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4강
| 강의일자 | 2010. |
| 게시일자 | 2015. 07. 10. |
| 동영상 길이 | 22:01 |
| 강의 중 인용 도서 | 맹자, 중용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0VY8Wu_1UcY |
『맹자』, 『중용』: 책 이름
맹자: 사람 이름
중용: 철학 용어
그다음 『중용』에 나온 구절인데요, 다 연결된 구절인데 한 번씩 읽어서, 유교의 그 맛을 좀 보시라고요.
“군자는 중용에만 의지한다.” 해서 “중용에 합당한 경우에는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 남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으니, 오직 성자라야 이걸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천민(天民)도 성자라는 거예요. 제가 이 글을 올린 거는.
진짜 도를 품으면서요, 혼자 즐기며 살 수 있는 것도 참, 공자님이 “그거 성자나 하지.” 하고 할 정도의 참 그런 일이라는 거죠.
맹자의 천작·인작(天爵·人爵)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맹자가 이르기를, 하느님이 주는 벼슬도 있고 사람이 주는 벼슬도 있다.
인(仁)과 의(義), 충(忠)과 신(信)과, 선(善)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 아주 선이 너무 좋아서 게으를 수가 없는 것. 너무 선의 오타쿠죠.
선에 너무 몰입된 사람 “이것이 바로 하늘이 주는 벼슬이다.”
하느님이 주는 벼슬이 별것이 아니라
인과 의가 막 점점 자라는 것, 선이 너무 즐겁기 시작하고 이러면, 하늘에서 이미 벼슬살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희로 치면, 견성(見性)이면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9품 벼슬 받은 거예요, 하늘에서.
2단이면 하늘에서 8품, 8급 공무원, 9급, 7급 이렇게 올라간다는 겁니다.
“공·경·대부”
공(公)은 우리로 치면 삼정승이죠. 조선시대로 치면 공이 삼정승이고요.
경(卿)이 육조 판서죠. 판서, 정승들이고요. 대부(大夫)가 그 아래의 관료들이고요.
“이것은 사람이 주는 벼슬이다. 옛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는 벼슬을 닦았을 뿐이었으나
사람이 주는 벼슬이 자연히 따라왔다.”
그러니까 옛날 도인들은요, 이윤(伊尹)이나 강태공 생각해 보세요.
그냥 자기 도(道)만 묵묵히 따라왔는데요, 천자 바로 아래의 벼슬이 다 왔죠.
공경대부가 왔죠. 그러니까 인작까지도 얻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는 벼슬을 닦아”요.
이렇게 인의예지를 막 닦다가 “사람이 주는 벼슬을 요구한다, 닦으면서, 계속.”
우리죠. “아, 왜, 조금만 올려 주면 진짜 잘할 텐데.”
그러니까 도 닦으면서도 계속 “사회에서 한 자리 주면 내가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이 계속 있는 거고.
이제 더 심한 케이스죠.
“그러다가 이미 사람이 주는 벼슬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느님이 주는 벼슬을 바로 버려 버린다”는 겁니다. “나 사실 인의예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가면 이건 참 심한 거다. 미혹이 심해서 마침내 반드시 망하리라.” 저주를 한번 딱 때려 주시는데, 제가 얘기해 드린 건 이거예요.
맹자의 일관된 논리에서 천민(天民)이라고 하는 걸 한번 잡아, 천민(天民)에 관련된 자료는 제가 다 뽑은 거예요.
몇 개 더 있는데, 『맹자』 앞부분 보다 보면요, 이윤이 스스로 자기를 천민(天民)이라고 부르는 게 나와요.
“이윤이 밭 갈다가” 똑같아요, ‘요순의 도’라고 그래요.
맹자는 꼭, 그냥 ‘도’라고 안 하고, 여기서는.
그냥 ‘도’라고 할 때도 있는데, 요·순(堯·舜)을 제일 높이 보니까 “요순의 도를 닦고 있다가” 이윤이, 혼자 밭 갈며 즐기다가, 탕임금(湯)이 폐백을, 예물을 보내서 불러요.
그러니까 뭐라고 생각하냐면 “내가 밭 갈면서 이렇게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게 낫지, 뭐 하러 나가느냐?”라고 하면서 여전히 밭 갈았는데, 세 번인가 부르니까 갑자기 생각을 바꿔 먹은 게 “내가 천민(天民) 중에 선각자인데, 내가 하늘 백성으로 아주 선각한 사람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우리” 하느님이 실제 내리신 진짜 백성들이요, “누가 구제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요순의 도를 혼자 즐기는 것보다,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나갔다는 거예요.
