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2강

홍익학당 아카이브
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6일 (수) 20:01 판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강의일자 2010.
게시일자 2015. 04. 15.
동영상 길이 27:47
강의 중 인용 도서 맹자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xn1nuZuETyY


제가 아주 잘한다는 게 아니라, 제가 책 쓸 정도 하려면요, 전 읽다가, 제가 이 세 줄을 읽었다면 이 세 줄이 완전히 제 것이 안 되면 저는 만족을 못 해요. 여기 쓰는 단어 하나라도 다 찾아서, 저는 인터넷이라도 찾아서 다 체크해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말할 때의 그 느낌과 정보를 그대로 받고 싶은 거예요, 저는. 이데아를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일단. 이 사람이 뭔 말을 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은 거죠. 이건 역지사지의 한 모습이에요. 이것도 서(恕)예요. 책 볼 때 서가 안 되면 안 된다는 거죠. 이 사람과 거의 하나가 돼야 돼요. 맹자랑 거의 하나가 돼서, 맹자가 이때 무슨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가 생생하게 오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면 벌써, 단어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해 버리면, 무슨 마음인지는 이미 모른다고 봐야죠. 저 사람이 쓰는 용어를 이해 못 하면, 만약에 영어로 쓰더라도요, 그 영어 용어 다 찾아봐서라도 알아내야 그 사람 마음을 알아낼 수가 있지, 전혀 지금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어요. 그렇게 볼 거면은 책을 안 보는 게 낫죠. 이거 읽고 다른 소리 할 거면요. 그러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맹자 얘기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일단은 맹자 말을 이해해야 돼요. 그런데 맹자가 도(道)를 얻으신 분이면 그 안에서 우리는 되게 보석을 만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일단 맹자 말부터가 이해가 안 되면, 이데아는 차치하고, 일단 맹자 말을 왜곡시켜 들은 다음에, 거기서 뭘 찾으면 무서워지죠. 뭘 찾은 건지 알 수 없는 걸 찾게 돼요, 자꾸. 그러니까 멀리 가는 거예요, 막, 사이비로 가고, 자기 딴에는. 근데 자명하다는 것도 오해의 여지가 있어요. 뭔가 자명하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중의 하나예요. 좋은 것, 참나가 “맞다!”라고 해 준 거고요, 아닌 것, 내 고정관념이 “맞다!”라고 해 준 거예요, 생각도 안 해 보고. 평생 맨 하던 거니까요. “그래. 맞아. 그럴 줄 알았어. 너 도인이네.” 짐작하던 바가 맞고 듣기 좋은 얘기 들려오면 다 “맞다”고 그래요. 버선발로 나와서 맞이할 거예요, 이런 사람은. 이거랑 자명한 거랑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늘 깨어있는 연습이 투철히 돼야 돼요. 마음이 맑으면 때가 끼는 게 잘 보일 거잖아요. 그런데 마음이 늘 혼탁하면요, 깨어있음이 약하면 애먼 것들이 와서 막 장난을 치는데도 몰라요. 깨어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몰라요.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요. 아주 예리하게 보고 있으면 안 들어올 그런 잡스러운 잡상님들이 들어와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은 녹화도 되고 하니까, 우리 학당 회원분들 정회원 자격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맹자』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해 봤고요. 몇 개 보죠. 몇 개 보고 끝내고 쉬시죠. 어디까지 했나요, 그때? 8번도 했고요. 9번도 했던 것 같고. (수강자: 10번까지는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는 모르겠는데. 10번 했나? (수강자: 호걸스러운 선비 얘기.) 그 뒤로는 안 했나요? (수강자: 이 장도 건너뛰어서 뒤엣것 한 것 같은데요.)

