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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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7일 (목) 20: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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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6. 04. 02. 土.
게시일자 2016. 04. 21.
동영상 길이 1:00:20
강의 중 인용 도서 화엄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INHBGJ5ei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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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 페이지, 열 장 되죠. 열 장. 열 장에 담긴 내용들을요 정확히 숙지하고 여러분 삶에 그대로 소화해야 돼요. 그냥 삶에 이게 반영되지 않으면 안 돼요. 선을 닦는다고 짐 산에 들어가서 앉아 계시고 그럴 때가 아니에요. 예. 여러분이 사는 삶의 현장이 도량입니다. 여러분 마음자리가 도 닦는 자리지, 마음 벗어나서 도(道) 닦을 데가 없어요. 여러분 마음에서 도를 닦고 마음을 어떻게 닦을 거냐 하는 여러분의 답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그걸 24시간 여러분이 하고 계셔야 돼요. 절대 끊어지면 안 된다. 가 아니라 24시간동안 끊어졌다 또 이어졌다 하면서 여러분 삶에서 계속해서 닦여지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오늘 하루 잘 닦으셔서 오늘 보살도 잘 하시고. 닦인 만큼 여러분이 또 이 밝아집니다. 예. 닦음, 닦은 만큼 더 부, 더 보살이 돼요. 더 부처가 되고. 내일은, 오늘의, 오늘 쌓아 온 또 내공으로 내일 또. 오늘 쌓은 복덕 공덕으로 내일의 보살도를 내일 아침에 또 열어 가는.

그러니까 보살은 잠잘 때 어떻게 자야 돼요? 잘 때. 내일 아침 또 보살도 할 걸 기대하면서 자는 거예요. 참나로 돌아가는 거예요. 잠 잔다는 건 참나로 돌아가는. 그래서 충전이 되면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또 내일을, 그 날 해야 될 6바라밀의 어떤 지혜가 여러분을 인도합니다. 오늘 이거 못 하면 나 오늘 하루 제일 찜찜하다. 오늘 이거 못 하면 나 산 거 아니다. 하는 게 여러분을 또 깨자마자 인도해요. 그럼 다시 또 가슴 뛰는 삶을 사시는 거죠. 고걸 이루기 위해서 또 머리를 굴리고 연구하고 꼼수도 부리고 하는 겁니다. 예. 그래서 항상 이러게 이런, 삶에서의 보살도가 구현되지 않는 수행, 산에 가서 각 잡고 열두 시간씩 24시간씩 삼매에 들어있다. 그거는 6바라밀 중에 선이라고 하는 어느 한 분야에 대한 수행만 계속 하시는 거. 고시생이 한 과목만 100점 나오고 다른 과목 다 과락 나오면 합격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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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 합격하시려면, 보살도 합격하시려면 자, 여기 여러분 에고의 세계고 여기가 여러분 참나의 세곕니다. 불교 얘기하면서 참나 얘기하면 부르르 떠시는 분들 있어요 “부처님은 무아라고 했는데 참나라고 안 했는데.” 그, 불경을 제대로 들여다 보세요. 일단 초기 부처, 초기 불교 때 경전 가지고 일단 대승불교를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 저는 초기불교식 가르침, 소승불교랑 대승불교는 빨리 결별하라고 제가 말씀드린 적 있죠. 예. 4주 안에 빨리 이혼하라. 그 둘이는 대화를 나누면 안 돼요. 나누실려면요 두, 두 가르침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원만하게 아시는 분 아니면 대화를 함부로 섞으면 안 돼요. 왜냐, 다 엉켜버려요. 왜.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 경전을 새로 만들어 낸 종교예요.

그래서 법화경에서 소승불교식 가르침에 대해서 석가모니 본인이 등장해서, 법화경에서, 물론 후대에 만든 경전이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그 때 대승 가르침을 바로 너희들한테 가르쳐 주면 너희들이 정신착란을 일으킬까봐 안 가르쳐 줬다.”고 나와요. 즉 완전히 다른 가르침이라는 거예요. 이걸 섞고 계시면 다 엉망이 됩니다. 까 여러분은 당당하게 참나라고 하셔야 돼요. 참나를 참나라고 못 하고 무아니 뭐니 자꾸 돌려 버리면요 안 됩니다. 무아라는 건요 이 에고가 무, 에고가 실체가 없단 얘기예요. 무아론이라는 거는. 초기경 다 뒤져보세요. 실제 초기경에 들어가서 무아론을 분석해 봐도 그 때 무아라는 거는 5온의 자아, 5온의 자아라는 거는 실체가 없다 하는 겁니다. 5온의 자아, 색수상행식 있죠. 예. 색깔 물질. 색깔 물질(=色) 느낌(受) 생각(想) 행 의지(=行) 그리고 이 모든 거를 따지고 있는 식별. 그렇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그리고 이 식이라는 건요 이 모든 거를 분별하는 의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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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물질을, 물질을 경험하고 느낌을 경험하고 생각을 경험하고 의지를 경험했잖아요. 에고의 이런 경험을요 에고가 스스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요거는 참나의 알아차림이 아니고 알음알이에요. 알음알이로 다 분석하고 있어요. 이 모든 게 여러분의 에고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이 여러분의 이 에고라는 건요, 석가모니는요 이 참나 세계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안 했어요. 여길 열반이라고 부르셨잖아요. 열반 자리라고 부르고 이 자리에 대해서는요 “색수상행식을 떠나면 열반에 도달한다.” 이렇게만 설명했어요. 색수상행식을 싫어하여 떠나면 열반에 도달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를 버리면 청정한 열반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럼 열반에 대한 묘사가 뭐였죠? 탐진치가 여긴 없다. 탐진치 없으면 그냥 열반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참나에는요 탐진치 없어요. 자꾸 참나를 이해 못 하는 분들이 이 에고로 생각하세요. 이 소승불교 분들은 병이 걸린 게, 어떤, 참나라도 나라는 말만 나오면 다 오온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오온이 아니라는데. 오온(五蘊)을 다 버렸을 때 얻어지는 여러분의 순수 상태를 참나라고 하는 거예요. 에고의 나가 아니라. 여러분의 의식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나라고 하는 거. 이 때 오온 중의 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이 오온의 식을 가지고, 이 오온의 색수상행식을 통틀어서 이 오온이라는 게 나라고 생각하고 사는데 “아니다.” 붙, 석가모니가 두 번째 설법하셨던 무아상경에 보면요 제자들한테 이, 이 얘기밖에 안 해요. 오온을 하나씩 다 꺼내서 “물질이 너냐? 너 아니다.” 왜, 왜 그런지 아세요? 근거가 뭔지 아세요? 무상하니까 너 아니다. 색깔, 무상하니까 너 아니다. 느낌, 무상하니까 너 아니다. 석가모닌 벌써 뭘 전제하고 있죠? 무상한 거는 영원한 니 께 아니다. 라는 논리로 접근해서 오온의 세곈 다 무상하니까. 즉 여기서 식은 철저히 무상한 식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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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한 식(識)을 예로 들면서 “그것도 너 아니다.” 그래서 무아예요.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에 나온 이 깨달음을 대승불교에서 뭐라고 불렀습니까. 나중에. 아공사상이라고. 여기의 我는 에곱니다. 에고의 자아라는 건 사실 실체가 없다. 공하다. 이게, 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게 아공의 깨달음이에요. 여기까지 얻으시면 여러분 자유가 옵니다. 지금 여러분 왜 사는데요? 내 에고를 위해서 살고 있죠. 에고를 더 빛낼려고. 에고를 더 행복하게 만들려고. 에고에게 성취감을 주려고. 에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려고. 이렇게 사는데 “내가 그렇게 부둥켜안고 살고 있는 에고가 실체가 없는 거다.”라는 걸 알면 힘이 빠지죠. 모든 걸 내려놓은 상태가 가능해집니다. 그 때 여러분 마음상태가 열반에 도달하게 돼 있어, 열반도 여러분 마음의 상탭니다. 이거는 태국의 아라한 이룬 사람들이 다 증언해요. 열반은 마음의 상태다. 그리고 우리 몰, 본래의 마음의 상태다.

