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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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istrator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29일 (목) 16:12 판 (새 문서: [https://youtu.be/A76ePjLB9ys 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3강 보러 가기] 녹취록<br> 클로버 노트 운용: 동파<br> 검수자: 보급형 (검수자 註: 홍범구주의 ‘천광’에 대해, 홍범구주 강의 자료를 보면 天子之光이라고 합니다. 딱 天光이라는 단어는 안 보입니다. https://cafe.naver.com/bohd/34549 자막에는 반영하지 마시고요.) “지나가면 변화가 일어나고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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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3강 보러 가기


녹취록
클로버 노트 운용: 동파
검수자: 보급형



(검수자 註: 홍범구주의 ‘천광’에 대해, 홍범구주 강의 자료를 보면 天子之光이라고 합니다. 딱 天光이라는 단어는 안 보입니다. https://cafe.naver.com/bohd/34549 자막에는 반영하지 마시고요.)


“지나가면 변화가 일어나고 거기에 신령함이 꼭 보존된다.” 이렇게 『천자문(千字文)』 같은 데서 풀거든요. 과화존신(過化存神)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시죠. 과화존신이라고 많이 쓰시는데, 지난 시간에는 이게 “군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죠. 지나가기만 해도, 어느 마을을 지나가면 그 마을 사람들이 변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튼 이게 노자(老子)가 강조한 건데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 군자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이 변한다, 저절로, 북극성처럼.” 아니면 “태풍의 눈처럼 조용한데 주변은 이렇게 움직인다. 변화가 일어나야 군자다.” 하는데, 이게 진짜 황극(皇極)의 맛이죠. 황극(皇極)의 특징이라, 노자가 처음 얘기한 게 아니라, 노자는 그걸 잘 정리했을 뿐이고, 어떤 특성인지. 그전부터 내려오는 그게 아주, 요·순(堯·舜)부터 다 그게 특징이에요. 요·순이 된 이유가, 가만히 있어도 주변이 변해야 요·순 자격이 있거든요. 대표적인 황극의 모델들이기 때문에. 촬영되나요?

예.

바로, 시간 됐나요?

5분 남았는데요.

시작하시죠. 그래서 과화존신이라고 지난 시간에 이렇게 풀었는데요. 군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게, 요게 사람이 이렇게 서 있는 게요, 이렇게 바뀐 거예요, 사람이. 바뀌었죠. 살아있던 사람이 죽고, 악인이 선해지고. 이 정도가 돼야 변화예요. 이게 결국에 뭐냐 하면, 『주역』에서는 화(化)라는 말이 나오면 양이 음으로 바뀌었거나, 음이 양으로 바뀌었거나예요, 무조건. 화(化)라는 건 이거예요. 여기서 이거랑 비교되는 게, 변(變)이라는 게 있죠. ‘말씀 언(言)’에 ‘실 사(絲)’ 해 가지고, 이거는 말을 실 다루듯이, 말을 조리 있게 다뤄 가는 거거든요. 아니면 음악을 갖다가 이렇게 연주해 가는 거예요. 음(音)을. 그러니까 이 변(變)이라는 건 뭐냐면요, 양에서 음으로 가고, 음에서 양으로 가는 것을 실질적으로 이렇게, 어떤 일정 멜로디에 맞게 연주해 가는 걸 변(變)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변(變)은 좀 더 드러나지 않은 어떤 ‘변화의 질서’고요, 화(化)는 결과물이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양이 음으로 바뀌었어.” “음이 양으로 바뀌었어.” 이렇게. 양·음을 나누면, 변(變)이 양(陽)적이면 화(化)는 음(陰)이죠. 화는 결과물이에요. 변은 은밀하게 계속해서 움직여 가는, 어떤 일정 질서를 가지고 움직여 가는 걸 말하고요. 음악으로 치면 어떤 일정 멜로디를 이렇게 염두에 두고 변화해 가는 거고. 화(化)는 그때마다 뭐냐 하면 음(音)이 하나하나가 확 바뀌죠, 어떻게 어떻게. 수(手)를 놓는 거는 화예요. 그래서 ‘변화’라고 쓰는데요, 변은 양이고 화는 음입니다. 그래서 실제 이 양이 음으로 되어 버리고 음이 양으로 되어 버리는 걸 우리가 化(화)라고 그래요. 바뀌었으니까. 그래서 과화(過化)는, 군자 지나간 자리에 악인이 개과천선이죠. 개과(改過)를 해서 천선(遷善), 선으로 바뀐 걸 말해요. 그러니까 유교에서 ‘화(化)’ 하면요, 유교에서 ‘화(化)’ 하면 일단 중요한 것은 ‘선악’이죠. 악이 선으로 바뀐 것, 그 허물이 선으로 바뀐 것. 개과천선.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이게, 요즘 광화문 새로운 현판 하고, 금 가 가지고 요즘 그러는데, 광화문(光化門)하고도 연결해 보면요, 이 유교의 이상(理想)이 지금 광화문 새로 만드는 거에 다 걸려 있는데, 의미가 있는 게, 앞에 세종대왕이 이번에 자리했잖아요. 세종대왕 때 집현전에서 지은 이름이거든요,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그전에는 그 이름이 아니었어요. 태종 때 대충 부르다가 광화(光化)라고 하는 게 이거예요. 임금의 빛이, 광(光)이 사방을 다 비춰 가지고 백성들을 싹 변화시키겠다는 것. “만방을 다 변화시키겠다.” 광이 원래, 집현전에서 그 문장을 만든 게 있어요. “화급만방(化及萬方)”이라고. 만방을 다 변화가, 만방에 교화가 미치고, “광피사표(光被四表)” 빛이 사표, 그러니까 ‘네 귀퉁이’요. 저 구석진 데. 이렇게 사방으로 치면, 우리가 천하를 땅으로 비유하면 이 귀퉁이 있잖아요. 여기까지 임금의 이 황극의 빛이 다 비추고, 그래 가지고 빛이 비치는 곳마다, 우리가 햇빛 비치면 “변하지 마라”고 그래도 변하죠. 더우니까. 옷을 벗을 수도 있고, 햇빛을 받아서 이제 일어나 가지고 활동을 시작할 거고요. 그 에너지를 태양에서 얻어 가지고 생명이 살아나고. 그 정도의 변화가, 따뜻한 빛과 열이 있잖아요. 이 빛이라는 건 단순히 빛만이 아니라 또 열이 있어서, 요거는, 빛과 열은요, 태양을 하느님에 비유할 때 빛은 주로 지혜 부분을 얘기합니다. 열은 어떤 사랑이나 힘이고요. 만물을 움직이는 힘과 만물을 살리는 힘을 상징하고요. 빛은 지혜입니다. 안 보이던 게 확 보이거든요. 세종대왕의 가르침이 이제 황극이 되셔 가지고 광화로, 광화라는 게 이제 광화문 세울 때 걸었던 현판에 담은 뜻이죠. 지금 세종대왕상도 복원되고 이제 광화문도 다시 제자리 찾고 하는 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가 변해 가는 하나의 그거였으면 좋겠다. 징조였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거기까지 그냥 얘기해 봤습니다.

군자가 지나가면, 군자가 가지고 있는 빛이 있어요. 이거를 신기하게, 옛날에 ‘임금 황(皇)’ 자 쓸 때, ‘황극(皇極)’ 할 때 이렇게 그리죠. 이게 황극이거든요. ‘임금 황(皇)’. 꼭 머리에다가 뿔 세 개를 그려 놔요. 그래서 이게 빛을 상징해요. 이게 뿔도 상징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신라의 금관, 그런 금관들 보면 다 이게 치솟는 뿔이죠, 이런 식으로. 이런 걸 엮어 놓죠. 하늘로. 옛날에 소를 신성시하는 것도 뿔 때문이죠. 하늘로 솟구친 뿔. 그래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치솟아 오르는 것에 대해서 되게 중요시하는데, 이 황극(皇極)에서 말하는 황(皇) 자도 옛날에 임금 중에 아주 제일 뛰어난 임금인데 “머리에 뿔 꽂았다.”라고 볼 수도 있고요. 한편으로는 빛으로 볼 수도 있는 게, 실제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 임금이 가진 빛을 천광(天光)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광(光) 자가 이렇게 머리에 불이 나는 사람을 그려요. 원래 이게 ‘빛 광(光)’ 자예요. 머리에서 불이 치솟는 사람. 그래서 그 사람이 너무 밝다는 거예요, 머리가, 환해 가지고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다 나오고,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면 다 맞고, 실제 인간사에서. 그래서 그렇게 모범이, 이게 동서남북, 아까도 그랬지만 동서남북 사방에서 제일 모범이 되시는 분이 황극이니까 이 정도 빛이 있어야 되는데, 황극, 『홍범구주』에 뭐라고 그러냐면 ‘천광’, 황(皇)은 천광(天光)이 있어서 이 천광으로, “백성들이 천광을 가까이하면서 변화한다.”라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까지 이해하시면, 우리 광화문도 좀 의미가 다르겠지만, 이것도 군자의 빛이죠. 그 빛으로 군자가 지나가면 변해 버려요. 근데 이게 지금 13절 얘기하는 거죠. 「진심(盡心)」 13절인데, 「진심上」. “지나간 자리에, 이렇게 지나가고 난 뒤에도 신령함(神)이 여전히 보존(存)되더라.”라는 식으로 지금 푸는데,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그렇게 풀었는데요.

