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0강: 두 판 사이의 차이
홍익학당 아카이브
https://cafe.naver.com/bohd/48263 |
편집 요약 없음 |
||
| 20번째 줄: | 20번째 줄: | ||
(00:04) | (00:04) | ||
보조 지눌 스님의 <수심결>에서 해오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여러분들 다 보셨을 텐데. 제 수심결 출간한 지 오래됐죠. 다들 보셨을 텐데, 같이 또 읽어 볼게요. 보조 스님이 이제, 스님한테 묻는, 질의 응답을 통해 견성시키는 내용입니다. 자, | 보조 지눌 스님의 <수심결>에서 해오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여러분들 다 보셨을 텐데. 제 수심결 출간한 지 오래됐죠. 다들 보셨을 텐데, 같이 또 읽어 볼게요. 보조 스님이 이제, 스님한테 묻는, 질의 응답을 통해 견성시키는 내용입니다. 자, “진리에 들어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그대에게 하나의 문을 가르쳐 주어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근원'...” '그대의 근원'이라는 게 근원 원(原)자를 썼는데, “근원으로 돌아가게 해 버리겠다.” 참나를 각성시켜 주겠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방법론이 여러 방법이 있다 이거죠. | ||
(00:52) | (00:52) | ||
지금은 관음법문을 쓰는 겁니다, 관음. 소리를 관(觀)해 가지고 진리를 깨치는 그 방법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자, 저기- | 지금은 관음법문을 쓰는 겁니다, 관음. 소리를 관(觀)해 가지고 진리를 깨치는 그 방법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자, 저기- “지금 저 까마귀 울며 까치 지저귀는 소리 들리는가?” 여러분 지금 밖의 차 소리 들리세요? 스님이 “예, 듣고 있습니다.” 보조 스님이요, “그렇다면 소리를 듣는 '그대 자신'을 돌이켜 들어 보라.” 소리를 듣는 데 일단 몰입하셨다가 '소리 듣는 나는 누구지?' 하고 나로 돌아가고, 소리 듣는 자가 되어 보라. “그 듣는 본성 자리에 소리가 있는가?”, “그 자리에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이게 잘 따라간 거죠, 지금 그 제자분이. “훌륭하다. 이것이 관음입리지문(觀音入理之門). '소리를 관(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다.” 해서 관음법문이라는 거죠. | ||
(01:50) | (01:50) | ||
| 29번째 줄: | 29번째 줄: | ||
(02:44) | (02:44) | ||
소리에 끌려가지 말고 소리를 듣는 나 자신으로 존재해 보라. | 소리에 끌려가지 말고 소리를 듣는 나 자신으로 존재해 보라. “내가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그 자리(소리 듣는 그대 자신)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일체 없었다고 했다. 이미 얻을 것이 없었다면, 얻을 수 없었다면 그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 아닐까?” 그 자리는 그러면 소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텅 비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空)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나 자리를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이 “어, 그런데 거기가 그냥 텅 비어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알아차리더라구요.” 이 얘깁니다. “광명하여 어둡지 않더라구요.” | ||
(03:28) | (03:28) | ||
