거면 지렁이가 돼야 끝나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가 주는 밥도 막 뿌리고 토해버리고, 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는 집에서 나와가지고 다른 데 가서 살고 맹자가 볼 때는 별로 안 좋게 봐요.
맹자는 이렇게 인의예지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딱 자기가 어떤 선을 정해놓고 그 선을 넘어가면 다 거부하고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진중자는 정의가 아니라면은 제나라를 줘도 안 받는다. 자기가 비위가 틀어지면 제나라를 줘도 안 받을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실제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내가 볼 때 이거는 한 그릇의 밥을 버리고, 한 사람의 국을 버리는 정의다.” 55:00
진중자陳仲子가 원래 이런 사람이다.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막 먹던 거 토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람이다. “그 사람은 친척과 군신 상하를 버리는 거, (사람으로서 인의예지죠) 춘추 오륜(친척과의 관계, 군신과의 관계, 상하 위아래의 관계)을 버려버리고 이렇게 자기만 혼자 고고하겠다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는 죄다.” 일종의 인륜을 버리면서 자신만의 청렴함을 추구하는 건 죄다.
“작은 정의를 가지고 큰 정의라고 믿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냐? 나는 그렇게 못 보겠다.” 이거 이런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스님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어요. 오는 부모 막 돌 던져서 쫓아버리고 고고하게 열반하겠다고 자기는. 유교에서 보면 다 죄예요. 55:47
‘인의예지 버리면서 대체 뭘 얻겠다는 거지? 열반을 얻겠다고?’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는거죠. 그렇죠? 그런 부분. 인의예지도 우리 왜냐하면 인간이 우주적으로 받은 원상이 있기 때문에 원래 어떻게 살아라 하는 그 프로그램을 잘 아는 사람이 잘하면 끝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꼭 뭘 버려야 되고 속세를 떠나야 이루어지고 하는 거는 다 이거는 환상이에요. 56:11
이 도가 왜곡되어와서 지금 도 닦는다고 그러면 다 막 뭐라도 속세를 버려야 되나? 이런 착각이 일어나는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게, 이 유교가 정확히 꿰뚫어 보이는 게,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인의예지를 그대로 나는 표현할 수 있는가? 대자연의 공식에 위배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걸 못 하니까 산에 가가지고 막 이렇게 앉아서, 이렇게 철조망 치고 앉아서 도 닦는다고 하고 있는데, 일종의 이렇게 보면 코미디라는 거. 도가 뭔지는 알고 그러느냐? 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56:50
35절에 도응桃應이라는 사람이 이제 제자인데, “묻기를, 순舜이 천자天子가 되고” 이게 유명한, 35절은 진짜 유명해요. 순舜이 천자天子가 돼가지고요(임금이 됐을 때), 고요皐陶는 순舜의 아주 드림팀 중에 하나예요. 유명한 신하 중에 하나예요.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었고” 고수瞽瞍가 여기서 보면요, 고요皐陶가 사士가 됐다고 돼 있죠. 왜 선비인데 법관인가? 하면 이게 도끼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죠? 57:16
이때 지금 한문으로는 고요皐陶가 사士가 됐다고 돼 있어요. 근데 지금 법을 맡은 사람을 말하거든요, 문맥상에서 분명히. “고요皐陶가 법관이 돼가지고, (고수瞽瞍는 순舜임금 아버지입니다) 고수瞽瞍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이제 괜히 도응桃應이 이런 질문을 해서, 이게 조선시대 내내 화제가 되고, 이거는 중국의 유교 역사에서 내내 이게 화제가 돼요. 시비거리가 되고. 57:36
다산은 “이거 틀렸다. 맹자가 쓴 거 아니다”라고 부정한 게, 이거 엉터리다 라고 하세요. 보세요, 어떤 말인가. 제가 뒤에 구봉 선생이 해놓은 걸 해놨어요. 구봉 선생이 이거에 대해서 써놓은 게 있어서요. 왜냐하면 구봉 선생이 자기 집안이 걸려가지고 도망가야 돼서 튀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변명하려고 고수瞽瞍가, 순임금이 고수瞽瞍 업고 튄 거랑 같은 거냐? 이런 시비가 붙으니까 자기가 답이, 누가 와서 그런 걸 따지니까 답한 게 있어요. 58:07
아무튼 보세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순임금이 천자天子고, 고요皐陶가 신하가 법관이고, 아버지가 살인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맹자가 법대로 집행할 따름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도응桃應은 다른 대답을 아마 생각했겠죠, 자기 나름에는 이해가 안 되니까. 도응桃應이 “그렇다면 순임금이 금하지 않을까요?” 과연 그게 법대로 집행할 수 있을까? 이게 의문이 됐던 건데. 포청천 보면 바로 개작두죠. 포청천에서는 왕족이라고 봐주지 않는데요. 58:36
그렇죠? 그 관념으로 한번 봐요. 그러면 “순임금께서 금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맹자가. “순임금이 어떻게 금할 수 있느냐? 고요皐陶는 받은 바가 있다.” 그러니까 직책을 받았는데, 자기가 너는 이런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사형을, 작두를 쳐라 라고 해놓고, 자기 아버지 걸렸다고 그걸 막을 수 있겠느냐?