다산(茶山) 선생이 이렇게 주장한 게 있어요. “내 생각에는 다르다. 지나간 것의 반대말이면 머문 거다. 존(存)은 머문 거로 보자.”라는 의견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풀면 더 재미있는 게 있어요. 13절 한번 보시죠. 그 부분이 얘기하다 갑자기 나와서. 13절 먼저 보고, 12절 보고 지나가죠. 13절에 “맹자가 이르기를 패자(霸者)의 백성은” 아주 지금 미국 같은 강한 나라, 강한 질서를, 약육강식이긴 하지만, 지도부가, 아주 강력한 질서를 유지한 나라의 백성들은 기뻐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패자(霸者)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요, “우리가 미국의 국민”이라는 거, 엄청 자부심 있거든요. 전 세계 여행 다닐 만하죠, 어디 가도 대우받으니까. 그래서 패자의 백성이 된 걸 기뻐합니다. “내가 훌륭한 리더를 모셨지.”하고, 거기 아래에서 자기가, 뭐죠, 그 졸자(卒者) 노릇을 하면서도 기쁜 거예요. “내가 머슴이라도 정승집 머슴이다.” 하는 이 기쁨인데, 왕자(王者)의 백성은 다르다는 거예요. 왕자의 백성은 주인공으로 임금이 대우하고 정치를 했기 때문에, 왕자는 홍익인간주의자니까요, 홍익인간주의자가 다스린 나라의 백성은 주인공 의식이 투철하다는 거예요. 아까 그 패자의 백성들은 노예 정신이라면요, “내가 강한 자의 노예다.”라는 걸 자랑하고 즐거워한다면, 왕자의 백성은 스스로 밝다는 거예요. 스스로 밝고 만족해요. 주인공으로 사는 거죠. “내가 주인공이다.” 하고 살기 때문에 “죽여도 원망하지 않으며” 노예라면 잘 대해 줄 때는 좋아하다가 “죽인다.” 그러면 원망하겠죠.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거 내가 전쟁을” 설사 이제 백성, 이게 죽인다는 것도 임금이 갑자기 백성 미워서 죽일 리가 없죠. 왕자(王者)라면 “타당한 명분이 있는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날 거다, 나라에. 전쟁이 있거나 아니면 지진이 났는데 구하자.”라고 했을 때 죽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그럴 때도 내가 주인공이니까, 왕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게 옳은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백성들도. “그래, 양심상 내가 측은지심, 수오지심에 내가 못 참겠다.” 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남 원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 책임이죠. 이롭게 해 줘도 별로 공(功)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내 양심에 만족스럽지 않은 거는 내가 취하지 않겠다.” 할 정도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백성들이 날로 선으로 옮겨가면서도” 개과천선이 일어나요. 실제 지금 광화(光化)가 일어나는 거죠. 황극이 다스리니까 변화가 일어나 가지고 “백성들이 날로 선으로 변해 가는데도 도대체 그렇게 만든 자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임금이 워낙 티 안 나게 한다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뭐 하나 줘도 내가 줬다는 걸 꼭 확인받겠지만, 황극이 하면 다 변화시킬 뿐이지 황극은 조용히 있다는 거죠. 하느님이 하시는 걸 배워서, 하느님이 만물을 다 변화시키면서도 일일이 “내가 했다.”라고 얘기 안 하고 다니시듯이, 그러니까 백성들이 잘 모른다는 건 “스스로 내가 변한다.”라고 생각하고 주인공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거죠. 이 얘기의 이제 종합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대저 군자의 지나가는 바는 교화를 일으키며” 소과자(所過者)는, 군자가 지나가는 바는 변화를 일으키며, “소존자(所存者)는” 그럼 과(過)의 반대로 풀어 보자는 거죠. 그럼 이번에 ‘머문다’(存)라고 하면요 “소존자(所存者)는, 군자의 머무는 바는 신령하다(神).” 군자는요 “가만히 있어도 신령하다”는 식으로 풀 수가 있다는 겁니다. 군자는 가만히 있어도 신령하고 움직이면 변화를 일으킨다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무위 무불위(無爲 無不爲)’랑 통하고, 유교에서 말하는 ‘치중화(致中和)’죠. ‘치중화’ 그러잖아요. 희로애락이 안 일어날 때도 중을 잡고 있고, 발(發)하면 주변과 조화를 일으키고. 여기에 맞먹는 내용이 또 풀어지니까 좋은 것 같아요, 다산 선생님식 의견이. 지나가면, 군자가 실제 움직이면 변화가 일어나고, 실질적인. 가만히 있어도 신령하다는 거예요. 주변에 뭔가 신령한 기운이 감돌면서 가까이 간 사람들이 변화가 일어나는 거죠. 변화가 다른 게 아니겠죠? 그거 있죠? 가까이 간 사람들 양심이 자꾸 밝아지는 거예요, 별 게 아니라. 선(善)은 다 양심으로 하는 거니까. 악(惡)도 양심으로 안 하는 거고요. 양심이 자꾸 살아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을 만나면. 교화도 그런 거고. 그런데 가만히 있어도 그런 에너지를 풍긴다는 거죠. “순임금(舜)이 무위(無爲)로 나라를 다스렸다.” 하는 것도 이제 이런 원리라고 보시면 되겠죠. 그래서 이렇게 보면 재밌겠죠. 과화존신. ‘중화(中和)’가 되겠죠. 존신(存神)은 중(中)이고요, 과화(過化)는 화(和)가 되겠죠. 이렇게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딱히 어느 것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는데, 다 풀이가 가능한데요. 왜냐하면 굳이 “지나가는 자리가 신령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군자의 양면을 다 얘기해 주는 거니까 이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다음 말이요, 지금 중화(中和)를 예비한 말이잖아요. 위나 아래로 천지랑 함께 흐른다는 게 중화에 맞는 얘기거든요. 원래 맹자라는 분이 중용의 달인이라 중용의 아주 전문가거든요. 우리가 보시면 이거죠. 희로애락이 아무 발동하지 않을 때는 흔들리지 않는 중을 잡고 있고 희로애락이 발동하면 항상 조화를 이룬다는 거죠. 이게 나무가 말을 하는 거죠. 나무에서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악기예요. 나무로 만든 악기를 딱 연주하면 화(和)가, 주변이 다 화평해지거든요. 모든 시름을 잃고 그 음(音)에 빠져들어서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거죠, 화(和)는. 그래서 화락(和樂)하다는 거죠. 락(樂)도 지금 이게 ‘실 사(絲)’ 자죠. 나무(木)에다가 실(絲)을 묶어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겁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거예요. 둘 다, 화락(和樂)이라는 게. 그래서 예전에는 음악이라는 게 즐거움을 상징해요. 음악 들을 때 뿅 가더라는 거죠. 즐겁고. 그것도 혼자 즐거운 게 아니라 다 같이 즐거워지잖아요. 보통 뭐냐면, 한마음이 돼 가지고. 그래서 이런 걸 되게 중시해요. 이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이 돼 가지고 같이 즐거워지는 거니까 여기 이 상에 맞죠. 알이라는 상에 되게 맞죠. 누구 하나 소외된 사람 없이 원탁, 이번에 G20도 원탁회의 하잖아요. 왜냐면 원탁회의 하는데 가난한 나라는 뒤로 빠지고 부자 나라는 좀 더 앞에 앉고 이러는 게 없죠. 중심에서 볼 때 누구나 똑같은 거리에 앉는다는 거죠. 평등을 상징합니다.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니까 한마음이 된다는 거죠. 중을 가진 사람은 실제 움직이면,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만약 중을 갖고 움직이면, 여기 계신 분들은 지금 각자 다르게 앉아 계시지만 제 마음에서는 거리가 똑같다는 거죠. 똑같이 제가 고르게 생각하고, 다 즐겁게, 모든 분들이 즐거워져야 제 임무가 끝나는 거죠. 이렇게 이게 중화인데요. 이렇게 중화를 이루면 중(中)은 하늘이랑 통하거든요. 중은 형상이 없으니까요. 형상은 없는데 이 안에 만물의 어떤 원형들은 다 들어 있죠, 원상(原象)들은. 그래서 『중용(中庸)』에 “중(中)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그러거든요. “천하의 큰 뿌리다.” 천지 만물이 다 여기서 나왔다는 거예요, 중에서, 형체가 없는데도, 아무것도 없는데도. 지금 없죠. 중은 안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제, 여기에는 개별 만물들이 존재하는데 개별 사물들을 한 덩어리로 꿰뚫는 그 중심이죠. 지금 우리 모두의 중심이 되는 자리죠, 여기는 안 보이지만. 거기에서 우리가 다 나왔다는 거고요. 이 자리는 우리의 달도가 된다는 게 이런 조화, 만물들 간에 서로 조화를 이루려면 여기에는 어떤 일정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그 질서를 우리가 달도(達道)라고 합니다. 어디서나 통하는 질서, 뭐냐 하면 어른한테 공경하고, 부자 간에 사랑이 있고, 임금과 신하 간에 의리가 있고, 오륜(五倫)을 말하는 겁니다, 달도는. 인간의 오륜. 그래서 이 오륜은, 오륜에 상응하는 많은 것들이 있겠죠. 자연 법칙도 있을 거고. 이건 인간관계의 법칙이죠. 인간관계의 법칙이 두루 통해 가지고 이걸, 전체 사람들을 화락(和樂)하게 만들어 주는, 그래서 천하의 대본(大本) 자리는 안 보이지만 우리 오륜이나 이런 건 다 할 수 있죠, 우리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되고 자식은 부모한테 효도해야지.” 하는 이게 하나의 공식이거든요. 우리는 다 알고 쓰죠. 이걸 왜 해야 되느냐? 그래야 전체가 하나의 화락이, 누구나 다 원하는 걸 얻을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중(中)은 하나 더 들어가죠. 달도보다 더 어려운 게요, 중은 그런 오륜의 근본이 되는 거예요. “왜 오륜을 해야 되지?” 하는 거예요. “왜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해야 되지?” “자식은 왜 부모한테 효도해야 되지?” 근데 이런 후천적인 공식에, 이건 후천적인 공식이고, 더 근원이 되는 대본(大本)은 여기 우리가 원상(原象)이라고 하는 거죠. 서양에서 이데아(idea)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건 어렵지 않아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인의예지’입니다. 그냥 딱 무조건 대본(大本) 나오면 그어 놓으세요. 오행이고요, 인의예지고요, 거기서 다 나왔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사랑의 이데아 인(仁), 정의의 이데아 의(義), 조화의 이데아 예(禮), 지혜의 이데아(智)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를 보면 그 이데아 중에서 인의 이데아가 발동하면서 아버지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를 낳아 주신 분이니까요. 부모님은 애들 볼 때 인의 이데아가 먼저 발동하면서, 시비지심보다도요, 얘가 옳으냐 그르냐 뭐 여러 가지 다른 걸 따지기 전에 인의 이데아가 먼저 튀어나오더라는 거죠, 그게 사랑의 형태로. 나오면서 얼마든지 왜곡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그 근원을 보면 다 같아요. 나와 남을 같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거든요. 옆집 아기가 물에 빠지는 거 보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나 내 자식 보면서 일어나는 마음이나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죠. 특히 근데 내 자식은 더 둘로 안 보인다는 거죠. 그래서 특히 유교에서는 가족 관계부터 잘하라는 거죠. 이거 못하는 사람이 남의 자식 구한다고 뛰어다닐 확률은 거의 떨어지니까요, 자기 자식한테도 안 하는 사람이. 그래서 가정에서 하는 거 보면 안다는 거예요. 가정에서 사랑을 쓰는 걸 보면 남한테도 얼마나 쓸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가정에 일체 안 되고 남한테만 쓴다고 그러면 사기일 확률이 높겠죠. 뭔가 욕심이 있어서, 그렇게 보여야 돼서 그 모습을 취하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중용』에서는 “친구 간에 잘하는 걸 보려면 가족 관계를 먼저 보라”고 그러잖아요. 가족에서 잘하는 거. 뭐 대충 이해가 되시죠? 그러니까 이 중(中)은 천(天)에 속하고요. 이것들은 형체가 있는 것들이고 쪼개져 있는 것들이잖아요, 낱개로. 여기서 이게, 『주역』 어려운 얘기 잠깐만 하겠습니다. 이게 괘(卦)로 그리면 건괘(☰)예요, 중(中)은. 한 덩어리거든요. 천지 만물이 아무리 많아도 중은 하나로, 쪼개지는 법이 없어요. 그렇죠? 근데 천지만물은 다 각개죠. 그림 보세요. 벌써 각개죠. 다 쪼개져 있어요. 이게 곤(☷)이에요. 그리고 땅이에요. 땅은 형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형체가 없는데 뭘 대느냐? 정보를 대요. 우리가 상(象)이라고 하고 원리라고 하는데요. 정보를 대고요, 땅은 형체를 만들어 줘요. 이 두 개가 합작이 돼야 만물이 나와요. 풀이 하나 이렇게 자라려면요, 이 하늘은 우리가 흔히 아는 대기의 하늘이 아닙니다. 대기의 하늘은, 그것도 하나의, 땅의 한 모습이에요. 땅의 좀 더 미세한 모습이죠, 실제로는. 그래서 우리 유교나 이런 데서 말하는 ‘하늘’은 하느님을 말해요. 무형의 존재, 진짜로. 존재는 하는데 무형의 존재로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 그래서 우주를 굴리는 자리를 우리가 하늘이라고 그래요. 이 하늘에는 만물을 어떻게 만들어야겠다는 대본(大本)이 있어요. 정보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무수한 개벽이 지나도요, 또 우주를 만들면 어떻게 만들어야겠다는 시나리오가 다 있는 거죠.

