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14강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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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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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style="text-align:left;"| 강의일자 | 2016. 02. 20. 土. |- !style="text-align:left;"| 게시일자 | 2016. 03. 13. |- !style="text-align:left;"| 동영상 길이 | 52:11 |- !style="text-align:left;"| 강의 중 인용 도서 | 천부경 |- !style="text-align:left;"|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sEtcZHh933A |} 00:01 천부경을 좀 끝낼게요. 요거 하나 써 놓고 할게요. 一終無終一입니다. 예전에 그 呑虛스님은 요거 반대가 이제 시작이 뭐였죠? 一始無始一이죠. 그래서 탄허스님같은 경우는 요 一을 풀 때, 예ㅈ… 제가 不遠間에 탄허스님의 천부경 풀이 하나 올려드릴게요. 유튜브에. 왜냐면 저기 어디죠? 금강선원인가요? 탄허스님 고 제자분이 하시는 慧炬스님 주로 하시는. 계시는 데가. 거기 이제 놀러가니까 탄허 박물관 같이 기념관 같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구경 갔는데 제가 이제 견성콘서트 이런 거 한다는 거, 그게 몇 년 전인데, 그걸 알고 거기 그 담당하시는 분이 탄허스님 책 이렇게 두꺼운, 자료집을 주신 거죠. 그래서 제가 저도 예전에 다 봤던 건데 거기에도 있더라구요. 천부경 얘기가. 그래서 어 이게 딱, 얘기해놓으신 거나 글 써놓으신 거 다 묶어놓은 거라 고 자료가 있어서 학당에 지금 제가 수련모임 할 때 한 번 읽어드릴려고 빼놓긴 했는데 계속 지금 다른 얘기만 하면서. 최근에 또 아인슈타인이 치고 나와가지고 아인슈타인 얘기하다가 좀 넘어갔어요. 그래서 탄허스님 거 한 번 읽어드릴게요. 제가. 그 그분도 재밌는데, 그 분이 그 一을 풀 때 現存一念이라고 풀어요. 이게 원래 方漢岩 스님이 늘 주장하던, 탄허스님 스승인 방한암 스님이 늘 주장한 게 참선이란 뭐냐? 한 생각 일어났을 때 돌이켜서 현존일념, 현재 존재하는 그 한 생각을 찾아낸, 그럼 이게 이미 에고의 한 생각이 아니라는 거 아시겠죠.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을 현존일념이라고 부른. 02:11 그래서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이 하나다. 라고 보고 이 천부경을 푸시는 거예요. 그래서 현존일념, 그래서 우주는 현존일념에서 시작한다. 하나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 현존일념, 그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예, 無始一. 시작이 없는 하나이다. 그래서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현존일념으로 우주 만물은 돌아가는데 역시 그 자리는 無終一. 끝이 없는 하나이다. 요렇게 풀어도 이것도 말 되잖아요. [[파일:천부경14_image01.png]] 그러니까 천부경을 제대로 풀었느냐랑 별거로 별건으로 이 자체도 말이 자명한 말이기 때문에 제가 소개해 드립니다. 고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시는 게 좋아요. 자명한 얘기며는 이제 取해서 쓰시면 좋습니다. 다만 저는 이제 그런 얘기를 다 소개는 못 해드리는 게 저는 원 저자의 의중에 제일 부합하다고 제가 판단되는 고걸 얘기해 드리는 거를 목표로 하는 거거든요. 제 강의 시간에는. 또 다양한 해석은 다양한 해석대로 양심에 맞으면 다 자명한 거예요. 그래서 다른 해석이 다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제가 볼 때 원 저자는 이걸 의도했을 거 같다. 더 자명한 거, 고 얘기 해드릴려고 제가 이제 강의를 하는 거기 때문에 제 강의시간에 다른 뭐 입장을 다 소개는 못 해드립니다만 제가 볼 때 자명한 입장들. 그 자체의 말이 좋은 것들은 또 제가 소개를 해드릴 거예요. 그래서 탄허스님 것도 소개해드릴게요. 고 말씀이 참 자명하게 잘 해놓으셔서. 그래서 그건 그거고 이제 우리 학당의 그 관점에서 지금 얘기를 풀면 어떻게 될까요? 一終無終一은. 예. 하나가 끝나고(一終), 無도 끝나기를 하나에서 한다(無終一). 요걸 이제 鳳宇선생님이 이렇게 푸신 거예요. 저렇게 푸시는 걸 보고, 말이 참 좋은 거예요. 아 저렇게 풀 수도 있구나. 04:02 나머지 해석들은 대개 그냥 여러 사람들이 대충 비슷하게 추측을 했었는데 이렇게 푸는 방식이 제가 재미나서 이제 그 의미를 캐보다가 의미가 이제 좋아서, 아 요걸로 저는 풀어드리면 좋겠다. 라고 생각 한거죠. 그래서 그동안 스토리가 있었죠. 人中天地一. 사람 안에서 천지가 하나가 됐다. 하는 얘기가 먼저 앞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희 학당 로고 기억하시죠? 학당 로고만 기억하셔도 돼요. 예, 여기(☉ 중심점)가 여러분의 본쳅니다. 本心. 본심은 태양처럼 광명하다고 그랬죠. 그래서 학당에다 제가 학당 로고에 예전에 그 수묵화로 이걸 표현하고 싶어서 어디 전시회에서요 원을 하나 그려 달래요. 저한테. 스님이. 그래서 원을 그렸는데 뭔가 원만 그리니까 심심한 거예요. 그래서 임팩트를 좀 주고 싶어서 빨간 점을 찍었습니다. 점을 찍고 싶었는데 이왕이면 태양을 뭔가 나타내는 데 색깔이 검은색 빨간색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빨간색으로 찍어서 한 번 보내드렸더니 아무튼 보고 좋다고 하셔서 저희, 그 그림 그린 김에 저희 학당에 걸어놓고 그냥 쓰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一圓相을 자꾸 일원상을 그려달라고 하셔서 부탁 받아서 하다가 그냥 저 같으면 여기다 점 하날 더 찍고 싶어서 일어난 일인데 요게 本心本 太陽昻明 할 때, 천부경에서 말한 본심이 태양입니다. 여기는 안 변해요. 여기는 하나죠. 수리적으로 하나. 0이면서 하나죠. 텅 비었으면서 우주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텅, 0이면서 하나예요. 거기서 우주 만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本心을 알고, 본심은 불변이라고 그랬죠. 不動本. 不動, 움직이지 않고. 用은요, 본심의 작용은요. 작용은 예, 만변한다. 끝없이 변한다. 그래서 用變 不動本. 