요 얘기를요 이제 글로 공부하신 분들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열반을 참나라고만 부르면 “열반을 왜 오온이라고 하느냐.”라고 해서 또 우겨서 싸움이 나요. 그래서 이, 그러니까 제가 대화 좀 하지 마시라. 둘이 대화를 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일단 각자의 논리에 충실해 보자구요. 오온을 초월하면 무조건 열반이다. 여기까지 부정하실 분 있나요? 대승 공부하신 분 중에 이거 부정하실 분 있나요? “그래. 그게 열반이, 내가 말한, 내가 경험한 참나라는 거다.” 여기서 또 싸움이 시작돼요. 그니까 여기까지만 일단 대화를 해 보죠. 초기불교에선 여기까지. 자, 자, 이 참나의 세계, 그러니까 참나라고 당당히 얘기하세요. 이걸 참나란 의미를 알고 얘기하시면 당당할 수 있습니다. 아트만가 그러면 또 힌두교 나옵니다. 힌두교 아트만이랑 같냐 다르냐. 같건 다르건 불교가 고민할 일이 아니에요. 건 힌두교의 문제지. 왜 불교가 거기까지 가서 따지고 다니세요. 힌두교 공부 해 보신 적도 없으면서. 모르는 건 말 안 하는 게 자명한 겁니다. 모르는 건 말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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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건 다르건. 불교 안에서요 대승불교 옛날 보살들도 이런 오류를 범해요. 힌두교 아트만 얘기만 나오면 불교는 아무튼 이걸 비방해야 되거든요. 이걸 비방함으로써 불교는 자아를 정립해 왔어요. 자신들의 어떤 입장을. 그러니까 뭐라고 하냐면 “아트만, 상주불변이라고 한다. 그런 게 어딨냐.” 비판한 다음에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우리는 아뢰야식만을 인정한다.” 그럼 아뢰야식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는지 아세요? “상주불변.” 금 장난하십니까? ㅎ 그래서 묘사가 똑같애요. 성유식론 뒤져보세요. 상주불변(常住不變)이 아뢰야식이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서 그 안에서 힌두교의 아트만을 한문으로 뭐라고 짐, 성유식론에 번역돼 있냐면 신아(神我)라 그래요. “신령한 나라고 하는 이 설은 말도 안 된다. 우리 안에 영원한 게 있다면 어떻게 영원하지 않은 게 나왔겠는가.”고 막 욕해요. 그 다음에 우리 아뢰야식은 상주불멸이라고 또 그래요.

그 하, 이게 보고 있으면 웃깁니다. 원효 스님은 대놓고 법신은 상주불변하니까 법신이라고 하고. 그 아트만 나오면 또 경기 내요 “아트만은 아니라니까.” 이런 얘기는 계속 듣고 계실 이유가 없죠. 그러건 말건 여러분이 신경 쓰실 이유가 없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시라. 고민하지 마시라. 아트만이건 아니건 여러분이 고민하실 일은 아니고. 여러분이 아셔야 할 일은 여러분 안의 참나를 깨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의 참나를 깨쳐서 에고를 초월한, 에고가, 우리가 본래, 나의 자아가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었다면 더 근원적인 실체는 뭘까요? 참나예요. 이 참나 세계에서 결국 현상계가 펼쳐지고 있구나. 하는 거를 깨치시는 이 내용이 법공이라고 합니다. 法空. 보세요. 법이라는 건 이 에고를 포함한, 이 에고가 살아가는 세계, 에고와 세계. 주관과 객관의 세계 모두를 통틀어서 법이라고 합니다. 그 법을 이루고 있는 건 사실 색수상행식밖에 없어요. 이 色의 세계가 객관이잖아요. 수상행식은 주관이고. 느낌이니 생각이니 따지는 거는 이 주관의 세계죠. 에고의 작용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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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라는 건, 에고의, 어떤 타자로서 전제된 거죠. 대, 대상으로서. 그래서 에고가 살아가는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 에고가 벌이는 수많은 작용들 전체를, 사실 색수상행식일 뿐인데 전체가 사실은, 보세요. 오온이 나라고 여겼던 그게 공(空)하다는 거(我空)랑, 이건 오온 자체가 공(空)하다는(法空). 오온도 따져보니까 그 친구들이 공한데. 자, 소승불교식 공(空)은요 진짜 공(空)하더라는 거예요. 실체가 없더라 하는, 말은 비슷합니다. 자아의 실체가 없더라. 뭔 말일까요. 허망하더라는 거예요. 우리가 내, 나라고 여겼던 것들이 결국 오온인데 따져 봤더니 그 놈들이 다 무상한 것들이고 번뇌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고 내 뜻대로 되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나라고 고정된 자아라고 여겼던 그거는 실체가 없더라. 정도예요.

법공에서의 공(空)은요 “만법이 실체가 없더라.” 이 말은 다른 의밉니다. 말은 같죠. 여러분이 짐 보고 계신, 짐 제 모습. 색깔이죠(色). 제 소리. 저한테서 무슨 냄새가 짐 느껴지시진 않겠지만 이 오, 여러 가지 오감의 느낌들, 거기에 대해서 이제 여러분이 저를 보시면서 느끼는 느낌(受).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뭐라고 따지고 계시죠(想). 제 얘기를 들으면서. 고 여러분 마음이 움직이고 계세요(行). 어떤 업을 짓기 위해서 움직여요. 제 말을 들으시는 중에. 그리고 이 모든 거를 분석하고 계세요. 식별하고 계세요(識). 자, 이 모든 작용이, 통틀어서 여러분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 만법의 작용이 실체가 없더란 얘긴 뭔지 아세요? “다 참나의 작용이더라.”예요.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참나의 작용이더란 의밉니다. 아공과 법공은 의미가 원래 달라요. 말은 같애요. 자아에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상, 아공. 만법에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상, 법공. 의민 다릅니다. 왜냐면 하나는 소승의 이론이고 하난 대승의 이론이기 때문에 이론이 달라요. 그래서 뭐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본래 공(空)하더라.” 이 읨, 의미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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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이 본래 참나의 작용, 공(空)의 작용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실체가 없다. 하는 겁니다. 오온 자체에는. 그러니까, 대신에 뭐예요. 그러니까. 그럼 거기서 끝나야 되죠. 만약에 이, 이 초기불교식이라면 만법이 본래 실체가 없다 하면 거기서 끝나야죠. 그런데 뭐라고 나가요? 色이 본래 공(空)이요 공(空)은 또 色이다. 라고 나간단 말이에요. 두 개가 하나로 돌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다 공(空)의 작용이니까. 이건 대승의 논리라 소승에서 이해 못 하는 논립니다. 왜냐면 소승에서는 참나의 작용으로서 현상계를 보지 않아요. 무상하고 괴롭고 내 것이 아니니까 빨리 버리고 열반의 세계로 떠나야 되기 때문에. 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다가 이제 이, 이 아공 차원에서는 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다가, 법공 차원에선 다시 껴안는 겁니다. 껴안으면서 대승이 시작돼요.

그래서 대승 보살도는 현상계 버릴 생각을 하겠습니까? 보살 한다면서 현상계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다면 반야바라밀이 부족한 거고 공성(空性)의 지혜가 부족한 거고 색즉시공을 깨닫지 못 한 거기 때문에 보살의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이 보살 자격을 만들어 가실려면 뭐 화두도 닦고 염불도 하고 다 해야 되지만 그거는 6바라밀 중에 선(禪)에 국한돼 있어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반야라는 나머지 요소까지 다 갖춰 줘야, 그리고 그래서 여러분 안에 있는 참나의 공덕이, 무진장 공덕이 밖으로 원만하게 터져 나와야 됩니다. 지금 천정에 보시면 요거 점 세 개 찍혀 있죠. 요 여러분 참나 자리 그려놓은 겁니다. 여러분 참나 안에는요, 요거를 첫 째로 체상용으로 볼 수 있어요. 여러분의 참나 안에는 세 가지 작용이 있는데, 세 가지 위상이 있는데. 참나의 본체(體)와. 참나 안에 들어 있는 형상(相)은 뭘까요. 참나 안에 들여다보면 하나가 아니라 보시 지계 인욕,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온갖 선(善), 여기서 나오는 게 온갖 선(善)이 되기 때문에 만행이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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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萬行)이, 만 가지 수행이 다 어서 나오는지 아세요? 여기서 나와요. 그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6바라밀의 다른 이름이 육도(六度)예요. 바라밀을 한자로 그냥, 우리를 열반으로 건네준다고 그래서 도(度) 그래요. 육도만행이라는 게 여기서 나온. 즉 6도가 펼쳐져서 만행이 되는 거예요. 6바라밀만 열심히 하시면 온갖 선행은 다 나와요. 거기서. 온갖 악행은 6바라밀 부족에서 나와요. 근데 6바라밀 중에 선정만 강조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균형이 깨져 버리죠. 선(禪)만 강조하고 보시니 지계니 이런 걸 다 무시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예. 참나 공덕이 원만하게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만행이, 제대로 된 만행이 못 나옵니다. 예. 균형이 어그러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참, 이게 왜 불교에서 점 세 개를 꽂아놓을까요. 여기다가. 셋이 균형을 이뤄야 돼요. 6바라밀은 6바라밀대로 균형을 못 이루면 엉망이 됩니다. 이 셋은 또 균형을 이뤄야 되고. 요 6바라밀을 줄이면 뭐가 될까요. 지혜 선정 계율. 계정혜도 셋입니다. 셋이 균형을 이뤄 줘야 돼요. 한 쪽이 무너지면 큰일나요. 보세요. 지혜는 네비게이션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운전하는 네비게이션이 있고. 그럼 운전자는 어떻게 돼야, 해야 돼요? 선정. 깨어있어야 돼요. 그리고 지계. 바퀴가 열심히 굴러줘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이 보살로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보살은요 항상 어느 순간에, 지금 어, 지금 앉아 계신 자리에서 그대로 선정 상태, 깨어 계시, 셔야 되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되고. 운전자가. 그 다음에 지혜로워야 돼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는 게 모두를 살리는 길인지 알고 계셔야 돼요. 그 다음 계율, 그대로 실천을 하고 계셔야 돼요. 지금. 그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그 방향으로 말을 하고 그 방향으로 행동을 하고 계셔야 돼요. 자, 이 셋이 균형을 잡아야, 삼학이라고 하죠. 이거는. 三學이 이루어 져야 여러분이 붇, 보살이 되고, 불보살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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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확장판입니다. 삼학의 확장판은 계정혜에다가 이제 보시 지, 보시 인욕 정진을 더 추가한 거예요. 이러면 이제 원만한 공덕의 정밀한,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살펴지게 됩니다. 자, 그러면 지금 저 천장에 박혀 있는 저건 뭐냐. 이 모든 걸 다 포함한 말로서 자, 참나는 본체가 텅 비어 있어야 되고 그 안에 이런 삼학과 6발이, 삼학과 6바라밀의 온갖 좋은 공덕상을 갖고 있어야 되고 그걸 가지고 우주를 굴릴 수 있어야 돼요. 이 중에 하나만 빠져도 온전한 참나가 아닙니다. 그니까 참나를 실체로서 정확히 규정을 못 하면요 이런 그림을 그려 봤자예요. 이건 여러분이 지금 이 우주를 이 참나가 움직이고 있는 어떤 현상으로 보고 이 우주의 실체로서, 본질로서 참나를 설정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참나를 이렇게 박아 놓고 또 “무아론 아닌가.” 했다가 이케 “참나는 없다.” 갔다가 왔다 갔다 해 버리면요 엉망이 됩니다. 여기 분명히 얘기하고 있어요. 참나는 본체는 공(空)하지만 그 안에는 만법이 갖추어져 있어서 그 작용으로 우주가 굴러가고 이 작용대로, 인간은 이 작용대로 안 살아요.