그래서 그걸 만들었는데, 실제 땅이 아니면 만들 수가 없잖아요. 땅이 이렇게 만물을 쪼개 주지 않으면, 한 덩어리만 있으면 우주가 나올 수가 없죠. 분화가 돼야 하는데요. 사람도 만들어지고 공간도 쪼개지고 시간도 쪼개지고 다 쪼개져야 되니까 곤(☷)의 원리가 생겨야 반드시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실제 빅뱅 이론에서 보면 이거는 우주의 발산력이죠. 확 터져 나가는 힘인데, 곤(☷)이 그걸 하나하나 쭉 붙잡아 주지 않으면, 질량이나 이렇게 무게를 갖게 하지 않으면 입자들이 생겨나지 못하겠죠 그냥 큰 덩어리로 발산만 하겠죠. 그런데 이 곤의 힘이 그걸 잡아 줍니다. 여기서 제가, 빅뱅 이론에서 말하는 하늘만 해도 벌써 에너지인데요. 이 하늘은 더 미세한 하늘까지도 얘기하는 겁니다. 그 하늘을 빼고 얘기하는 건 아닌데요, 그 하늘의 더 근원이 되는, 진짜 우주 안에 존재하는, 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에너지체, 그 하늘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일단. 왜 이렇게 말씀드렸냐면요, 우리가 중화(中和)를 이루면, 중화를 이루면 천지(天地)가 자리 잡는다는 말을 하거든요, 『중용』에서. 『맹자』 얘기하다가 『중용』으로 갔는데, 천지가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한번 느껴 보시라는 거예요. 중화라는 게 제가 깨어서요, 제가 깨어서, 별거 아니에요, 제가 깨어있으면서 이 친구랑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말실수도 막 나갈 거를 깨어서 보니까 “이건 아니다.” 해서 자중하면서 적절하게 해서 우리 둘이 서로 ‘윈-윈’하는 방법을 찾은 게 화(和)예요. 서로 기분 좋아졌어요. 중화(中和)죠. 여기에 무슨 천지가 작용했냐는 거죠. 중화를 이루면 천지(天地)가 제자리 잡힌다고 그랬는데, 여기서 그러면 “이 친구가 천이고 내가 지거나, 내가 천이고 이 친구가 지냐?” 이런 게 아니고요. 이 상황에서 인(仁)이라는 이데아가, 인의예지라는 이데아가 잘 발현됐죠. 인의예지의 이데아가 이 안에 들어 있다가요, 지금 이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실제로 인의예지로 이 친구랑 관계에서 구현됐죠. 이게 천지라는 겁니다. 인의예지의 이데아는 천(天)의 작용이고요, 실제 지금 이 친구랑 저 사이에 좋은 관계가 형성된 거는 모양이 나타났잖아요. 서로 기분 좋았잖아요. 곤(☷)의 세계거든요. 땅이 작용한 거예요. 그래서 원래는 천지 작용이 여기에서 안 일어나요. 제가 막 욕하고 이 친구도 맞받아치고 하다가 천지 작용이 어그러져서 관계가 깨져야 되는데 천지가 지금 옳게 작용하니까 당연히 따라오는 게 있어요. 천·지가 결국 하는 짓이 뭐냐 하면, 하늘은 정보를 대고 땅은 형체를 만들어 주면 뭐가 되냐면 만물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끝없이 만물이 튀어나와요. 우주에 채워지게 돼 있어요. 하늘한테서 정보를 받고 땅에서 형체를 받은. 우리도 그렇잖아요. 이 형체는 땅에서 온 거고요. 이 정신은 하늘에서 온 거죠, 순수 정신. 그 얘기는 뭔 말이냐면 천지가 제자리 잡았다는 건 천지가 제 기능을 한다는 얘기고요. 천지가 제 기능을 하게 되면, 우리 둘 사이에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우리 둘 다 서로 사는 방향으로 가고 있죠. 우리가 곧 만물이죠. 천지이자 만물이에요. 우리 주변도 좋아지고요, 이 가족도 좋아지고 저 가족도 좋아지고, 우리도 좋아지고 그래서 결국엔 천지가 제 작용하는 데에는 반드시 모두가 다 좋아져요. 거기에 제가 동물을 키우고 있다면 그 동물도 좋은 방향으로 가겠죠, 제가 기분이 좋아지면, 항상. 제가 화락을 추구하면 또 애완동물하고도, 요즘 반려동물이라고 하는데, 좋은 관계가 유지되겠죠. 그래서 만물이 다 살아나요. 제가 꽃을 키운다면 꽃한테도 저주를 안 퍼붓겠죠. 근데 꽃한테도 막 욕하면서 물을 주면 꽃이 안 자라죠. 그래서 천지가 작용 안 하는 데는 다 어그러지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가 작용하는 데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당장 제 몸도 만물이에요, 제 세포들이 무럭무럭 자라요. 제가 기분이 좋고 깨어있으면. 남 다 빼고 제 안에서만 해도 변화가, 천지가 제 자리를 찾으면 온몸이 무럭무럭 건강해지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얘기는 뭐냐 하면, 군자가 중화를 이루면 위아래로 천지랑 함께 흐른다는 건 군자를 통해서 천지가 작용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 사람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가, 천지가 저를 통해서 작용하는 거예요. 제 정신은 하늘이고 제 몸은 땅이에요. 제 감정도 땅이고요. 제 생각도 땅이고, 사실은. 땅의 요소가 강하죠. 순수 정신, 우리 희로애락 미발(未發)의 중(中)이 하늘이라면. 그래서 제가 깨어나는 순간 이미 제 안에서 천지는 제 자리를 찾았어요. 그래서 좋은 현상이 제 몸에서부터 일어나요. “천군태형(天君泰亨) 백체종령(百體從令).”이라고 몸 안에서부터 벌써 좋은 일이 일어나요. 그러면 저랑 만나는 사람들이 다 좋은 변화를 겪어요. 그러면 저로 인해서 천지가, 이 부분만큼 천지가 안 통하다가, 기운이, 제가 깨어있음으로 인해서 천지가 여기서 작용하게 되면서 좋은 현상이 일어났죠. 그래서 여기 천지랑 같이 흐른다는 게, 천지가 흐르는 거는 만물을 살리는 방향으로 흐르는 거죠. 이렇게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조금 도울 뿐이라고 하겠는가?” 인간이 도를 이루면 조금 돕는 정도가 아니라는 거죠. 천지를 오히려 제대로 완성시켜 준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은 천지를 완성시켜 주는 존재예요. 지금 천지가 다 갖춰졌는데 빠진 게 인간이에요. 동물한테도 천지가 바라는 거 없어요. 인간이 중·화를 어기는 바람에 천지도 어그러져 있어요. 이 부분만큼 여기도 천지인데, 지금 이 친구가 땅을 어그러지게 하고 하늘을 어그러지게 하면 이 부분만큼 어그러진 거예요. “내가 우주를 바로잡겠다.” 하는 게 아니고, 천지정위(天地定位)라는 게, 지금 여기서 천지가 정위가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저 우주는 다 살 만한데요, 여기가 문제인 건데, 제가 깨어있음으로 인해서, 중화를 지킴으로 생각이 없을 때도 광명하고, 정신이, 생각이 일어나면 늘 조화에 맞게 남하고 윈-윈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 선을 따르고 악을 물러나게 한다면 천지를 작용하게 할 수도 있다. 천지를 완성시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뒤에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요임금(堯)을 칭송하는 노래죠. 「격양가(擊壤歌)」라고 있는데, 격이 ‘칠 격(擊)’ 자죠. 우리 ‘격투기’ 할 때 격(擊) 자예요. 양은 우리가 ‘토양’ 할 때 양(壤) 자입니다. 토양, 땅이에요. 그러니까 『사기(史記)』에 보면요, 요임금이 이렇게 뭐죠? 민간 이렇게 암행인가요? 이렇게 이제 민심 보러 돌아다니는데, 요즘 같으면 TV에서 얼굴 보면 알아보겠지만 그때 요임금 못 알아보겠죠. 이렇게 돌아다니시니까 어떤 노인 하나가 땅을 막 발로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나 봐요. 뭘로 쳤는지 모르겠지만 발이나, 이렇게 치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네. 논 갈아 밥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네.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이게 요임금이 정치를 정말 잘했다는 증거물로, 지금까지도 “격양가를 부른다.” 하면 최고의 정치죠. 이게 노자의 ‘정치의 이상’이에요. 노자도 이 이상이 없어요. 그래서 노자도 결국 요·순 정치를 모델로 한 거예요, 그 황극 사상을. 요·순 같은 황극, 천지를 갖다가 변화시킬 정도의 그런 깨어있음과 절도, 그리고 백성 다스릴 때 백성이 스스로 주인공 되게 다스리지, “임금이 뛰어나서 우리가 사네.” 이렇게 노예 정신으로 안 만든다는 거예요. 패자(霸者)는요 노예 정신으로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따라와요. 그러니까 종교단체도 패도로 다스리는 종교단체는 철저히 이 교주의 ‘빠’가 돼서 예속된 노예 정신을 만들어요. 깨어나게 만들지 않아요. 사실은 깨어나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깨어나지 않게 해야만 그 단체가 유지되는 거죠. 깨어나 버리면 안 돼요. 주인공이 많아지면 안 돼요. 그런데 왕도는 달라요. 온 국민이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정치예요. 그래서 어려워요. 왕도는 어려워서 잘 안 되는 거지, 쉬우면 진작 됐죠. 인간이 하기가 참 어려운 시스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심이 더 승(勝)한데, 인심은 항상 위태롭거든요. 인심에는 패도가 맞아요. 근데 도심에는 왕도가 맞죠. 그래서 역사가 크게 보면 인심과 도심의 이렇게 투쟁사인데, 인심과 도심이 늘 인심이 많이 승리하죠. 간간이 도심의 승리, 예전에 과거 전적이 있긴 한데 드물죠. 몇백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정도. 우리도 세종대왕 때는 한 번 있었지, 그 뒤로는 정조대왕이 조금, 많이 복원해서, 근데 아주 왕도로 가긴 힘들었거든요, 그 상황이. 그래서 이 왕도라는 게, 왕도가 되면 재밌는 게, 단순히 그냥 백성만 편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 그때 모든 영감이 다 나오죠, 지혜가. 국방력도 증진되고 과학도 발달하고, 문화·예술·언어, 이 왕도가 좋은 게 여러 지혜를 같이 쓰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지혜로 모든 걸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왕도가 잘 이루어질수록 백성들도 뛰어난 인재들이 등용돼 가지고 자기 재주를 다 펴기 때문에, 또 그걸 왕이 잘 받쳐 주고 그러면 무한한,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인프라가 잘 된 시대에 이런 왕도가 펼쳐지면, 진짜 지금 펼쳐질 만하죠. 어마어마한 콘텐츠가 막 만들어질 겁니다. 그동안 여러, 자금이 딸려서, 기득권에 뭔가 이렇게 눌려 가지고 못 나오던 아이디어나 이런 게 다 꽃피워 줄 만한 그런 리더를 말하는 거죠, 왕도는. 13장 하나에서 좀 많이 읽었는데요, 그만큼 중요한 내용 같아요.

12장은 그 연장에서요, 아니, 12절은 “맹자가 이르기를, 편안하게 해 주는 길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힘들어도 원망 안 한다.” 4대강이 아니라 6대강, 7대강을 파자고 그래도 백성한테, 백성 위해서 하는 것 같으면 백성이 삽 들고라도 가서 판다는 거죠. 도와준다는 거죠. 우리 금 모으기 할 때 그게 “나한테 도움 되리라”고 하고 금 내놓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 마음이 있거든요, 백성은. 진짜 이게 좋은 거에 쓰일 걸로 알면. 근데 그 뒤로 여러 번 국가에서 그거, 거기다가 이만한 빨대를 꽂아서 이렇게 해 드셔 가지고 요즘은 성금 내라고 그래도 잘 안 내실 겁니다. 이게 어디로, 누구 배 채울지 모르는데. 실제 국민들한테 가지도 않는다는 게 계속 보고됐기 때문에. 이런 거죠. 이런 믿음이 상실된 상태에서는 이제 왕도가 안 되겠죠. 그래서 왕도로 하면, 살리는 길로 백성을 죽이면, 죽더라도 원망 안 한다는 겁니다, 죽이는 자를. 근데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지만, 죽이는 길로 백성을 이렇게 대하면 안 죽이더라도 원망한다는 거죠. 죽이지 않더라도 “나를 죽음의 길로 조금씩 몰아가겠구나.”라는 그 눈치가 보인다면, 이렇게 선명한 거라면. 그래서 홍익인간 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백성들도 자신을 위해 일하는 정부의 진심에 반응할 거라는 겁니다. 진심이 보여야 가능하겠죠. 그래야, 왜냐하면 백성들도 양심이 다 있는데, 나를 이해하는 사람한테 그게 느껴진다면 그렇게 못 할 거라는 거죠. 근데 백성들이 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기 때문에 자기 혼자 챙겨 먹으려는 정치인을 보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계속 악플을 달죠, 수오지심으로 인해서, 그래서 그건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잖아요. 그 악 자체가 참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요. 내 걸 금 그게 악이 남의 거거든요. (이 문장은 자막 제작시 빼 주세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범죄자 처벌하는 것도 실제로 보면 수오지심 때문에 하는 거예요. 법정이 열리고, 사형 때릴 거냐, 얘를 무기 줄 거냐, 10년 형을 줄 거냐도요, 어디에 적합하게 주는 게 옳냐면요, 수오지심이 만족하는 만큼 주는 게 맞죠. 그래서 수오지심은 법의 잣대가 돼요, 실제로는. 실제 법에서도 이걸 우리가 양심이라고 하죠. 양심에 준해서 재판하라고 하는 게, 단순히 법조문만 가지고 하라고는 안 해요. 왜냐하면 법조문도 양심에 가장 흡족한 정도로 정해 놓은 것뿐이거든요. 그런데 시대에 따라서, 또 양심의 반응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일일이 체크를 못하니까, “판사가 좀 잘해야 된다.”라고 했으니까, 판사가 사실은 양심의 달인이 돼야 맞고요. 실제로 우리도 양심이 있으니까 한번 볼 수가 있어요. 근데 어느 처벌에 대해서 백성들이 너무 많이 분노한다면 그 법의 형량이 수오지심에 안 맞는다는 거니까 좀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죠. 그게 혹시 일부의 착각·편견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한 게. 왜 수오지심이 법의 기준이 되면 좋냐면요, 이런 것까지도 있어요. 우리가 악을 미워하, 수오지심이 일어날 때 뭐냐 하면 결국 죽이려고 일어나는 건 아니죠, 저를, 제가 악에 물드는 걸 미워하는 마음은 뭐냐 하면, 제 자신을 막 미워하고 막 이렇게 자책하는 그런 단순한 마음이 아니고, 빨리 선을 회복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혈(瘀血)이 돼 가지고 피가 이렇게 마비되는데 그걸 미워하는 거죠. 우리 몸이 저항하죠. 살려고. 열이 나고 막 여기 막힌 피를 뚫으려고 하는데 그게 수오지심입니다. 몸에서 분노하죠. 세포들이 죽어 가니까요. 살리려고요. 그래서 양심이 자꾸 더럽혀지니까 양심이 살려고 나오는 게 수오지심입니다. 그래서 악을 잘라내야 내가 살겠다는 거예요. 악을 뚫어 내야, 고쳐야. 막힌 혈관이 있으면 뚫어야 살겠다는 거죠. 처벌이라는 거는 딱 그만큼이 적당한 처벌이죠. 막힌 데 뚫을 정도. 근데 사이코패스 정도면 뚫기가 아주 힘들죠. 그걸 다시, 사이코패스의 양심을 회복해 놔야 그 처벌이 올바른 처벌이죠. 뭐 사이코패스 아니라 어떤 범죄든지. 그러니까 처벌 자체는 항상 선(善)이라고 보는 게요, 철학적으로, 처벌은 좋은 거고, 항상, 사실 즐거운 거죠. 왜냐하면 그 인심은 싫어하더라도 도심은 즐거워할 거니까요. 이제 도심이 살겠는데요, 처벌을 받아야 살죠. 죄를 지었는데 처벌을 안 받는다고 좋은 게 아니라, 양심이 계속 가책을 받는데요. 양심이 홀가분해지려면 적절한 대가를 치러야만 빨리 되니까, 그 대가는 양심이 흡족해하는 정도가 맞겠죠. 그래서 모든 처벌의 기준은 수오지심이 흡족한 정도라고 보시면 맞고요. 그래야 처벌이, 그게 단순한 복수냐 뭐냐 하며 아직까지 논쟁이 많아요. 복수냐, 그게 보복이냐, 아니면 그 법에 대한 어떤, 앞으로 범죄 예방책이냐 하는데, 첫째로 뭐냐면, 그런 걸 다 떠나서 처벌의 목적은 양심 살려 주는 겁니다. 범인의 양심을 살려내야 범인이 뭐 뉘우치든지 반성을 하면서, 양심이 살아나야 끝날 일이잖아요. 왜냐하면 그래야 이 친구가 다시 범죄를 안 저지르지, 처벌을 아무리 받아도 양심이 안 살아나면 이 친구는 나가면 또 하겠죠. 이미 습관화된 거는 범죄인데.

『맹자』 하면서 수오지심, 『맹자』 앞으로 계속 나오거든요. 수오지심이나 사단(四端)으로 『맹자』를 다 읽어 보세요. 그러면 『맹자』가, 맛이, 어렵지 않아요. 이제 이거 지우고요. 사단(四端)을 좀 그려 놓고 볼게요.