작용은 변하는데 본체는, 본심은 절대 안 변한다. 요게 여러분 삶인데 여러분 마음이 이렇게 굴러간다는 거죠. 이 본심자리 여기가 아까 현존일념 자립니다. 탄허스님이 말한. 순수한 알아차림 자리예요. [[파일:천부경14_image02.png]] 06:11 지금 여러분 마음 안에 이게 없다면 여러분, 이걸 못 느끼신다면요 이게 말이 안 돼요. 여러분 마음의 근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마음의 근원을 모르겠습니다. 못 느낍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이해되세요? 여러분 지금 알고 계신 거예요. 지금 저 보고 계신 마음의 제일 밑바닥 마음이 이거예요. 근데 저를 보면서 작용이 일어나요. 생각 감정 오감이 일어나서 활발하게 여러분 마음을 수놓습니다. 근데 요거는 만변이에요. 끝없이 변하는 게 본성인데 안 변하는 게 있어요. 자, 요거 변한다고 나라는 존재까지 변해버리면요 여러분이 어제의 나를 나라고 생각할 수 없어야 돼요. 다른 존재로 느껴져야 되는데 지금, 30년 전에 내가 겪은 일도 지금 생생하시고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가 같다고 느끼시는 거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요. 그 자리가 제일 본체자리라고. 본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계속해서 같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0년 전이건 20년 전이건. 자, 여기까지 해서, 자 그래서 이 본심은 하늘에 해당되고 불변하는 건 하늘에 해당되고, 동그라미로 표시되죠. 변하는 것들은 땅에 해당돼서 네모난 거. 예, 동서남북이 있고 춘하추동이 있고 끝없이 변해가는 거. 여기는 시작도 끝도 없는 동그라미로 표현해서, 내 안에서 사람 마음 안에서 천지가 하나가 된다는 거는 본심과 이 본심에 의한 작용이 원만하게 굴러가는 그 모습을 말한다고 제가 말씀 드렸구요. 자 그렇게 해서 전체 저게 이게 하나 아닌가요? 사람 안에서 천지가 하나가 된다. 사람 마음 안에서 천지가 하나가 돼서 돌아가고 있다. 자 여기까지 설명 드렸고 그런데 이제 보십시오. 17번, 하늘 땅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묘하게 불어난 하나는, 그 하나는, 하는데 여기다 일곱이라고 써놨죠. 자, 이것도 설명 드렸는데 기억나세요? [[파일:천부경14_image03.png]] 08:08 자, 이 천지인을 나눌 수 없는 저 근원. 본심자리가 부풀어져서, 예, 현상계에서 물질이 될라면 숫자가 일곱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이게 안 나오네요. 자, 7이란 숫자가 필요하다는 거 아시겠죠. 자 현상계 안에 물체가 되려면 앞이 있어야 되고 뒤가 있어야 되구요, 위 아래, 좌 우 해서 6면체여야 돼요. 그리고 그 중심점. 요 하나가 부풀어져서 전후좌우상하를 갖게 되면 7이란 숫자가 되죠. 그래서 천부경에서 7은 1이 묘하게 불어난 것이다. 요 말이 나왔었죠. 그래서 여러분의 공부라는 것도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이 본심, 이 순수한 본심을 현상, 여기서 짐 여기서는 지금 이 점을 평면적으로 이렇게 밖으로 작용을 한 점에서 태양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듯이 그 작용의 범위 안에서 힘을 써라. 요렇게 말 할 수 있지만 힘을 쓰는 구체적 모습은 현상계에서 일곱 수를 가지고 전후좌우상하 좌우를 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주변과 함께 반응 하면서 중심을 잡고, 자 여기서 중심을 잡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중용에서 말하는 中和의 삶을 사는 게 불변의 본심과 변화하는 작용을 잘 굴리는, 그래서 불변의 본심을 잘 잡는 거를 中심 잡았다 그러고, 이 중심 자리에서 주변과 잘 조화를 이루는, 양심으로 조화를 이루는 거를 조和 그럽니다. 그리고 이게 한 번에 안 그치구요, 中和가 한 번에 안 그치고 庸이라 그래서 용은 항상용자예요. 항상 할 때, 요건 항상성을 말합니다. 요 중화는요 둘 다 중 뭐죠 이 중심을 잘 잡으란 얘기예요. 10:03 보세요. 가운데 중심은 당연히 잘 잡아야겠지만 그 때 그 때 처한 상황에서 균형을 잘 잡아줘야만 전후좌우상하에서 오는 이 자극에 대응해서 잘 균형을 잡아주는 것도 다 중심 잡는 거예요. 결국. 그래서 형이상학적 중심이라는 건 보세요. 저의 형이상학적 중심은 여러분한테 안 보입니다. 근데 형이하학적 중심은 보여요, 제가 중심 잡고 있는지 아닌지. 일단 육체상에서도 중심 잡고 있어야 되죠. 여러분 몸도 중심을 잡고 있어요. 예. 몸이 뭐죠? 따뜻하면 땀구멍 열고 차면 땀구멍 닫고 하면서 계속 이 그 중심을, 균형을 잡고 있어요. 지금 이 몸 하나도 균형을 잡기 위해서 계속 움직이면서 최적의 위치를 찾아내요. 요걸 제가 만약에, 저는 재주가 없어서 못 돌립니다만, 돌리는 사람도 한 군데만 가지고 하는 거 아니죠. 기울어지는 거 따라서 계속 옮겨 다닙, 형이하학적 중심은요 그 때 그 때 최선을 계속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변해요. 형이하학적 중심은 변해요. 그래서 여기는 변한다고 하는 거예요. 변해야 돼요. 안 변하고 있으면 중심을 잃어버려요. 금방. 좀 전엔 여기가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여기 서줘야 돼요. 시간이 또 변하고 그 과정에서 또 이 우주가 변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끝없이 변화하는 중심을 和라 그러고 그 때 그 때 중심 잘 잡는 걸 調和 그래요. 이건(中) 불변의 중심이에요. 요거 이해되시죠. 이 儒敎 이런 걸 모르시면서요 유교 中庸은 대충 적당주의고 우리 불교 中道가 진짜 중도다. 그러는데 천만의 말씀이고 초기불교에서 말한 중도는 유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중도가 아니고 유교의 중도에 그래도 맞는 게 대승의 6바라밀행이 그래도 대승, 대승의 중도가 유교의 중도에 맞아요. 소승 중도보다 훨씬 깊은 중도란 말이에요. 변치않는 중심을 잡고 거기서 그 본체에서 작용을 일으켜서 항상 매순간 양심의 균형을 이루자는 거예요. 12:04 그런데 그게 항상 돼야 돼요. 한 순간만 그러면 안 돼요. 계속 자이로스코프처럼. 발로 차도 중심을 잡고 늘 균형을 안 놓치죠. 그런 존재가 聖人이에요. 이 정도 인격을 굴리면 성인 그래요. 불교에서 말하는 7지보살 이상은 요 정도 굴려요. 그 전에는 자빠지기도 하고, 다만 자빠졌다 금방 일어나면 이제 더 고단자고 예, 중심을 제대로 못 잡으면 더 저단자고. 이해되시죠. 이렇게. 저급자가 되겠죠. 저급자. 