제자가 너무 잘 따라와 주죠? 자기가 쓴 글이라 그래요. 가정해서 쓴 글이라. 대답을 너무 앞서가면서까지 맞춰 주잖아요. 이게 실제라면 아마 스승이 그랬을 거예요. 오버하지 말라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하고 싶은 얘기를 따라와 주는 거죠. "거기 텅 비어 있더냐?", "아니요. 텅 비어 있지만 않고 광명하여 어둡지 않던데요?" | 제자가 너무 잘 따라와 주죠? 자기가 쓴 글이라 그래요. 가정해서 쓴 글이라. 대답을 너무 앞서가면서까지 맞춰 주잖아요. 이게 실제라면 아마 스승이 그랬을 거예요. 오버하지 말라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하고 싶은 얘기를 따라와 주는 거죠. "거기 텅 비어 있더냐?", "아니요. 텅 비어 있지만 않고 광명하여 어둡지 않던데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텅 비어 있지 않은 본체인가?”, “형상도 모양도 없어서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가 모든 부처 · 조사들의 '생명' 자리다.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 ||
(04:09) | (04:09) | ||
이제 의심하지 않는 단계에 들어갔죠? 여기가 해오 자리예요. 지금 이 양반이 참나를 체험했죠. 그리고 이해했죠? 자, 참나를 체험했고 왜 이 자리를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는지까지 이해했어요. 생각 · 감정 · 오감이 일체 없는 텅 빈 자리인데 거기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참나는 속성이 텅 비어 있으면서 알아차린다.'까지 안 거예요. 그렇죠? 그럼 이게 해오죠. 참나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했다구요. 여기 이제 아공 · 법공이 다 들어있는 거죠. | 이제 의심하지 않는 단계에 들어갔죠? 여기가 해오 자리예요. 지금 이 양반이 참나를 체험했죠. 그리고 이해했죠? 자, 참나를 체험했고 왜 이 자리를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는지까지 이해했어요. 생각 · 감정 · 오감이 일체 없는 텅 빈 자리인데 거기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참나는 속성이 텅 비어 있으면서 알아차린다.'까지 안 거예요. 그렇죠? 그럼 이게 해오죠. 참나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했다구요. 여기 이제 아공 · 법공이 다 들어있는 거죠. “그대가 만약 참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게 된다면 의심이 '단박' 사라진다.” 자, 이래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겁니다. | ||
(04:50) | (04:50) | ||
자, | 자, “참나를 단박 깨치게 되면 동시에 이제 이해가 밀려오게 돼 있고, 그 이해까지 얻게 되면 의심이 사라진다. 의심도 단박 사라진다.” 자, 그래서 참나를 정확히 만나게 되면 참나를 이해해 버리게 되고, 우리는 그 이해를 통해 의심을 끊게 된다. 이게 초기 불교 때부터요, 견도(見道). 도를 진짜 보면 의심이 사라진다고 되어 있는 게 이겁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 오래 못 머물면 분명히 다시 의심은 싹터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미 이해의 씨가 뿌려졌죠. 이해해 버렸단 말이에요. 이게 이제 그걸 막아줍니다. 그러면서 이게 싸우다가 완전히 승리하고 끝나면 증오가 되는 거예요. | ||
(05:33) | (05:33) | ||
그래서 이분 이 말씀이, 의심이- | 그래서 이분 이 말씀이, 의심이- “그렇게 참나 자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면···” 일단 만났는데 이제 의심할 수 있어요? 참나가 존재한다는 걸, 만났는데 의심할 순 없잖아요. 1초라도 만나면 이제 의심이 불가능합니다.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러고도 의심한다는 건요, 그 기존의 습기(習氣)가 남아서 의심하는 거지 분명히 이해, 확고한 이해가 뿌리를 내려요. 만나서 이해했으니까. 그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일어나 버리면 의심이 단박에 사라진다. 이제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잖아요. "어, 내가 다시 지금 그걸 못 느끼고 있어. 그런데 그 자리는 분명히 있어. 안 사라지는 부분이 있어, 이제." 확고한 부분이 생겨요. 다시 흔들리는 부분도 생기지만 확고한 부분이 생깁니다. | ||
(06:22) | (06:22) | ||