우리 마음 안에 이렇게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주 쉽죠. 인(仁)이라는 게 들어 있고요, 의(義)라는 게 들어 있고요. 지금 이건 결론만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진짜 그런가는 좀 이따 얘기하고요. 지(智)라는 게, 신(信)이라는 게 있는데, 인이 들어 있다는 증표는요, 우리 마음에 측은지심이 일어난다는 거죠. 측은한 측은지심이. 그래서 측은지심은 프로그램은 아닙니다. 이 프로그램이 어떤 특정 시공간, 시간·공간 안에 어떤 개체성을 띠고 나타날 때죠. 막연한 측은지심은 없어요. 어떤 상황이 지금 슬픈 거지, 안타까운 거지, 근데 이 차이예요. 인이라는 것은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개체성이 없습니다. 이게 원상(原象)과 감정의 차이예요. 본성과 감정의 차이가요, 본성 차원에서는요 어떠한 그게 없습니다. 시공을 초월해 있는 자리예요. 그런데 감정 차원은, 여기 측은지심은 분명히 감정이거든요. 측은한 감정이잖아요. 이 감정은 뭐냐 하면 분명히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고 어떤 대상이 있어요. 그래서 이건, 이 세계는 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측은지심부터는 우리가 형이하의 덕(德)이라고 하고, 인(仁)에 대해서는 형이상의 도(道),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로 영원히 우주에 새겨져 있는 길이에요. “천 년 만 년 뒤에도 인간으로 나오는 한에는 이 길을 걸어라.” 하는 게 길이고요. 덕은 매 순간 달라요. 얘한테 측은해한 것, 이 친구한테 측은해한 것, 이 친구한테 측은해한 것. 다 달라요. 강도도 다 다르고요, 맛도 다 달라요. 덕은 하나도 같은 게 없습니다, 형이하의 덕은. 이 차이 아시겠죠? 형이하의 덕에서도 나오는 게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측은해해야 되더라.” 하는 공식은 있죠. 이게 인에서 나온 겁니다. 인이 그대로 형이하에 작용해 가지고요, 그럼, 지금 이 세 개를 나눠 보세요. 측은한 나의 감정하고요, 이건 순수하게 정(情)입니다. 인이라는 아주 그 본성 차원의 이데아랑요, 요 중간에 뭔 일이 있었냐, 하면요. 어떤 일정 조건을 갖추면 인의 공식을 그대로, 이 시공간 안에 있는 현상계에 집행하라는 그 어떤 공식이 나와요. 이게 제가 인과 공식이라고 부르는데, 이걸 근본 원리라고 부르면요, 시공을 떠난 걸 제가 ‘근본 원리’라고 부르고, 시공간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근본 원리에 대해서는 ‘인과 공식’이라고, 같은 놈이에요. 사실은 이 인(仁)이랑 이놈이랑 같은 놈인데요, 시공간 안에서 작용할 때의 이데아는 우리가 달리 불러 준다는 거죠. ‘공식’이라고 불러 주자는 거죠. ‘자연법칙’이라던가. 지난번에 제가 만유인력 법칙의 예를 들었지만, 보세요. 이 물건이 떨어져요. 우리 눈에는 이 측은한 감정, 이건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얘기해서 그렇지, 여기서 이데아 연구하는 법이 나오는데요. 본성은 만물의 원리니까 우리 감정에도 있겠지만 이 물질에도 있겠죠. 제가 이걸 지금 떨어뜨렸잖아요. 우리 눈에는 떨어진 것만 보여요. 개별 구체적 어떤 사물 하나가 땅에 지금, 그것도 어느 일반적인 책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놈에, 이 상에 떨어지는 거예요, 자꾸. 우리는 이거밖에 안 보이는데 지금 측은지심에 해당해요. 정(情). 시공간 안에 드러난 흔적이죠. 우리 흔적이 보여요. 제가 한번 감정 낸 것은 흔적이 남아서, 이제 사람들이 “너 그때 그거 측은해하더라.” 뭐 “어쩌더라.” 다 알아요. 남도 알고 나도 알고. 근데 여기에 이렇게 떨어지게 하는 건 우리가 중력이라고 하는데요, 만유인력 법칙이라고 일단 쉽게 얘기하죠. 중력인데, 만유인력 법칙이 떨어뜨리게 하는데, 그 법칙이라는 놈이 지금 여기서 작용해서, 제가 이 물건을 안 들 때는 여기 지금 안 보이다가, 이렇게 드니까 지금 여기 와서 이제 떨어뜨릴 준비를 하고 있죠. 놓으면 바로 떨어뜨립니다. 늘 작용하고 있는데요, 제가 일정 조건을 갖출 때마다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죠, 계속해서. 그래서, 그런데 그러면 뭐냐 하면, 두 물체 간에 붙으라고 하는 이데아가 있다고 치면요, 그 이데아가 이 현상계 안에 작용할 때는 우리가 인과공식이라고 불러 주자는 거죠. 지금, 이 시간에 작용하니까요. 보편적 중력이 있다면 그 중력이 지금, 이 시간 안에 여기서 이놈한테 작용하고 있잖아요. 이거랑 똑같아요. 인(仁)이라는 거는 진짜 보편적인, 그러면 지금 이제 떨어지고 나서 방금 이 두 놈을 붙게 했던 그 힘은 또 지금 작용을 안 나타내잖아요. 여기서는 지금. 그러면 그놈은 어디 가 있냐? 시공간 초월해서 계속 존재하겠죠. 그러다가 제가 일정 조건을 만들면 또 나와 여기서 작용하겠죠. 둘을 붙게 하고 끝내겠죠. 늘 있지만 어떤 시공간에 꼭 와서 작용을 하는 그거는 우리가 ‘인과공식’이라고 부르고 그 결과물은 ‘사물’이라고 부르잖아요. 개별 사물이죠. 사물 안에 만물이 다 들어와요. 사(事)는 일이고요, 물(物)은 물건입니다. 이거는 물건이고요. 제가 이걸 가지고 글씨를 쓰는 건 사(事)죠. 일이죠. 그래서 현상계에 존재하는 건 ‘사’ 아니면 ‘물’이에요. 어떤 독립 주체거나 아니면 그걸 가지고 일어나는 작용이에요. 그것의 작용적인 면. 그래서 ‘개별 사물’ 그러면 만물이 다 들어옵니다. 일이거나 물건이거나예요. 『대학(大學)』에서 “일은 시작과 끝이 있고, 물건에는 본말이 있으니까, 사물의 더 먼저 할 것, 더 뒤에 할 것을 알면 격물치지(格物致知)다.”라고 하는 것도 이런 겁니다. 지금 이게 본(本)이죠. 이 개별 사물의 본을 들어가 봤더니 인과 공식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죠. 근데 더 들어가면 이 인(仁)은 뭐냐? 우리가 대본(大本)이라고 불러야겠죠, 아까 『중용(中庸)』의 공식대로라면. 말(末)에서 본(本)으로 들어가고, 사물은 말이죠. 말에서 본으로 들어가고, 본에서 더 대본(大本)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격물치지가 끝나요, 하나의 그 사물에 관련된. 이게 무수한 만물이 다 똑같아요. 왜냐하면 무수한 만물이 다 하나의 중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러 방면으로 이걸, 이 공식을, 이 작업을 해 가지고 최대한 우리한테 필요한 정보를 많이, 이데아를 얻어야 우리가 성인이 될 수가 있죠. 성인은, 63빌딩 같은 구조물, 건축물을 생각하시면요, 이렇게 하나가 정확히 알아지면 불이 하나가 들어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건물 하나하나. 전체 건물 구조는 아직 안 나와요. 그런데 자꾸 자명한 쪽으로 가셔서 불을 켜시다 보면 어느덧, 어느 날 활연관통(豁然貫通)한다는 게요, 다 불을 안 켰는데도 건물이 보여요, 대충. “몇 층짜리고” 이게 다 나옵니다. “폭이 얼마고” 그쯤 되면 이제 우리 원상 공부가 어느 경지를 넘어서서 이제 성인의 경지로 자꾸 나아갈 겁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접근해 보세요. 그래서 우리 안에 인(仁)의 이데아가 있다가 조건만 생기면 반드시 나와서 측은지심을 일으켜요. 여지 없죠. 그래서 예(禮)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예의 이데아가 있다가, 그러니까 조화, 예라는 건 우리가 어떤 예절, 우리가 이제 구체적으로 보는 예절이 아니고요, 여기서의, 우리 안에 있는 이데아로서의 예는 뭐냐면 만물이 조화를 이루라는 거예요, 적절하게. “네가 이 정도만 하라”는 거예요. 인사 두 번 하는 게 전체를 봐도 적절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적절함’의 원리가 있어요, 적절과 조화에. 그게 있다가 딱 이게 어떻게 우리한테 가르쳐주냐면요, 딱 사양지심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딱 할 때 “이건 좀 오버다.” 하는 느낌이, “이쯤에서 멈추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사양지심이 당연히 생긴다는 겁니다. “아, 이거 더 하면 아니다.” 그 마음이 없다면 예절이라는 게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3천 가지 예법, 뭐 4천 가지 예법이 다 존재해도 이 마음 하나에서 다 나오는 거예요. 아까 그 무수한 법전 이만큼 하나가 수오지심에서 나온 거듯이요, 예법, 이렇게 쌓아 놓은 예법이 사실은 사양지심에서 나와요. “아, 그건 좀 오버인데.” 하는, “이게 딱 이 정도가 좋은데.” 하는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에서 무수한 걸 대입해 보고 나오는 게 그거라는 겁니다. “임금 앞에는” 어떤 새로운 조건이 생겨요. “이런 관계에서는 어떤 게 딱 적절하지?” 그러면 그걸 자꾸 하나하나 규칙을, 룰을 만들어서 우리 사양지심이 만족하는 걸 쭉 써 놓으면 그게 『예기(禮記)』가 돼요. 별거 아니라는 겁니다. 인(仁)은 이게 사랑의, 인도가 나올 거고요, 홍익인간의 길이. 예(禮)는 예법이 나올 거고요. 의(義)는 아까 같이 법전이 하나 나오겠죠. “정의다.” “아니다.”가 나옵니다. 계율이나 법이 나옵니다. “이거 어기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오지심이 얼마나 센 분이면, 지난번에 읽어 드렸지만 『성경』에 “팔이 하나 잘못하면 팔을 도끼로 찍어 내 버려라. 두 팔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는 한 팔 가지고 하늘나라 가는 게 낫다. 두 눈이 이상한 짓을 하면 눈을 뽑아 버려라. 장님으로 하늘나라 가는 게 낫다, 두 눈 뜨고 지옥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얘기해요. 이게 수오지심의 그냥 표현이에요. “악하고 타협하지 마라.” 하는 그게 수오지심이에요. 물드는 게 싫은 이 마음. 우리 본성에는요, 이 참나자리에 가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를 사실은, 이렇게 지금, 지(智)는 하나 더 보고 가죠, 개념과 체험을 딱 붙여 주면 “자명!” 할 때 우리가 자명하다는 거 알아요, 누구나 다. 안 가르쳐줘도 자명한 건 자명하다고 알아요, 누구나, 아무리 어린애도. 그게 시비지심이에요. 옳은지 그른지 알아요. 이거를 확충만 잘 시켜 주면 됩니다. 근데 우리 안에 이렇게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니까 우리 안에 이런 그림이 있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깨어서 참나자리에 딱 들어가 보면 희로애락 미발 자리에 들어가 보면 아무것도 없죠. 텅 빈 의식만 있습니다. 그럼 뭐냐? 이거는 어디에 있냐? 근데 얘기하잖아요. 이건 형체가 없다고. 무형인데 상(象)으로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프로그램으로만 있어요. 참나가 작동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우리 참나가요, 다 깨어있는데, 이거랑 똑같아요. 이거 물건 들면 반드시 여기서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리가 딱 깨어있기만 하면요, 어려운 사람 보면 측은지심이 탁 나오죠. 그러니까 그걸로 아는 거죠. “아, 참나가 인(仁)한 원리를 안에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지요. 깨어있는 상태에서 참나가 작동하는 걸 보고. 참나 안에는 이게 텅 빈 중에 있어요. 어떻게 아실 수 있냐면, 참나 상태에서 딱 깨어서 보시면 참나에선 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이 없죠, 깨어있을 때. 그렇지? 수길이. 깨어있을 때 나와 남을 가르디? 그 자리는?

없죠.