저단자들도 중심을 잘 못 잡고 좀 중단자가 되면 이제 얼추 잡고. 그래도 자꾸 자빠지고, 자빠지는 게 줄다 줄다가 어느 날부터 안 자빠지기 시작하면 여러분 성인 그럽니다. 요게 7지보살 이상이에요. 왜 화엄경에서, 7지보살 이상이라야 번뇌에서 벗어난다. 라고 했을까요. 수리적으로 1에서 7이 가야, 7은 돼야 자립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도 태어나서 한 일곱 살은 돼야 에고가 이제 주체적으로 독립을 합니다. 그 때부터 시끄러워지기 시작하고. 에고가 이제 중심을 잡으니까 자기가 이제 그 저 뭐죠 주인공이라는 걸 세상에 알리는. 내 삶의 주체는 나다. 하는 걸 알리면 이제 부모님하고 충돌이 나는 거죠. 이해되시죠. 예, 내가 있어야만 사는 존재였는데 갑자기,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하고 나온단 말이에요. 고게요 우주의 수리 원리예요. 7이란 숫자가 그런 의미를 갖고.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7지보살, 7단이 되면 그 때부터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보살이 돼요. 그래서 이런 원리도 아시면 하나, 여기서 지금 하나라는 게, 근데 여기서 하나, 같은 하나가 등장하는데. 같은 하나가 아니다. 하는 걸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파일:천부경14_image04.png]] 13:52 하나가 나오고 無가 나오고 다시 하나가 나왔는데 보세요. 天地人이 조화를 이루는 묘하게 불어난 하나. 천지가 함께 돌아가는 건 이거죠. 이 하나죠. 그래서 일곱이라고 제가 한 거예요. [[파일:천부경14_image05.png]] 14:04 이 일곱은. 자 보세요. 천부경 앞의 논리에 따라 일부터 시작해서 우주가 진행되다 보면 지금 우리 존재가 현재 존재가 이 일곱수잖아요. 일곱으로 설명되잖아요. 전후좌우상하. 이 물질을 가지고 내면에 있는 정신으로, 이 정신으로, 여길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마음 안에서도 본체와 작용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지금 이 그림 가지고 말하면 육체를 정신으로 운전한다는 그 그림으로도 쓸 수 있죠. 지금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계시잖아요. 7이라는 숫자가 이미 이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위아래 좌우 앞뒤. 자 이걸 어떻게 경영할 거냐의 문제가 돼요. 이게 여러분의 실존입니다. 지금 이렇게만(하나) 존재하시지 않는다구요. 여기서(하나) 시작했겠지만 근원은, 나는 지금 현재 이 상황에 처해있다는 거예요. 이 실존을 무시하고는 지금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여기서 지금 이 실존을 무시하고 다시 돌아가자 하는 게 열반주의고 소승 철학들입니다. 천부경은 소승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나와서 지금 굴러가는 이 모습 자체를 지금 하느님의 신성의 작용으로 중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작용은 변하지만 본체는 변하지 않으면서 계속 굴러간다는 거죠. 끝없이 우주에서. 진화해가면서. 그래서 이 그 논리에 충실하게 해석해 보면 천지인이 조화를 이루는 묘하게 불어난 하나는 결국에 이 하나를 보시면 본질은 결국 여기(하나)서 나왔잖아요. 여기 이 자리죠(7의 중심) 이 자리가 결국은 근원이고 결국 이 일곱의 근원은 이 하나에서 나온 거고. 그 하나의 근원은요 텅 빔이죠. 이해되세요? 1이란 수는, 아, 일곱이라는 수는 결국에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에서 나온 거죠. 예. 하나에서 나온 거고. 하나는 어디에서 나왔나요? 0에서요. 텅 빈 자리가 작용을 하면 1이 되고 1이 현상계에서 작용을 하면 7로 모습을 나타내는 거죠. 그러니까 자, 일곱은 결국 본질상의 텅 빔일 뿐이요 텅 빔은 다시 묘하게 불어난 하나로 자신을 표현해낸다. 현상계에서. 텅 빔은 텅 빔으로 있지 않아요. [[파일:천부경14_image06.png]] 16:07 一始無 했듯이 하나는 반드시 無에서 시작한다. 無는 반드시, 반대로 말하면 無는 반드시 하나로 자신의 모습을 나투면서 현상계를 끝없이 창조해내요. 그래서 無는 존재의 하느님. 보세요. 無는 존재의 하느님. 하나(앞의 一)는 창조의 하느님. 그리고 이 하나(뒤의 一)는요 지금 이 하나는 7로 보시라는. 평면적으로 말 하면 5구요, 더 발전하면 9가 될 수 있는. 자, 평면적으로 말 하면요 가운데 중심점이 있고 동서남북만 있으면 이 경영자예요. 황극의 경영자의 모습이 있어요. 그리고 그 경영자가 입체로 표현되면 7이 되고 7이 더 정밀해지면 9가 되죠. 그래서 결국 지금 7로 대표했지만 7은 입체물로서 말씀드린 거고 5와 9의 원리는 다 여기 안에 들어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여기는 경영의 하느님, 그래서 제가 이거를 창조의 하느님은 太極이라고 불렀고 존재의 하느님은 無極이라고 불렀고 경영의 하나님은 皇極이라고 불렀습니다. 복습이에요. 예전에 다 했던 거. 저런것도 있구나. 하고 들으시면 안 돼요. 지금. 지금 마지막 시간인데. 천부경. 제가 또 서비스를 안 하고 못 넘어가요. 혹시 이제 이렇게 나갈 때 지금 눈이 공허한 눈이 계실까봐 설명을 최대한 해드린 거예요. 근데 요즘은 제 강의를 많이 듣고 오셔서 대부분 뭐 다 아시더라구요. 자 이거 이 관계 설명 재밌지 않나요? 太極도 끝난다. 어디로 끝나, 어디로 돌아가냐. 無極도 돌아간다. 어디로 돌아가냐. 皇極으로. [[파일:천부경14_image07.png]] 17:45 지금 太極 無極이 다 어디로 돌아왔다구요? 지금 이 자리로. 여러분의 모습이 無極 太極의 결론이래요. 무극 태극으로 우리가 가야 되는 게 아니라 열반으로 들어가야 되는 게 아니라 무극 태극의 결론이 지금 이 모습이라는 겁니다. 변화하는 생각 감정 오감을 굴리면서 변치 않는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이 결론이라는 거예요. 멋있지 않나요? 이렇게 풀면. 제가 이렇게 풀어드리는 겁니다. 이 가르침이 너무 좋아서. 이게 대승의 핵심이 아닌가 싶어서요. 따라서 만물의 근본인 하나와 텅 빔도 모두 이 묘하게 불어난 하나, 그럼 이걸로 어떻게 하나를 7로 푸느냐? 분명히 앞부분에 있었잖아요. 七一妙衍. 기억 나시죠? 7은 1이 묘하게 불어난 것이다. 그럼 불어난 1이라고 보시면 돼요. 불어난 1. 묘하게 불어난 하나예요. 자, 하나도 없음도 결국 묘하게 불어난 하나, 지금 우리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 이게 옛날 선문답이 있어요. 