그래서, | 그래서, “여기서 대장부의 강한 의지가 분출하게 될 것이며···” 이제 맛봤는데 이제 의욕이 나죠. “참되고 바른 견해가 발동하여···” 지혜가 발동하죠. 참나를 만났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서 오는 그 지혜는요, 막연하게 상상하던 게 아니에요. 참나에 대해서 상상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참나에 대해 상상한 분들이 현재 불교 경전들을 강의하고 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제일 무서워요, 이분들은. 자기가 상상한 얘기를 하고 있어요. 경전을 보고 자기가 상상한 걸 가지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못 가는 거예요. 그 말 듣곤 아무도 못 가요. | ||
(06:58) | (06:58) | ||
그런데 진짜 체험하고 나면 확실한 이해,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당연히 발동하겠죠. 왜? 직관도 하게 되고 직관의, 직관에 바탕을 둔 추리가 이제. 당연히 추론이 일어나요. | 그런데 진짜 체험하고 나면 확실한 이해,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당연히 발동하겠죠. 왜? 직관도 하게 되고 직관의, 직관에 바탕을 둔 추리가 이제. 당연히 추론이 일어나요. “진리의 참맛을 직접 보며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참맛을 직접 봤죠. 그리고 스스로 긍정했죠. "맞다!" 이해도 생겼죠. 이해해서... 이겁니다. 자, 보통 이 직관의 영역을요, 정견(正見)이라고 그래요, 불교에서. 올바른 견해가 생겼다는 건요, 직관을 한 거예요. "아!" 그리고 추론, 올바른 추론을 뭐라고 하냐면요. 추리나 추론입니다. 올바른 추론을 정사유(正思惟) 그래요. 올바른 전제에 서서 올바른 논리를 펼쳐나가면요, 이분은 이제 직관과 분별이 다 원만해지겠죠. | ||
(07:53) | (07:53) | ||
| 53번째 줄: | 53번째 줄: | ||
(08:42) | (08:42) | ||
자, 정견은 직관을 강조한 얘기고, 정사유는 추론을 강조했다. 사실은 둘이 또 만나는 작용이 있지만, 아무튼 어느 쪽에 더 포인트를 두고 있는지만 구별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견해가 발동한다는 건 정견, 정사유를 다 얘길 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참나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올바른 사유까지 계속 이제, 올바른 추론까지 전개하게 되니- 자, 이 정도 오면 이 자리가, | 자, 정견은 직관을 강조한 얘기고, 정사유는 추론을 강조했다. 사실은 둘이 또 만나는 작용이 있지만, 아무튼 어느 쪽에 더 포인트를 두고 있는지만 구별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견해가 발동한다는 건 정견, 정사유를 다 얘길 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참나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올바른 사유까지 계속 이제, 올바른 추론까지 전개하게 되니- 자, 이 정도 오면 이 자리가,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이해하여 깨달은 자리' 해오처(解悟處)다.” 이해하여 깨달은 자리예요. 깨달음을 이해한 자리도 되고. 이해하여 깨달은 자리. | ||
(09:25) | (09:25) | ||
보조 스님이 주를 달았어요, 각주를. | 보조 스님이 주를 달았어요, 각주를. “(이것이 비록 '증오'가 아니고 '해오'이긴 하지만) 이 자리에는 다시 계급의 차례가 있을 수 없는바, 이것을 단박(돈, 頓)이라고 하는 것이다.” "해오다."라고 해 놓고 본인이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여기는 이게 단박이라고 내가, 이걸 돈오라고 부를 수 있다 이거예요. 해오도 돈오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자리에는···” 왜? “다시 계급의 차례가 없다.” 그, 보세요. 짧지만 그 순간 불성을 만났고, 불성을 이해했단 말이에요. 그게 그 짧은 순간 우리는 영원과 통한 거예요. 여기에 단박, 여기에 계급과 차례를 붙일 수 없다. 그 순간에 우리는 참나와 하나가 된 거다. 짧더라도 그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래서 단박이라고 한다. | ||