많이 이제 좀, 맹자에 의해서 각색됐다고 보시고요.
근데 맹자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왜냐면 실제로 전해오는 얘기는, 이윤이 탕임금한테 요리를 해 가면서 이렇게 해 가지고 탕임금을 잘 설득해서, 그러니까 나쁜 의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탕임금이 못 알아보니까 요리사로 들어가서 이렇게 했다는 게 있거든요.
누가 그걸 물어보니까 “그런 일 없다.”라고 맹자가 “우리 이윤은 딱, 그 하다가,
‘한 명이라도 백성이 힘들면 나로 인해 그렇다고 생각하자.’ 하고 이렇게 나가서 정치를 했다”는 그 얘기가 앞에 나와요.
그래서 천민(天民)의 아주 대표적인 거예요. 그래서 율곡도 당연히 『동호문답』 쓸 때 그 구절을 읽었기 때문에 이 묘사 자체가 이윤의 묘사예요.
“보물을 품고 있으면서”
이렇게, 이 뭐죠? ‘효…’.
‘기기낙도’인가 그렇죠(囂囂樂道 효효낙도).
이런 묘사 자체가 앞에 맹자가 이윤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을 그대로 쓴 거예요.
‘낙도(樂道)’할 때도 ‘낙 요순지도(堯舜之道)’를 한 거죠. 율곡의 『동호문답』도 거기 『맹자』에서 온 거라는 건데,
아무튼 ‘천작’ 이래서 맹자가 거만해하세요.
임금이 불러도 잘 안 가요. “그 사람은 인작이 있고 난 천작인데, 왜 내가, 부른다고 바로 가냐?”
그래 가지고 세 개를 쳐요.
‘인작’ ‘천작’ “벼슬이 세 개 있다.” 하나가 ‘나이’예요.
그래서 “내가 셋 중에 두 개를 갖고 있는데 왜 내가 가냐?” 막 이런 식의 계산까지 때리는 분이에요, 실제로.
20절은요,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유명한 거죠. 군자삼락(君子三樂).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건 여기에 있지 않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자매가 별 탈 없는 것이 일락이다.” 아무래도 이게 좀 깨지면 즐거움이 덜하다는 거죠. 이거는 인(仁)의 마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게 개인적인 어떤 마음으로 한 거면 군자락이라고는 안 하겠죠. 도심(道心)에 이게 맞는 거라는 거예요. 도심에, 나랑 가장 절친했던 사람들이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이 사랑의 마음이 더 애틋하잖아요. 그걸 얘기해 준 거예요. 두 번째가 “하늘을 우러러 봄에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들을 굽어 봄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거는 두 번째 즐거움”이라는 건, 이거는 인과 반대죠. 의(義)죠. 내가 하나도 부끄러운 짓한 게 없다는 거예요, 하늘에다, 땅에다, 사람에다, 누구에다 대도. 그러니까 인과 의의 마음, 두 개를 얘기한 거예요. 그러면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천하의 영특한 인재를 얻어서 교육함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이거는 뭐냐면, 인과 의를 자기는 이렇게 밝혔잖아요. 이걸 계승자를, 그걸 그대로 계승할 수 있는 인재를 만나서, 제다이로 치면 그 제자를 갖다 길러서 나같이 똑같이 이렇게 마스터로 만들어 놓으면 그 즐거움이 세 번째라는 겁니다. “여기에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건 없다.” 이해되시죠? 그런데 이 중에 재밌는 게, 이제 주자주(朱子註)에도 나오는데, 첫 번째 즐거움하고 세 번째 즐거움은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인력(人力)으로 할 수 없는 게 있어요. 그 인재가 없으면 못 길러요. 그리고 부모님, 제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인명(人命) 자체가 좀 재천(在天)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건 두 번째라는 거예요. 옛날 선비들이 주목한 건. 두 번째는 내가 하기 나름이거든요, 끝까지. 죄를 안 짓고 수오지심으로 끝까지 밀고 가는 건 내가 하기 나름이니까. 예전에 제가 맹자에 대해서 『수심결』에도 썼던 구절인데 “진심 지성(盡心 知性), 지성 지천(知性 知天).” 그러니까 “내 본성을 밝혀서 돈오(頓悟)를 해 가지고요, 하느님 자리를 알고, 내 본성을 잘 배양해서 하느님 섬기는 것, 나는 이거를 수명을 잊고” 오래 살건 짧게 살건 “이걸 하면서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있어요. 이게 「진심장」 제일 첫 번째에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한번 지나 오면서 볼 건데, 이거랑 통하죠, 두 번째 게. 그러니까 뭐냐면, 앞뒤의 것은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할, 인력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되면 좋은 거죠. 안 될 확률이 높은 거죠. 그래서 두 번째 것만 하면서, 사실은, “하느님 자리, 양심을 알고 그 양심을 실천하면서 죽는 날까지, 언제 죽든 관계치 않고 그거에만 매진해 살다가 가는 게 인간의 길이다.”라고 한 맹자의 입장에서 볼 때 두 번째 부분이 참 중요하다는 거죠. 늘 그렇게 산다는 게. 오늘 한 건 다 끝나겠네요.