12·13·14 한번 쭉 읽어 보죠, 이 한 페이지만이라도. “맹자왈 佚道使民(일도사민)이면” 이게 이제 ‘일(佚)’이 ‘편안하다 일(佚)’ 자로 한 거네요. “도(道)로 편안하게 해 주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러니까 도(道)로 편안하게 한다는 게 아까 그거죠. 깨어나게 하면서, 양심을 자꾸 살아나게 하면서, 인의예지가, 사단의 마음이. 나라가 할 일이 별 게 아니라, 이제 이걸 보면 그거죠. 양심만 살아나게 하면 되는 건데요. 그러면 알아서 법을 지킬 텐데요. 그걸 그냥 억지로 막 누르려고 하면 안 되겠죠. 그러면서 백성을 부리면요, 비록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고요, 백성들이 힘들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고, 살게 해 주는데 “생도(生道)로 백성을 죽이면” 살리는 도로 백성을 갖다가 아주 힘들게 굴어도요, “비록 죽을 지경에 가더라도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않을 거다.” 말이 좀 세죠. 거의 성경에 있는 말씀 같은데. 왜 그런 것 같으세요? 그러니까 생도(生道)는 그거죠. 살리는 도죠. 사단(四端)이 자꾸 살아나게 하는 쪽이죠. 그래야 백성이 산 거죠. 밥만 먹여준다고 산 건 아니니까. 살리는 도라는 것은 양심이 자주 나오게, 자리 잡게. 이 얘기가, 지금 말하는 게 극단적인데 이렇게 보시면 되죠. 만약에 생도가 아니고요, 사도(死道), 죽이는 도로요, 그러니까 임금이나 좋지 백성들은 다 죽이는 도가 사도겠죠. 생도는 나도 살고 백성도 살고 하는 방향으로 한 거죠. 가르친 건데, 이렇게 가르쳐 놓으면, 일반적으로는 반대 상황을 생각하면 쉬워요. 백성을 부릴 때. 그러니까 꼭 양극단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가 뜻이 명확하지 않으신 것 같으면 반대 상황을 쳐 주면 맛이 딱 나요. 우리가 이렇게 사람이라고 그려 놨는데, 그림자 같은 게 하나도 없이 그려 놓으면 맛이 안 나죠. 여기다 그림자 넣고 명함을 좀 넣어 줘야 입체감이 확 생기듯이 반대 것을 딱 쳐 주면 좋죠. 반대로 생각하면 편안하게 하는 게 아니라 막 볶는 도요. 백성들을 막 못살게 구는 도로 백성을 부리면 “씨발씨발.” 하겠죠. 그래서 비록 수고롭지 않게 하더라도 원망이 장난 아니겠죠. 지금 대통령이 우리를 막 다 괴롭혀서 욕하는 건 아니잖아요. 움직임 하나에도 다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 내는 게, 꼭 우리를 수고롭게 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심보가 이미 그러면 우리가 마음에 원망이 생기는 거죠. 수고롭기 전에 이미 원망이 나오죠. “저거 왜 그래?” 이거죠. 저거 저렇게 가면 안 되는데. 자꾸 나를 힘들게 하는 도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거죠. 백성을 죽이는 지경까지 가기 전에 이미 난리가 나겠지요. 근데 이거는 아주 극단적인 예죠. “설사 죽이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거다.” 이 정도로 백성을 실제로 생각해서 백성들의 밝게 해 주는 정치를 펴냐? 이거죠. 진짜로 백성을 살게 해 주면, 나라가 위급에 처할 때는 죽인다는 게 “야, 너 좀 죽어 줘야겠다.” 