“그럼 어떡할까요?” 순임금이 “천하를 버리는 거를 해진 짚신 버리는 것 같이 보고, 아버지 업고 도망가셔서 바닷가에 가서 살면서 죽을 때까지 기뻐하며 즐겁게 천하를 잊으셨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다산이 볼 때 뭐가 의문이냐면 “아니 살인자 업고 튀어서 산다고?” 다산이 볼 때 “고요皐陶가 신하가 돼가지고, 순임금 도망가는데 이렇게 무리하게 법을 집행한다고? 순임금이 튈 텐데?” 그럼 한꺼번에 천자를 잃고, 다산이 볼 때는 “이게 말이 되는 짓이냐, 이거 자체가 잘못됐다”라고 봤는데. 그렇게 볼 필요는 없죠. 59:53
실제로 보면요, 그러니까 이걸 잘 이해해야 돼요. 그런데 이걸 말하면 어폐가 있어요, 이말만 가지고는.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인자인데 도망가가지고 아버지랑 즐겁게 살았다. 이걸로 끝나면 뭔가 이상하잖아요? 고수瞽瞍는 뭐야 이게? 1:00:03
거기에 대해서 구봉 선생님이 한 얘기가 있어요. “혹자가 고수瞽瞍가 죽는 것이 마땅할 때 순임금이 몰래 그를 업고 도망가는 게 옳다면, 자식 업고 동생이 형을 업고 도망가는 것도 옳다는 말인가?” 이게 구봉 선생님 얘기예요. 구봉 선생이 원래 그 집안의 죄가 발각돼가지고 집안이 다 도망갔잖아요. 도망다녔어요, 조선 그 안에서. 00:25
이거에 대해서 순임금을 빗대서 뭐라고 지적을 한 거죠. “고수瞽瞍가 죽어야 되는데, 구봉이 죽어야 되는데 몰래 도망가는 게 옳으냐?” 이걸 질문한 거예요. 근데 구봉선생님 답이 재밌죠. “그렇지 않다. 순임금에게 있어서는 옳지만, 순임금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옳지만, 순임금은 아버지 데리고 도망가서 막 어디 가서 살까? 라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게 효자로서 옳지만 이거 고수瞽瞍 입장에선는 옳지 않다. 죽는 것이 합당하면 죽을 뿐이다. 어찌 도망가겠는가?” 00:57
고수는 어떻게 하느냐? 순임금을 잘 타일러서 죄를 받아야 옳다는 거죠, 여기까지 이해해야 완벽해요. 그래야 말이 안 나오지 안 그러면 말이 나올 일이에요. 애매하게 끝났기 때문에 말이. 말이 또 진행이 안 됐으니까. 근데 구봉선생님의 논리는 이거예요. 구봉선생님은 “그래, 순임군도 도망간 거 핑계 대고 너도 도망가려고?” 이렇게 물어보니까 구봉선생님이 “무슨 소리냐! 그 자리에서 죽어야지” 오히려 반대로 치고 나가신 거예요. 01:25
그런 거는 반전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 선조는 영민하셔서 다시 처벌을 번복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도망다닌다. 우리 임금을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 이런 논리를 펴요. “법이 번복될 일이 없으면 억울하더라도 죽어야 옳지만, 우리 선조는 머리가 좋으셔서 지금 한 때 일시적으로 지금 판결을 잘못하신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도망다니면서 버텨야 우리 임금을 죄인을 안 만든다”라는 논리를, 교묘한 논리를 지키는 게 나와요. 01:58
첫 머리, 그러니까 문을 “무슨 소리냐! 죽어야지!” 오히려 세게 나간 거죠. 상대방이 오히려 고소권을 빌미로 구봉을 이렇게 살짝 건드니까, 구봉선생님이 세게 나온 거죠. 이걸 넣어놓은 이유가 여기까지 봐야 논리가 좀 선다는 거예요. 여기서 끝나버리면 좀 이상하죠. 02:15
36번은 요즘도 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이게 결국은 아까의 인仁이에요. 인仁에 거하자는 거예요. 사람은 인仁에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어떻게 얘기를 하냐면 “맹자가 범 땅에서 제 나라로 갔는데, 제나라 왕자를 보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거처가 기운을 바꾸고, 배양함이 몸을 바꾸니 위대하도다. 모두 사람의 자식이 아닌가? 하였다.” 02:43
말 어렵죠. 뭐냐면 내가 이제 엘지(LG회사)를 다니는데 우리 회장을 만났더니 회장이 말투가 거만하고 막 이렇게 사람의 포스가 있더라는데, 삼성을 갔는데 삼성에 거기 왕자를 만났더니,아들을 만났더니, 엘지의 왕자급을 만나고 삼성가의 왕자를 만나도 똑같더라는 거예요, 말투는. 노는 물이 같으니까.
