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와 운명 그리고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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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일자 | 2024. 03. 04. 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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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할 때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이게 왜 남이 못 도와주냐면요, 신이 만약에 인간을 냈는데 자유의지를 줬다는 얘기는 신도 못 도와준다는 얘기예요.
유혹을 하고 인도를 해줄 수 있고 협박을 할 수는 있지만, 신이. 당근과 채찍으로 막 이렇게 자극은 줄 수 있지만, 결국 선택은 인간의 몫이라는 얘기죠, 자유의지를 줬다는 건.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양심을 선택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얘기죠, 애초에 이 게임은 룰이. 신이 강제로 떠먹여 줘서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죠. 신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거예요.
자유의지를 줬다는 건요, 내가 자유로 선을 택할 때 나도 또 다른 신이 되는 거지, 타율적으로 해서 선을 택한다면 나는 신이 될 수 없다는 얘기죠. 신은 스스로 선을 선택한 존재죠. 스스로의 뜻이 선인 존재죠.
그럼, 인간이 신성을 구현하려면 스스로의, 스스로(자기 원인으로요) 자유라는 건, 오직 원인이 자기한테 있어야 해요. 남이 시켜서가 아니에요. 신이 남을 시켜서 지금 6바라밀로 우주를 경영하고 있다면 신이 아니죠.
마찬가지로 인간이 신성한 존재가 되려면요, 스스로의 내적 동기로 6바라밀을 선택해야 해요. 이거 어렵죠. 신성을 구현한다는 게 어렵죠.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죠.
누가 막, 그런 거 있잖아요. ‘심부름하면 용돈 줄게’ 해서 심부름을 하면, 이거는 거래를 한 거지, 내면의 신성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볼 수가 없잖아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그거 남이 또 시켜서 했다 그러면, 그건 노예 도덕이지, 자기가 결정한 게 아니죠, 노예 상태지.
그럼, 오로지 자기가 주인의식을, 우주 최고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선이 제일 옳은 줄 알아서 스스로 선을 선택할 때, 내가 신적인 존재가 되겠죠.
그러니까 시공 안에 드러난 신이 되겠죠. 시공을 초월한 신이 시공 안에 인간의 모습으로 신성을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그걸 한번 생각해 보시면 그게 나한테서 구현이 돼야 해요.
그래서 자유의지가 왜 인간한테 있다고 우리는 얘기하느냐? 안 그러면 인간은 그냥 프로그램이지 이건 뭐... 사실은 내가 책임질 일도 없고. 악에 대해서도 책임 안 지게 된다는 거예요. 악도 내가 했나요? 신이 정해놓은 대로 한 거지.
이게 똑같아요. 인도식으로 모든 걸 카르마로 설명해 버리면요, ‘아니 내가 살인도 카르마 때문에 한 거지, 뭐 내가 선택했나?’
‘이 중에 자기가 지금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 카르마지.’ 이렇게 나가버리면 아무도 책임을 안 져요.
그럼 웃겨요. 이 카르마는 언제 선택했지? 그럼, 카르마는 어떻게 짓나요? ‘네가 선택해서 카르마를 지었지.’
왜 이번 생에는 선택의 기회가 없죠? 언제 지은 카르마가 지금 세세생생 우리를 왜 그렇게 제약하고 있죠? 뭔가 이상하잖아요, 이야기가?
이번 생에 카르마, 지난 과거 카르마의 제약받는 부분이 있는 만큼 또 나도, 그 카르마조차도 과거의 내가 선택한 거니까 책임을 지고 있겠죠.
근데 내가 선택의 기회가 없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버리면, 카르마론도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건 이미 카르마가 아니라 신이 그냥 설계해 놓은 거예요, 이렇게 하라고.
각자 배역이 그래서 살인하고 있는 거고, 배역이 그래서 죄짓고 있는 거고, 이렇게밖에 안 돼요. 그러면 우리는 아무도 도덕에 대해 책임을 안 지게 됩니다.
자유의지를 부정해 버리면요, 우리는 도 닦을 이유도 없어요. 이미 정해진 거를 우리가 뭐 어떻게 해요? 집에 드러누워 있겠지요.
왜 누워 있냐? 하면
나는 계속 누워 있기로 정해졌다.
그러니까 누워 있지 않겠냐? 이렇게 하면 뭐라고 그래요.