(10:17) | (10:17) | ||
| 125번째 줄: | 125번째 줄: | ||
(26:57) | (26:57) | ||
자, | 자, “그래서 믿음의 '원인'이 모든 부처의 '결과로서의 공덕'과 일치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룰 수 있다.” 자, 믿음이 확고해져야 해오인데, 처음에 믿고 시작했던 게 이해가 된 거잖아요. 믿음이 확고해졌다는 거예요. 믿음이 자리잡은 건데 믿음이 자리잡으려면요. 믿음의 원인이, 씨앗이 모든 부처의 결과로서의 공덕, 열매랑 일치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때 해오예요. 해오라 이거예요. 자, 해오는요. 보세요. | ||
(27:38) | (27:38) | ||
| 140번째 줄: | 140번째 줄: | ||
(30:40) | (30:40) | ||
자, "처음 제대로 믿을 때 이미 우리는 부처를 만난다, 완벽한 부처를." 자, 이 얘기를요. 조금만 더 하고 쉴게요. 보조 지눌의 <원돈성불론>에서 한번 보실래요? 원돈성불론이요, 화엄경에 기반한 성불론이라는 거예요. "원만하되 단박에 부처가 된다는 이론이 화엄경에는 나온다." 그런데 일반 화엄경에 나오는 게 아니라 통현 장자의 화엄경론, 화엄경을 풀이한 논문에 이런 주장이 나와요. 그 주장을 보조 스님은 적극적으로 취하신 거예요. 왜? 선교(禪敎)를 고급지게 회통시켜 보려고. 이런 회통이 아닌 회통은요, 이게 올바른 회통이 아니죠. 그래서 10신 초의 해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번 보시죠. | 자, "처음 제대로 믿을 때 이미 우리는 부처를 만난다, 완벽한 부처를." 자, 이 얘기를요. 조금만 더 하고 쉴게요. 보조 지눌의 <원돈성불론>에서 한번 보실래요? 원돈성불론이요, 화엄경에 기반한 성불론이라는 거예요. "원만하되 단박에 부처가 된다는 이론이 화엄경에는 나온다." 그런데 일반 화엄경에 나오는 게 아니라 통현 장자의 화엄경론, 화엄경을 풀이한 논문에 이런 주장이 나와요. 그 주장을 보조 스님은 적극적으로 취하신 거예요. 왜? 선교(禪敎)를 고급지게 회통시켜 보려고. 이런 회통이 아닌 회통은요, 이게 올바른 회통이 아니죠. 그래서 10신 초의 해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번 보시죠. “이 일승원돈문(一乘圓頓門...” 오직 한 길이라는 거예요. 부처로 가는 오직 한 길. | ||
(31:35) | (31:35) | ||
소승, 대승이 아니고 '일승' 그럴 때는요, 사실은 대승을 말해요. 자, 보세요. 소승에 대비해서 대승 하면 두 길이 있는 것 같잖아요? 근데 따지고 보면 대승밖에 없는 거예요. 소승은 잘못된 길인 거예요. 그래서 일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직 부처가, 불보살 되자는 | 소승, 대승이 아니고 '일승' 그럴 때는요, 사실은 대승을 말해요. 자, 보세요. 소승에 대비해서 대승 하면 두 길이 있는 것 같잖아요? 근데 따지고 보면 대승밖에 없는 거예요. 소승은 잘못된 길인 거예요. 그래서 일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직 부처가, 불보살 되자는 “이 일승의 원만한, 원만한 부처가 단박에 되자는 이 문을 가탁하는 자는 10신의 처음에···” 처음 믿어서, 그 처음 믿음은 뭔가 불순물이 많은 믿음이죠. 그냥 "나 부처님 믿기로 했어." 한 그 믿음이 제대로 딱 이해와 함께 자리 잡을 때의 그 믿음. 그때가 이제 올바른 정각이라는 거예요. | ||
(32:15) | (32:15) | ||
“10신의 처음에 '근본지의 과보의 바다(根本智果海)'를 얻음이요,···” 말이 어렵습니다. 근본지는 이제 불지죠. 여러분, 여러분 이 뿌리가 되는 지혜, 우주의 뿌리가 되는 지혜, 이 부처의 지혜의 과보라는 게, 열매라는 건. 보세요. 열매라는 건 12지를 말하는 거예요. 불성에 갇혀진 지혜가 여기는 씨앗 상태인데 여기서는 열매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자, 씨앗 상태에서는 에고는 모르고 부처는 아는데, 에고는 못 따라가니까 그걸 전부로 알면 안 되고. 씨앗 상태라 하더라도 이미 사실은 부처. 불성 자리는 씨앗이나 열매나 똑같다는 거예요. 에고 차원에서만 달라지죠. | |||
(32:58) | (32:58) | ||
| 171번째 줄: | 171번째 줄: | ||
(38:43) | (38:43) | ||