누가 趙州스님한테, 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니 요게 만법이죠(7 그림). 만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고 질문했, 萬法歸一하니 一歸何處?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니까 뭐라고 답했게요? 조주스님이. 내가 옛날 청주에서 장삼을 하나, 옷을 하나 샀는데 무게가 뭐 몇 근이더라. 요 얘기 하고 말았다구요. 여기서 여러분 또 금방 포기하시고, 역시 선문답은 나랑 맞지 않아. 근처에도 안 가는 게 맞을 거 같다. 이러지 마시고 그 이게 별게 아니라, 텅 빔이 어디로 돌아가겠어요. 옛날, 시간성이 생겨요. 그 말에서 시간이 창조돼요. 옛날. 지금이 아닌 옛날. 청주에서. 여기가 아닌 청주에서. 공간이 창조돼요. 장삼이라는 물건을 내가 샀는데 무게가 몇 근이더라. 이제 수량이 나타나요. 하나가 어디로 돌아간다구요? 시간을 창조하고 공간을 창조하고 나와 남을 창조하고 물건을 창조하고 이 또 이 물건의 수량을 창조하는데 작용하고 있더라. 20:09 그럼 사실 그 말도 복잡한 말이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럼 지금 제가 울고 웃고 생각하는 이, 이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죠. 지금 여러분의 삶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하나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시겠다. 하면 안 돼요. 그 하나가 돌아간 게 지금 여러분의 모습인데. 이해되세요? 같은 원립니다. 천부경이.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힘드시고 포기하고 싶고 生이 너무 지루해도 힘들구요 너무 괴로워도 힘들고 아무튼 뭘 해도 힘들어요. 많이 먹어도 힘들고 안 먹어도 힘들고 딱 맞는 순간은 찰나고. 딱 행복할 땐 찰나구요 금방 또 지나가선 고 지나간 걸 그리워하면서 또 행복을 놓치고 계속 우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이 순간이 매 순간 순간이 참나는 최선을 다 해서 드러내고 있는 우주의 그 작용이라는 거. 하느님의 작용이란 걸 알면요 의미가 또 새롭게 와닿을 거고 여기서 다시 여러분이 매순간 부활해야 돼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요 매순간 이 부활의 기쁨을 못 느끼면요 여러분의 신앙은 가짭니다. 지금 행복하세요? 부활의 기쁨이 지금 느껴지세요? 요게 안 느껴지면요 그거는 그런 그 신앙은요 진짜 聖人들이 가르쳤던 그 가르침은 아니에요. 그래서 보세요. 인간 에고의 두 모습. 신앙의 모습으로 가면요 에고를 위안해주고 사실은 그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도 사회 안에서. 에고를 만족시켜주는 상품이 돼버려요. 이해되세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여러분으로 하여금 내면의 신성을 찾게 도와주고 신성대로 사는, 매 순간이 신성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어떤 그 영감과 그 행복감. 그 희열로 돌아가게 해 줘야 되는데 그걸 못 해주는 종교는요 거기서 여러분이 얻는 신앙의 기쁨은요 가짜예요. 예, 진통제 정도라구요. 근본 치료제가 아니에요. 일시적인 위안책이에요. 22:04 그래서 그거를 가지고 여러분 사실은 이 영업을 합니다. 절에 가며는, 절과 교회 어딜 갈 거냐. 뭔가 좀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을 보고 행복을 얻고 싶으면 교회로 가세요. 나보다 더, 보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을 보고 싶으면 절로 가세요. 왜냐, 불상에는 여러분 늘 웃고 계신, 살도 적당히 포동포동하시면서 환하게 웃고 계시고 옷도 그냥 너무 여유로운, 가운 하나 걸치시고 쉬고 계신 모습이 있고. 거기 가면 몇 천 년째 지금 못박혀계신 분이 있어요. 저런 분도 계신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 하면서 위안을 얻던가. 에고가 위안 얻는 방식입니다. 이게. 나보, 나도 같이 행복한 사람과 나를 동일시 해보거나.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보면서, 내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 하고 행복감을 얻으시는. 자 이 두 가지 다 에고 놀음이에요. 근본적으로 그런데. 일반인한텐 이것도 필요해요. 이걸 제가 거부하는 게 아니에요. 살라면 당장 이런 것도 우린 필요해요. 우리 에고는. 그런데 본질적인 치료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본질적인 치료는 여러분 안에서 결국 신성이 작동할 때. 양심이 작동하고 우리가 양심에 호응해 줄 때 우리가 이 무한한 우주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 지금 이 순간 우주의 근원적 존재가 창조를 해나가고 있어요. 그 창조를, 창조의 모습이 지금 이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걸 아는 게 되게 중요한 게요. 창조가 빅뱅 때 한 번 일어나고 끝난 줄 아세요. 지금 창조가, 하느님이 또 창조할까? 하느님은 매순간 창조하고 있는, 매 순간 생각 감정 오감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건 창조라고 생각을 안 하고, 창조라는 건 결국 시공과 생각 감정 오감을 나투는 건데. 여러분 주무셨다 일어날 때 또 창조가 일어난 거고. 그 때만 일어난 게 아닌데요. 그러면서도 매 순간 여러분이 마음에서 근원을 들어가 보시면 그 때 그런 모습이 잘 보이는 것뿐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근원에서 생각 감정 없는 데서 생각 감정이 계속 창조되고 있어요. 24:06 매순간 창조되고 있는데 매순간 그 부활의 기쁨을 못 느끼실 수가 있나요. 지금 하느님이 이렇게 창조를 하고 계신데. 그 창조에 같이 참여하고 있는데. 거듭나고 있는데요. 매순간 여러분도 같이 거듭나고 있는데. 자 요게 진행되고 있는데 여러분이 못 느끼신, 불감증이에요. 불감증. 이걸 회복하자고 여기 모인 겁니다. 원래 일어나고 있는 걸 우리가 못 느끼니까 느껴보자고 모이신 거지 없는 걸 만들자고 모인 게 아니에요. 그걸 느끼시면요 매 순간 극락이에요. 불교식으로 말 하면 매순간 극락이에요. 매순간 지금 부처님을 만나고 있는데 염불을 따로 할 필요가 있나요? 실제 여러분 매순간 부처님이 작용하고 있어요. 안에서. 그 부처님을 의식하고 있어요. 念佛이라는 게 결국 부처를 念하는 겁니다. 기억하자예요. 부처를 기억하자. 