이게 아니고, 나라가 위급에 처하면 죽기로 싸우죠, 밖에 나가서. 그게 백성을 죽음으로 모는 거죠. 군주가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그런다 하더라도 나가서 달갑게 죽을 거라는 겁니다. “내가 나라 위해. 그동안 우리 가족이 다 잘 살았으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들겠냐는 거죠. 요즘 자꾸 우리나라도 스스로도 찜찜하니까 그런지, 시국적으로. 자꾸 물어보잖아요. “전쟁 나면 싸우겠습니까?” 뭐 이런 거로. 서로 “왠지 아닐 것 같아.”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자꾸 조사하지, 안 그러면 안 하죠. 이런 걸 느끼는 거죠, 은연중에. 조직 사회라, 나라라는 게 집단인데, 인간을 이렇게 모아 놓았으니 별 소리가 많은데, 리더가, 이 알(☉)이 개판을 치면 이 주변은 흩어지는 게 본식이죠, 깨져 버리는 게. 조직도 그렇고 다 그렇죠. 팀장이 개판이면 이 조직 깨지고 끝나겠죠. 리더가 이상하니까 “야, 너도 혹시 칠 생각 있냐? 조금이라도 나랑 힘들어지면 어떻게, 계속 이 조직을 위해 남을 거야?” “언제 이 조직이 나를 위해 뭘 해줬다고?” 막 이렇게 나오면 끝인 거죠. 근데 그 전에 덕을 베풀고 백성의 양지를 깨어나게, 양심을 살리는 이런 정치를 펴면 양심이 살아서라도 이렇게 못 한다는 겁니다. “내가 나라 위해서 그동안 했는데, 덕을 많이 봤는데 그래도 나라 위해 죽어야지.” 이렇게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거지요. 공부자(工夫者)는 임금이 이렇게 안 해도 해요, 이거를, 사실은. 백성이 이렇게 한다는 게 신기한 거죠. 소크라테스 같은 분은 아테네 정치인들이 못살게 굴어도 사형 내리니까 그대로 받았잖아요. 요즘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권위에 순종하라”는 쪽으로 쓰는 건 잘못 쓴 거고요.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그때 “도망가면 잡으러 오지도 않을 테니까 갑시다.”라고 하니까, 친구가 가자고 하니까, 도인이라 “철학자로서 내가 아테네 청년들한테 아테네를 따르라고 하고 법을 따르라고 했는데, 내 법이 나한테 밥을 주고 떡을 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사약(賜藥) 내렸다고 튀면 그게 무슨 이성을 가지고 자기를 통제하는 철학자냐? 나라가 좋을 때도 덕을 봤으면 죽을 때도 또 나를 내놔야 옳지.” 이렇게. 근데 일반 백성은 그렇지는 않죠. 일반 백성은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해요. 왜냐하면 양심이 거기까지 계발된 건 아니거든요. 일반 백성한테 그러라고 하면 그건 또 다른 지옥고(地獄苦)죠. 조선시대가 힘든 이유가요, 선비들이나 해야 할 것을 막 백성들한테 요구하는 거죠. 자기들도 안 하면서, 실질적으로. 이러면 죽어요. 도덕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사제(司祭)들도 그래요. 자기들은 막 뒤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면서 밖에다가는 “야, 너 에고가 그렇게 하면 돼?” 남 지적할 때는 인의예지를 따져요. 이게 가장 잘못된 형태입니다. 우리도 절대 그렇게 조직이 (되면 안 됩니다). 모 단체들이 그런 단체들이 많아요.