그런데 우주가 다 참나 뜻대로 굴러가는데 인간이 꼭 깽판을 치니까 인, 보, 보살이라는 게 별 게 아니라 “참나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자.”예요. 인간으로서. 중생으로서. 보살은 중생이잖아요. 깨달은 중생이지. 중생으로서 참나 뜻대로 사는 중생이 돼 보자 하는 겁니다. 작용 그대로 살아보자. 그럴려면 우리 안에 있는 참나를 안 찾고 참나 안에 있는 본체와 그 안에 있는 공덕상을 우리가 무시하고 어떻게 작용을, 작용만 취할 수가 있습니까. 그 본질대로 우리가 굴러가는 건데요. 그래서 참나 안에 새겨져 있는 우주의 근본 원리대로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작용을 부릴 때 우리가 보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깨어 있음이 있고. 보리. 밖으로는 중생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보리살타라고 해서, 살타는 중생입니다. 보리. 보리. 밖으로는 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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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는 체상용이 하나인 참나를 깨치고 있고 밖으로는 육도만행을 하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하는. 선방에 앉아서 혼자 앉아 계시는 거는요 온전한 보살도가 아닙니다. 이미. 과목 중에 선(禪)이라는 과목만 특수하게 닦고 계신 분이에요. 6바라밀을 원만하게 닦지 않으면 인격이라는 게 계발이 안 됩니다. 인격의 여섯 가지 요소예요. 여러분이요 선(善)을 하고 싶으면, 선악 중에 선이요. 진짜 보살로서 선(善)을 하고 싶으면요 이 여섯 가지 요소를 다 점검하지 않으면 절대 선행이 나오지 않습니다. 보시, 보시라는 게 꼭 남한테 뭘 줘서가 아니라 남의 이익을 내 이익처럼 실감나게 위해줄 수 있어야 돼요. 자타불이의 마음으로. 남을 나처럼 진짜로 위하고 있느냐가 보시의 핵심입니다. 지계, 그래서 남한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어야 돼요. 요것, 요것 따져서 지킬 줄 아셔야 돼요. 인욕, 진실이거나 진리인 경우에 흔쾌히, 무조건 OK 하고 수용하실 줄 알아야 돼요. 여러분 에고가 아무리 싫어하는 상황이 펼쳐져도 진실이고 진리라면 받아들이셔야 돼요. 그게 인욕입니다.

정진,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안으로 선(禪)만 닦는 게 아니라 선(禪)을 통해서, 선(禪)은 당연히 기본입니다. 선(禪)을 통해서 깨어서 이 순간에 현상계를 좋은 카르마로, 선업으로 갈 수 있게 수를 놓을 수 있어야 돼요. 6바라밀을 통해. 현상계를 바꿀 수 있어야 된다구요. 카르마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매 순간 쉬지 않고. 이 한 보살이 카르마를 바꿔 놓음으로써 나라가 변하고 우주가 변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안 계셨으면 여러분 당당하게 독립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다른 나라가 그냥 독립을 줌, 시켜주면 여러분이 당당하게 그 나라 주인 노릇을 못해요. 그래서 김구선생이 광복군 훈련 시키고 할 때에 한반도가, 일본이 학, 항복 선언 해 버리니까 통탄하셨잖아요. 좀 더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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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의 힘으로 들어가서 찾았어야 되는데 외세의 힘으로 찾고 나면 외세에 또 끌려가야 되니까. 진짜 독립이 못 되니까. 이런 이게 다 카르마를 아는 분들의 얘기예요. 그리고 독립운동 초창기에 한 분들은 진짜 독립 될 거 기대도 못 하고 한 분들 많습니다. 나의 이런 작은 의거가 좋은 카르마를 형성시켜 주기를, 나중에 우리 나라가 독립했을 때 그 때 그 후손들이 당당하게 독립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자기 목숨 바친 분들 많습니다. 도인 아니라도 일, 도 닦은 사람들은 아니죠. 그 분들이. 그래도 그 분들이 보살이에요. 6바라밀을 그대로 하는 분이 보살이에요. 관념을 좀 바꾸세요.