매순간 내가 부처님의 작업에 같이 참가하고 있는데 그게 염불이 아닐 수가 있나요. 따로 시간 내서 하는 염불은 그것 또한 에고의 불안감을 극복해 볼려는, 에고가 부처랑 단절돼 있다는 그 느낌을 극복해보려는 시도지 실제 도인은요 매순간 극락이에요. 따로 극락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지금 내 내면에 극락이 있고 부처가 있고 신이 있어요. 매순간 경배고 매순간 부활이고 매순간 지금 극락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 자리를 自性淨土 그러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요 자리를 자성정토라 그래요. 정토는 극락이죠. 자성이 극락이에요. 여러분이. [[파일:천부경14_image08.png]] 25:48 여기가 또 뭡니까? 여기가 부처자리예요. 염불은 뭡니까. 이 자리를 기억하세요. 여러분 안의 신성을 기억하세요. 신성과 함께 하세요. 그러면 거기가 극락이고 거기가 이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거긴 천국, 아버지 나라예요. 자, 막 갖다 붙여도 말이 되죠. 왜 그럴까요? 맞으니까. 원래 그러니까요. 원래 그래요. 아니 이 지구 조그만데서 언어 다르다고 다 찢어놓고 지금 맞으면 신기하다고 하는 게 더 웃기죠. 우주 전체에서 볼 때 정말 어디 그 소소한 그 지역싸움밖에 안 되는. 언어 다르다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게 우주의 그 근원적인 실상을 먼지도 안 되는 그 지구에 모인 그 사람들끼리 서로 말 바꿔서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고 있다는 게 웃기지 않습니까.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의 근원자리를. 자,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이걸 예전 어른들이 알아내고 이렇게 써 놨다는 게 재밌지 않습니까. 26:51 결국에 아홉으로 대표되는. 결국 이 7은요 갈 데 까지 가면 9가 돼요. 변화의 극치는 9입니다. 자, 이걸 뭐로 설명했죠? 제가. 고 안 가져 왔네요(前後左右上下 쓰인 6면체). 요거 보시면요 앞뒤 위아래 좌우 있죠. 꼭지점은 몇 개 있죠? 여덟 개 있죠. 더 정밀하게 따지면 8방이 나와요. 위 아래 지금 네 점씩 있어서 8방이죠. 꼭지점이. 8방의 중심이 되죠. 즉 그러면 중심점까지 하면 9가 되죠. 더 정밀하게 말하면 9가 돼요. 그래서 자, 10은 완벽한 완성이 됩니다. 10은 완성이 돼버리기 때문에 10은 현상계에서 안 씁니다. 9가 끝이에요. 그래서 동양의 모든 고전에서 列子, 뭐 黃帝內經 다 뒤지시면 9가 수의 끝이라고 나옵니다. 수의 끝은 9다. 분명히 10이 있는데도 9라고 하는 건 현상계에서는 완벽한 완성이 없기 때문에. 왜냐, 현상계는 변해야 되니까. 보세요, 여기에 안 맞잖아요. 현상계 안에 10이 있으면 萬變이라는 말이 안 되죠. 언젠가 멈춘단 얘기죠. 그게 아니에요. 변해야 되기 때문에 9까지만 있어요. 현상계는. 20은 형이상학적인 숫잔거죠. 그 얘긴 다 드렸구요. 결국 아홉으로 대표되는 현상계의 모든 변화는 본래 하나이며, 하나는 본래 텅 빔이다. 그러니 열, 자, 10은 어떤 의미를 가져요? 현상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 절대계에 있는 현상계의 완벽한 이상적인 모습이에요. 현상계가 10이 돼서 끝나야 한다는 충동을 우린 다 느껴요. 그런데 실제로 현상계에서 10은 없어요. 10을 향해 끝없이 다가갈 수만 있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현상계에서 10은 작용을 해요? 안 해요? 어떤 의미로 작용을 해요. 목적이 돼주는 거예요. 목적이 돼주는 작용을 해요. 이 절대계, 이 현상계가. 그래서 보세요. 서양 철학자들이 이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 신의 영역을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 우주에 형상을 주는 形相因, 형상의 씨앗. 형상을 주는 자리고. 우주의 질료가 돼 주는, 우주에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質料因, 질료의 근원이고. 예, 作用因, 우주를 굴러가게 하는 시작이면서, 하나 더 쳐요. 目的因, 우주에 목적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요 네 가지가 이 신이 하는 작용입니다. 29:17 신이 하는 네 가지 모습이에요. 신의 속성이에요. 자, 그러면 똑같죠. 이건 똑같에요. 이 서양 철학자의 이런 卓見을 함 보세요. 우주가 목적을 제시해 주는데 그 목적은 완벽한 모습이겠죠. 그게 10이에요. 그런데 현상계에서는요. 그 목적을 향해 끝없이 갈 뿐이죠. 변해야 되는 게 현상계니까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게 현상계라. 음양의 모순으로 현상계가 굴러가죠. 陽이 커지면 陽 세상이 와야 되는데 다시 陰이 커지게 돼 있어요. 모순이죠. 한 친구가 커지면 반대쪽이 다시 커져서 그걸 제압하게 만들어 놨다구요. 현상계. 그래야 영원히 굴러가니까. 영원히 굴러가려면 완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 그러면 이 목적이라던가 우주의 근원적인 형상은 어디 있겠습니까. 신의 세계, 이 다 신의 모습이에요. 거기서 에너지를 대 주고 거기에서 이제 작용, 우주 작용을 일으키고. 다만 이제 신의 모습인데 이 질료인의 모습에 대해서는, 신은 질료가 없어야 된다는 입장을 가지면 이제 主理派 철학자들, 동양. 근데 신이 에너지다. 라고 보는 사람들 主氣派들. 주기파들은 이 질료인도 신 안에 넣는 거고 주리파들은 질료를 신에서 자꾸 분리시키려고 그래요. 질료는 뭔가 때 묻은 것처럼 볼려고 하고. 재밌는 건 아리스토텔레스도 요 네 가지가 우주의 근원이라고 제시하면서 神에서 질료를 뺍니다. 그래서 여러분 외우기 쉽게 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리파예요. 주리파. 이해되세요? 그래서 이 형상이 목적도 되고 우주를 굴리는데 질료적인 거는 좀 뭔가 더 오염된 걸로 생각하는. 그런 어떤 입장에 서 있는데. 이 우리가 볼 때는 저 네 개는 사실 하납니다. 신성 자체가 사실 에너지기 때문에 신성이 에너지란 입장에서는 저 질료적인 것까지도 다 신 안에서 찾으면 돼요. 31:07 예, 그런 입장을 우리 조선에선 主氣派라고 그래요. 신 안에서 에너지적인 요소도 우주의 근원에서 다 같이 어 하나로 파악하는 거. 자, 이제 이런 것도 좀 어려운 거 같지만요 인류가 찾아낸 그 이거 요즘 중력파 찾아낸 거만 놀래지 마시구요. 우주의 근원이 이 네 가지로 돼 있다. 이런 거 찾아내시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이게 있어야 우주가 굴러간다는 걸 알아낸 거거든요. 