“정충 기장 신명(精充 氣壯 神明). 정이 가득 차면 성욕이 사라진다.” 막 이러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나도 안 되죠. 채우기가 무섭게 충족시키려는 분들이 많죠. 말은 또 이렇게 청산유수들인데 실제로 안 한다는 거죠. 그게 남한테만 자꾸 요구한다는 거죠. 이게 문제예요. 좋은 말도 남한테 요구하기 전에 자기한테 더 센 걸 요구하고 남한테는 관대해야 돼요. 왜냐? 남의 양심 계발 정도는 나랑은 다르거든요. 특히나 백성들이라면 더 감안을 해서 얘기를 해 줘야 되는데, 이런 것 같습니다.

두 줄인데요,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는. 그래서 이대로 보고 느낌이 잘 안 오시면 반대로 한번 쳐 보세요. 반대 말을 하면 잘 와요. 『중용』에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정(精)’하고 ‘일(一)’하라.” 그러면 중(中)을 잡고 싶다는데 ‘정일(精一)’이 무슨 말인지 느낌이 안 오시면요, 반대 말을 생각해 보세요. ‘정(精)’이잖아요. ‘일(一)’ 하면 우리가 반대말도 알아야 하는데 이게 ‘조粗’나 ‘잡雜’이거든요. ‘거칠 조(粗)’ 자예요. ‘정밀할 정(精)’ 자의 반대가 ‘거칠 조(粗)’ 자거든요. 그래서 하나(一)의 반대는 ‘다(多)’겠죠. ‘다(多)’나 이렇게 ‘잡(雜)’이라고 하는데 약자(略字)인데요. 하나의 반대는 잡스러운 거죠. 그래서 ‘정일’의 반대는요 ‘조잡(粗雜)하다’예요, 우리말로. 정신이 조잡하면 중을 잡을 수가 없겠죠. “뭐가 정일이지?” 하면 조잡하지 않은 거예요, 정신이. 거칠지 않고 되게 밝고 딱 모아져 있는 상태예요. 일(一)이어야 해요. 다(多)면 안 되죠. 이것저것 하고 있는 상태가 多죠. 정신이 산만하게. 이 정(精)-조(粗) 차이는요, 이게 ‘쌀 미(米)’ 자잖아요. 쌀이에요. 정은요 쌀을 불순물 하나도 없이 다 껍데기 벗긴 거고요, 그래서 쌀이 푸른색(靑)이 돌 정도로 아주 이쁜 쌀이고요. 조(粗)는 거칠게 벗긴 거예요. 우리 그거 뭐죠? 안 벗기고 먹는 현미, 이런 거예요. 조(粗). 그러면 이해되시죠? 우리 정신의 때를 싹 다 벗겨야 하는데, 안 벗기고 덕지덕지 뭐가 붙어 있는 상태가 조(粗)죠. 거친 상태. 정신의 때가 다 안 벗겨지고, 거칠고, 이것저것 막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우리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정일하라!”라는 건 그 반대예요. 순수하게 만드는 거예요, 정(精)이란. 내 안에 있는 본래 그, 쌀 껍질을 싹 벗기면 그게 나오듯이 흰 쌀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껍질이다 싶은 건 다 쳐내면서 계속 있으면.

같은 말이죠. 일(一)을 안 하고 정(精)하는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가 나오죠. 그게 집중을, 하나로 정신을 모으지 않고 벗겨지지가 않죠. 정이 안 되고요. 정(精)을 해야 또 하나(一)가 이루어지고요. 이런 것도 보실 때 그러시면 좋겠고요.

이 13번도 대단한 얘기인데요. 이게 보세요, 이거는 이게 『노자(老子)』 이상이에요. 『노자』에 나온 문구랑 거의 똑같아요. 『맹자』가요, 이게 유교랑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게, 노자는 공자님 스승이고 유교랑 『노자』랑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노자』는 다만, 중(中)으로 치면 『노자』는 “중심을 잘 잡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무위 무불위(無爲 無不爲)다.” 하는 거고, 유교는 “진짜로 잘 잡았으면 잘 다스려 보자.” 하는 거고, 잘 잡아서. 그래서 사실은 저 알 철학인데요, 둘 다.