그냥 깨어있을 뿐이지. 그 자리에 악(惡)이랑 타협하는 마음이 없지. 깨어있을 뿐이지. 거기는 어떠한 불순물도 끼어 있지 않아. 그러니까 그게 작동하면 반드시 정의가 나와야 되고, 깨어있음이 오버하는 법이 없어요. 깨어있으면 가장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깨어있음 상태는 항상 자명하죠. 정신이 항상 선명하죠. 의심이라는 게 없고 모른다는 것도 없어요. 항상 밝을 뿐이지.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에. 광명할 뿐이고. 그럼 이 성실함은 뭐냐? 이 신(信)은 『맹자』가 따로 얘기를 안 했어요. 그런데 후대 학자들이 이걸 성실지심(誠實之心)이라고 부르는데요. 다른 건 아니죠. 다른 거와 마찬가지로 한번 보세요, 이게 뭐겠는지. 사단지심(四端之心)처럼 건들면 반드시 나오는 거잖아요. 우리가 “성실해야지!” 하는 마음이 성실지심이 아니고, 그건 안 할 수도 있는 거니까, 맹자가 제시하는 이런 것들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죠. 성실지심도 본능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한테. “저는 별로 성실하지 않고 게으른데요?”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게 뭔 얘기냐면 이걸 따로 얘기 안 한 이유도요, 『맹자』가, 요 네 가지가 성실하게 작동하고 있죠. 한시도 쉬지 않고. 이게 성실지심이에요. 그래서, 고로 우리는 성실해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信)이에요. 이 ‘신’은 남을 잘 믿어서 신(信)이 아닙니다. ‘인의예지신’에서 신은요, 우리 말로 번역할 때는 ‘성실’로 해야 돼요. “신뢰를 준다.”라는 뜻이에요, 남한테. “사랑하고 인자하고” 사랑과 정의, 예절과 지혜를 잘하기 때문에 남들이 보면 저 사람 하는 짓만 봐도 그냥 믿게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을 그냥 믿게 된다. 그러니까 말만 들어도 그 사람을 믿게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말만 들어도. “저 내일 새벽 4시까지 나올게요.” 하면 그냥 당연히 나오는 걸로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남을 믿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성실’이라고 풀어야 돼요. 내가 잘 믿는 사람이면 도덕적으로 이게 본성이 될 일이 없겠죠. 그냥 잘 낚이는 사람일 뿐이죠. 잘 믿는 사람은 그게 아니고요, 성실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인간 안에는 이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 그래서 『맹자』 전체를 통틀어서, 맹자가 자신하고 “왕도정치 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이면 이걸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누구나 인간은 이걸 이렇게 대접받길 원해요. 자신이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인심 위주이기 때문에, 이건 도심의 세계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걸 하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인심 속에서도 도심이 드러나는 게 뭐냐면, 누구나 이거를 원해요. 자기가 그렇게 받기를. 사랑받기를 원하고, 자기가 정의로운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자기에 대해서는 가려 주길 원하고, 자기한텐 누가 좀 사양해 줬으면 좋겠고, 자기한테 성실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누구나 이거를 인심의 아주 더러운 마음속에서도 “옳다.”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저게 옳다.”라고. 근데 나더러 하라 그러면 “옳지만 나는 하기 싫다.” 인심은. 근데 본능적으로 하고 있어요. 우리 안에는 도심이 있다 보니까 본능적으로 자꾸 튀어나와요, 이게. 자꾸 죽이고 있죠, 우리가. “야, 이건 좀 오바 같은데?” “야, 무슨 소리야? 더 해 보자.” 이런 식으로 해서 항상 죽이고 있지, 그래서 또 다른 거 하나는요, 인간이면 누구나 이걸 할 수 있어요. 이거 못 한다는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옳다고 여기고 있고, 누구나 그 대접을 받기를 원해요. 이게 선(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 하나도 안 어려운 게, 누구나 원하는 게 선이에요. 누구나 받기를 원하는 게. 선이 어려운 게 하나도 아니고요, 누구나 “그거 옳다”고 하면 선이에요. 그것부터 하시라는 거예요.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것부터 하셔서, 사람들이 판단하기 어려운 것까지도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누구나 맞는다고 생각하는 그 자명한 걸로 시작해서, 논리적으로 잘 이끌어 나가, 자명함의 자명함을 추구해 가다 보면, 우리가 지금 판단하기 아주 어려운 미세한 선의 그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거. 선(善)들이 충돌하는 부분도 있을 거거든요. 이 선이 더 먼저인지? 이 선이 먼저인지? 악(惡)끼리 충돌하면, 악이나, 악하고 선이 충돌하면 쉬울 거예요, 오히려. 악은 티가 확 나니까요. 근데 선끼리 충돌하고 그러면 어느 게 더 우선순위가 있는지 이런 건 좀 어려워요. 이건 약간 고난이도 수학 문제죠. 저희가 지금 아주 기초 공식만 배운 거고, 거기까지는 무수한 실전 문제를 푸시면서 실력이 올라가셔야 되는데, 공식은, 원리는 자명한 것 자명한 것만 추구하세요. 이것도 자명한 거잖아요. ‘나’ 안에 다 있는 거거든요. 이 정도의 자명함을 계속해서 추구하시다 보면, 그리고 이걸 실제로 자꾸 해 보셔야 돼요. 우리가 지금 아는 의(義)가 의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실제 해 보시면 인간이 어디까지 수오지심이 그걸 알고 있는지, 갖고 있는 정보를 끄집어 내야 돼요. 그러면 개념과 체험이 딱 만나는 그 자명한 걸 부딪치셔 가지고 안에 있는 게, 이데아(idea)가 튀어나오게 하시면 돼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그것, 인(仁)을 진짜로 실천할 때 나와요. 자연히 나와요. 이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자꾸 인(仁)에 대해서 연구하시고 실천하시고 우리 수련의 다섯 기둥에 나오는 ‘깨어있음’은 이런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는 데에 최적의 그거고요, 깨어있는 것 자체가. 인심을 막아 주거든요. 그러면 도심이 활성화돼요. 그때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들을 잘 관찰해 보시고 실제 실천으로 옮겨 보시면 인(仁)과 의(義), 예(禮)·지(智)에 대해서 더 정밀하게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을 갖고 있지 마시고 다시 안으로 던져 놓으시고 또 깨어 계시면 또 안에서 활성화될 거고요. 맹자의 말처럼 호연지기는 도심을 지지해 주기 때문에 둘이 똑같은 원래의 성분이거든요. 도심과 우리 호연지기, 원기는. 그래서 우리가 깨어있으면 이 좋은 기운이 작동하고요, 좋은 기운을 모으면 또 깨어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좋은 기운이 몸 안에 많이 모이면 도심이 지지를 받고 더 힘을 가지고 파워풀하게 에고를 부리실 겁니다. 우리 수련의 다섯 기둥을 잘 익히시고요.

14절 가 보죠. 맹자가 이르기를 “인자한 말은, 인자하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간 것만 못하다.” 선한 정치는, 아시겠죠? 아주 제가 멋진 멘트 날리는 것은요, 인자한 말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인자하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스며드는 것만 못한다는 거죠. 그런데 뭐냐면요 사람들도 양심이 있어서 다 알거든요. 저 사람이 인한지 아닌지 다 알아요. 근데 인하지도 않은 사람이 인한 말을 어디서 배워 와 가지고 멋지게 포장한다고 그 사람이 인자(仁者)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남들이, 그 사람을 겪어 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그 사람 인하더라.” 하는 소문이 쫙 가슴까지 배인 것만 못하다는 거죠, 이렇게 인자한 포장을 하는 건요, 자기가. “선한 정치는”요, 마음의 문제를 많이 다루십니다. “선한 정치는 선한 가르침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만 못하다.” 정치도, 어떤 선한 정책을 자꾸 펴는 것도 좋은데, 정치보다는 교육이 더 효과가 크다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교육으로 실제 그 사람의 양심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패도(霸道)도 정치는 잘할 수 있거든요. 패도도 딱 부러지게 해 가지고 백성들 두 말 안 나오게 해 가지고 세금 걷을 때 확실히 걷고, 이렇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는, 그렇게 정치에 능수능란한 것보다는 “교육을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아주 양심을 깨우는 것만 못하다.” “선한 정치는 백성들이 두려워한다.” 저거 왜냐하면, 이 사람은요 진짜로 10년 때릴 거라면 10년 때리고요, 사형시키겠다면 진짜 사형시키고, 세금 안 내면 진짜 잡아갈 거예요,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면. 지금같이 탈세해도, 부자들이 탈세해도 못 잡아가잖아요. “그렇게 될 거다. 두려워한다.” 근데 한편으론 두려워하는 거니까 정치도 이게 의(義) 쪽이죠, 지금. 그런데 인(仁) 쪽을 얘기하는 겁니다. 정의를 막 이렇게 룰(rule)을 정해 놓고 룰을 실천하면 정의는 분명히 자명해요, 정의로는. 10년 때리겠다고 10년 때렸으면 자명한 거죠. 정의가 지켜진 건데, 이거 이전에 백성들 양심을 이렇게, 진짜 사랑한다면 백성들이 죄를 안 지을 수밖에 없게 “백성을 교화시키는 게 더 먼저 아니냐?” 이거죠. 그래서 선한 교육은 백성들이 좋아한다는 거죠. 자기를 자꾸 깨어나게 해 주니까요. 밝게 해 주고. “선한 정치는 백성들의 재화를 얻고”요, 백성들이 세금 잘 내거든요. 백성들이 또 부유해졌고요, 정치를 잘하니까. 선한 정치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요, 교육에 더 우선순위가 있다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같이 선한 건데, “선한 가르침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다.” 백성들이 아주 그 정부에 대해서 심적으로 지지하게 된다는 거죠. 백성들 마음도 밝아져 가지고 인의예지를 잘 판단하게 되고.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정치’니까 이 정치가 나쁜 정치를 말하는 건 아니고요, 잘하는 정치인데 정치랑은 교육이랑은 맛이 다르죠. 교육은 목(木) 기운이 강하고 정치는 금(金) 기운이죠. 딱 엄하게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엄한 정치보다는 그전에 먼저 백성들을 좀 편하게, 깨어나게, 즐겁게 할 수 있게 해 주면 더 좋겠다는 거죠.

15절에서 유명한 양지·양능이라는 게 설명이 여기서 됩니다. 『맹자』 전체에서 양지·양능이 뭔지 설명된 게 이곳이에요. 들어 보세요. “배우지 않고 능한 게 양지(良知)다.” 이게 이 사단 중에 뭐겠어요? “배우지 않고 … 양능이다.” “능한 건 양능(良能)이다.” 구분해 보세요. 4단(四端) 중에. 그다음 양지가요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아는 건 타고난 지력이다. 양지다.” 본래 아는 게 있고요, 사람이면 본래 할 줄 아는 게 있다는 거예요. 이게 신기한 게 아니고요, 동물들도 다 해요. 동물들도 막 태어나면 양지·양능이 있어서 뭐 해야 될지 다 알고 움직여요. 엄마 젖 빨아야 하는지 알고 다 귀신같이 그 엄마 젖 어디 있는지 찾아서 빨고요. 그러니까 거기에 다 양지·양능이 있죠. 뭘 해야 된다는 걸 아는 게 양지고 그걸 실제 할 수 있는 게 능(能)이고요. 여기로, 4단으로 치면 이 시비지심을 양지로 보고요, 나머지 세 개를, 이것까지 하면 네 개겠죠, 이 나머지를 양능으로 보시면. ‘하는 거’거든요, 나머지는. 다 ‘하는 거’예요. 측은해해야 하고요, 사양할 줄 알아야 하고요, 수오(羞惡), 분노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런데 시비지심은 하는 것보다는 아는 거죠. “아, 이건 옳아. 이건 틀려.” 이거 아는 거죠. 그래서 그게 양지는 시비지심을 말하고요, 양능은 나머지 세 감정을 말해서, 통합해서 이 양지·양능을 합쳐서 말하면요, ‘양심’ 그래요. 그러니까 양심을 이 정도 아셔야 돼요. 우리가 그냥 흔히 ‘양심’ 그러면 잘 몰라요, 뭐가 양심인지. 사람마다 다 똑같은지도 알 수 없고요. “양심이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아?”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거예요. 근데 맹자는 ‘똑같은 양심’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양심이라고 하는 부분도 개개인이 다 들여다보면 다 다를 거예요. 후천적으로 영향받은 것도 많거든요. 선입견 가지고 있는 것도 많고. 그런데 맹자는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맹자가 말한 양심은 요즘 학자들이 말하는 양심하고 달라요. 서양에서 말한 양심은 상당히 후천적인 거예요. 어려서 어느 문화권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양심이 다르다는 거예요, 요즘 서양식 이론은. 그런데 맹자의 양심은 다릅니다, 여러분 보셨겠지만. 우주 어디, 안드로메다 끝까지 가도 인간이면 똑같이 가지고 있을 이걸 말하는 거예요. 시비지심,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성실지심, 딱 이것만 얘기하는 거예요, 양심이라고 할 때. 이 중에 양지가 있고 양능이 있습니다. “손으로 끌어 줘야 할 정도의 두세 살 어린아이도 부모 사랑할 줄 안다.” 그러니까 엄마 젖 찾을 줄 알고요, 아빠 찾을 줄 안다는 얘기예요. 누가 자기 밥 주는지 동물들도 알잖아요. 누가, 밥 주는 사람이 이제 우선순위로. 아기들도 알아요. 누가 나 키워 주고 사랑해 주는지 다 안다는 거죠. “자라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안다.” 나보다 더 연장자가 미리 와 있더라고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형이니까 좀 더 수그리는 마음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부모 친애하는 거는 인(仁)이고” 이 ‘인’을 요즘, 그러니까 우리가, 쭉 동양, 우리나라에서 풀어 오길 ‘어질다’라고 항상 풀어 왔거든요. ‘어질 인(仁)’ 그랬는데 제가 ‘인자하다’라고 바꿔서 푸는 게요, ‘어질다’라는 말은 ‘어질 현(賢)’ 자가 있거든요. ‘인’이라고 하는 게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우리가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에 맞먹는 글자가 되는데, ‘어질다’라고만 풀어 버리면 모호해져요. 왜 그렇게 풀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제가 굳이 ‘인자함’이라고 풀어 보는 게, ‘인’에는 ‘자비 자(慈)’ 자랑 지금 ‘어질 인(仁)’ 자를 같이 쓴 거거든요.