“어떤 분이 6바라밀 잘 한다. 참 인격자다.” 그러면 “어오 그 분이 보살인가보다.” 해야 되는데. 오 하다가도 “어느 분은 뭐 자면서 유체이탈을 한대.” 그러면 “와.” 이거는 보기 드문 현상이거든요. “전생을 본대.” “와.” 금 그게 더 신기해 보이죠. 앉아서 자고, 뭐지, 절대 누워서 안 주무신대. 와. 고런 재주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데 보시면 거기 많이 나옵니다. 별의 별 신통자들이 다 나. 인간은 원래 신통이 많아요. 이, 우리 안에 있는 참나라는 건요 못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이 중에 어느 일부만 발현하면 다 신통자가 돼요. 제가 본 신통자는 이불을 던져서 침대에 딱 맞게 맞춥니다. 멀리서. 포크레인으로 계란을 갖고 놀아요. 포크레인 끝까지 의식이 가 있단 말이에요. 신통자예요. 여러분 삶에서 신통 안 부리고 안, 못, 사람 못 삽니다. 다 신통이에요. 여러분 이거(팔) 드는 것도 신통이에요. 아니, 정신이 들으란다고 왜 물질이 지금 올라오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염력을 익힌 적도 없는데. 타고나서 신통 부리고 있어요. 지수화풍 四大를 뭉쳐서 여러분이, 이거(몸) 땅의 일붑니다. 땅의 일부를 여러분 몸인 양 해 가지고 지금 끌고 다니시면서 살고 계신데. 정신이.
22:05
그 신통을 부리면서, “누가 뭐 했다.” 그러면 “하.” 그런데 그 신통 중에 제일 신통은, 참나가 뭐 하라고 그래요? 6바라밀 잘하라고 그래요. 인간들끼리 좀 잘 지내라 그래요. 제발. 고 다른 중생 좀 괴롭히지 말고. 요 얘기를 못 지켜요. 이거 외에 다른 거에는 다 열광하는데 6바라밀 하자 그러면 마음이 착 식어버립니다. 산에 가서 내가 천상계를 왕래하는 신통을 얻어 보겠다. 그럼 왠지 뭔가 불끈 힘이 나요. 데 산에 가서 내가 1년 2년을 아주 바쳐서 6바라밀의 달인이 돼서 내려오겠다. 이건 의욕이 안 나죠. 에고가 별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에 우리가 좋아하는 신통이라는 것도 에고가 좋아하는 걸 따라가고 있더라는. 그런, 지금 그게 올바른 상황이냐 이거죠. 우리가 도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에고 충족시켜 주려고 그렇게 도 닦은 분들이 아닌데. 참나 원(願) 풀어주려고 사실은 도 닦은 분들인데, 그 분들의 진, 그 본체를 알아볼 수 있는 여러분의 안목이 생길려면 참나를, 여러분 내면의 참나를 먼저 이해하시지 않고 어떻게 이, 우리가 닦아야 할 보살도가 보이겠습니까. 예, 이게 제가 말씀드리는 어떤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체상용, 이거를 다른 식으로 또 뭐라고 하냐면요 법신(體), 相은 보신, 用은 화신 그럽니다. 여러분 안에 법신 보신 화신이 갖춰져 있어요. 여러분 안에 진리의 본체가 들어 있고, 기독교에서는 성부(體) 성령(相) 성잡(用)니다. 여러분 안에 진리의 본질이 들어있고, 법신이라는 건 진리 덩어리가 들어있고. 보신, 모든 카르마를 경영할 수 있는 그 힘을 가진 정신이 들어있고. 밖으로 화신, 실제로 여러분 현상계 짐 여러분의 모습으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요 세 가지 이 힘이 이 하나의 참나의 근원 안에 모두 들어있다는 거를 이해 못 하시고 못 받아들이시면요, 참나의 힘이 아닌데 무슨 수로 6바라밀을 하고 무슨 수로 현상계를 경영합니까.
24:03
현상계에서 무슨 수로 보살도를 해요. 참나, 참나를 못 믿고 참나랑 친해지지 않곤 절대로 보살도 못 합니다. 그런데 초기불교는 참나 얘기가 없단 말이에요. 열반으로서 그냥 에고를 버리고 열반 얻어란 얘기만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보살도는 에고를 버릴 생각이 없잖아요. 오온이 없으면 보살도를 어떻게 해요. 오온이 없는데 삼학은 어떻게 하며 6바라밀은 누가 합니까. 오온이 하는데요. 다 오온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오온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살타, 중생의 부분을 절대 버리지 않아요. 보리, 깨달음의 부분도 절대 버리지 않아요. 그래서 유마경에서 항상 윤회계에 머물면서도 항상 열반에 머물고, 열반에 머물면서도 항상 현상계에서 6바라밀을 실천하는 존재가 보살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보살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정도(正道)를 제가 논해 보겠다는 건 이 보살이 어떻게 닦여서 이루어지고 또 어떻게 살아가는 존잰지, 저는 닦는다보다 살아간다는 말을 좋아해요. 그냥 살아가시는 모습이에요. 여러분은 좋건 싫건 주은, 죽는 그 날까지 사셔야 되잖아요. 어떻게 사실 겁니까? 어떻게 살아도 여러분은 카르마를 짓게 돼 있어요. 업을 짓게 돼 있어요. 어떤 업을 지으실 겁니까. 이거 그냥 정하는 자리예요.

그러니까 보살이라는 거는 여러분 삶의 방향, 더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게 보살돕니다. 보살의 길이라는 거는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으로서 중생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건가. 그렇게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6바라밀의 힘을 기르게 돼 있어요. 여러분 참나 내면에 있는 이 공덕을 밖으로 여러분이 갖추지 않으면 절대 나오지 않아요. 여러분 안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참나가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고 그 안엔 전지전능의 힘이 있고 지혜가 있고 자비의 공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밖으로 안 나오잖아요. 에고를 통해 안 나오잖아요. 요게 화두나 이런 염불 해서 한 방에 만나면 이게 그게 어느 날 다 나올까요? 절대 안 나옵니다.
26:01
여러분 카르마를 바꿔야 돼요. 참나를 만나는 거는 카르마를 본격적으로 바꾸기 위한 시작입니다. 그래서 견성이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견성이 끝이 아니다. 하는 것도 한 번 제가 말씀 드립니다. 보살도는 견성이 시작이에요. 참나를 알아야 그 참나, 보세요. 참나를 알아야, 참나랑 친해져야 참나 안에 있는 지혜와 공덕과 자비를 알게 되고 그 힘을 꺼내 쓰면서 이 에고도 보살로서 거듭나게 되는 겁니다. 이런 당연한 공부의 순서를 무시하고 덤벼서는 절대로 훌륭한 보살이 될 수 없다. 이런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이 유식학 이론에서도요, 유식학, 대승불교 이론에서 아주 그 중점을 둬서 설명한 부분이 있어요 “우리 안에는 본래적으로, 선천적으로 광명한 무루(無漏)의 종자, 선(善)의 종자들이 들어있는데, 절대로, 에고가 그런 업을 짓기 전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라고 돼 있. 에고가 선정바라밀을 닦아야만 선(禪)이, 참나 안에 있는 이 깨어있음의 힘이 나오게 돼 있고. 에고가 보시의 바라, 보시바라밀을 닦아서 보시의 공덕을 쌓아서 보시를 할 수 있는 카르마를 만들어야만 그게 보조적인 연, 인연 중에서 간접 원인이 연(緣)이죠. 직접 원인은, 이미 보시 할 수 있는 능력은 여러분한테 있어요. 因은 있는데, 씨앗은 있는데 에고가 연(緣)을 지어줘야 돼요. 도와주는 연이라고 해서 조연(助緣) 그럽니다.

인연을 지어 줘야 보시바라밀이, 보시의 능력이 보시바라밀로 온전히 밖으로 나옵니다. 이게 대승의 기본이에요. 이걸 무시한 이론들은요 한 방에 참나 깨치면 다 나온대요. 안 나옵니다. 절대로. 그 분들이 닦은 건 뭐예요? 선(禪)만 죽어라 닦았기 땜에 선(禪)만 나오는 거예요. 죽어라 선(禪)만 닦았으니까 언제 어디서라도 뭐 자신의 마음 안에서 공적영지의, 고요하되 또랑또랑한 힘이 언제든 나오죠. 언제든 평정심이 나오는 거예요. 고거 하나 얻으신 거예요. 고생을 해서. 보시 지계도 그렇게 고생을 해서 얻어 주셔야 돼요. 보시를 할 수 있는 카르마를 짓지 않으면 여러분 안에 있는 좋은 종자가 밖으로 절대 안 나옵니다.
28:05
이게 대승불교의 어떤 기본 원칙입니다. 그래서 씨앗은 이미 있지만 절대로 여러분 에고의 도움이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견성을 하고 견성한 뒤에 보조적인 연(緣)을 닦아서 6바라밀을 총체적으로 닦다 보면 여러분 참나가 안팎으로 원만하게 나올 때가 있겠죠. 그 때 부처가 된다는 게 유식학 이론이에요. 별 게 아니고. 그 때 앋, 아뢰야식이 다 정화돼서, 아뢰야식 정화라는 게요, 어,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 보면 이렇게 정화된다고 돼 있어요. 화두를 깊은 잠 속에서도, 깊은 잠 속에선 아뢰야식 밖에 작동을 안 하는데, 여러분이 깊은 숙면에 들 때, 꿈을 꾸면 의식이 작동하지만 꿈도 안 꾸는 깊은 밤에는 무의식 중에서 아뢰야식만 작동하는데 그 때 여러분이, 그 땐 나니 남도 없잖아요. 그럼 에고의식도 작동을 안 하고 오로지 여러분을 유지시켜주는 아뢰야식만 작동하는데 그 때 화두를 들 수 있으면 아뢰야식이 정화된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화두만 깊은 잠 속에서 들면 아뢰야식이 정화되는 8지에서 10지 보살 자리가 된다고 하시는데 그거는 말이 안 되는 얘기고 그거는 학당으로 치면 급수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걸로 아뢰야식이 정화됐다는 게 아니예요.