『맹자』 보세요. “맹자 왈 패자(霸者)” 패자는 약육강식의 대표 주자예요. 그러니까 무서워요. 머리가 좋고요, 용기가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금 미국이 패도(霸道)를 하는 거죠. 지금 우리 전 세계의 패자죠. 그러면 힘으로 미국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다들 머리 숙여서 말 들어요. 그래서 왜 패자를 치냐? (왜) 왕자와 패자를 구분하냐면요, 둘 다 다스림에 있어서는 ‘다스리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요. 패자도 아니면 나라가 통치도 안 돼요. 최소한 패자가 다스릴 때는 질서는 있어요. 그래서 왕자(王者)와 패자(霸者)를 구분해요. “어떤 식의 질서가 어우르냐?”예요. 패자의 질서는 “대가리 박아!”예요. 머리 쳐들면…. 미국, 깡패 국가잖아요. 조금이라도 미국에 반기 들면 가서 밟아 줘요. 다시는 머리 못 들게 해 줘요.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유지해요. 이게 깡패의 질서죠. 그래서 “패자의 백성은 기뻐하는 듯하고, 왕자의 백성은 담담한 듯하다.” 왕자의 백성은요, 왕자는 반대예요. 약육강식주의자가 패자라면 “왕자는 뭐냐?” 하면 홍익인간이죠. “너도 살고 나도 살자.” 하고, 이렇게. 그러니까 차이는 간단한 게요, 지도부의 차이예요. 이 지도부가 지도부의 힘을 강력하게 해 가지고 백성을 제압하는 형태가 패자고요. 지도부가 훨씬 살찌죠, 백성보다. 근데 왕도(王道)는요, 지도부가 백성을 위해 복무하는, “우리가 공복(公僕)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성 살리는 데 더 신경을 많이 써야지요, 자기들 거 챙기기보다는. 그러니까 왕자는요, 당연히 안 되는 이유가, ‘도심(道心)은 미미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로운’ 인류가 패자가 쉽지 왕자는 어려워요. 이건 하기가 힘들어요. 누가 그 왕을, 그 지도부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아까 할아버지 말씀처럼 고단자 아니고는 할 수가 없어요, 하고 싶어도.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백성을 위해 좀 나눠줬더니 백성들이 더 잘 살아요, 나보다. “내가 왕인데 이거는 뭔가 잘못됐….” 그러면 이제 패자로 돌변하는 거야. 이게 견딜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에요, 인간이, 말 쉽게. “내가 리더인데, 나누어 줬더니 날 무시하는 것 같아.” 그러면 나눠주고 무시도 안 받을 정도여야 하고, 나눠줘도, 무시받아도 전혀…, 그러면 얼마나 도인이어야 돼요? 이게 답이 안 나와요.

많은 수련 단체들이 이상해지는 이유가요, 그 사람들도 시작할 때는 “진짜 내가 왕도로 해 보리라.” 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좀 하다 보니까, 아, 이거 아닌 거예요. 자꾸 기어오르고, 나눠줬더니. 또 에고들이, 사람 에고가 못됐잖아요. 자꾸 나눠줬더니 무시해요. 이제 당연히 달라고 하고. “이건 아닌데. 가격을 올려 볼까?” 막 이제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해요. 접근을 쉽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저기 골프 그런데 회원(권 가격을) 이렇게(높게) 받으면 서로 벽이 좀 그어지잖아요. “우리 골프장에, 서민들을 위한 골프장이니까 아무나 오십쇼.” 했더니 개판이 된 거예요. 한 2천 원 내고 와 가지고 잔디를 뽑아 가고 막. “워, 이건 아닌데.” 해서 합리적인 명분이 생겨요. “이건 아니다.” 가격을 딱 올려요. “문을 높게 하고, 이 관리를 엄격하게 하겠다.” 말은 다 좋은데, 점점 이제 골이 생기죠, 또.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해도 안 되니까 이게 힘들어요.

똑같아요. 우리가 공부하려고 앉았는데요, 마음이 고요하니까 자고 있고, “아, 이건 아니다. 야, 잘하자. 잘하자.” 했더니 생각이 막 산란해져 가지고…. 이 중(中)에 도가 있는데 못 들어가는 거랑 똑같아요. 나라도 조금 놔두면 혼란으로 빠지고요. 조금만 잡으면 또 너무 독재로 가고. 무정부와 독재 사이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해요. 중을 못 잡아요. 첫째가, 왕도 아주 인격의 황극(皇極)을 잡으실 정도로 달인이 돼야 하고, 백성도 수준이 좀 있어야 돼요. 그 정치를 받을 정도의, 그런 정치를 누릴 정도의 안목은 좀 있어야 돼요.