“어른을 공경함은 정의로운 것이다.” 인과 의가 지금 어린이 안에, 이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걸 또 다르게 얘기하는 겁니다. 측은지심과, 아까는 수오지심으로 말했는데요. 이제는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어린애가 부모 사랑하는 건 인(仁)이죠. 부모랑 나를 동일시하는 거예요, 어린이가. 이게 호르몬 중에 옥시토신이 나와서 가능한 건데요, 애완동물도 잠깐 보고 있다 보면 막 내 새끼 같고 내 살 같고 이렇게 나랑 동일시되더라는 거죠. 나의 아바타처럼 느껴지는 그 마음이 인(仁)이고요. 의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나보다 형이니까.” 하고 숙이는 마음이 의(義)예요. “그게 옳으니까 하자.”라는 마음이 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버이 사랑하고는 약간 달라요. 형에 대한 공경. 그래서 형에 대한 공경은 의(義)의 대표이기 때문에 장차 사회에 나가서도 어른들하고 관계 맺을 때나 다른 사람들 만날 때는 이 ‘의’의 감정이 중요하죠. 다 사랑을, ‘인’과 ‘의’가 좀 다르거든요. 남하고 관계에서는 죄 안 짓는 게, 죄 안 짓고 룰(rule)대로 하는 게 일단 중요하죠. 사회에서 법대로 하는 게. 그때는 이 형한테 공경하던 마음이 확장되면 다 가능하단 말이에요, 사회생활이. 그리고 어버이 사랑하고 이거 막 내 몸처럼 사랑해야 될 사람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인이 있기 때문에, 먼 사람을 봐도 이 감정이, 영역 안에서 남들도 좀 더 동일시해 준다는 거죠. 인(仁)이 없으면 의(義)도 가능하지 않죠.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내가, 어린 놈이 까불면 안 좋겠다.”라고 생각하니까 대접하는 거니까, 의는 사실은 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요, 단지 사랑만이 아니라는 거죠. 좀 더 다른 게 더 들어 있다는 거지, 인을 전제하고 있는 건 맞습니다. 그래서 인과 의가, 어린애가 본래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걸 지금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어린애가 엄마 찾고 형 말 듣는 게, 여기서 이 어린애 하나가 장차 인과 의를 이루어서 성인(聖人)이 될 자질이 지금 보인다.”라고 무협지에서 “선골(仙骨)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미 이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는 증거다!”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하는 말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내가 이런 말 그냥 공수표 남발하는 게 아니라는, ‘아기가 보이는 그 사소한 행동에다 내가 과하게 걸고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게 아니라” 그다음 뭐라고 그랬죠? “천하에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그걸 바라고 있고 누구나 그걸 옳다고 여기면 인과 의다.” 이겁니다. “인과 의가 별 게 아니라, ‘사랑과 정의’ 하니까 어렵게 생각하지만, 엄마 사랑하고, 형한테 나이 어리니까 자기를 낮추고 여기 안에 다 들어 있다.” “누구나 이걸 원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거면 그게 선(善)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선이 별 게 아니라, 이 아이디어가 재미있습니다. 누구나 통하면 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서(恕)에 맞으면 선이라는 거예요. 뭐가 인의예지에 맞는지 모르겠다 싶으면요, “누구나 그거 해도 되나?”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나 도둑질할 거 생각하면 좀 안 좋죠. “하면 안 되겠지.” 왜냐하면 누군가는 내 거 훔쳐 갈 거잖아요. 제가 도둑질 할 때요, “왜 도둑질이 나쁘다는 거야?”라고 큰소리칠지 모르지만 자기 거 누가 훔쳐 가면 안 좋아지겠죠. 그러면 그게 악(惡)이라는, 선(善)이 아니라는 게 나와 버리죠. 여기도 그거예요. 어버이 사랑, 형 공경은 어디에나 통하는 거니까 그거는 선이라는 거예요. 선, 그중에 인(仁)과 의(義)다. 이 느낌을 이렇게 잘 보시면 재미있습니다. 그 근거가 “천하에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왜냐면요, 이 본성에 내재한 거 아니고는 천하에 두루 통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욕심은 다르기 때문에요, 욕심으로 한 거라면 당장 여기서 안 통해요. 저는 좋다고 하는데 이 친구는 싫다고 할 겁니다. “야, 너 100만 원 내 쪽으로 보내라.” 그러면 이 친구 안 좋아하겠지요. 저는 좋은 일이지만. “야, 그거 내놔 봐.” 그거 안 좋아하는데요, 어떤 얘기를 하면 둘 다 좋아져요. 그러면, 본성에 맞는 얘기를 하면 둘 다 좋아져요. 왜냐하면 본성에서는 절대 저를 위해서 말하지 않거든요. 모두를 위해서 말하지. “네가 양보해라”고 본성해서 일어나지 “악착같이, 남한테 피해를 주더라도 네가 챙겨라”고 안 할 겁니다. 당장 그 마음은 천하에 두루 통하면 큰일 나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살 수가 없지요. 인간들이 악한데도 사회가 이 정도 굴러가는 거는, 다들 엄청나게 도심(道心)이 지금 잡아 주고 있는 거예요. 그 차들이 그렇게 차선에 많이 나와도 교통사고가 생각만큼 안 나는 것처럼 인간을 이렇게 풀어 놨는데도 하고 있는 건요 지키고 있는 마음이, 잡아 주는 마음이 엄청난 거예요, 사실은. 우리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양심이 사실은 엄청나게 그거 잡아 주고 있어요. 우리도 센 욕심 날 때나 고민하지, 그 전엔 그렇게까지 법하고 저촉(抵觸) 안 일어나잖아요. 진짜 센 거가 나타났을 때 그걸 이겨 낸 사람과 지는 사람이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양심이 엄청나게 잡아 주고 우리 기저에서 잡아 주고 있는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마인드가 너무 쉬운 게요,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안에 다 있다는 거고요, 사단이. 사단(四端)이 있는 거 보면 이데아(idea) 있다. 이데아만 확장하면 된다. 『중용』에서도요, 인간의 길이 뭡니까? ‘인간의 길’ 그러면 막 아주 고원(高遠)할 것 같죠? 그런데 별거 아니라 “본성 따르는 게 길이다.” 이렇게 얘기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이게 성(性)이거든요. 그러면 측은지심 확장하고, 수오지심 늘 쓰고, 사양지심 늘 쓰고, 시비지심 늘 쓰고, 성실지심 늘 쓰면 인간의 길은 끝이에요. 그러니까 이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라는 거. 그 구체적인 예가 인(仁)으로는 부자유친, 예(禮)로는 장유유서, 의(義)로는 군신유의, 지(智)로는 부부유별, 신(信)으로는 붕우유신, 이 5개의 인간관계 안에 이 이데아가 또 들어 있거든요, 또 다른 약간 변형된 공식으로. 관계가 다르죠. 이게 부자(父子) 관계예요. 부자 관계에는 인이 작용할 때 부자유친으로 작용하더라는 거죠, 공식이. “둘이는 친해라.”라고. 인의 변형된 모습이죠, 부자유친은. 그래서 부자유친·군신유의, 이런 건 달도(達道)라고 그래요, 우리가. 이건 달도예요. 어디에나 통하는 공식이라 달도라고 그래요. 두루 ‘통할 달(達)’ 자에 ‘길 도(道)’ 자. 그러니까 이 인(仁)으로서의 도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형이상의 도를 말하는 게 아니고요. 우리가 통달된 길이라고 할 때는, 달도는, 어디나 가면 통하는 거예요. 어디나 인간은 이렇게 해 주면 좋아하더라는 공식이 있잖아요. 그 공식을 우리가 달도라고 그래요. 인간관계의 사·물, 현상이라면 거기에는 공식이 있고, 그 공식의 보이지 않는 뿌리로, 여기서부터는 형이상이에요. 이렇게 보시면 되겠죠. 여기서부터는 형이상이에요. 이놈이 형이하에 들어와서 작용하고 있는 게 이거고요. 하느님이면요, 하느님이 형이하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공식이에요. 인과 공식. 그래서 사실은 하나예요. 이게 둘이겠습니까? 이데아랑 저 공식이.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이데아 속에 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관찰만 조금씩 해 보시면, 자신을, 이렇게 깨어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해 보시고 이 『맹자』에 나온 것처럼 하나하나 점검해 보시면 꽤 많은 감이 오실 겁니다.

16절은 “맹자가 이르기를” 몇 시야?

45분이요.

몇 시까지죠, 원래? 시간 아직 있죠?

아홉 시 반까지요.

충분하겠습니다. 이제 순임금(舜) 얘기가 나오는데요, 순임금이 황극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한번 보세요. “맹자가 이르기를, 순임금이 깊은 산속에 사실 때는” 이게 역산에서 밭 갈 때라고 주자(朱子)가 주를 달았는데요, 역산(歷山)이라고 지금 산서성(山西省) 쪽에 있는 건데요, 산서성 역산 쪽에 밭을 갈면서 사실 때가 있었다는 거죠, 산속에서 야인처럼. “나무와 돌과 같이 사시면서 사슴과 멧돼지랑 같이 노시어, 깊은 산속의 야인과” 아주 거친 사람들하고 다를 게 없었는데, 다른 점이 이거라던 거예요. 그러니까 외양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지금 뭐 여기도 똑같죠. 홍대 쪽에 살더라도, 뭐 그냥 저 홍대 앞에 사는 사람, 어디 뭐 시골에 살면 시골에 그냥 사는 사람, 이렇게 보이는데 뭐가 다른지 보세요. 순임금만의 다른 점이요, “그런데 하나의 선한 말을 들으시거나 하나의 선한 행위를 보시면 강과 하천을 터 놓은 듯이 성대하게 뻗어 나가니 능히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얘기는요, 그런 선한 거에, 이렇게 하나 탁 와서 건드리면, 이 안에 프로그램이, 이게 엄청나게 활성화되신 분이라 쫙 그게 밀고 속에서부터 터져 나왔다는 거예요. 그 선한, 그런 거에 대해서는 아주 그 안에서부터, 순임금 안에서 이게 터져 나왔다는 거죠. 그래서 그걸 아주 정밀하게 실현시키는 힘이 어마어마했다는 겁니다, 혹시 그런 상황에 빠지시거나 그런 말을 들으시거나 할 때는. 선한 말을 들어도 우리가, 일반적인 야인이라면 선한 말을 들어도 선한지 잘 모르겠죠. 그게 그렇게까지 선한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분은 아니까 그거는 왜 선한 건지까지도 안에서부터 이렇게 팍 터져 나오는, 이 시비지심과 측은지심, 수오지심, 이런 양심이 늘 터져 나오니까, 건들면 터져 나왔다는 거예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터져 나와요. 이거는 공부가, 산에 계셨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런 수련의 다섯 가지가 꽉 차 있는 상태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럴 때 건들면, 외양이나 하는 거는 평범한 사람같이 살고 있어도 건들면요, 왜 선한지 왜 뭔지가 다 나옵니다. 그래서 순임금이 대단한 게, 이런 분을 갖다가 들어다가 정치에다 놨더니 장관 시키고 뭐 시켰더니 다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이미 안에 정밀하게 여러 가지를 혼자서 다 시뮬레이션을 그리면서 밝히신 거죠, 인(仁)에 대해서. 그래서 천자 되시니까 바로 선기옥형(璇璣玉衡) 만들어 가지고 천문을 관측하시고. 증산도 증산경에 그게 있어요. 제자들한테 강증산이 해 주는 말에 “순임금은 밭 갈다가 임금 되니까 바로 선기옥형 만들었다. 그러니까 도인은 걱정 안 해도 일 생기면, 닥치면 다 하느니라.” 뭐 이런 식의 예를 들어 준 게 있는데, 그게 진짜 닥쳐서 바로 나온 건지, 그전에 다 공부를 하신 건지는 모르죠. 그래도 남들보다 빨리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큼 안에 이 섬이, 이 양심의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있는 상태였다는 게 지금 포인트죠.

주자주(朱子註)를 볼게요. 바로 뒤에 「오제본기(五帝本紀)」 바로 밑에 주자주가 있는데, 이 부분을 주자가 풀었는데 말을 참 잘해 놓으셔서 제가 주자주를 특별히 소개할게요. 황극을 말하는 건데요, 결국엔. 우리 마음 안에 황극이 일어나는 거죠. 순임금 마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대개 성인의 마음은 지극히, 지허지명(至虛至明),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밝아서 혼연지중(渾然之中)에” 텅 빈 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혼연지중, 우리 본성 마음자리 보면 그러거든요. “텅 빈 것 같은데 만리필구(萬理畢具), 온갖 원상, 원리를 다 갖추고 있다가” 우리 중생도 동일한데요, 갖춰져 있는 건, 활성화가 안 돼 있죠. 이분은 다 밝혀져 있다는 거예요, 그게. 광명하게 다 드러나 있어요. 그래서 건들면 이제 바로 적용이 일어나는 거죠. “하나라도 감응하여 접촉함이 있다면 그 반응이 매우 신속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다.” 딱 하면 “아, 그거는 몇 년 형(刑).” 하고 딱 떨어지는. 이 잣대가 안에 다 있어 가지고 건들면 바로, 이게 돼야 공부된 것 같겠죠. 그래서 “이러이런 경우는 선인가요, 악인가요?” 할 때요, “이러이러 이러이러해서 선이고. 이러이러해서 악이고. 이게 이런 경우. 양극단이 어떻고. 이건 치우친 모습이고.” 이렇게 쭉 나온다는 거죠. 하나의 선한 말이나 행위로 탁 건들면 이게 쫙. 왜 이건 악이고 왜 선인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거죠. 일반인들은 막연하죠. 이 잣대가 활성화가 안 됐기 때문에 선인지 악인지 잘 몰라요. 아주 원초적인 건 아는데 조금만 난이도가 올라가면 몰라요. 왜냐하면 적용을 잘 안 해 보시기 때문에.