21절, 이것도 이게 아주 재밌습니다. 이게 인의예지가, 다산(茶山)은 이 구절을 좀 다르게 막 풀려고 하는 이유가요, 다산은 인의예지를 철저히 형이하(形而下)로만 봤어요. “맹자는 형이하로 봤다, 인의예지를.” 근데 주자는 인의예지를 형이상이라고 보고, 우리도 그렇게 보고 있죠, 지금. 우리도 그 프로그램이라고 보잖아요, 인의예지를. 맹자가 어떻게 봤는지가 여실히 나오는데요, 그걸 다산이 좀, 이 구절을 풀기, 다산은 이걸 싫어하셔서, 이런 식 풀이가, 다른 식으로 최대한 풀려고 하는데요, 다산 말도 맞는데요, 인의예지도 해야 인의예지가 의미를 갖는 거지만, 안에 이데아(idea)는 있거든요. 이데아가 없으면 우린 못 해요, 인의예지를. 그러니까 다산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안 맞아요. 철학적인 이런 거랑 좀 안 맞아요, 다산은. 다산은 우리 안에 그런 이데아가 있다는 거에 대해서 아주 싫어했던 분이라, 그 부분은 좀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보시죠. “넓은 땅과 많은 무리의 백성, 이건 군자가 원하는 것이다.” 3단계로 구분합니다. 이건 골짜기(谷)죠. 골짜기(谷)로 ‘하품 흠(欠)’ 자. ‘하품 흠(欠)’ 자의 전서를 보면 이렇게 생겼어요. 이렇게 하품하고 있어요. 갑골문은 꼭 사람을 이렇게 그립니다. 팔·다리, 무릎 꿇고 있는 다리. ‘아~’ 하고 벌리고 있는 거, 입에 구덩이 패인 상태죠. 이걸 이렇게도 그리고요. 구덩이 패인 상태죠. 강하게 원하긴 한다는 거예요. 원하는, 욕망하는 단계. 그다음에 두 번째가요, 락(樂). 아까 그거 보셨죠? 이렇게 실로, 나무에다가 실을 연결해 가지고요, 이게, ‘흰 백(白)’ 자가 밝힌다는 거예요. 어떤 안에 있는 마음을 갖다 연주하면서 밝힌다는 거, 연주를 하면 연주자의 마음이 확 드러나잖아요. 그게, 이게 지금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락(樂)이. 욕망하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에 락하는 단계가 그다음 단계로 봐요. 그다음 단계가 뭐냐면 성(性). 이 단계로 발전한다는 게 아니고요, 이 각각 의미하는 바가, 이렇게 이런 단계로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욕망할 수는 있는데요. 욕망은 꼭 안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거고, 꼭 되기를 바라고 욕(欲)하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가. 우리가 이런 거 있잖아요. “우리나라가 아주 강대국이 됐으면.” 원하는 거 다 맞죠? 군자도 그걸 원하는 게 죄가 아니거든요. 죄는 아니니까 원할 수는 있는데요, 그게 꼭 되라고 원하는 건 아니잖아요. “되면 좋겠다.”죠, 이왕이면. “우리나라가 아주 세계에서 강대국이면.” 근데 다 원하는, 나라마다 다 원하면, 나라에 있는 군자들이 다 원하면, 근데 다 이루어질 일은 없잖아요, 분명히. 그리고 또 한 나라에 갈 거고. 그게 죄는 아닌데 “반드시 그러리라!” 하고 이렇게 덤비는 건 아니죠, 또 군자가. 이겁니다. “땅이 넓어지고 백성이 많아지면 군자는 좋겠지. 그런 거 원하지. 근데 즐거워하는 바는 여기에 없다.” 즐거워한다는 건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에요. 군자가 정말 즐기는 것은요, 반드시 돼야 하는 것들이에요. ‘내가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 그게 뭐냐면요, “천하의 중심에 우뚝 서서 사해(四海)의 백성을 안정시키는 건 군자가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거는 황극(皇極)이죠. 황극의 상이, 저희가 이렇게도 잡는데요. 동서남북에서 볼 때 정중앙이죠. 그래서 사방의 중심에 우뚝 서서 사해(四海)를 안정시킨다는 게 이건데요. 이걸 입체로 그려 보면 이렇게 돼요. 피라미드가 황극의 상이죠. 사방에서 우러러보이죠. 그래서 실제 황극의 모델, ‘황극’이라고 하는 ‘극’ 자체가, 극(極)이라는 말이 이렇게, 이게 ‘용마루 극(極)’ 자거든요. 용마루. 