막 “끌어내려!” 백성들이 무조건, 우리나라 백성들이었는데 그렇게 됐죠. “아~!” 해서 올려요. 올라가는 순간부터 막 악플을 달기 시작해요, 내려올 때까지. 막 밟아도 속이 후련치 않아요. 그러다 자살하니까 또 “아~!” 막 이런 식이에요, 계속. 뭔가 하나 있으면 정신이 없어요. 또 누구 올리겠죠, 나중에. 또 올라가는 날부터 아마 악플 달리기 시작할 겁니다, 내려올 때까지. 이런 식으로는 또 곤란하죠. 백성도 그런 거를 아직 받을 정도의 수준이 안 돼요. 그런 리더가 올 수준도 안 되고.

근데 여기 ‘왕자(王者)의 백성들’은 뭐냐면 이걸 누리는 정도의 수준이 된 거예요. 왜냐하면요, 왕자의 백성이라면 기본적으로 양심이 계발된 사람들이겠죠. 왜냐하면 왕이 최대한, 우리 『대학』에 나온 게 왕자의 정치거든요. 왕자가 할 일이요, “명명덕(明明德)” 내 덕을 최대한 밝히고, 그다음에 “신민(新民)” 백성들까지도 다 밝혀줘야 왕자거든요. 그러니까 왕자의 백성이라고 하면 이미 본성이 많이 드러난 거예요, 왕자의 혜택으로. 근데 이제 보세요. “담담하다, 항상. 왕자의 백성은 죽여도 원망하지 않고 이롭게 해 주어도 공으로 이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미 이런 이해관계를 많이 초월했다는 거예요. “양심대로 살면 되지, 사람이.” 뭐 나 돈 준다고 좋아하고요, 이러면….

요즘은 다르죠. “뉴타운 하겠습니다!” 하면 뽑아 주잖아요. 패자(霸者)의 백성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왕자(王者)의 백성들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중심들이 있어서 다 자기들이 알(☉)이에요, 하나의. 이해되죠? 그래서 제가 지난 주말에, “남들을 대할 때 하나의, 일국의 군주로 대하라”고 한 거예요. 각자의 알이 알이고 각자의 중심이 있으니까. 내가 그걸 좌지우지하지 말자. 패자는 “그걸 내가 고쳐주마!” 하고 덤비는 거예요. 패자도 또 질이 다른데요, 힘으로 하는 패자가 있고 아주 그냥 머리로 제압하는 패자가 있어요, 자기 재능을 믿고, 리더가. 어쨌든 패자죠.

왕도는 안 그래요. 이쪽을 살려 주는 방향으로 써요. 그랬더니 왕도 밑에 살다 보면 자기가 다 군주인 거예요. 공부를 해 가지고 다 자기가 중심이 잡혔기 때문에, 뭐 죽인다고 해도 “그게 죽을 일이면 죽지 뭐.” 이롭게 해 줘도 “그건 내 거 아닌데. 그건 내가 받을 게 아니다.” 이래 버리니까 이렇게도 변하는 거죠. 그래서 백성들이 날로 선(善) 쪽으로 가는데도 굳이 누가 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몰라요. 관심도 없어요. 나날이 자기가 밝아지는 데만 신경 쓰고 있죠. 그런 분위기를 계속 만드는 게 왕도(王道), 황극의 역할이고요. 근데 황극도 대우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안 할 수 없어서 하는 거고 당연히 하는 거지. 백성도 밝아지면서도 누구의 ‘빠’가 되지를 않아요,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패자의 백성들은, 약육강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똑같은 패턴이 있어요. 강자를 위에다 꽂고, 강자랑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또 약자를 무시해요. 그렇죠? 패자의 백성들은 그래서 “막 기뻐하는 듯하다”는 게요, 미국 시민들 생각하면 돼요. 거의 미국이랑 나를 동일시하면서 다른 나라 가서 거기 누르는 재미로, 그 인심이 충족되거든요. 패자의 나라에서는 도심을 몰라요. 그러니까 인심이 좋은 쪽으로 자꾸 가요. 남 위에 서는 게 당연히 좋고, 남보다는 이익을 많이 보는 게 좋고, 밑에 좀 깔아 주는 사람들이 많은 게 좋죠. 위에는 소수고, 밑에는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좋고요.