순임금이 이제 황극의 모델, 아까 요 임금의 「격양가」에 맞먹는 순임금의 황극으로서의 모델이, 왜 황극이 되셨나에 대한 근거입니다. 보세요. 『사기』 「오제본기」에 있는 건데요. “순임금이 저 산서성 역산에서 밭을 갈 때면 역산의 백성들이 모두 그 논밭을 양보”했대요, 순임금한테, 감화돼 가지고. 이게 과화존신(過化存神)의 예죠. “뇌택(雷澤)에서” 한자가 왜 ‘역산’이 붙었지? 왜 이렇게 갖다 붙이기가 되는….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요, 여기가 산동성(山東省) 쪽이라고 하나요? “물고기를 잡으면 백성들이” 여긴 산동성 쪽이라고 하는데요, 뇌택은. 백성들이 그 자리를 양보했대요. 물자리를. 고기 잘 낚이는 자리를 양보할 정도가. “황하 물가에서 도자기를 구우면” 그래서 순임금은 도자기 굽는 사람으로 유명해요. 사람 굽는, 사람의 그릇을 만드는 것도 도자기 굽는 거니까요. 근데 아무튼 황하 물가에 도자기를 구우셨는데, 한때는, 그랬더니 “황하 물가에서 나오는 모든 도자기들이 하나도 뒤틀리거나 찌그러진 게 없었”대요. 이 얘기는, 다른 장인(匠人)들까지 다 영향을 받아 가지고, 순임금으로 인해서, 도자기를 제대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그러니까 과화존신을 말해요. 순임금이 지나가거나 머무르면 거기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순임금이 1년을 머물면” 이 부분도 이제 똑같죠. 과화존신이죠. 1년을 머물면 마을이 이루어지고요. 촌락이. “2년이면 읍(邑)이 이루어지고 3년이면 도시가 이루어졌다.” 이게 노자의 이상이에요. 이런 사람이. 그러니까 요·순이 노자의 이상이에요. 그래서 중국의 유교나 도가의 모든 근원은 요·순이죠. 요·순이 제일 우두머리예요. 그러면 요·순은 어디서 나갔냐? 하면 우리가 “우리 고조선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제가 공개 안 하는 게 하나 있어요. 저는 두고두고 의심하는 성향이 있어서. 중국에 창힐 조적비(鳥跡碑)라고요, 창일(蒼頡)이 새 발자국 보고 만들었다는 문자 비석이 있어요. 그게 똑같은 비석이에요. 우리나라 영변에서 발견된 게 있어요. 그래서 최치원이 이거 보고 천부경 만들었다고 해 가지고 유명한 게 있어요, 신지문자(神誌文字)라고. 중국에서는 창힐문자라고 그러고 우리나라에서는 신지문자라고 하는데, 단군 때 신하 중의 하나가, 근데 제가 그걸 다 푼 게 있는데요, 거기를 풀면 신시(神市)가 나와요. 환웅이 내려와 가지고 신시를, 백성들한테 농사법 가르쳐 가지고 살다가 신시를 이루었는데 이 풀이가 중국에서도 된 게 없어요. 중국에서 된 거 보면 엉터리고요. 그 신지문자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환단고기』 쓰는 사람들은 아주 신성한 문자로 취급하는데, 또 서예가들도 쓰고요. 신기한 문자라고. 근데 갑골문·전서의 변체들이에요. 그러니까 갑골문보다 오래된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학자들이 착각하는 게, 그걸 아주 오래된 고조선 문자로 아는데 갑골문보다도 더 아래 문자예요. 전서 중의 한 변형들이에요. 그거를 아마 고조선 때 사람들이 쓴 것 같아요, 저는. 그러니까 아마 만주 쪽에 갑골문의 변형된 글자들이 많이 돌았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변형된 문자가 하도 많으니까 진시황이 그거 모아 가지고 전서를 통일시킨 거예요. 이사(李斯)한테 해 가지고. 그게 우리 지금 쓰는 전서거든요. 통일되기 전의 전서들이 남방도 다르고 다 달라요, 문자들이. 그중의 일부라 사실은 푸는 게 어렵지 않은 게요, 그거 다 있어요. 그거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걸 특이한 문자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가지고, 요즘 그게 원본 천부경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강의하고 다니시는 분들. 마음대로 풀어 가지고. 근데 그거는 천부경까지 올라갈 수가 없고요. 결국 그 내용을 보면 역사예요, 그냥. 백성들이 농사짓고 자리 잡고. 이번에 아메리카 인디언 봐서 더 그렇지만, 그 얘기예요. “예전에 하늘에서 어떤 한 분이 내려와서 백성들이 받들어서 문명을 가르쳐 줘서 그거 가지고 농사짓고 살고 밭 갈고 살고 시장도 만들어서, 교육하고 살았는데 추장이 대를 이어 나왔다.”까지 나오고 “그게 신시다.”라고 마지막 문자가 ‘신시’로 끝나요. “잘 다스리셨다. 그래 가지고 대를 이어서 문명이 내려왔다.” 그런데 그거 보면 고조선 때 누가 쓴 것 같아요. 나름 그 저 『몽골리안 일만 년의 지혜』랑 내용이 하나도 안 달라요. 그냥 “예전에 한, 누가 내려와 가지고 농사짓고 대를 이어 살다가 그곳이 신시다.”라고만 써져 있을 뿐. 이걸 갖다가 이제 ‘천부경 원형’이라고 그래서 막 갖다 붙이는데, 최치원 선생님이 그거 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천부경이 나오질 않죠. 지금 천부경은 최치원 선생님이 나름 또 공부해서 만드신 걸 거예요. 어디 영(靈)으로 많이 받으시고요. 고대에는 간단한 문자로만 내려왔을 테니까요. 도형이나 이런 상징물로. 철학 하는 분들이면 그냥 뭐 아시겠지만, 지금 그런 식의 진행은 아닌 것 같아서. 사실은, 근데 제가 그걸 공개를 안 하는 게, 좀 더 자료를 기다려 볼게요. 가끔 풀어 놓고는 있어요. 신지문자라고 지금 부르는데. 그거 상에서 보면 제 느낌에는 분명히, 그러니까 이것만 말씀드리면 그냥 그런 별거 아닌 내용이죠. 고조선 때쯤에 그런 문자로 쓰여진 것 같아요. 그걸 중국에서도 특이한 글자라고 “창힐이 최초에 만든 글자인가 보다.” 해 가지고 비석으로 세워 놨어요. 거기 끝에 가면 ‘신시’로 끝나게 돼 있어요, 한자로. 거기도 똑같아요. 좀 더 확장판이에요. 우리 영변에서 발견된 거는 글자는 똑같아요. 몇 자가 더 들어 있어요, 중국에 있는 건. 그러니까 왜 두 군데서 이게 발견되는지도 이상한 얘기고. 그래서, 제가, 증거가 너무 없어서, 이걸 풀어만 놓고. 제가 자신하고 얘기해 드리는 거는, 풀이하는 과정은 제가 또 우리 쪽으로 갖다 붙일 수도 있잖아요. 근데 그 글자들은 다 알아낼 수 있어요. 다 지금, 갑골문, 그거 다 있는 거예요. 전서의 여러 유형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다 찾아낼 수 있는데 그걸 왜 막 난해한 문자라고 중국에서도 자꾸 이렇게 하는지 거기다가 어마어마하게 걸어서 풀어요, 중국도, 알 수 없게. 글자가 다 있는데.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해서, 그냥 더 얘기는 안 하고 있는데, “이상한데 이거.” 제가 나중에 보여 드리면, 보면 다 아실 거예요. 이게 당연히 이거라는 것 정도.

그러면 몇천 년 전 거는 맞고요?

그러면 우리가 볼 때 빠르면, 아니, 진시황 때가요, 고조선이, 우리가, 고조선 멸망이 한나라 때잖아요. 한사군(漢四郡) 때. 그러니까 그때쯤 나왔을 수도 있어요. 그때 다, 한자가 막 형성될 때예요. 진시황 때쯤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전서 통일되기 전일 수도 있고. 통일된 뒤에도 우리는 그냥 계속 그거 썼을 수도 있죠. 중국이 통일한 거지, 이쪽이 통일한 건 아니니까.

유물은 옛날 게 맞나 보죠?

그럴 거예요. 중국에서도 신기해하니. 그 글자가 없어요. 그래서 서예하시는 분이 그 글자를 이렇게 따로 쓰기도 하고 그래요. 서첩으로도 있고 그래요. 글자가 하도 신기해서. 인터넷에 치면요, 지금 치셔도 나올 거예요. 신지문자 치면 나와요. ‘영변 신지문자’ 하면은. 그게 돌로 새겨진 거잖아요. 글로 써서는 지금까지 전하질 않죠. 돌에 새겨진 것들이 그런 게 있다는, 그럼 이런 게 더 나오면요, 저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거. 분명히, 아니 『몽골리안 일만 년의 지혜』가, 만 년 전 게 전승이 내려오는데 왜 고조선 쪽에 뭐가 없겠어요? 옛날에 다 사람들이 살았는데. 별거 아니죠. 농사짓고. 농사짓는 법 누가 가르쳐 줘야 되거든요. 농사짓는 법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 사람이 성인(聖人) 되는 거죠. “위대하신 분이 오셔서 우리 농사짓는 법 가르쳐 줘서 농사짓고, 장사도 하라고 그래서 장사도 하고, 이렇게 살았다.” 하는 얘기예요. “그게 신시다. 옛날에 그런 신의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일이, 우리 고대에.” 환웅 신화가 실제 내려오잖아요. 그러니까 환웅 신화가 그냥 별 게 아니라, 환웅 신화가 “고조선 말기에도 그런 원형이 존재했다.” 정도로는 지금 근거 들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제가 자신하는 게, 중국 측에서 그 한자 푸는 것보다는 훨씬 정밀하기 때문에 우리 측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쪽도 아주 부정은 못 할 겁니다. 내놓을 정도는 돼요. 그런데 제가 그 글자 자체를 제가 본 적도 없고 그래서 지금 얘기 안 하는 거죠. 본 적도 없고, 그 글자가, 뭐 저기 만져라도 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말았는데.

17절 가죠. 그 문자는 나중에 기회 되면 제가 보여드릴 테니까요. 지금 한번 찾아보셔도 돼요. 신지문자 유명하니까.

17절에요, “맹자가 이르기를, 그 하지 말아야 할 걸 하지 않으며, 욕심내지 않아야 할 걸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이게 수오지심이죠. 다른 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 양심이 알거든요. 이게 내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그러면 멈춰야 되는데 “아, 이거 아이폰…” 하면서 이렇게 점점 자꾸 이렇게 마음이 가다 보면 마음이 맺히죠, 여기에. 그래서 이거 안 가지면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잠깐 의식이 끊어진 사이에 이게 여기 와 있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빨리 사라져야죠. 이게 이렇게, 순간적으로 이렇게 양심이 가려지면서 인심이 승(勝)해야 일어나거든요. 이게 일어날 때요, 실제 저도 뭔가 나쁜 짓 할 때 보면요, 약간 정신이 풀어져요. 단 몇 초라도요, 탁, 초점이 약간 불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깨어 있으면 이게 안 되거든요. 약간 정신이 풀려요, 순간적으로. 홰까닥 한다고 그러죠. 우리 뇌가 한번 홰까닥해요. 그러지 마라는 거죠. 늘 깨어 있어 가지고 수오지심 그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수오지심 그대로 하는 건데, 유교로, 『논어』에 가 보면 극기복례죠. 에고를 이겨 내라는 게 이거죠. “에고가 하고 싶다고 다 해 주지 말고, 에고가 욕심낸다고 다 해 주지 마라.” “예(禮)에 맞지 않는 건 하지 마라.” 그러면 재밌는 게, “극기복례를하면 인(仁)이 이루어진다.”라고 결론이 나오죠. 인. 왜 그러냐면요, 의가 이루어지면요, 예라는 것은 인과 의를 실천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는 인 아니면 의예요, 주로 표현하는 게. 근데 예로 인과 의를 표현할 수 있는데, 의(義)도 결국은 인(仁)을 하기 위한 거거든요. 인을 실천하는 게 의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건 인으로 귀결되게 돼 있어요. 예를 하든, 우리가, 의을 하든. 정의를 실천하는 것도 인을 하려는 거죠. 인하지 않은 거를 미워하는 거니까요. 인을 갖다가 표현하려다 보니까 “너무 나대지 말고 표현해라.” 너무 오버하지 말고 적절히 표현하라는 거고, 의도 결국은 불인(不仁)에 대해서는 강하게 저항하라는 거죠. “사랑이 아닌 거에 대해서는 저항하라.”가 ‘의’면, ‘인’은 “사랑하라.” 그냥 나와 남을 둘로 안 보는 걸 말하고요. 나와 남을 둘로 본 내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는 게 ‘의’거든요. 결국 예라는 거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았으면 표현하라는 거예요, 말과 행동으로. 지(智)라는 건 별거 아니죠. 뭐가 ‘인’이고 뭐가 ‘의’인지, ‘예’인지 이거 잘 알라는 거지. 특히 크게 보면 이렇게 보시면 돼요. 이렇게 보면 재미있어요. 인과 의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인간한테는. 사랑과 정의. 그런데 정의도 사랑을 위한 거지, 어느 문화권에서도 정의를 더 세우진 않아요. 사랑이 더, 배후에 있는데, 사랑을 위해서 ‘사랑의 매’가, 여기는 매를 때릴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매죠. 사랑을 위한 거죠. 근데 인이 사라지고 의만 앞세우는 그런 나라는 살벌해지죠. 예전에 미국 영화 「저지 드레드(Judge Dredd)」요, 뭐 그런. 법이 제일 기본에 선 나라, 이런 데는 살벌해요. 뭘 위한 정의냐? 이것도 나와야 하거든요. 똑같아요. 인에 뿌리를 둬야 의도 맛이 나고요. 인과 의를 표현하는 게 예고요. 이들 간의 관계를 보면요. 인과 의를 아는 게 지(智)입니다. 뭐가 인이고, 지금 ‘인’해야 되는지, ‘의’해야 되는지를 아는 게. 그러니까, 푹, 지금 껴안아 주고 끝내야 될 일인지, 처벌을 해야 될지 아는 게 지고, 거기에 알맞게 행동하는 게 예죠. 왜냐하면, 보세요. 오행이 목과 금 기운이 서로 반대되고요. 수와 화가 서로 반대되거든요. 그래서 아는 거와 하는 게 서로 쌍을 이루고 봄 기운과 가을 기운이 쌍을 이뤄요. 그래서 지금 내가, 이거예요, 봄기운으로 갈 거냐, 가을 기운으로 갈 거냐를 결정한 다음에 그걸 아는 게 물(지혜)이고요, 하는 게 화(火, 예절)예요, 표현하는 게, 실제로. 그때, 말할 때 그런데 수위 잘 조절해야 되잖아요. 내가 아무리 화가 나고 의를 표현하겠다고 그래도 수위 조절을 잘해야 되니까 예가 이제, 그 표현하는 것부터가 이미 예예요. 우리가 예법을 하는 게 꼭 예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아버지 돌아가신 날 만났는데 “어떻게 내가 하고 있어야 오늘 제일 양심이 편할까?” 해서, 제사상 차려서 절해 드릴 때 제일 편하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원칙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들어가 보면 여기서, 저 안에서 시작되더라는 거죠.