그래도 힘을 내봐야지? 이 말은 다 자유의지를 전제한 거잖아요. 그래도 네가 정신 차려야지 이거는, 다 자유의지를 전제한 얘기이기 때문에. 좀 극단적인 얘기입니다만 그렇게도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유의지를 우리가 요즘 과학계에서도 자꾸 자유의지가 없다는 쪽으로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인간의 그 신성에 대해서까지 탐구하고 할 얘기예요.
자유의지라는 건 신이에요. 자유라는 건 신의 세계예요. 자유의지라는 것도 이 신적인 마음이에요, 우리의 신성이고. 신성의 발현이라고 봐야 해요, 자유의지는. 쉬운 얘기가 아닌 거죠, 자유의지가 있냐 없냐는.
이게 더 자유의지가 있을수록 신성에 가까운 거죠. 동물보다 인간이 훨씬 더 자유의지가 있잖아요.
동물이 더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동물한테 책임을 안 묻잖아요.
동물이 살인해도 애매하잖아요, 처벌하기가. 사실 얘는 본능대로 움직인 건데, 인간이 괜히 옆에 갔다가 죽은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호랑이 우리에 사람이 들어갔다가 죽었다. 사실 걔는 사람이건 뭐건 상관없이 그냥 먹잇감이 보이면 무는 거고,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걔가 ‘아, 저놈 내가 벼르고 있던 놈이다. 죽여야겠다!’ 막 이러고, 막 인간적으로 더 자기가 결정을 해서, 책임감 있는 결정을 해서 죽였다 그러면 우리가 고민하지 않겠죠.
‘호랑이, 이건 사형!’ 막 이래가지고 감히 너를 키워주던 사람한테 너는 은혜를 뭐로 갚았다. 막 이렇게 죄목을 쭉 들겠죠.
그런데 걔한테 말해도 걔는 모르잖아요, 무슨 일인지. 그래도 안락사시키는 건 사람을 죽였다는 게 워낙 크니까.
또 사람을 죽인 경험을 가진 거 자체가 또 사람 피 맛을 봤다. 이거 안 된다. 여러 가지 이유를 걸어서 우리가 안락사나 이렇게 처벌을 하긴 하지만 인간한테 하는 처벌 하고 달라요. 좀 애매해요. 그 이유가 그거거든요. 얘는 자유도가 더 낮으니까.
인간을 왜 처벌하냐면, ‘너, 네가 결정했잖아!’ 이거죠. ‘네가 선택했잖아. 안 그럴 수도 있었는데 선택했잖아.’
근데 호랑이한테는 ‘안 물 수도 있었는데 왜 물었어?’ 하기 애매해요. 그 옆에 있으면 물게 돼 있거든요.
‘너 사람인데 그래도 물면 안 되지.’ 이게 안 먹히잖아요. 그러니까 애매한 부분이 있는 거예요. 보호단체가, 동물보호단체가 자꾸 시위하고 할 만한 뭔가 거리가 있어요.
‘왜 얘가 뭔 책임이냐?’ 이러는데 근데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인간을 죽였다는 거는 또 그건 또 다르다, 의미가 크다. 이렇게 보는 거거든요.
그럼 이게 다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인간이 더 신성한 존재라는 뭔가가 있거든요. 다 이걸 말로 못 하니까 이게 납득을 잘 못 시키는 거예요. ‘아,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않나, 호랑이가.’
막 이러면, ‘왜 모든 생명은 똑같지’ 뭐 이런 얘기, 그 말도 맞는 말인데 생명현상이란 점에서 똑같지 않냐? 이 말도 맞는데, ‘그래도 분명히 신성의 발현 정도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치냐?’
이 부분이 신성을 이해보다는 사람들끼리 요즘 얘기하니까 되게 뭔가 다른데도 다르다는 걸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자유도라는 걸 갖고 보시면 동물들 보세요. 그 각 종마다 똑같은, 들어가면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요. 자유도가 일단 떨어지죠.
인간은 왜 벗겨서 태어났을까요, 털 없이? 골라 입으라고. 지금 맨날 피처폰 쓰다가 스마트폰 쓰면 그거잖아요, 자유도가 올라가잖아요.