그런데 왕자는 다르죠. 그래서 “군자는 과화존신(過化存神)”이라는 말이, 이게 할아버지도 그런 말 많이 쓰시는데, 과화존신이라는 말이 여기서 출전(出典)해요. 이게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말인데요. “군자(君子)는 소과자화(所過者化)며” “군자는 지나가는 곳은” 이게 ‘통과할 과(過)’잖아요. “군자가 통과하는 곳은 저절로 교화가 되며” “소존자(所存者)는 신(神)이라.” “보존되는 곳은 신령하다.” “상하(上下)가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 “군자나 백성들이나 천지와 함께 같이 흐르니 어찌 조금 돕는다고 하겠는가?” 이게 왕도의 극치를 묘사한 거예요.

노자(老子)가 이거보다 더 묘사하지 않아요. 『노자』에 나오는 이상 정치가. 노자가 말한 이상 정치가 그거예요. “군자가 이미 왕위(王位)에 있어도 백성이 날로 살 만해지면서도 누구 덕인지를 모른다.”예요. 그거 똑같죠. 왜 이 마음이 있냐면, 진짜 군주라면 “내 덕이다.”라고 가서 얘기하고 다니지 말라는 거예요. 실제로. 이게 하느님의 정치가 이렇기 때문에 그래요. 하느님이 우리 지금 다 살려 주셨는데, 하느님이 찾아와서 “야. 너 내 덕인지는 알고 살아라.” 이런 얘기 안 하거든요. 말도 안 하잖아요, 저희한테. 하느님처럼 정치하자는 거예요. 노자도 그 얘기고요, 유교도 그 얘기예요. “하느님이 하면 그렇게 안 한다.” 인간이 하니까 잘해 놓고도요, 사람들이 받들면 또 망가지거든요. “내가 좀 그렇지.” 하면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해요.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게 “어떠한 죄업도 ‘참회할 회(悔)’ 자 하나를 못 이기고, 어떠한 선업도 ‘오만할 오(傲)’ 자 하나를 못 이긴다.”라고 했거든요. 지금 『채근담』 아마 다음엔가 나올 거예요. 지금 『채근담』 강의에서. 그 말이 무섭죠. 그러니까 아무리 성자(聖者)도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절대 자기가 성자라고, 누가 “당신 성인이시죠?” 할 때 그렇다고 안 해요. 그러는 순간 자기가 오만해져서 깎일까 봐 안 해요. 계제(階梯: 영성 레벨) 깎일까 봐. 그 단(段)이 아니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자기도 속으로는 알지만 “어, 내가 ‘뭐’야.” 하면 그때부터 형성될 일을 알기 때문에 안 해요. 그걸로 인해 내가 실덕(失德)할까 봐. 실덕이 더 중요한 거예요, 자기는. 양심 지키는 게 중요하지,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 가지고 나를 받들고 막 “이제부터는 어떻게,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다 아닌 거예요. “이거 지금 날 죽이려고. 위에 가면 나는…. 어떻게 올려 놓은 계제인데, 강등시키려고 이것들이 작정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군자한테는. 그래서 그렇게 안 해요.