자, 그러니까 이 다음 말이 나오는 거예요. | 자, 그러니까 이 다음 말이 나오는 거예요. “만겁 동안 닦은 뒤에 10신의 마음에 가득 참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분명하다.” "만겁 뒤에 돈오가 오는 게 아니라 10신 초에 돈오가 바로 온다니까!" 이 얘기예요. 이해되시겠죠? 여기서 만겁이라는 건, 1급 되는 데까지 만겁 걸린다는 불교 이론을 전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 부처, 원만한 부처를 증득하는 데, "만겁 걸린 뒤에 얻는 게 아니라 바로 얻을 수 있다니까? 화엄경에 근거해서 볼 때도." 근데 그 화엄경은 통현 장자의 화엄경론을 말하는 거고요. “다만, 초심(初心)의 범부(凡夫)가 인연을 만나 바야흐로 자심의 '근본보광명지(根本普光明智)'를 깨달음이요,···” | ||
(39:29) | (39:29) | ||
그러니까 지금 이 10신 초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진짜 초심자가, 이제 막 불교에 귀의한,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한 중생 범부가 인연을 만나 참선도 배우고 이렇게 명상하는 법도 배우고 지혜 공부도 배우다 보니 바야흐로 내 마음에 근본 뿌리가 되는, 근본이 되는 보광명지, 두루 광명하게 비추는 그 참나 자리를 깨달음이요, | 그러니까 지금 이 10신 초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진짜 초심자가, 이제 막 불교에 귀의한,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한 중생 범부가 인연을 만나 참선도 배우고 이렇게 명상하는 법도 배우고 지혜 공부도 배우다 보니 바야흐로 내 마음에 근본 뿌리가 되는, 근본이 되는 보광명지, 두루 광명하게 비추는 그 참나 자리를 깨달음이요, “점수의 공(功)이 지극해진 연후에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니까 점수의 공이 지극해지려면요. 해오 뒤에... 자,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 이론은요, 해오 뒤에 점수(漸修) 해서 증오를 얻고, 증오 뒤에 또 점수 해 가는 이론입니다. | ||
(40:14) | (40:14) | ||
그러니까 돈오점수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해오를 돈오로 보면 이 돈오 이후 점수 해서 증오를 얻는 거고, 증오를 돈오로 보면 1주 보살의 돈오 이후 점수를 해서 1지부터 또 10지를 닦아가는 거구요. 그러니까 지금, 지금 얘기하는 점수는 여기겠죠? "해오 이후 점수가 꽉차서 만겁 걸려서 얻는 증오가 아니고 내가 말하는 것은, 지금 경전에서도 말하는 그, 처음의 돈오라는 것은 해오를 말한다." | 그러니까 돈오점수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해오를 돈오로 보면 이 돈오 이후 점수 해서 증오를 얻는 거고, 증오를 돈오로 보면 1주 보살의 돈오 이후 점수를 해서 1지부터 또 10지를 닦아가는 거구요. 그러니까 지금, 지금 얘기하는 점수는 여기겠죠? "해오 이후 점수가 꽉차서 만겁 걸려서 얻는 증오가 아니고 내가 말하는 것은, 지금 경전에서도 말하는 그, 처음의 돈오라는 것은 해오를 말한다." “점수의 공이 지극해진 연후···” 진짜 점수의 공이 지극해지려면은 이제 12지 불지까지 가야겠죠. 근데 그건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겁 뒤에 얻는 그 1주의 증오처가 아니다." 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누구나 바로 해오할 수 있다." | ||
(40:58) | (40:58) | ||
“그러므로 원리(理)와 지혜(智)가 비록 나타나나, 많은 생의 습기(濕氣)가···” 자, 그래서. 그러니까 처음 범부가, 여러분 막 명상 배우고 경전 좀 읽다가 딱 돈오를, 해오를 한 거니까 원리와 지혜는 나타나요. 아공 · 법공의 원리와, 아공 · 법공의 원리를 깨치는 그 지혜. 원리는 그, 내 마음에서 깨치는 건 지혜고, 지혜의 내용물이 원리죠. 그러니까 원리를 지혜로 깨닫는 그 경지를 얻겠지만 “많은 생의 습기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습기가 많아서 생각마다 침노해서 흔들어요. 그 깨달은 걸 또 흔들어요. 지혜를 자꾸 흔들어요. 그래서, 작위가 있어서 이제 막 노력을 해야 돼요. | |||
(41:45) | (41:45) | ||