그래서 지금 설명할 때도 다 도움이 되잖아요. 자 열이라는 건 결국 우주의 궁극적인 목표예요. 그 열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고 아홉으로 무한하게 변화하는 현상계 또한 하나와 텅 빔처럼 영원한 것이다. 현상계도 영원하다고 아셔야 돼요. 이게 반야심경에서 말 하는 뭡니까. 예, 고 이제(?) 空이죠. 이 空. 空(一始無始一에서 無)이 色(뒤의 一)이요 色이 空이다. 하는 겁니다. 空은 어디로 돌아가냐. 色으로. 色의 뿌리는 뭐냐. 空이다. 결국 하나다. 하는 거죠. 요게 반야심경에서 주장하는 대승 철학의 핵심입니다. 예, 이걸 지금 우리식으로 표현해 보면 이래요. 아홉 또한 하나와 텅 빔처럼 영원하다. 텅 빔과 하나는 아홉의 변화를 낳고 아홉의 변화는 텅 빔과 하나의 무한한 변화와 다양성을 매 순간 현상계에 실현한다. 서로, 서로 한 존재예요. 사실은. 보세요. 지구에 남북극이 있듯이 한 존재예요. 한 존재의 한쪽 극에는 그 이런 불변의 본질이 있고 한쪽 끝에는 만변의 현상이 있는 거예요. 작용이. 이렇게 하나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셔야 돼요. 우주를 절대계 현상계 찢어놓고 보시면 안 돼요. 남극 북극 찢어놓고 봐야 되지만 결국 하나이듯이 결국 하나예요.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저는 눈에 보이는 참나예요. 제 참나는 눈에 안 보이는 저구요. 지금 제 모습은 눈에 보이는 참나예요. 33:07 이게 하나로 보여야 돼요. 그래야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걸 아셔야 이 대승 철학이 나와요. 이 정도 수준의 철학을 못 하면요 문제가 생기는 게 열반 지상주의로 가게 돼요. 현상계는 거부하고, 참나로 우린 돌아가야 된다. 엄마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된다. 세상에 나온 게 잘못이었다. 자꾸 이런 추측을 하게 돼요. 보세요. 억측이죠. 하나 땐 좋았는데 일곱 되더니 힘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곱을 거부하고 하나로 돌아가려고 해요. 거의 엄마 뱃속으로 갈려는 사상이죠. 탄생 전으로 들어가야 된다. 나는 태어난 게 잘못이었다. 이런 사상을 어떻게 궁극적인 사상이라고 합니까. 이게 둘이 아니다. 하는 대승 철학이라야 현상계에서 온전하게 주체 노릇을 할 수 있는 철학이에요. 그러면 이제부터 현상계에서 뭘 하겠어요. 당당한 주체로서 다른 주체들과 서로 어우러져서 홍익인간, 서로 돕고 이롭게 하는 게 가능해져요. 안 그러면 이롭고 돕게 할 수가 없어요. 남을 도와주고 이롭게 할려다가도, 세상에 나온 게 잘못이었다. 이게 계속, 이게 베이스에 깔려 있으면요 남을 도와도 무의미해요. 우리가 서로 도운들 뭐 하리오. 이 무상한 세상에. 감방의 죄수들끼리 서로 도와주면 뭐 해요. 기분이 좋아요? 사형수들 끼리 둘이 도와주면 뭐합니까. 우울해요. 그냥. 세상이 無常苦無我다. 우울해요. 이해되세요? 거기에서 뭐 명상을 통해 초연해졌다 한들 다른 대안은 없는 거예요. 無常苦無我인데 감방의 괴로움을 이제 안 느끼게 됐다.지 결국 내가 있는 곳은 감방이다. 빨리 나가야 한다. 여기 들어온 게 잘못이었다. 이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고 미세한 탐진치가 있어요. 대승에서는 그것도 뿌리를 뽑아버립니다. 그런 생각마저도 본래 다 空하다. 로 가버려요. 대승경전은 그래서 다 空하다. 로 가버려요. 다 空하다. 이 말이, 다 헛것이다. 가 아니라 모든 게 청정하다는, 너의 그런 번뇌, 욕망, 성욕 다 청정하다는 거죠. 35:06 그거를 도리에 맞게만 써라 이거예요. 그거 자체를 가지고 싸우지 말고, 나는 왜 성욕이 있을까. 로 싸우지 말고, 성욕을 어떻게 관리할까. 로 연구하라는 거예요. 그 쪽에다가 투자하라는 거예요. 깨어서 연구하면서. 그래서 이런 도리를 연구하는 겁니다. 공식을 알면 관리할 수가 있으니까요. 현상계를. 근데 공식을 모르게 되면요 현상계에 대한 아주 거부감만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무조건 열반. 현상계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지 못해요. 현상계가 어떻게 창조됐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색깔이 본래 空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아내야 되는데 소승철학은 거기까지 알아내지 않고 뭐 까지만 연구해요? 無常苦無我다. 만 연구해요. 괴로운거다. 라고만 자꾸 연구해요. 그럼 답이 뭡니까? 樂 찾으려면, 행복해지려면. 현상계 떠나는 수밖에 없어요. 그 철학을 아주 뿌리 깊게 믿고 계신 분하곤 대화가 안 됩니다. 뭘 해도 괴롭다는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중생 구제하셔야 돼요.’ ‘중생 구제해도 괴롭습니다. 무상고무아인데 뭔 의미가 있겠습니까.’ 빨리 죽어야지. 이거 밖에 없어요. 빨리 죽어야지. 빨리 죽어야지란 말이 원래 그 뭐 몇 대 거짓말에 들어가듯이 그런 분들 보면 또 열반에도 안 들어갑니다. 실제로는. 실제론 열반을 거부해요. 좀 더 있다 갑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모순돼 있죠. 현상계 괴로운 일 만나면 다, 열반에 가야지~ 가면 해결된다~ 하면서 현상계를 또 못 떠나고 있어요. 사실은. 이게 참 인간의 그 이중성이죠. 대승은 그걸 껴안아 버리는 거예요. 참나의 입장에서. 그런 마음 그런 마음 다 참나하고 껴안아 버리면 다른 답이 나와요. 그래서 너무 다른 답이 나오기 때문에 제가 “소승 대승은 너무 다른 철학이다. 서로 너무 그렇게 아는 척 하지 말라.” 제가 이 얘기 드리는 게,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그 입장이다. 37:00 제가 이 얘기 하면서 꼭 소승 대승 들먹이는 게 천부경 철학이 너무나 대승철학의 핵심을 정확히 얘기해주고 있어서 그래요. 따라서. 자, 결론 내립시다. 참된 인간의 길은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여러분 지금 서 계신 곳 그 자리에 지금 이 순간 계신 그 자리에서 텅 빔과 하나와 그 표현이 되는 일곱을 조화롭게 다스려 매 순간 성장해 가는 진정한 완성, 열을 향해 나아가는 그 중에 이루어진다. 이게 인간이 가야할 길이다. 이 우주에서 인간은, 자, 어떻게 살아야 되냐. 천부경을 다 읽고 이해하셨으면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텅 빔이고 그대로 우주의 근원이면서 또한 동시에 다른 사람과 시간 공간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수작하는 모습이 그대로 진리라는 걸 받아들이셔야 돼요. 