방황하시는 게, 이폰 갈아타면 처음에 힘든 게 앱을 뭘 깔아야 하는지? 사람마다 다른 앱을 깔고 있잖아요. 그럼 ,자유가 두렵거든요, 처음에.
만약 인간계에 지금 인간으로 오셨는데 막 선택의 자유에서 너무 힘들고, 뭘 골라야 할지 너무 모르겠고, 막 낯설다 이러면 전생에 좀 금수 쪽에 있다가 오셨을 수도 있어요. 갑자기 펼쳐진 이 자유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난 너무 오래 피처폰만 쓰다가 갑자기 스마트폰을 쓰니까 ‘전화만 걸면 되지, 전화기가!’ 지금 이런 이거 들고 그 얘기 하시면 지금 우리가 다 웃을 거 아니에요. ‘좀 수상한데, 저 사람?’ 이런 거죠.
인간으로 왔는데 짐승 하던 것만 하려고 그래요. 짐승들이 잘하는 것만 해요. 먹고 싸고 자고, 먹고 싸고 자고. 약간 수상한데?
부모님들의 그 화가 어떻게 보면 맞을 수 있죠. ‘네가 어? 네가 짐승이냐?’ 왜 짐승의 도를 구현하고 있냐? 이거죠. 인간계로 왔는데, 왜 짐승들 하는 걸 하고 있냐?
이런 관점에서 보시면, 인간이 얼마나 자유도가 높은지 아실 거예요. 딱 머리털도 마음대로 다 자기 각자 개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벌써 동물로만 가도 개성을 드러내기는 힘들어요, 각자. 개성이 없는 건 아닌데 약해요. 종 전체의 특성을 오히려 갖고 있어요.
그렇죠? 개 키우면 뭐 얘 종이 무슨 종이냐? 이런 게 일단 종으로 파악하잖아요.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놈 한 놈 또 다를 거 아니에요. 근데 되게 몰개성적으로 되게 있거든요. 그런 게 더 강하다.
인간도 어떻게 보면, 어떨 때 보면 몰개성적입니다. 전 세계 아줌마들 웃음소리가 다 비슷한 거 같은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게 몰개성적일 때. 아저씨들이 다 비슷한 행동을 할 때,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목소리도 비슷해지고, 서로 뭔가 왜 이렇게 문명을 초월해서 다른 문명인데도 왜 비슷한 모습이 있지? 이럴 때 우리가 되게 몰개성적인 모습이 느껴지거든요.
동물들은 그게 훨씬 강하잖아요. 이런 거 가지고 인간이 또 많은 걸 받았구나! 하는 거 아셔야 해요. 그게 자유의지예요.
그런데 이 자유의지를 과학으로만 단순하게 우리가 설명하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해요? 우리가 뭔가 하나 생각을 해서 결정하는 행위가, 단순히 우리 단순히 뇌 작용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더 영적인 작용이 있다고 보는 거죠, 우리는.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봐야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거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 과거에 업력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마어마한 우리 안에 있는 카르마가 날 끌고 갈 거 아니에요, 사실은.
내 안에 이미 프로그램된 본능이 나를, 동물적인 본능이 끌고 가려고 할 거고, 탐진치가 끌고 가려고 할 거고, 카르마가 그동안 해온 그 업이 나를 끌고 가려고 하고. 거기에 끌려만 간다면 우린 자유의지가 없는 게 맞죠.
그런데 탐진치를 하더라도 어떤 탐진치를 할지, 거기도 자유가 들어갈 거고. 이 탐진치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깨어서 6바라밀을 쓸지, 그것도 거기에도 내 자유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동물들도 다 자유가 있죠. 있는데 자유도가 떨어진다, 우리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좁다. 우리는 선택의 폭이 넓다. 넓다 보니까 뭐가 어떤 폭까지 들어왔냐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선택까지 가능해진 거죠. 그렇죠?
고등 침팬지로 살아가길 선택할 수도 있지만, 우리 선택인 거예요. 신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가 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신성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동물들, 아까 중생 동물들 어떻게 구원할 거냐? 이거는 요원한 얘기예요. 동물이 스스로 선택해야 하거든요.
그럼, 동물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선택해 가지고 신성한 존재가 되긴 힘들잖아요. 그럼, 인간으로 와야죠, 동물도. 동물도 구원시키려면 인간으로 와서 구원받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결국 인간만 구원하면 되는 거죠. 만약에 그런 논리로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신성해지는 거지, 동물들을 신성하게 할 방법이 없잖아요, 우리가?