“형색(色)과 마음(心)이 다하지 못함이니, ...” 그러니까 지금 참나에 계속 안주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지혜와 내가 깨달은 이치가 자꾸 흔들려요. “그러니까 10신의 범부의 해오처(解悟處)라고 하는 것이다.” 이해는 했는데 아직 자기 것으로 못 만든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해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해되시죠? 지금 설명 다 됐죠? 자, 그럼 이거 뒤에까지 읽고 나면 "좀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라고 해도, "근데 너는 12지 부처를 깨달았다니까? 이미 넌, 너의 마음 안에는 12지 부처가 이제 들어섰다니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보조 스님이. 이 얘기가 해 주고 싶은 말은... | |||
(42:30) | (42:30) | ||
| 201번째 줄: | 201번째 줄: | ||
(46:16) | (46:16) | ||
통현 장자의 <신화엄론(新華嚴論)> 거기서 뭐라고 했길래 보조 스님이 이렇게 탄력 받아서 얘기하시는지 한번 보실래요? 이통현의 신화엄론. 이 분이 참 대단한 분이죠. 이분은 스님도 아니죠. 이통현 장자라고 하는, 이분은 거사인데 화엄경을 평생, 거의 선적인 정신으로 화엄경을 풀이해 놓으신 거예요. 대단한 분입니다. 자, 이분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실래요? 미리 살짝 맛보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제대로 읽어 드릴게요. | 통현 장자의 <신화엄론(新華嚴論)> 거기서 뭐라고 했길래 보조 스님이 이렇게 탄력 받아서 얘기하시는지 한번 보실래요? 이통현의 신화엄론. 이 분이 참 대단한 분이죠. 이분은 스님도 아니죠. 이통현 장자라고 하는, 이분은 거사인데 화엄경을 평생, 거의 선적인 정신으로 화엄경을 풀이해 놓으신 거예요. 대단한 분입니다. 자, 이분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실래요? 미리 살짝 맛보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제대로 읽어 드릴게요. “10주 초에···” 1주 보살이라는 거예요. “1주 보살에 곧장 견성하여···” 원래 1주에 견성하는 게 정식 견성입니다. 해오는 아직 내 것은 안 된 거니까, 습기 때문에. “1주에 견성하여 법신의 지혜를 일으키면 곧 정각(正覺)을 이룬다.” | ||
(47:04) | (47:04) | ||
진정한 초발심은 사실 1주예요. 그전의 믿음이라는 건 아직 약한 초발심이에요. 그런데 제대로 초발심이 1주라고 하는 것은 1주 보살, 1주의 경지, 1주의 이름이 뭐죠? 1주. 10주 중에 1주의 이름이 발심주(發心住)입니다. 그러니까 초발심에 정각한다는 게 딱 제일 원만한 설명이에요. 1주 보살 때 바로 정각한다. | 진정한 초발심은 사실 1주예요. 그전의 믿음이라는 건 아직 약한 초발심이에요. 그런데 제대로 초발심이 1주라고 하는 것은 1주 보살, 1주의 경지, 1주의 이름이 뭐죠? 1주. 10주 중에 1주의 이름이 발심주(發心住)입니다. 그러니까 초발심에 정각한다는 게 딱 제일 원만한 설명이에요. 1주 보살 때 바로 정각한다. “1주에···” 10주 초심은 1주예요. “1주 보살(=十住初心)에 여래불과지법문(如來佛果地法門)을 바르게 증득한다.” 여래의, 부처의 그 열매의 경지. 12지 경지를 말하는 거예요. 12지 경지의 법문을, 진리의 문을 바로 증득한다. “1주에 그 지위가 불과(佛果)랑 동등하다.” 1주 보살이면 이미 12지다. 자, 이 얘기를 이분도 왜 하겠어요? 선불교를 겨냥한 거죠. | ||
(47:50) | (47:50) | ||
| 211번째 줄: | 211번째 줄: | ||
(48:30) | (48:30) | ||
말도 안 되니까요. 전혀 교학... 교학이 아니라 교학의 레벨만 갖다 설명하고 있지, 교학적 설명이 하나도 안 되니까 그건 거부하는 겁니다. 왜? 교학의 1지부터 10지 체계는 6바라밀의 연성 정도거든요. 그 설명이 하나도 없고 화두 하나로 1지부터 10지부터 설명하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건 애초에 잘못된 설명입니다. 참고하실 필요가 없어요. 근데 지금 이 통현 장자는 분명히 화엄경의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선불교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이분이 훨씬 설명을 잘하고 계신 거예요. 1주. | 말도 안 되니까요. 