아뢰야식은 어떻게 정화돼요? 대승경에서? 여러분 안에 있는, 6바라밀의 발현을 막는 모든 업장이 정화됐을 때 아뢰야식이 정화됐다고 하는 겁니다. 건 선(禪)의 어떤 일부만 가지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여기까지 제가 간단하게 말씀 드리고. 자, 이제 제목 설명은 끝났고. 이 보살의 길이라는 건 이제 다 나왔죠. 그럼 공부법도 이 안에 이미 다 나왔어요. 그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한 번 설명해 드려 볼게요. 교재의 이 그림 한 번 봐 보실래요? 자, 공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겪는 이 과정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 이제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 시작했는진 모르죠. 어느 겁에, 어, 얼마나 과거에 여러분이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보세요. 사람이 살다가 한 만 겁쯤 되면요 보살도를 이제, 보살도,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가 만 겁 쯤 되며는 이제 한 번 고비가 오고 그 다음에 첫 번째 무량겁, 무량겁을 맞이하게 됩니다. 첫 번째 무량겁을 맞이할 때, 예, 1지 보살이 된다고 돼 있어요.
30:26
이게 경전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이거를 꼭 그대로 누가 거 다 쟀을까요? 그, 전, 대략으로 보세요. 이걸 누가 다 이케 생을 재 보고 진짜 따, 딱 만 겁인지 뭐 9998번 겁이었는지 알 수 없죠. 그런 게 아니라 이치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대충 이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무량겁이 걸린다고 할 때 한 만 겁 정도면 1주 보살에 도달한다는 거예요. 학당에서 말한 1급. 1지는 1단. 급이니 단으로 해야 이해가 쉽잖아요. 그래서 바둑처럼 9급 9단 체계로 설명하는 게 좋고, 화엄경이 딱 거기에 맞아요. 거기 10단이라고 하지만 이 9단 중에 최고수를 10단이라고 하는 거기 때문에 이 체계가 어긋나지 않습니다. 딱 맞아서 9급 9단으로 말씀드리면 처음에 이제 공부 시작한 게 9급이라면 9급이 일, 1급 되는 데 만 겁 걸린대요. 공부할 맛 안 나죠. 제가 봤을 때 이거는요 슬렁 슬렁 했을 땐 거 같애요.

그래서, 예, 만 겁 뒤에 또, 무량겁에서 만 겁 뺀 거만큼 더 하면 1단이 된다. 이러면 누가 공부합니까? 다만 이렇게 한 생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닦아 간다고 봤을 때 이 정도 세월이 걸린다는 거죠. 이걸 의식적으로 집중적으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습니다. 제가 봐선. 그 경전에서도 대승게, 기신론에서도 이래요. 혹 빨리 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만 겁 다 채운 거다. 이 뭔 말인지 아세요? 겪어야 할 건 다 겪어야 된다구요. 다만 이거를 빠르게 겪을 수도 있고, 공부를 했다 안 했다 했다 안 했다 하면 이게 한정이 없는.
32:00
여러분 이거 책 하나도 그래요. 요거, 여기서 여기 한 페이지 제가 읽으시라고 나눠드려도요 어떤 분은 하루 종일 봐도 이해가 안 됩니다. 봤다 안 봤다 봤. 어떤 분은 딱 1분 몰입해서 쭉 읽으시면 내용이 들어오는데 어떤 분은 하루 종일 봐도 내용이 안 들어와요. 봤다 안 봤다 봤다 안. 자, 한 생에서도 공부를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면요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게 또 가요. 오히려 까먹고 가기도 하고. 그런데 집중적으로 공부를, 길을 정확히 알고 몰아서 하면요 레벨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거를, 이걸 이렇게 보지 마시고. 이 정도 비율이다. 라는 것만 보고 저는 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 처음에 9급에 시작하셔서 또 여기(9급 1급 사이)는 이 경전에서 설명이 없지만 간단하게, 이 단계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열 가지 믿음의 단계라 그래요. 대승 경전에선. 예.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그런 데서 보면요, 제가, 밑에 설명돼 있네요. 보실래요? 보살영락본업경에 기원하는데, 화엄경엔 안 나와요. 10신이. 그런데 화엄경에서 10신이 나오는 것처럼 많이 얘기하시는 거는 그, 1주 보살 아래 단계로 10신이 나오는 것처럼 얘기하시는 거는 그런 공부 단계에 대한 얘기를 10신의 단계라고 규정하는 거예요. 대승기신, 어, 대승불교에서. 그래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10신을 대개 어떤 한 단계처럼 전제하는데 그 사실 어떤 구체적인 내용이 없구요, 보세요. 보살영락보, 본업경에는. 신심, 믿는 마음. 두 번째 염심, 늘 진리를 염하려는 그렇게 마음을 챙기는 마음. 세 번째, 밑에 있죠. 10신이라는 구절이 있죠. 자, 정진심, 진리를 향해 끝없이 정진해 나가는 마음. 선정의 마음. 선정을, 이 때도 선정 공부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이, 이 모든 마음들이 아직 진리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에요. 마음을 이렇게 써야 된다는 거죠. 지혜심, 지혜를 닦아가는 마음. 계심, 계율을 지켜가는 마음.
34:01
계정혜가 다 나왔죠. 회향심, 여러분이 얻은 작은 성취라도 내려놓는 마음이요. 그거 내가 했다 하지 말고 내려놓는 마음. 내려놓고 다시 선정에 들면 회향입니다. 회향하는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선정에 드시면 돼요. 모두 내려놓고. 에고가 잘 한 기특한 일을 내려 놓고 선정에 드시면 그게 회향이 돼 버립니다. 호법심, 진리를 보호하려는 마음. 사심, 내려놓는 마음. 평정심이에요. 捨心은 평정심이에요. 모든 걸 내려놓은 상태의 마음. 선정에 든 상태의 마음입니다. 원심, 공부를 더 잘 하기를 원하는 마음. 진리를 깨치기를 원하는 마음. 요 정도 마음이 있는 상태래요. 자, 뭡니까. 진지하게 공부를 하는 마음 정도예요. 10신은. 자, 그러면 10신 과정에서 뭘 닦을까요. 처음 공부해서, 이 대승 경전에서 10신이라고 하는 게 저희 학당에서 홍익학당에서 9급에서 1급에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학당 오셔서 9급에서 1급 되는데 그렇게 많이 안 걸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뭐 심각한 단계로 보지 마시고 9급에서 1급 되는 단계를 지금 10신이라고 이 대승 불교에서 이 단계를 규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1주가 된 뒤에 여기(1단)까지를 10주의 단계라, 이 10주, 또 10행, 10회향이, 이 3 단계가 여기 다 들어간다고 봅니다.

그래서 보세요. 처음 열, 열 가지 믿음의 단계. 그 다음에 열 가지 안정의 단계, 안주의 단계(住). 그 시작이 1주죠. 열 가지 안주 했으면 열 가지 실천을 하고(行). 그 뒤에 열 가지 회향을 하면 1지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1지가 이제 한 칠, 7지 8지 되는데 또 이 정도의 무량겁이 걸려요. 같은 비율의 시간이 걸리고 7지에서 이제 8지 지나서 10지 되는 데 또 이 정도의 비율이 걸려서 10지 보살까지는 3무량겁이 걸린다고 합니다. 자, 요 정도 비중이라는 거예요. 1지 보살 되는 게 이렇게 처음에 어렵습니다. 중생이 1지까지 가는 게 어렵고 1지에서 이제 또 독가, 닦아서 아집을 진짜로 내려놓는 7지 보살 되기가 어렵고 7지 이후에는 이제 聖人의 단계로 살아가는 또 한 겁을 거쳐서 온전한 이제 10지 보살이 탄생한다. 10지 보살이면요 현상계의 부처님이에요.
36:16
중생의 모습을 한 분 중에 제일 높은 분이에요. 까 10지 보살이라고 단순히 보살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 사실 다른 경전에 마, 서 말하는 아미타불 같은 존재들이 화엄경에서는 10지 보살이에요. 다른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은 佛이고 아미타불 모시는 관세음보살만 10지라고 하는데 사실은 둘 간에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관세음보살에 대한 경전에 보면 관세음보살이 원래 부천데 보살로 다시 나왔다고 돼 있어요. 즉, 중생의 모습을 다시 갖췄대요. 중생을 도와주기 위해. 이게 좀 말이 안 되는 얘기지만 그런 얘기들을 들어 보면 불보살 간의 관, 이 간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10지 보살 되며는 실제로 화엄경에서도 “부처의 직위를 부여받았다.”라고 나오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10지 보살은 부처입니다. 성유식론이나 유식학의 이론이나 대승기신론에서는 그렇게 안 봐요. 10지 이후에 또 불지를 따로 설정하지만 화엄경에서는요 10지 보살 되면 “부처의 자리를 받았다.”라고 나와요.