안 그러면 부처님이 오셔서 개 성불시킨 얘기, 이런 게 막 많아야 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되게 강조했어야 해요, 한두 건이 아니라.
‘야 너희 인간만 구원받아선 안 돼. 어차피 이 개들이 또 인간으로 온단 말이야.’ ‘개일 때 구원시키자!’ 이렇게 말이 나왔어야죠.
결국은 인간이 구원, 인간으로 와야 구원이 돼요. 심지어 남녀 차별이 있을 때는 이런 말까지 한다니까요. 여자는 남자로 태어나야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남자로 태어나야만 도를 닦을 수 있는, 이게 불교의 기본 세계관이었어요.
여기에 이제 태클을 건 게, 2,000년 전부터 ‘유마경’ 나오면서 여자가 성불한 얘기들이 ‘법화경’에도 나오고, ‘유마경’에도, ‘화엄경’에도 나오고 이런 식으로 등장한 거죠. 반발한 거죠.
심지어 정토론, 지금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 사상은요, 정토에는 남자밖에 없어요, 여러분. 남탕이에요. 왜냐하면 ‘남자만 성불한다’는 관념에서 정토론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태어날 땐 여성이 다 남성화돼서 태어나는 거예요. 남자로 태어나요, 정토에는. 삭막하겠죠, 정토? 저는 안 가겠습니다. 여기가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여기가 정토라고 생각하고. 재미없을 것 같아요.
왜 그런데 그런 주장이 나왔냐? 아니 ‘남자만 성불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거죠.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중생을 성불시킨다는 얘기도 쉬운 얘기가 아니죠. 우리가 이제 우리는 이제 그런 대승경전들의 힘을 가지고 ‘남녀 성불 다 가능하다!’라고 해도 인간인 거죠. 인간이 구원받는 얘기지, 결국 인간이 잘해야죠.
그러니까 ‘홍익중생’, 말은 좋은데 결국은 인간이 잘해야 하기 때문에 홍익인간이 더 직접적인 가르침입니다. ‘홍익인간’
우리나라 홍익인간은요, 불교는 홍익중생이거든요. 그러니까 뭐 ‘중생을 왜 이롭게 해야지, 왜 인간만 이롭게 하냐?’ 그러는데 인간이 바로 서면 중생도 바로 서는 거지,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이 바로 서는 게 제일 중요하죠, 홍익인간이.
그래서 ‘인간주의’가 진짜 중요한 겁니다. 책임감을 말하는 거예요. 인간주의는 인간이 우주에 책임이 있다.
근데 인간이 자꾸 홍익중생이니 하면서 중생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뒤로 빠지려는 행위가 책임감 없는 행위예요.
뭔가 중생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뭐라고’ 아니 이렇게 고사양 받아놓고, ‘인간이 뭐라고’ 해버리면요, 그게 오히려 도적놈 심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집안에서 장남이 투자 다 받아놓고, 그렇죠? ‘우리 똑같은 형제자매 아니냐? 힘들 때 같이 나누자!’ 이러면 야, 씨 네가 다 가져갔는데, 돈 다 가져가 놓고 갑자기 힘들 때는 ‘N 분의 1 하자!’ 그러면 욕 나오죠.
그 똑같은 소리예요. 갑자기 인간이 자기가 다 해먹을 땐 다 해먹고, 책임 나놀 때는 막 ‘중생 아니냐, 우리가 같은’ 막 이러면,
책임감을 가지라는 거예요. 홍익인간 인간주의는요, 인간이 제일 우월하다가 아니라 인간이 우주에서 진짜 큰 혜택을 입었다는 거예요, 이미. 그리고 우주가 제일 인간한테 기대한다는 거예요, 맏이로서. 인간이 잘 해야 한다는 건 각오입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하고 같은, 인간이 뭐가 뛰어나다고 다른 생명체랑 뭐가 다르냐? 이런 얘기들은요, 올바른 지혜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에요.
인간이 얼마나 혜택을 받고 있고 지금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런 부분을 되게 희석시켜요. 인간의 책임인데.
인간이 잘났다는 아집을 버리자 정도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죠. 인간이 지구에서 에너지를 제일 많이 쓰고 있잖아요.