이 안에서 그럼 나는 어떻게 이 살아갈 것이냐. 그게 뭐냐면 이 6바라밀이고 동양에서 仁義禮智信입니다. 진리대로만 사시라는 거예요. 본성을 깨쳐서 本心은 태양처럼 광명하니까 태양처럼 광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양처럼 빛나는 그 지혜를 갖고, 태양처럼 뜨거운 그런 자비심으로, 태양처럼 무한한 힘을 갖고서 현상계에서 수작을 해서 매순간 더 현상계에 진리를 더 잘 드러내려고 노력하시는 거. 이게 그냥 목표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 이 얘기가 왜 중요하냐면요 이 얘기를 이제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요. 난 열반에 들고 끝낼려고 그랬는데, 현상계에서 계속 성장해 가래요. 미치겠죠. 끝없는 성장을 하래요. 끝도 없대요. 미치겠다. 나는 열반으로 가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렇게 보이지만, 반대로 뒤집어 보면 이래요. 영원히 난 성장할 거기 땜에 지금 이 순간에 오히려 만족하게 돼요. 이해되세요? 어차피 여러분 졸업을 못해요. 이 우주에서. 그럼 지금부터 즐기시는 거죠. 학교를. 남들이 빨리 졸업해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긴장이 되시겠지만 어차피 여기서 못 빠져나간대요. 아무도. 39:01 천천히 즐기세요. 이 순간에 집중할 수가 있게 돼요. 이 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삶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이에요. 대승은. 오히려 무한한, 무한한 이 그 뭐죠 윤회를 얘기하면서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만들어줘요. 열반은요. 빨리 탈출하자고 하면서 사실은 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을 못하게 만들어요. 이 삶을 다 방기하고 도망갈 생각만 해요. 결혼했는데 끝없이 그 생각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빨리 이혼해야 되는데. 빨리 이혼해야 되는데. 무조건, 이혼하면 더 행복해지는데. 뭐 이러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 가정에 충실할 수 있을까요? 못해요. 그걸 본인은 또 몰라요. 빨리 탈출하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너의 책임을 다 하라고 해도 그 말이 안 들려요. 너는 계속 굴러라. 나는 나간다. 기본 베이스가 이렇다니까요. 이래서 소승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비판하는 건. 그거는 잘못된 철학이에요. 소승은. 이 우주의 실상에 대해서 왜곡시키고 있는 철학이에요. 이렇게 우주에서 도망가겠다는 거는요. 에고밖에 없어요. 왜냐. 소승철학의 기본은 에고 입장에 서 있단 말이에요. 도망가야겠다는.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참나 상태에서 살아보셨다면 참나는 절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이 순간을 창조하고 있지. 이 모순이 와요. 소승식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이 모순이 오게 됩니다. 자기가 느껴요. 참나상태에서 살아가면 너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데 또 에고가 다시 발동해요. 그래도 떠나야지. 그래도 빨리 현상계를 떠나야지. 뭐죠. 그 에고의 소린 근원을 캐면 탐진친데 여러분이 그걸 소승의 위대한 철학인줄 아니까 자꾸 요 놈이 안에서 더, 여러분 마음 안에 깔려있는 바이러스인데 잘 살고 있어요. 오히려 되게 신성해 보이는 존재로서 여러분 안에서 기능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못 빠져나와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무리 행복한 순간 가족과 그 지금 이 순간에 다 몰입해서 행복하고 사랑을 나누고 이 정의를 구현해야 할 그런 현장에서도 매순간 뭘 느끼는지 아세요? 이것도 다 부질없는데 돌아가야 되는데. 41:06 난 떠나야 되는데. 다 이게 다 인간의 부질없는 짓인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자기가 만들어서 하고 있어요. 웃기죠. 천부경 철학에선 그걸 거부합니다. 지금 그 순간에 집중해서 거기서 인의예지를 드러내세요. 무한한 우주에 참여하세요. 같이. 無極 太極 皇極으로서 작용해주셔야 돼요. 무극 태극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어요. 황극은요. 여러분이 인의예지를 가지고 생각 감정 오감을 진리에 맞게 생각 감정 오감을 본심에 맞게 양심에 맞게 경영할 때만 황극이 돼요. 인간은 그런 존잽니다. 인간은요 욕심을 따를 수도 있는 존재예요. 우주에서 특이한 존재예요. 양심을 따르면 우주랑 동등하고 양심을 어기고 욕심을 따르면 짐승만 못한 그런 존재. 그러니까 인간은 매순간, 이 얘기를요 진지하게 들어주셔야 돼요. 여러분이 우리가 뭐 동물이면요 더 잘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살던 대로 살다 가면 되는데 우주가 프로그램 해 놓은 대로 살다 가면 되는데 인간은요 여러분 선택에 따라서 선악이 갈려버려요. 황극이 구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살면 그냥 황극 되겠지. 가 아니에요. 여러분 안에서 보세요, 황극은 작용합니다. 여러분 안에서 황극 작용이 일어나요. 자, 뭐가 일어날까요. 여러분 생각 감정 오감이 善하면 상을 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황극작용은 여러분 안에서 지금 경영자로서 이 하나는 끝없이 작동하는데 여러분이 끝없이 생각 감정 오감으로 惡을 자꾸 선택해 버리면 악의 씨앗을 심으면 악의 과보를 냉정하게 줘야 되는 게 황극이죠. 즉 황극작용은 항상 한결같이 여러분 안에서 제대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에고가 엉망으로 살면 이 현상계도 엉망이 돼버려요. 善因善果 惡因惡果기 때문에. 이해되세요? 이 妙한 얘길 아셔야 돼요. 43:00 그 여러분 안에 신성의 황극작용은 매순간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문제인 거예요. 안 속아주기 때문에. 막 살면 정말 우주 현상계가 개판이 돼요. 여러분이 막 살면 가정이 개판이 되게 돼있어요. 자 그러면 인간이 황극에 동참한다는 건 뭐죠? 