왜냐하면 집에, 한옥집 가면, 한옥 보면 이게 용마루죠. 용마루를 보세요. 사방에서 그 용마루를 향해 보게 돼 있어요. 그걸 극(極)이라고 합니다. 먼 우주의 꼭대기. 사방에 사는 백성들의 꼭대기라 맨 위에 계시니까, 왜 이렇게 올려놔야 더 상에 맞냐면요, 예수님도 황극 얘기할 때 그래요. “사람의 아들을” 황극을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그러는데요. “사람의 아주 분신이다.” 화신(化身). “사람이면 이런 거다.” 하는 걸 사람의 아들이라고 그래요. “인자(人子)는 높이 들려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다 보고 그 빛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높은 곳에 존재해야 임금이, 그러니까 우러러볼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보고 변해야 되니까요. 영향을 받아야 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천하의 중심에 우뚝 서 가지고 사해(四海)의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은 군자가 즐거워하는 거다.” 이거는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예요.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된다는 보장은 없어도 “반드시 이루리라.” 하고 덤벼야 되는 게 ‘즐기는 거’고요. “그거 되면 좋지.” 하는 거는 단순히 욕(欲) 차원이라는 거죠. “되면 좋지.” 근데 안 돼도 이게 중요한 거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본말(本末)을 따지면 지금 넓은 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작은 땅이라도 내가 황극을 이루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해되시죠?
요거 하나 더 보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황극임을 암시하는 말을 진짜 많이 하는데요, 이런 말도 해요. “누가 등불을 갖다 땅에다 놓더냐? 위에다 놓지.” 이런 얘기를 해요. 왜냐면 “그래야 다 비춰 보는데.” 그러니까 아까 천민(天民)은 땅에 있는 등불이죠. 대인(大人)은 하늘에 있는 등불이죠. 백성들이 혜택을 바로 입을 수가 있는데, 천민(天民)은 혜택을 입을 수는 없죠. 어디 야산에서 밭 갈고 있으니까. 그런 차이가 있죠. “그런 사람이면 들어다 써야 한다.” 그런 메시지도 있죠. 이걸 괘상으로 보세요. 괘상(卦象)으로 이걸 잡아 보면요, 양이 치솟는, 이게 전체적으로 산 모양이죠. 사실 간괘(☶)가 황극이에요. 일단 산이라는 것 자체가 황극이고요, 자세히 보시면 양(⚊)이 하나고 음(⚋)이 둘이에요. 근데 우리 이름도 그렇죠. 제가 윤홍식이면 ‘윤’ 하고요, 이름을 두 자로 쓰는 건 지금 이 공식입니다. 자연 공식에 맞추느라고요, 짝수가 음이고 홀수는 양이거든요. 그래서 성(姓)은 아버지나 나나 똑같죠. 성은 이렇게 내려오는 거고 이름만 이렇게 자꾸 바뀌는 거잖아요. 그래서 양하고 음을 맞추느라고 되도록이면, 변칙도 물론 있지만, 성은 하나고 이름을 두 자 써요. 그리고 남자가 절 한 번 하면 여자가 두 번 하죠. 절 많이 받아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여자는 음이라 두 번 하는 게 자연에 맞다는 거예요. 똑같이 뭐냐면 양 하나에 음 둘이 붙었는데, 양이 위에 있고 음이 아래에서 받드는 형국이잖아요. 이게 산이에요. 그리고 이게 황극을 상징해요. 양이 음 위에 서 가지고 지금 리드(lead)를 잘하고 있다는 거예요. 올바른 리더를 상징하고요. 지금 이거랑 겸해서 보면 뭐냐면, 이걸 또 쪼개서 보세요. 네 개의 점 위에, 가운데의 한 양이 네 개의 점을 이끌고 있는 형국이거든요. 이게 이거죠. ‘하나 둘 셋 넷’에, 이 가운데가 사방을 제압하는 형국이고, 이 형국도 돼요. 아니면 여기. 사방을 갖다가, 저 위에 서 가지고 사방을 리드, 양 하나가 사방을 리드하는 형국. 예, 이렇게. 