그래서 군자는 말은 안 하는데도요. 왜, 군자가 뭐가 다르냐? 지나가는 곳마다 변화해요. 군자가 어느 날 광주에 있으면 광주가 변하고, 대구로 가면 대구가 변하고.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말하더냐?” 이거죠. 그냥 머물면 거기가 변해 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노자』의 “무위 무불위(無爲 無不爲).”랑 뭐가 달라요? 똑같은 얘기예요. 그렇죠? 그래서 “과화존신(過化存神).”이라는 건 이거예요. “지나가는 곳이 변화하고, 거기에 보존되는 곳은 신령한 기운이 거기에 남는다”는 거예요. 군자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뭔가 변화, 신기하게 사람들이 더 밝아지고, 뭔가 더 평화로워지더라는 거예요. 이게 존(存), 보존되는 거, 신(神)이라는 게 이거예요. 과화존신(過化存神)이, 지나가는 곳은 변화하고, 머물렀던 자리에는 뭔가 신령한 자취가 남아요. 이 정도가 돼야 군자라는 거죠. 윗사람은 이렇게 말 안 하고 조용히 변화시키면서 다니고, 아랫사람은 누가 변화시키는지 모르는데 자꾸 변하고 있고. 이게 진정한 왕도고 황극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는 거예요. 느낌 오시죠? 오늘 이거 하기 잘했네요. 이 파트가 정말 중요한 파트입니다. 『맹자』 전체에서 이렇게까지 얘기한 데가 없어요, 왕도의 극치에 대해서는. 이건 『노자』 이상으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 천지랑 같이 흐르는데 어찌 조금 돕는다고 하느냐?”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요, 천지랑 사람이 신령해지면 여기까지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예요. 천황(天皇)·지황(地皇), 『천부경(天符經)』으로 치면, 천도 하나(天一)고 땅도 하나(地一)인데 인간의 하나(人一)가 얼마나 위대하냐면, 사람이 황극(皇極)을 잡으면 천지를 이렇게, 천지에 아주 조화(造化: 신통한 일)를 일으키는, 이 인간들 사이에서 변화를 일으켜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 『중용』에 나오죠. “인간이 천지에 참여한다.”라고. 천지에 참여한다는 게 이런 건데 어찌 조금 돕는다고 하겠냐? “인간이 천지를 조금 돕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천지를 완성한다”고 봐야 돼요, 원래. 그렇죠? 여기까지만 하겠는데요, 이런 ‘관점의 전환’이 있어야 돼요. 천지의 열매가 인간이거든요. 천지의 중심이 인간이라, 인간이 하는 것에 따라서 천지는 완성이 돼요. 인간이 개판 치면 천지는 완성이 안 돼요. 천지가 공들여 만든 게 생명체고, 생명체 중에 제일 뛰어난 게 인간인데, 동물들한테 “선을 하라”고는 안 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선을 하고 악을 하고의 차(差)가 엄청나게 커요. 그래서 인간들이 만약에 다 선을 하면 이 우주는 지금보다 몇 차원 수준이 높아질 거예요. 그래서 우주를 완성하는 건 인간이라는 정도의 자부심이 있어야 돼요. “인간이 겨우 지구에 붙어 사는 바이러스지.” 이 정도로 생각해서는 답이 안 나와요. 제가 ‘진보’ 하시는 분들 싫어하는 게, 인간이 죄를 저지르…, “인간이 만물을 다 먹어 치워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기득권 보수 노인들하고는 다르게, 반대로, 이거 보시면 돼요. 독재와 무정부 사이에 인간이 왔다 갔다 하듯이 진보와 보수 모습이 꼭 이래요. 보수는 중심에 선 사람들 위주로 자꾸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하고, 진보는 이게 싫어 가지고 무정부 쪽으로 가요. 파편화를 시켜 버려요. 다 부숴 버리고 끝내려고 하는 에너지가 있어요. 이 중간에 도가 있어요. 중(中)과 화(和)가. 이것도 똑같아요. 혼침과 산란으로 비유하면 돼요. 산란해지거나 혼침해지거나, 그 중간에 도가 있어요. 그래서 진보나 보수나 중을 못 잡으면 아무것도…, 둘 다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둘 다 결국에는 답이 안 돼요. 도움이 안 돼요. 흩어 버려요, 자꾸. 대통령이 조금 못하면 “대통령 없이 삽시다.” 그러면…. 그게 필요하니까 만들었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