전혀 교학... 교학이 아니라 교학의 레벨만 갖다 설명하고 있지, 교학적 설명이 하나도 안 되니까 그건 거부하는 겁니다. 왜? 교학의 1지부터 10지 체계는 6바라밀의 연성 정도거든요. 그 설명이 하나도 없고 화두 하나로 1지부터 10지부터 설명하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건 애초에 잘못된 설명입니다. 참고하실 필요가 없어요. 근데 지금 이 통현 장자는 분명히 화엄경의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선불교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이분이 훨씬 설명을 잘하고 계신 거예요. 1주. “1주에 이미 불과랑 동등하다.” 1주가 되면 일과 일이... | ||
(49:20) | (49:20) | ||
왜 그러냐? | 왜 그러냐? “일과 일이 서로 융합하며 통하고, 거듭 거듭 다함이 없으니···” 이 말이 뭔지 아세요? 어려운 말입니다. 이게요, 1지 안에 10지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1주 안에 10주가 다 들어 있고. 1지 안에 10지가 다 들어 있듯이 또 1주 안에 52단계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한 레벨 안에. 이런 얘기예요. 일과 일이 서로 통한... 그러니까 화엄경의 이론이죠. "하나 안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 즉 1주 보살 안에도 이미 사실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10지 체계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 지위마다 부처랑 다 통한다.” 사실 2지 보살도 부처고, 3지 보살도 부처고, 1주 보살도 부처란 거예요. 왜? 그 각, 그게 그 뭐죠. | ||
(50:05) | (50:05) | ||
그,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하나에 우주가 다 비치는 것처럼 각 레벨레벨마다 부처의 모습을 닮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랑 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주 보살들도 이미 부처랑 동등하다. 왜? 레벨레벨이 다 부처의 경지이기 때문에. | 그,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하나에 우주가 다 비치는 것처럼 각 레벨레벨마다 부처의 모습을 닮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랑 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주 보살들도 이미 부처랑 동등하다. 왜? 레벨레벨이 다 부처의 경지이기 때문에. “이를 깨달으면···” 이런 이치를 제대로 깨치는 게 1주 보살이에요. 1주 보살 돼서 딱 보면 "아, 내가 부처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더 닦아 가야 되지만 "난 이미 부처구나." 이런 이상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이 말을 말하는 겁니다. 그... 1지, 2지 그 각각의 일들이 서로 통해 있다는 거예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다함이 없다. 그러니까 한 레벨, 한 레벨에 우주의 모든 레벨이 들어있단 얘기예요. | ||
(50:51) | (50:51) | ||
그러니까 | 그러니까 “이걸 깨달으면 1주가 불과라는 걸 이해할 수 있고, 바야흐로 '원만한 원인(圓因)'이 된다.” 아직 과보를 맺지, 열매를 맺지 않았지만, 씨앗이지만 이미 원만하다는 거예요. 씨앗 상태이지만 이미 원만하다는 걸 알게 된다. “각각의 물방울 속에 모두 바다가 있으며···” 지금 이 얘기하는 거예요. 물방을 하나하나에 모든 바다가 이미 투영되어 있죠. “각각의 레벨(지위) 안에 모든 불과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레벨이라는 건 1지부터 10지를 대표해서 52레벨 다 얘기할 수도 있구요. 자, 여기까지만 볼게요. 나중에 다시 제가 설명 제대로 드릴게요. 다시 설명, 1주 보살 설명할 때... | ||
(51:30) | (51:3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