그래서 화엄 10지까지 가는 거 가지고 일단 말씀을 들어보면 3 무량겁을 거치면 여러분은 진짜 이 우주 최고봉의 보살에 이릅니다. 단, 이제 여기까지 말씀드리, 거기는 우리랑 지금 관심사가 아니고, 어떻게 이 과정을 순조롭게 해서 여러분 1지 보살 되느냐가 전 관건이고. 자, 1지도 어렵다. 자, 여기, 1주를 한 번 노려보시는 게 어떤가. 1주도 어려워 보인다. 자, 그러면 또 있습니다. 여기. 여기는 어딜까요. 8급에서 7급이요. 8급에서 7급만 돼도 여러분 숨통이 트이는 자립니다. 이 때 불성을 다이렉트로 만나요. 불성을 정확하게 만나요. 그래서 이 때를 뭐라고 그래요? 예전에 어른들이 해오라고 그럽니다. 해오(解悟). 예.
38:00

이해. 깨달을오자. 이해한 깨달음. 1주 보살을요 증오, 이건 증득하다거든요. 한자 거기 다 써 있죠? 증오(證悟). 증오의 자리 해오의 자리. 증오는 뭘까요. 에. 참나 아, 참나 안에 완전히 안착했다는 거예요. 해오는. 해오(解悟)라는 말은요 어 이, 이걸 제가 뭐라고 푸냐면 주로 체험적 이해라고 풀어요. 체험적 이해. 이 쪽(證悟)은 자명한 이해. 해오 이전의 이 9급의 단계가 보통 개념적 이해. 자, 개념적이라는 거랑 지금 이해한 깨달음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세요. 이걸 다 오해하셨습니다. 예전에. 이 말만 듣고 “머리로 이해한 깨달음이라고? 가짜네.” 이렇게 돼 버려요. 그게 아니에요. 개념적 깨달음이 더 먼저 있어요. 개념적으로만 알다가, 해오는요 체험이 있는 거예요. 참나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이 해오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해오는요 이제 참나를 만났는데 참나 만난 건 약하고 참나에 대한 개념이 더 많은 상태를 말해요. 개념이 체험보다 그, 더 큰 상태. 체험적 이햅니다. 그래서. 개념, 순수 개념적 이해는 아니에요. 개념적 이해는 체험이 훨씬 약해요. 체험이 아주 없다곤 못 하지만 이 때(解悟)는요 확실히 참나를 체험해요. 그래서 보통 화두가, 이거 이 화두 공부를 하신 분들은요 이걸 무시해요. 보세요. 참나를 완전히, 참나 안에 들어 앉어도 증오 밖에 안 되니까 1주 보살 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이 성철 스님 같은 분들은 선문정로에서 이걸 강하게 반박합니다. 뭐냐면 화두 해서 견성 하면 12지여야 된다는 거예요. 12지 부처. 10지 보다도 더 위의 궁극의 부처. 예. 이, 여기에 10지가 더 있고 그 이 뒤에 11지 12지를 더 붙이는데 둘 다 이제 거의 불집니다. 11지는 이제 마지막 번뇌 대청소 하는 데고 12지는 부처로서 이제 등극하는 건데 불지 하날 더 붙여서, 유식학은 불지라고만 더 붙이고, 이 다른 경전에선 대승경에서는 11 12지를 아예 또 구분해요.
40:09
그래서 11지를 등각불 12지를 묘각불 이러는데 다 억지 얘깁니다. 왜냐면 등각이란 말이 무상정등정각의 줄임말이기 때문에 등각에서 이미 부처거든요. 묘각은 더 신묘하다고 또, 또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이 11 12지를 이렇게 이름 붙인 거예요. 등각불 묘각불. 그런데 아무튼 10지 이후에 또 부처를 설정해서 “화두 터지면 바로 이거다.”라고 하고 싶어하세요. 그러니까 화두를 드는 동안 아뢰야식이 다 정화돼야만 되니까 꿈 속에서 들고 있으면, 몽중일여가 되면 7지 보살이고. 꿈이 없는 잠에서도 화두를 들고 있으면, 원래 화두를 제대로 들고 있을 순 없죠. 깨어 있단 얘기죠. 화두를 드는 몰입이, 그 몰입하는 마음이 유지되면 아뢰야식 다 정화된 8지 아니냐. 이렇게 나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무리한 이론이에요.

실제로는 이래요. 실제로 이런 비판은요 고려 말에 보조 지눌 스님이 다 얘기했어요. 뭐라고 얘기했냐면 “선가의 깨달음이 1주 보살 자리(혹은 짜리).” 이 머, 이 말 때문에 보조 스님이 저기, 이단시 된 겁니다. 성철 스님한테 이단시 됐어요. 근데 저는, 그 말이 맞아요. 저는 아무리 연구해도, 중국에서 유명한 화엄경 그 연구가인 통현 장자, 이통현 장자, 그 통현 장자의 화엄경론을 다시 이 땅에 알리는 걸 사명으로 삼으신 분이 탄허 스님이에요. 탄허 스님이 생을 걸고 통현 장자의 이론을 이 땅에 알리려고 했던 핵심이 뭔지 아세요? 1주에 견성 했단 얘기를 할려. 탄허 스님은 “1주에 견성”했단 얘길 하시려고 이 땅에 왔다고 본인이 생각하셨고. 성철 스님은 “화주, 화두 터지면 12지” 된단 얘길 한, 그걸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그런 사명감을 드러내셨는데 두 분 주장이 완전히 다르죠. 이 저는 탄허 스님 쪽이 맞다는 겁니다. 왜냐면 통연장자로 말하나 보조지눌 스님으로 말하나 제가 공부한 거로 말하나 그리고 역대 선(禪)의 조사들도, 에, 두 파가 있어요.
42:00
그, 이렇게(견성 1급) 보는 사람이 있고, 또 진짜로 깨치면 바로 부처라고 보는 분이 있고. 근데 이러, 이 쪽 분들 의견(깨치면 부처)만 모아 가지고 이렇게 강조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원만하게 아셔야지. 그래서 저는, 올바른 보살도를 정립할려면 첫째, 1주 보살에 견성했다는 거,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셔야 돼요. 기초가 안 되는데 어떻게 큰 보살이 나옵니까. 기초작업이 안 돼 있는데. 에. 이해되시죠. 그래서 실제로는요, 왜냐, 화두를 실제로 체험해 보시면 알 수 있어요. 실제로 체험하면요 화두 해 가지고 참나를 처음 보고 놀래서 문 막 박차고 오도송 읊고 할 때가 이 때예요. 8급 7급, 해오 자리예요. 해오 자리. 왜냐, 그러고 참나가 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 견성을 하고 그 때 거기서 다이렉트로 증오까지 해 버리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이 상태에서 보림을 한참 해야, 보임(保任) 공부를 해야 증오(證悟)에 들어가는 분이 있어요. 놓쳤다 잡았다를 반복하다가 늘 안 놓치는 거. 이거를 보림공부라고 합니다, 절에서.

보림공부. 보호(保)하고 맡아(任) 기른단 뜻이에요. 보림공부를 해야 내 것이 됩니다. 그 때가 증오 자리예요. 이제 참나가 자나 깨나 내면에서 성성한 상태. 그 때가 학당에서 말한 1급 상태고 이게 불교에서 1주 보살입니다. 요거 이해되세요? 여기까지.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8급 7급에서 그렇게 깨치시고 참나를 체험적으로 만나고, 체험적으로 만났지만 내가 그 안에 제대로 안주를 못 하니까 놓쳤다 잡았다를 반복하다가 확실히 들어앉으면 이제 증오 단계에 들어간다. 이 부분만 정확히 아셔도 지금 이 제가 나눠드린 자료에서, 여러분 공부가 이제 또 숨통이 트이시지 않을까. 밝아지시지 않을까 싶은데 함 보세요. 여기 경전에 나, 예, 여기 이제 제가 경전적 근거를 댔는데 지금 이 10信의 단계에서는 지금 뭘 닦겠어요? 그런데. 해오를 얻고 증오를 얻고 할 때 이 10신의 단계에서 닦는 거를요 대승기신론에선 저 10신의 단계에서 뭘 닦는다고 돼 있냐, 했냐면 6바라밀을 닦아요. 결국 대승 공부는 죽으나 사나 6바라밀인데 이 때는, 보세요. 바라밀이라고 안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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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수행인데 그 중에 하나를 통합해서 다섯 개 수행을 제시합니다. 대승기신론에선. 첫째, 뭐죠? 거기 써 있습니다. 보시 지계, 자, 인욕 정진. 그 다음에 뭐죠? 성전하, 선정하고 지혜가 나와야 되죠. 그걸 줄여서 지관공부. 에 실제론 여섯 개 수행이에요. 지관공부. 止는 선정이고 관(觀)은 지혜 공부니까 지관공부 해서 다섯 개의 수행을 대승기신론에서 제시하는데 실제론 여섯 갭니다. 자, 10신의 단계에서 뭘 닦아요? 6바라밀을 닦아요. 그런데 왜, 6바라밀이란 말을 대승기신론에서 일부러 안 써요. 6바라밀은 1주 이후에만 써요. 견성을 못 한 상태에서 하는 건 진짜 바라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에고의 입장이 세기 때문에 수행이라고 불러요. 여섯 가지 수행. 보시 바라밀이라고 안 하고 보시 그래요. 보시를 닦는다. 실제로 남의 입장을 배려 해 볼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억지로.