그래서 이 간괘(☶)는 황극의 상징물이에요. 그래서 이게 간토(艮土)인데, 토(土)에서, 아, 더 얘기하면 어렵고, 아무튼 이 정도만 이해하시면. 간방(艮方)이라는 게 왜, 이게 단순히 산을 말하는데 또 뭐 황극이, 우리 ‘배꼽 짜리에서 중심을 잡는다’ 할 때는요, 이쪽에 있으면 산인데 이 중심에 나와서 동서남북 상하의 중심이 되잖아요. 그러고 황극이 되면 괘상이 맞죠? “동서남북을 제압한다.” 아니면 양 하나가 음들을, 모든 음을 제압, 두 개의 음, 양이 음을 제압한다는 형국도 가지고 있고. 네 뒤퉁이는 음이고 가운데가 양이 되는 거죠, 이때는. 그래서 그거는 군자가 반드시 즐기는 거라는 겁니다. 그거 하는 거는 아주 목숨 걸고 한다는 겁니다. 황극(皇極)을 이루는 거는. 내가 꼭 임금이 안 되더라도요, 뭐냐면, 그런 강태공이나 이윤 같은 신하가 돼서 황극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도 ‘즐기는 일’이죠. 이게 『맹자』 안에 나오는데요, 세습제가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이거예요. 우리 단군 선양제(禪讓制)가 동이식(東夷式)이고 훌륭하다고 하는 이유가요, 세습으로 진행되면요, 아무리 이윤이나 강태공이 나와도 임금 못 하겠죠. 신하밖에 못 해요. 그러니까 황극을 할 수가 없어요. 위대한 황극을 배출하려면 그 문화가, 세습하지 않아야 돼요. 세습을 하게 되면 이제 차선책이에요. 재상으로 들어서는 시스템밖에 안 돼요. 그러면 제갈량이 아무리 유능해도 유선 밑에 있어서는 이게 안 되거든요. 한계가 있는 시스템이에요. 여기도 나오지만 이윤·강태공으로는, “대를 이어서 세습되는 경우에는 그 임금이 걸·주(桀·紂) 정도는 돼야 쫓아낼 수가 있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이윤과 강태공은 임금 못 했다.” 이렇게 나와요. 공자는 성인(聖人)의 덕은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성인의 추천이 있어야 되는데, 누가 아무도 그걸, 왜냐하면 요(堯) 같은 임금이 천거해 주면 될 수가 있지만, 공자 같은 사람들은, “그런 경우가 아니면 천자 노릇 못 했다.” 이런 천자 노릇 못 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는 거죠, 그 시대별로. 그러니까 이렇게 대를 이어서 세습제가 진행되는 경우에는 공자 아니라 누가 나와도 힘든 일이 있죠. 천자가 들어 써 줘야 되는데, 그걸 알아볼 눈이 있는 천자가 있느냐? 그런 문제가. 근데 여기서 이제 그다음에 “군자가 본성으로 삼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근데 이것도요, 황극(皇極)을 이루는 거는 군자가 반드시 이루고 싶어 하는 건데요, “본성은 여기에 없다.” 이해되세요? 즐기는 건데, 아주 죽도록 즐기는 건데 “본성은 거기에 없다. 군자가 본성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거를.” 본성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공이 없는 차원의 얘기예요. 그러니까 ‘본성’이라는 말이 나오면 모든 것의 원인의 원인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보시면 되냐면 “황극을 왜 해야 되지?” 하는 거에 대한 답이 본성이죠. “군자는 본성 그대로 사는 사람인데 황극 이루는 걸 즐긴다.” 근데 군자가 황극 이루는 걸 본성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거는, 황극을 이루라고 내모는 그 마음에 본성이 있는 거죠. “왜 황극을 이루려고 하지?” 그러면 그 본성은 인의예지죠. 인의예지 때문에 그래요. 인의예지를 구현하려다 보니까 자연히 황극을 원하게 된 거죠. 이렇게 순서 아시겠죠?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군자는 그걸 본성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군자를 얘기해 보면요, 본성이 훤히 드러났고요, 황극을 이루는 걸 정말 즐기고, 이왕이면 더 넓은 땅과 많은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기를 원해요. 