한 사람이 지금 살아가는데, 보세요. 원룸 하나 가지고 한 사람이 살아갈 때 소비하는 걸 보세요, 지구의 물자를 얼마나 소비하나.
보고 있으면 어마어마합니다. 그렇죠? 돼지, 닭, 소 키워도 이렇게 이렇게 막 처먹고, 이렇게 쓰고, 이렇게 누리고, TV 하나씩 다 있어야 하고, 뭐 있어야 하고, 폰 하나 써야 하고. 지구를 혼자 와서 엄청 끌어다 쓰고 가는 것 같지 않으세요? 죽을 때까지.
또 먹어야 해요. 뇌가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먹어요. 그래서 동물한테 이런 인간의 뇌를 다 안 준 게 맞아요, 자연계가. 동물도 만약에 인간의 뇌를 다 갖고 있잖아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동물들도 다 소비해야 합니다. 그 지구에서 다 그거를 끌어다 써야 해요.
인간이 지구에서 엄청나게 지금 에너지 쓰고 있는 존재예요.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죠. 뭐 토해내야죠. 먹튀 하면 안 되죠.
인간으로서 지구에서 산 것만으로도 혜택 입었다고 생각하고, 올바른 선택, 올바른 신성의 구현 이런 거 보여줘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홍익중생’인 거죠. 그 말은 맞죠.
인간이 자각해서 ‘아, 내가 중생들을 위해야 하겠다.’ ‘내가 지금 나만 이렇게 누리고 살 게 아니다.’ 요런 측면에서 홍익중생이 맞고, 더 들어가면 ‘아, 인간이 지금 중요하구나! 홍익인간이!’ 더 들어가면 직접적으로 홍익인간이 더 중요해요.
‘인간이 바로 서야 하는구나!’ ‘그래야 중생을 도울 수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다 취할 수 있죠.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해서 그런데 문제가 어려운 게,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라면 ‘까라면 까!’하고 이렇게 시키면 되겠죠? 그런데 지랄 같지 않나요? 예수님, 부처님이 와도 못 시켜요, 공부는.
그래서 인간의 문제가 어려운 게요, 예수님·부처님·공자님 뭐 누가 와도요, 유혹을 할 뿐이지, 강제할 수가 없어요. 스스로 선택해 줘야 하거든요.
아, 그런 거였군요. 그러면 내가 진리를 따르죠. 나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내가 양심에 순종하기를 내가 서약했고, 나는 스스로 내가 6바라밀을 내 일상에서 삶의 기준으로 삼기를, 삶의 원칙으로 삼기를 내가 서약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해줘야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요. 보살, 군자, 사도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얘기예요. 그걸 어떻게 시켜요, 여러분? 다른 지금 막 사이코패스, 나르시시스트 막 창궐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거기로 끌고 가요? 그래서 인간의 문제가 어려운 거예요.
보살들이 왜 몇천 년째 선언을 하고 있는데 지구는 나아지지 않고 있는가도 현실이 이래서 그래요. 쉽지 않죠.
우리 각자 돌아봐도 쉽지 않잖아요? 나도 쉽지 않은데, 내 우주 경영도 쉽지 않은데, 도대체 남의 우주까지 어떻게 경영해서 지구 전체에서 인간이 각성하게 만들 것인가? 지구에 사는 인간들 수준을 끌어올릴 것인가? 이런 고민이 진짜 힘든 이유가 이거예요.
보살도가 너무 힘들다. 대승 너무 힘들다. 그래서 반대로 소승으로 들어가면 ‘아, 남들은 내가 알아서 각자 판단하는 거고 각자도생이지 뭐, 나는 내 우주나 다스리자.’하고 앉아있다 보면, 또 이게 문제냐면 뭐냐면, 양심을 닦으면요, 양심이라는 게 골칫덩어리에요.
여러분 양심을 닦으시면요, 다른 인간들이 고통받는 걸 못 견디게 돼있어요. 근데 소승을 닦으려면 양심을 좀 마비시켜야 해요. 안 그러면 혼자 편히 있을 수가 없어요.
저 산에 자연인처럼 집 짓고 들어가 있어도 소식을 안 들어야지, 자꾸 ‘어디서 교통사고 나서 막 한 20명 죽었대~’ 그러면 괴롭죠, 밤에. 아시겠죠?