지계는요. 계율을 지킬려고 억지로 노력을 해 보라는 거예요. 좋은 카르마, 카르마, 좋은 습관을 쌓아야 되니까. 인욕, 진실이면 받아들일려고, 그런 마음이 안 들지만 에고가 노력을 해 보라는 거예요. 미리 카르마를 쌓아 놔야 나중에 공부가 쉬워진다. 그래서 이 자리를 이 대승불교에서 자량위라고 그래요. 자량위. 밑천 쌓는 자리라고. 저기 한문, 옆에 2페이지 위에 진한 글씨로 자량위 써 있죠. 資糧位. 에. 자량위란 말이 맨 끝에 있죠. 여섯 가지 수행으로 정사마타 정위빠사나에 이르는 길. 자량위. 자량위라는 게 밑천이라는 거예요. 밑천. 밑천 쌓아 가. 이해되세요? 자량위. 예. 그게 식량량자에다가 자금자자잖아요. 여러분 보살 될려면 밑천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뭐 이게 있어야지 가죠. 버티죠. 보살도를, 보살의 길을 꾸준히 걸을려면 여러분이 뭐 이렇게, 군대 같으면 군량 (소리 안 나옴)비를 해야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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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걸 갖고 가는. 이거 많이 쌓아 놓은 공덕이 여러분의 밑천이에요. 요걸 쌓아 놓은 그 카르마가. 그 공덕이. 그 공덕이 여러분을 지켜줍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고 지계를 하고. 그래서 실제로 에고가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으로 훈련돼 있으면 참나 안에 원래 내재돼 있는 보시의 종자 인욕의 종자 6바라밀의 종자가 밖으로 쉽게 나오게 되겠죠. 그걸 만들이 위해서 먼저 밑천을 쌓아 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 중에 뭐가 먼저 터지는지 아세요? 지관 쪽에서 터집니다. 여러분이 사실 앉아서 선정에 들고 선정에 들은 상태에서 어떤, 보세요. 여기(止)는 선정에 드는 거고, 선정에 선 상태에서 분석(觀)을 하는 게 처음에 쉽죠. 이건 앉아서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1주 보살까지는요 선방에서도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이 중에 1주 보살이 되는 핵심은요, 1주도 전에, 해오에 이르는 핵심은 여기에 있어요. 선정 지관만 잘 하면 얻을 수 있어요. 다른 건 사실 약해도. 다른 게 약하면 나중에 이제, 밑천이 부족했기 땜에 나중에 장사할 때 이제 힘들어지듯이 나중에 좀 힘들어져요. 다만 일단은 가능은 합니다. 선정과 지혜만 잘 닦아도. 마음을 늘 고요하게 하고 모른다고 하고 내면의 참나에 집중하면서 지혜 분석. 예. 참나는 무엇인가 에고는 무엇인가. 자꾸 이 참나와 에고 간의 관계를 연구하다 보면, 내 마음의 전부 아닙니까? 참나, 참나의 모습과 작용, 에고의 또 모습과 작용을 연구하다 보면 지혜가 생겨요. 요 정도 얻다 보면요 해오가 처음에 터집니다. 반드시 선정과 지혜가 함께 가야지 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선정만 해서는 깨달음이라고 안 해요. 선정 해서 여러분이 아무리 참나를 만나도 지혜로 그게 참, 참나라는 게 어떤 존재고 에고랑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분석을 못 하고 선정에 들었을 땐 그냥 선정이라고만 하지 지혤, 이 지혜를 겸비하지 않았을 땐 깨달음이라곤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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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해오란 말엔 이미 지혜 공부까지 있다는 거예요. 뭘 깨달을까요? 처음에. 참나를 정확히 알고 나서 “이게 참나다.” 하는 그 지혜라도 있어야 돼요. 이게 참나다. 에고랑 이렇게 다르다. 에고는 무상 苦 무안데 참나는 상락아정하는구나. 별 게 아닙니다. 무상하지 않구나, 즉 常, 영원하구나. 苦, 괴롭지 않구나. 참나는. 그러면 樂이죠. 고, 괴롭지 않구나. 常樂. 에고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요건 진짜 내 것이구나. 我. 그리고 무상 苦 무아에 전혀 물들지 않은 청정한 자리구나. 해서 상락아정을 깨쳐야. 요 지혜가 없으면, 지혜라는 건 이겁니다.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말 할 수 있어야 돼요. 근데 해오 단계에선 아직, 체험은 해서 참나가 그렇다는 건 확실힌 아는데 아직 체험보다는 개념이 더 앞선 상태. 이 때(證悟)는요. 자명해져요. 에고는 그런 거고 참나는 그런 거며.

자, 하나 더 있어요 “에고가 참나의 작옹, 작용이라 에고 또한 본래 청정한 거야.” 이 말까지 나와야 1주 보살 들어갑. 뒤엣 말이 못 나오고 “참나는 상락아정하고 에고는 무상 苦 무아야.” 여기까지 하면 아라한 밖에 안 돼요. 소승 성자로는 그 정도 실력이면 되는데 지혜가 부족해서 지금 보살도는 못 들어가요. 왜냐? 중생 구제하러 이 속세는 못 들어가요. 숲에서 자기를 지키는 정도는 돼요. 자, 이게 보살의 길입니다. 해오와 증오. 자, 그래서 자, 보세요. 보살은 5行, 나누면 사실 여섯 가지 수행이죠. 고걸 닦아서 처음에 신성취발심을 이루게 된다. 그 밑에 보면 수행이 10신 10주 10행 10회향 해서 10지의 단계에 들어가서 등각 묘각으로 간다. 요 얘기 아까 드렸던 얘깁니다. 그런데 그 발심이라고 써 놓은 요 부, 요 부분은 좀 설명해 드리고, 또, 우리 쉬었다가 제대로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 짐 이 단계에서 신성취발심이란, 발심, 대승기신론에서 이렇게 세 개로 나눠서 얘길 해요. 대승기신론을 가지고 기본적으로 읽어 볼려고 하기 때문에 신성취발심을 좀 이해하시면 좋을 거 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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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리고 그 나머지 두 개의 발심까지. 믿음이 성취되는 발심이 어딜까요. 자, 봐 보세요. 공부를 시작해서 10신의 단계까지는 아직 1주 보살 되기 전 까지는, 제대로 견성하기 전 까지는 견성 체험은 있어도 진짜 견성에 안주하기 전 까지는 여전히 개념이 더 앞서니까 믿음의 단계라고 하는 겁니다. 데 믿음이 언제 성취될까요? 1주 보살에서 성취돼요. 즉, 뭔 얘기냐면 이제 믿, 믿고 가는 게 아니라 참나에 들어앉아서 간단 말이에요. 이제 확신을 통해서 가요. 믿음의 질이 바뀝니다. 그래서 신성취발심. 믿음이 성취됐다. 모르고 믿는 게 아직 있었는데, 참나에 관해서 이제 모르고 믿는 게 아직 있었는데 참나에 들어앉게 됐다. 해서 신성취발심.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만 참나의 존재가 이제 늘 함께하기 때문에 그 부분 만큼은 믿음이 사, 이제 믿음의 영역이 사라져요. 확신의 영역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신성취, 믿음이 성취돼요.

그 다음에 무슨 발심이라고 하죠? 믿음이 이루어진 뒤에? 해행발심이라고 합니다. 이제 참나 안에 들어앉아서 살다 보니까 참나 안에 있는 6바라밀의 공덕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6바라밀을 실제로 해 보기 시작해요. 그리고 다시 그걸 참나한테 되돌려서 모든 게 참나로부터 나왔다는 거를 닦아, 이제 내려놓으면서 닦아가요. 그게 해행발심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뭐, 뭔 발심으로 가죠? 증발심. 증득하고 끝나요. 내 안에 6바라밀이 꽉 차 있는 진정한 참나, 참나의 원만한 모습을 다 알아요. 1주 보살 때 알았던 참나는 선정과 지혜 부분에 국한된 참나였고. 1지 보살이 되면 “참나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 통틀어서 그냥 이렇게 여섯 개의 덕목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참나의 본모습이구나.” 하는 걸 알면 1지 보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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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주 보살이 깨달은 참나는요 선정과 지혜에만 국한돼 있기 땜에 뭐라고 해요? 공적, 늘, 아, 공적(空寂), 늘 고요하고. 영지, 늘 지혜롭게 알아차리는 자리가 참나야. 여기까진 확실해져요. 공적의 마음이고, 공적영지라고 하죠. 예.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마음. 자, 고요하되 알아차리고 있어. 고요하되 비추고 있어. 이런 말을 정확히 강조하게 되면 거, 그 자리가 1주 보살의 견성이에요. 증오 단계. 참나는 늘 우리 내면에서 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요해요. 내가 화가 나도 역경에 빠져도 무슨 좋은 일이 있어도 항상 고요하고, 잠을 자도 깨도 꿈을 꿔도 항상 고요하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그 고요한 자리에서 고요함에만 정체돼 있는 게 아니라 항상 비추고 있다는 걸 알아요. 알아차리고 있다. 나의 모든 거를 비춰주고 있다는 걸 알아요. 요 정도까지 알고 그게 내 삶과 함께 되며는 1주고. 그렇다는 건 알았는데 그 참나를 자꾸 놓치면 아직 해오고, 8급 7급이고. 그 참나 안에 들어앉으면 1급이고. 이런 겁니다. 차이가. 그런데 그 참나 안에서 6바라밀까지 나온다는 걸 알면 1단이 돼요. 1단이 돼야 여러분 안심하고 이 때부터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확실히 통과한 거라 이 때부터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그냥 그 6바라밀을 하면서 사시면 돼요.