18절이요. “맹자가 이르기를 사람 중에 덕의 지혜와, 덕혜(德慧)와 술지(術知)” 아주 기술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뭘 잘 만들어 내는 게 기술이고요, 재주죠, 재주. 만들어 내거나 뭐 재능이 있는 거고, 덕은 양심을 잘 실천하는 거고요. 이런 데에 아주 도통한 사람들은 “늘 아픔과 시련 속에 있더라.” 질병 속에 있더라, 이겁니다. “질병 속에 있더라.” 근데 이게 맹자가 항상 주장하는 거죠. 아주 고통스러운 상황, “고통스러워야 사람들이 공부한다.” 왜냐하면, 이게 일리가 있는 게요, 우리 에고는 조금만 편하면, 에고가 인심이 치성하지 도심이 치성하지는 않거든요. 일이 잘 안 풀리면 늘 자기를 반성하게 되고,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읽어 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도심이 자꾸, 시비지심이나 수오지심, 측은지심, 사양지심이 발달하더라는 거죠.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주는 게 “오직 외로운 신하” 외로운 신하면요, 제가 임금이면 저 구석에 보이지 않게 서 있는 신하예요. 임금의 그 따뜻함을 하나도 입지 못하는 신하. 그러니까 총애를 못 받는 신하예요. 총애받지 못하는 신하랑요, 서자, 여기서는 얼자(孼子)인데요. 여기서 ‘얼자’라고 번역을 하는 게 맞죠. 근데 서자라고 했는데, 원래 한자로, ‘서자’ 밑에 괄호 보시면 서자는 ‘양첩의 자손’이고요, 양인(良人) 첩의. ‘얼자’는 천첩이에요, 기생이나 노비의 자식. 그러니까 일반 서자가 아니고 여기서는 얼자라고 표현했던데, 아주 좀, 사랑을 잘 못 받을 만한 그런, 서자 중에도, 서자는 맞죠, 서자는 맞는데 좀 이렇게 천첩의 서자는 “그 마음을 챙김이 위급하고 환란을 염려함이 깊다.” 그러니까 늘 걱정 속에 있다는 거예요. “혹시 나 이거 이렇게 있다가 밀려나는 거 아닌가?” 형제들이나 다른 신하들한테 “쫓겨나는 거 아닌가?” “나 누가 임금한테 잘못 말해 버리면 끝나는데.” 항변할 기회도 없이 끝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늘 지금 정신을 잘 챙기고 있고요. “정신 챙김이 위급하다”는 게 아주 위급한 상황처럼 정신을 깨어 있고요. “늘 환란을 염려하고” 그러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시나리오를 막 쓰고 있겠죠. 나름 대비책을 많이 세우고 있겠죠. 그래서 “덕과 기술의 지혜에 통달한다, 이런 자들이.” 예를 들어 준 거예요. 위기 상황에 늘 몰려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서자랑 외로운 신하를 들어 준 겁니다.

19절 가겠습니다. 질문은요, 끝나고 일괄적으로 받겠습니다. 체크해 두셨다가요, 카메라 끝나고. 그런가요? 두 시간 분량 찍을 수 있나요?

80분 남았습니다.

19절에요, “맹자가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이제 신하의 네 등급을 얘기해 주는 거예요, 이게. 맹자가 말할 때요,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요, 이게 뭐냐면 임금 되게 기분 좋게 해 주는 신하예요. 그 정도의 신하. 재주가 딱 그 정도에 있어요. 임금 기분 좋게 해 주는 정도. 그래서 임금이 그를 잘 받아들이고 기뻐해요, 그 신하는. 그 정도 신하가 있고요.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신하” 사직(社稷)은 토지신이죠. 그러니까 이게 일종의 영토를 상징하죠, 사직은. 주스 좀.

지금까지 뭐 이해 안 되는 거 없으시죠? 뭐냐면, 이번에 제가 애먼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지금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이거 발견됐죠. 동그라미가 세 개로 돼 있는 제단하고요, 네모 제단이 발견됐거든요. 그다음에 사당은 이렇게 발견됐어요, 앞에 이렇게 있는데. 이거 두 개는 제단이고, 이건 이제 사당이라고 하는데, 이거 보면 이렇게, 조선시대에도 똑같아요, 이거랑. 홍산문화에 이게 나왔다는 게 대단한 게요, 유교 문화의 기본이거든요. 이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거잖아요. 지금 저기 원구단(圜丘壇)이죠. 우리나라로 치면 원구단. 이거는 종묘거든요. 종묘가 있고, 아, 이건 사직(社稷)이죠. 사직. 사직은 땅의 신이에요. 토지신이고, 사(社)가 토지신이고 직(稷)이 곡식신이에요. 그러니까 땅에서 곡식 잘 자라라고 제사 지내는 신이에요. 이거는 종묘(宗廟)의 원형이에요. 동서남북이 있잖아요. 이게 중국 종묘의 원형이에요. 동실·서실·남실·북실을 갖는 건 원래. 근데 재밌는 게, 이 사당에는 삼각형 기하학 무늬가 그려져 있대요. 옛날 양반들이 원방각을 딱 맞춘 거죠. 그러니까 이거는 하늘한테, 이건 땅한테, 요거는 우리 조상한테 지내는 제사예요, 사람 조상한테. 이게 지금 뭐냐면, 서울에서도 예전에 만들 때 종묘가 좌측에 있죠. 종묘를 더 중시한 거예요, 자기 조상신들을. 사직은 우측에 있어요. 그러니까 좌가 더 높기 때문에 종묘를 높이고, 사직은 지금 사직공원이죠. 거기 네모나게 되어 있죠, 딱 조선에. 그래서 이게 이제 우리 홍산문화의 원형이 다 나온다는 거예요. 놀랍죠. 원방각이 홍산문화에 다 나온 거예요, 실제로 지금. 중국이 이제 ‘원·방’ 나오는 건 아는데 ‘각’ 나오는 건 몰라요. 각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저기 천제단·사직·종묘. 이렇게 세 개가 갖춰져야 천지인을 제대로 모시는 거죠. 이렇게 아시면서, 그래서 이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신하는 한 나라, 그 영토 안에 곡식 자라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요, 영토를 유지시켜 주는 신하예요. 그래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걸 기쁨으로 삼는 사람” 이건 아주 신하로 훌륭한 신하죠. 한 나라를 잘 건사하게 해 주는 신하니까요. 근데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한 나라에서나 통하는 신하고요, 이제 좀 더 센 성인급을 얘기해요. 그러다 보니까 천민(天民)을 먼저 예를 들어요. 천민(天民), ‘하느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하느님 백성이 있는데 천리 그대로” 양심 그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양심. 그래서 인작(人爵)은 없으나 천작(天爵)을 받은 사람인데, 지금 하느님 백성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신하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라에 등용되지 않은 분 중에, 나라에 등용되지 않은 분 중에 성인급들을 말해요. 뭐냐면 예전에 제갈량 등용되기 전이나요, 이윤(伊尹) 등용되기 전, 뭐 강태공 등용되기 전 생각하시면 돼요. 도를 엄청나게 품고 있는데 나라에 쓰이지는 않으니까 자신을 위해서만 쓰죠. 그래서 “천하에 두루 행해질 수 있는 뒤에야 행하는 사람이 천민이다.” 이게, 아시겠죠? 두루 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게 우리 수련의 다섯 기둥으로 보면 아주 이 대도로만 다니는 사람이죠. 양심상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건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성인이에요. 그래서 아주 성인은 아니더라도 현인 이상, 성인급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독선기신(獨善其身)’이라고 제가 달아놓은 게 뭐냐면, 이런 분들은 혼자서 선을 행하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나라에 등용이 안 됐으니까요. 근데 이런 분들은 만약에 등용만 하면요, 똑같아요. 산에서 지금 밭 갈고 있다가도요, 이윤이 산에서 밭 갈다가 탕왕(湯)에게 등용돼 가지고 하나라(夏)를 치고 은나라(殷)를 세웠거든요. 그러니까 엄청난 재주가 있는데, 양심이 밝다는 게 뭐냐면 사물을 더 아주 정확히 보기 때문에요, 탁월한 재능들이 있는데 등용되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하늘 백성’ 그러는데, ‘하느님 백성’이라고 하는 이유가요, 이 나라엔 제대로 된 백성은 못 되지만, 지금 우주 시민이라는 거예요, 이분은. 하느님이 살라고 한 인의예지를 그대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여러분들도 지금 인의예지를, 양심 밝히면요, 계제(階梯)가 오르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천민(天民)의 계제는, 제가 그냥 생각한 방식인데, 천작(天爵)이라는 게 있거든요. 하늘이 주는 벼슬이 있고 사람이 주는 벼슬이 있다면, 사람이 주는 벼슬이 옛날식으로 말하면, 요즘은 9급부터 1급 가도 장관 위에 또 있는데요, 예전식으로 하면 9품부터 1품까지죠. ‘정일품’ 하면 이제 최고봉이죠. ‘종일품’. 그러면 계제를 그 품으로 보세요. 거꾸로. 초계(初階)면 하늘나라 백성으로는 9품 벼슬 하고 있는 거죠. 9계면 하늘나라에서 정일품. 이게 벼슬이라는 거예요. 맹자는 그렇게 생각해요. 천작이라고 그러는 건 하늘 벼슬이에요. 그러니까 천민(天民)은 지금 이 나라에서는 벼슬을 못 살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백성이라는, 그러니까 벼슬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대신에 그러니까 여기서만 도를 펼치죠, 자기 한정된 공간에서만. 근데 이분이 대인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게요, 천민이 등용되면 대인(大人)이 돼요. 거기다 인작까지 얻은 사람, 이러면 이 사람은 자신만 바로잡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나갔으니까 남까지 다, 사물까지 바로잡아요. 정치도 바로잡아 버리고, 물건도 바로잡아 버리고, 사람도 바로잡아 버려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왜 이게 성인이냐고 그러면 『중용』에는 “성기성물(成己成物)이면, 나를 완성하고 사물을, 나는 인(仁)으로 완성하고 사물은 지(智)로 완성한다.”라고 『중용』에 돼 있는데, 인으로 완성한다는 건요, 인은 나와 남을 둘로 안 보는 거니까, “나를 완성하는 거는 에고가 완전히 제압됐을 때가 끝나고, 사물을 완성하는 거는 모르는 게 하나도 없을 때 완성된다.” 근데 「공손추上」 『맹자』에 가면요, “인하고 지하면” 그러니까 공자님은, 이게 공자님 칭찬이에요. “공자님은 인(仁)하고 지(智)하니 성인이시네요.”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성인이시네요.” 공자님 칭찬인데, 그래서 인·지하면 성인이라는 얘기를 제가 써 놓은 게, 이게 이제 유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거죠, 이 대인이라는 게. 나만 바로 세우는 게 아니라 남까지 바로 세우는 사람. 이 얘기가 왜 나오냐면 「공손추」에, 이게 공자님 얘기인데요, 『맹자』가 인용한 거예요. 누가, 제자가 맹자한테, 자공(子貢)인가 물어보니까 “선생님 성인이시죠?” 그러니까 “나는 아니다.” “나는 학이불염(學而不厭), 배우는 거를 염증 안 내고, 싫증 안 내고, 교이불권(敎而不倦), 남 가르치는 거를 게을리하지 않을 뿐이다.” 하니까, 자공이 말을 원체 잘하잖아요. “학이불염은 지(智)요, 교이불권은 인(仁)이니, 인하고 지하니 공자님 성인 맞네요.” 이렇게 나가는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기준이라는 게 인하고 지하면 성인이라는 기준이 있었다는 거지요, 그때. 공자님 때도 이미. 그걸 이제, 근데 『중용』에는 “인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지로 사물을 완성”했으니까, 나를 완성하고 남을 완성하는 대표적인 덕목이 인과 지라는 거죠. 그러면 성인이라는 거죠. 그다음 구절은 동호문답에, 율곡의 『동호문답(東湖問答)』에 나오는 천민(天民)이에요. 예전에 제가 읽은 기억이 나서 붙여 놨어요. “세상에 없는 보물을 품고 있으면서” 양심이 어마어마하게 밝아진 사람인데요, “시대를 구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지·양능이 장난이 아닌데, 그러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지금 홀로요, ‘산에서 밭 갈면서’예요, 상황이. 기쁜 마음으로 너무 즐거운 거예요, 도가. “죽겠네!” 하면서 “요·순의 도를 즐기면서 마치 보물을 함 속에 감춰 두고 살 사람, ‘누가 이걸 살까?’ 하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있는 사람이 하느님 백성이다.” 이해되시죠? 이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임금이 이런 사람만 잘 챙기면, 제갈량이든 강태공이든 이렇게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율곡의 『동호문답』에 이 대표적인 예로 이윤이나 강태공을 들어요. 제갈량은 율곡이 좀 안 좋게 봐요. 도덕보다, 왕도보다는 패도를 좀 많이 했다고, 제갈량은 이제 천민(天民)으로 안 봐요. 좀 아래 등급으로 보는데, 우리가 볼 땐 제갈량 천민(天民)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