스마트폰만 갖고 있어도 전 지구 소식이 들리는데 괴롭죠. ‘어디 전쟁 나서 무슨 일 당했대, 뭐에..’ 그럼 계속 스트레스를 받게 돼 있어요.
이 양심이라는 게 우리를 수오지심으로 계속 괴롭히고, 부끄럽고, 밉고, 화나고, 막 또 측은하고, 막 양심이 계속 우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소승의 도를 닦으려면 양심을 어느 정도 마비시켜야 해요. 이게 문제예요.
왜 소승이 답이 아니냐면, 혼자 좀 내적 충만을 기하겠다는 의미를 소승으로 보면, 소승도 꼭 필요한 도죠.
그런데 소승의 도는 뭐가 문제냐면 양심을 계발하면 힘들어지거든요. 대승화돼 버려요. 산에 혼자 앉아 있어도요, 결국은 중생의 행복을 기원해야 하고, 이래야 편해요.
그래서 실제로 소승 불교도 계속 중생 행복 기원하고 있어요, 숲에서. 안 그러면 불편하니까. 이 양심을 또 마비시켜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그 양심을 또 근데 이걸 표현하자고 밖으로 나가면 또 내 수행이 깨지고 내가 고통스러워지니까 숲에 앉아서 계속 지구평화를 기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보면 자연인들도 다 산에서 세계평화 기원하면서 계세요. 그래야 살겠으니까 하는 거예요.
사람은 원래 양심 하게 만들어졌는데 양심을, ‘아니 내가 오지랖이지, 남을 어떻게 구해?’하고 양심을 다 발현 안 하고 최소화하면서 자기의 내적 평화와 충만함 그걸 기약하는 게 소승이지, 사실 소승도 알고 보면 결국은 대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요.
자연스러운 모습을 더 갖게 되면 대승화돼 버려요. 그러니까 소승도 되게 약간 방편이고 치우친 모습이지, 양심을 좀 눌러야 하니까. ‘에이 양심을 어떻게 눌러, 양심이 날 인도한 대로 다 따라 보자.’ 그럼, 대승 돼 버리는 거예요.
사실은 그냥 대승하시라는 거예요. 소승은 치우친 생각의 방편이다. 그래서 대승하시면서 산에서 혼자 있을 때도 ‘내가 중생을 구제할 힘을 모으기 위해서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하면 그냥 대승이잖아요. 소승을 표방할 필요가 없잖아요.
대승인데 자리(自利) 쪽에도 힘을 쓰고 있는 보살인 거죠. 내가 힘이 좀 달리니까,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까. 힘 길러서 남 도와주려고, 이게 대승이죠. ‘중생 구제하려고 성불하겠다.’가 대승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성불에 집중합니다. 내 중생 구제 꼭 갈 겁니다.’ 이러면 대승이지, 굳이 소승을 들먹일 필요가 없으니까 제가 소승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근데 보면 소승하고 비슷한 모습으로 하고 있을 수도 있죠. 내가 당장 힘드니까. 근데 왜 소승과 대승의 차이는 뭐냐? ‘나는 결국은 내 양심 따를 것이다.’ 하고 있으면 대승이라는 거예요.
‘내가 좀 불편해도 양심 따라야 편하다.’ 하면 대승이에요. 근데 ‘내가 당장 편하게 해서 양심을 좀 접겠다,’ 그러면 소승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냥 혼자 계셔도 소승과 대승은 모습이 다르죠. 양심에 충실한 대승과 혼자 있더라도, 혼자 수행을 산에서 하더라도 대승으로 수행하시라는 거예요.
그게 모습은 소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은 대승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소승은 뭔 문제가 있냐면, 양심을 눌러야 하는 문제가 생겨요.
‘아, 오지랖 부리지 마. 각자 책임지는 거지, 왜 네가 남의 인생에 끼어들려고 그래?’ 이런 식으로 자기 양심을 계속 죽여줘야 해요, 소승은. 그래서 그런 거 하지 마시라고요.
그냥 ‘야, 오지랖 부리지 마!’ ‘네가 아직 지금 힘이 없잖아!’ ‘그러고 힘을 더 모아서 가자!’ 이렇게 마음먹고 지금 자신을 다스리시면 되죠. 이해 잘 되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