자, 그런데 여기까진 제가 늘 말, 말씀드리던 건데. 전 이제 오늘은 1주에다 조금 초점을 둬 볼려는 거잖아요. 1주만 돼도 사실 내 내면이 고요하고, 고요한 중에 깨어 있다는 거만 알아도. 글자가 좀 이상하게 써 있. 예. 늘, 이렇게 한 번, 한자로 써 볼까요. 고요적자. 늘 고요하되. 늘, 예, 비출조자. 고요하되 늘 비추고 있다. 고요하면서, 생각 감정 오감 오온을 초월해 있는 그 고요함에서 알아차림의 빛이 늘 비추고 있는 그 자리. 그 빛이 있기 땜에 여러분이 지금 그 빛 받아서 뭐 하는지 아세요? 태양빛 받아서 지구가 온갖 살림에 보태 쓰듯이 그 빛으로 여러분 생각도 하고 에고 욕심도 부려 보고. 즉 7식도 작동하고, 에고도 작동하고. 6식, 생각 감정도 작동하고. 5식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다 하는. 그 빛 받아다 다 쓰고 계시면서 그 너머에 그 빛이 있다 그러면 막 화내시고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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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혼자 사는 줄 알고 계세요. 태양빛 없이 지구가 혼자 그 빛 일으켜서 쓰는 게 아니라 태양 빛 받아서 우리가 쓰고 있는 그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태양 빛 받아서 우리가 몸도 녹이고 모든 그 살림을 꾸려간다. 거기서 에너지 얻어서 식물도 살고 동물도 살고 인간도 산다. 하는 그 부분에서 함 봐 보세요. 빛이 쓰이는 건 정말 다양한데 그 광원이 어디냐는 거예요. 여러분 의식의 빛의 광원이 어디냐. 거기 참나 자리에요. 그 자리가 여러분 안에서 늘 한, 한결 같이 빛나고 있다는 거 알면 1주 보살이죠. 그리고 그 자리가 있다는 걸 알면 지금 해오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그럼 완전히 인식 체계가 바뀝니다. 그 자리가 있다는 거 알고 나면요 잠깐의 체험으로도요, 단 1초만 체험해도 여러분 인식 체계가 바뀝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해오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거예요. 부처를 만났으면 이 때에 이미 보살로서의 갈, 이제 삶이 시작됐다는 거예요. 이, 모든 인식 체계가 바뀌어가기 시작한다는. 그러다가 바뀜이 이제 점점 커지다가 이 정도(證悟)까지 수용이 되면 증오가 되고 여기서 더 인식이 더 계발되면서 점점 더 많은 게, 짐 6바라밀이 삶에 들어오고 하다 보면 1지도 되고 10지도 되고 다 한다는. 시작을 여기(解悟)라고 보는 입장은 또, 여기를 또 엄청 강조하는 입장도 있어요. 두 개가 다 가능합니다. 예. 금 여기랑 여기 얘기가 짐 결국 화두 처음 터지고(解悟) 그,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證悟) 이 삶, 이 과정이 다 여기에 들어 있는데도 이거는 부정하고 자꾸 12지에다 갖다 댈려고 하면 안 됩니다. 12지라면요 6바라밀이 전지전능하게 드러날 정도여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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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천수관음 있죠? 그 천수관음 수준의 어떤 그 인격을 그리고 그 능력을 인간 세계 안에서 보여주지 못하면서 그런 얘기 하는 거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식, 실제로 보세요. 12지 얻었다고, 화두 터졌다고 하는 분들이 지, 그 참나 자리 묘사 할 때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다 이거만 써요. 고요(寂)하되 비춘다(照). 안팎으로 광명하다. 금 그 분, 그게 1주라는 증거예요. 1주는 거기까지 밖에 얘길 안 해요. 참나 안에서 나온, 6바라밀의 그 살아있는 공덕을 얘기할 수가 없거든요. 왜. 체험해 보지 않은 영역이기 땜에. 6바라밀이 도(道)라고 생각도 안 합니다. 6바라밀 그거는 하찮아. 견성 못 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이게 엄청난 차이예요. 6바라밀이 다 그대로 선(禪)이 돼야 여러분 1지 보살이 됩니다. 제대로 된 보살. 그 전부터 이렇게 닦으셔야 여러분 1주 보살도 빨리 돼요. 자, 보세요. 이렇게 닦으셔야 돼요. 보시 뒤에 다 선(禪)을 붙여 보세요. 이 전체가 선(禪)이 돼야 돼요.

선(禪)은요 인도말 그 “다야나”란 말을 음역하면서, 음역, 이게 하는 분들이 참 대단한 게 음도 똑같은 거 갖다 붙이면서 한자 중에, 음이 많잖아요 그 의미까지 갖고 있는 한자를 붙여 버립니다. 원래 선(禪)은요 그런 의미로 쓰는 게 아닌데 이 창의적으로 쓰신 거예요. 자, 보세요. 분석을 해 보세요. 이걸 왜 썼나 제가 한 번 봤는데요 원래 의미는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근데 홑단자가 들어 있고 볼시자가 들어 있어요. 오직 하나인 그 자리를 볼 수 있어야 선(禪)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보시한다고 보시에만 집착하면 선(禪)은 아니에요. 그냥 수행이지. 근데 보시바라밀이란 말을 들을려면 바라밀은 사실은 선(禪)이거든요. 진리로 건네주고 또 진리에서 나온 게 아니면 바라밀이라고 안 붙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서, 바라밀 자리에 선(禪)이 들어가도 맞아요. 보시선을 닦으셔야 돼요. 보시를 하되 나와 남이 둘이 없는 참나의 마음에서 하는 보시라야 보시선이고. 지계선, 계율을 지키되 억지로 지키는 게 아니라 계율을 지키는 그 마음이 참나에서 나와야 지계선이 되죠. 인욕도요 그냥 인욕, 참으시면 화병 걸리죠. 그런데 인욕을 하되 참나 자리에서 인욕을 하니까 깔끔하게 받아들여진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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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욕선이 돼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둘이 아닌 마음으로 노력하는 그 자, 그 자리가 그대로 선(禪)이고 그대로 정진이거든요. 정진선. 선(禪)은 원래 선(禪)이고. 반야선, 반야선이 어떤지 아세요? 서, 이 반야바라밀이란 건 뭔지 아세요? 여러분이요 지혜로 “이건 이거야.” 라고 분석하는 중에 참나의 마음으로 분석이 돼야지 반야바라밀이라고 그래요. 참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분석하는 건 그냥 분별이에요. 그런데 같은 분별을 해도 참나의 마음, 깨어 있는 마음으로 분별을 하면요 참나의 지혜가 여러분 안,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 발현되는 게 되거든요. 참나에서 끌어낸 지혜는 반야선이라 그러고 반야바라밀이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그래서 이 총체적인 선(禪)을 닦는 게 1지 보살 되는 과정인데. 자, 이거는요 이런 6바라밀 전체를 선(禪)으로 닦는 거는 1주 이후에 원래 배당돼 있어요. 대승기신론에서도. 처음 믿고(9급) 이 1주 보살 되는 데 까지는요 이렇, 이 정도(6바라밀禪)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일단 보시하는 연습이라도 하라는 거죠.

보시 연습 지계 연습 인욕 정진 지관 연습을 하다가, 이 중에 지관이 먼저 터져요. 마음을, 명상을 하다가 터지거든요. 보통 명상 하다가 터져요. 처음에. 명상 하다가 “아, 이 자리가 참나구나.” 할 때 관(觀)이 같이 해서 “이러 이러 이러니까 에고는 무상 苦 무아고, 이 자리는 무상 苦 무아가 없으니까 참나 맞네.”라고 인가를 해 주면 깔끔해집니다. 그러면 참나에서 나온 인가와, 자명한 인가죠. 의심 없는 인가와 자명한 체험이 합쳐지면서 깨달음이 이루어져요. 그게 이제 해오 자립니다. 그래서 그, 그 해오 깨달음까지 가는 과정을 5분 쉬었다가 본격적으로 이제 대승기신론에 근거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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