이런 사람이 군자라는 거예요. 앞의 걸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더, 더 본말(本末)이 있다는 것뿐이죠. 그래서, 근데 이 부분이 유명해요. 불교나 어디에 뒤지지 않는 얘기인 게요, “군자가 본성으로 삼는 거는, 비록 크게 뜻을 편다고 해도” 세상에 등용돼서 먹힌다고 해도요, “본성이 더 보태지는 건 아니”고요. “비록 궁한 처지에 있” 아주 천민(天民)이 돼 가지고, 본성을 지키고는 있는데, 아주 궁벽한 처지에서, 나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안 듣는 처지에 있다고 해서 “본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게 “불성은 줄어들거나” 뭐죠, 『반야심경』에 나오죠. “부증불감(不增不減)한다”고. 부증불감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게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이 이 말을 주로 쓰니까 “유교가 불교 본떴지.”라고 생각하실 수가 있는데, 맹자 때부터 이미 있어요. 그러니까 알고 있는 얘기예요, 다. 송나라 때 가면 “터럭 하나도 더 보탤 수가 없다.” “성인이라고 터럭 하나 더 보탤 수 있는 게 아니고, 중인(衆人)이라고 본성이, 중생이라고 더 적은 게 아니다.” 이 얘기를 꼭 하는데 “이거 불교에서 영향받았지.”라고 흔히 보는데, 맹자 때 이미 이 얘기가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왜 그러냐? 분수가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있나요? 내가 빼먹은 것 같기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넣었네요. 이 구절이 빠졌더라고요, 하다 보니까, 다시 아까 넣었는데 “분수가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분수’가 나쁜 말이 아니라 인의예지 하라는 거예요. 인의예지 하라는 게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넣고 빼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예요. 여기다가 뭘 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고 한다는 거죠. 이 중에 예(禮) 하나 빼고, 힘들다고 예(禮)가 빠지고 이러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성인이라고 해서 여기보다도 더 좋은, 몇 개가, 아이템이 더 들어와 가지고, 프로그램이 몇 개 더 첨가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이게 다 발현됐냐, 덜 발현됐냐’뿐이라는 거죠. “군자가 본성으로 삼는 인의예지는” 정확하게 얘기를 하고 있죠. “군자는 인의예지를 본성으로 삼고 있다.”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마음 안에 뿌리가 딱 박혀 있는 건데 “그 형색을 나타내면” 딱 얼굴에, 몸에 나타날 때는 “얼굴에 훤하게 드러나고, 등에서는 풍성하게 드러나며, 사지에서는 실제로 시행된다.” 상상을 한번 해 보세요. 그러니까 인의예지가, 안에 양심이 확 밝아졌다면 얼굴도 환할 거고요, 뒤태만 봐도 느낀다는 거죠. “등에서 풍성하다”는 건 “뒤태만 봐도 저 사람의 덕이, 포스(the force)가 느껴진다.”라고 하는 거고, 그 사람 팔다리에서는, 팔다리가 그냥 노는 게 아니라 꼭 그런 양심을 시행하고, 펼치고 있더라. “사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남들이 깨닫게 된다.” “나 양심 따르는 사람이야.”라고 말 안 해도 사지가 움직이는 걸 보면 자연히 “아.” 뭔가가, 이쪽도 양심이 있으니까요. 나도 있기 때문에, 하는 거 보면 뭔가 안에서 팍 자극받는 게 있더라는 거죠, 사람한테. 예,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