그러니까 저거 다 사람의 자식인데 어떻게 똑같이 됐지? 이유가 뭐겠냐는 거예요. “거처, 환경(자란 환경)이 기운을 바꾸고 저렇게 포스를 바꿨고, 배양하면(먹고 마시고 한 게) 그 사람을 배양해주는 모든 것들이, 옷 입고 먹고 마시고 한 게 저 사람은 저렇게 몸을 바꿨구나!” 똑같더라는 거예요, 목소리 말투도 비슷하고. 옛날 춘추전국시대의 왕들이. 03:40
요즘 보면 그렇죠. 노는 물이 다르니까 거기서 놀다 보니까 이상한 포스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맹자가 이르기를 왕자의 궁실과 수레와 말과 의곡이 (말 타고 집, 다 환경이죠) 남과 더불어 대부분 남과 더불어 한 가지이다. 그러나 왕자가 저와 같은 거는 그 거처함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물며 천하의 넓은 거처에 사는 자는 오죽하랴” 04:14
그러니까 궁실·수레·말·의복은 그렇게 차이 안 나더라는 거예요, 맹자 말이. 근데 거처함이 다른 것 같다. 사는 곳이 달라서 일반 신하들 사는 곳에 살지는 않으니까. 이 왕궁에 살잖아요?그렇죠. 지금 같으면 자금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 안에 살다 보면 달라진다는 거예요. 04:43
그래서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이거예요. 뭐냐면,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지면 포스가 바뀌더라는 거예요.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맹자는. 뭐냐면 “하물며 천하의 넓은 거처에 사는 자에 있어서는 오죽하랴” 이 말이 포인트예요. 04:57
왕 자식들끼리 서로 포스 비슷하더라 라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인仁에 거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천하의 넓은 곳이 인仁이에요, 지금 천하광거天下之廣居가. 그렇죠? 늘 인仁에 사는 사람은 포스가 어떨까? 그러면 다 비슷하겠죠. 성인들끼리는 다 비슷하다는 걸 말할 수 있죠, 알수 있죠, 우리가. 05:13
왕자들끼리 거처하는 곳이 같다 보니까, 다 타워팰리스에 살다 보면 비슷해지는데 우리는 다 인仁에 살면은 개성이 달라도 비슷하게 되겠죠. 그 비근한 예를 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노나라 임금이 송나라에 가서 (임금이 송나라 갔는데) 질택의문垤澤之門, 송나라 성문에서 누구를 부르니까 문 지키는 자가 말하기를 이분은 우리 임금이 아닌데 어찌 그 소리가 우리 임금과 같은가 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거처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는 곳이, 환경이 비슷하니까 포스가 비슷해져서 목소리도 비슷하게 나더라.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게 유명한 거예요. “거처가 기운을 바꾸고, 거이기居移氣 양이체養移體 , 먹고 마시고 하는 게 그 몸을 바꾸더라”하는 거예요.
배양하는 정도에 따라 그 몸이 바뀌더라 하는 이게 이제 되게 유명한데, 이 글을 보다가 하필 우연인데, 이걸 보다가 그날 『운곡집』을 찾아가지고 폈는데, 『운곡집』 딱 시작이 이걸로 시작해요. ‘거이기居移氣 양이체養移體다’하면서, “제왕의 배양법은 달라야 한다”해서 운곡 송한필 선생이라고, 이제 구봉 선생님 동생인데, 이분이 이제 써놓은 ‘제왕의 의복’, 제왕은 뭐 먹어야 되고, 제왕은 칠정은 어떻게 조절해야 되고, 제왕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되고, 쭉 써놓은 게 있는데, 시작할 때 문구가 “제왕은 거이기居移氣 양이체養移體라 일반 사람과는 이미 포스가 다르다. 그래서 제왕은 남다른 배양을 해야 된다”하면서 이렇게 쭉 논리를, 제왕의 글을 써놓은 게 있어요. 06:54
제왕의 양생법에 대해서, 배양법에 대해서. 이 문장이니까 조선시대 선비들도 또 그렇게 많이 인용을 하는 글이죠. 알아두시면 좋죠. (지금까지 내용에서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좀 질문 받고 끝내죠.) 1: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