이 우주가 경영하고 있는 그 모습을 에고가 배워서 같이 호응해주게 돼요. 여러분 에고가 생각으로 호응해 주는, 생각으로 이 우주, 불교로 말하면 비로자나불의 이 우주 경영법에 같이 호응해 주는. 지금 우리 천부경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그 하느님자리가 우주를 경영하는 모습에 같이 호응해 주는 그 공식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三一神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性通.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봐서 大德 大慧 大力한 위대한 지혜 위대한 자비 위대한 능력을 갖춘 그 하느님과 함께 하는 거라구요. 함께. 그게 황극을 돕는 거예요. 그래서 에고 차원에선 황극이 안 이뤄졌어요. 여러분이. 참나 차원에선 황극이 돌아가고 있는데.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에고 차원에서는 황극이 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사회가 지금 이렇게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자 여러분 이 마지막 말에서 배워야 할 거는 하나와 無는 결국 현상계에서 황극을 구현하는 걸 목표로 하기 때문에 여러분도 여기 동참하시라는 거예요. 빨리 여러분 안에 있는 텅 빔과, 존재의 하느님과, 이 하나로서의 우주의 창조적인 신성을 찾고, 그 작용으로써 생각 감정 오감을 양심으로 경영해 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중심을 잡고 이 주변 상황에 늘, 예, 생각 감정 오감을 조화롭게 경영해서 항상, 그것도 가끔씩 말고, 항상 자이로스코프처럼 우주 안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게 여러분 인격을 단련해야 됩니다. 그래야 천부경을, 의 공식을 정확히 알고 사는 게 돼요. 요 좀 와 닿으세요? 그러니까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수행을 하셔야지 이거 버리고 열반 들 생각 하시면 이미 땡입니다. 45:00 그 생각이 어서 나온 거예요 도대체. 그게 옳다고 왜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거 다 선입견이에요. 참나한테 물어보세요. 모른다. 하고 깨어 계셔보세요. 현상계를 버리고 빨리 열반으로 돌아와. 라고 거기서 명령한 적이 있던가요? 없어요. 여러분 선입견이 말 하고 있어요. 이것도 좋은데 돌아가야겠다. 열반 가면 더 좋을 거다. 이것도 이렇게 좋은데 열반 가면 얼마나 좋을까. 다 이게 탐욕입니다. 탐욕. 현상계는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도를 펴라고 얘기하는데 에고가 그 의무감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도망가고 싶은 거예요. 열반에 들어가면 이런 책임 안 져도 되지 않을까? 가정에 대해서 책임 안 져도 되지 않을까? 사회에 대해서 책임 안 져도 되지 않을까? 열반 가면 끝내주겠다. 잠깐 명상해도 이렇게 좋은데 열반은 또 얼마나 좋을까. 다 이게 貪瞋癡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저는 소승에 아주 반대합니다. 여기 제가 죽을 때까지 반대하고 죽을 거예요. 한 사람이요, 한 사람이 生을 걸고 죽을 때까지 반대하다 죽으면요 그 카르마 때문에 다음 사람들도 뭔가 잘 안, 이제 의심이 생길 수 있잖아요. 고걸 제가 할려구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믿고 죽어버리면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같이 세뇌당해요. 근데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거부하다 죽으면요.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저러겠지. 이걸 생각해보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지구 카르마를 바꿔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놓은 한 수가 지구 카르마를 바꿔서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아니 지금 여기가 중요하구나. 나는 지금 이 곳을 바로잡으라고 우주에서 파견된 하느님의 분신이구나. 이걸 아실 때 바뀌어요. 지구가. 그래야 여기 현장에서 몰입이 일어납니다. 제 몰입책의 원리가 뭡니까. 지금 이 순간 자기가 하는 일에 몰입하지 않으면 거기에서 행복도 창조도 성공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우주 공식인데 우주가 이런 공식을 내놓고 빨리 도망 나오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현장에서 우주를 더 풍요롭게 하고 자기 있는 자리에서 창조적인 결과물을 내라고 했을까요? 47:01 나와 남 모두가 이로운. 그러니까 홍익인간이란 우리 민족의 철학이 위대하다는 거구요 대승 철학이 중생을 이익중생,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대승 철학이 위대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한 마리 어린양이라도 구해야 된다는 게 위대하다는 거구요 뭐든지 대승이라야 위대하지, 그리고 신의 명령 땜에 내가 아테네인에게 봉사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난 목숨도 바치겠다는 소크라테스가 위대하다는 거구요. 공자님이 중국 땅에, 상갓집 개, 권력에 아주 권력 쫓아다니는 개라는 소리 들으면서도 중국 전역을 돌면서, 나만 등용시켜주면 백성들 잘 살게 해줄 수 있다. 라고 쫓아다닌 그 마음이 다 우주 양심의 발로입니다. 보편적인 우주의 근원적 양심에서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이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으로 양심이 꽃을 피우지만 근원이 하나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시대 양심이건 보면 그 양심의 화신들의 삶을 보면 양심이 와 닿는 거예요. 그 분들은 그렇게 사는 거 자체가 목표예요. 삶으로써, 양심이 이런 거라는 걸 삶으로 보여줬잖아요.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런 분들, 예수님 본인이 책 쓴 적도 없죠. 그냥 몸으로 보여주고 간 거예요. 그럼 그 기록이 지구에 남아서 그 사람의 인격을 써 놓은 것 같지만 에고를 써논 거 같지만 그 안에 뭐가 있으니까 우리가 보는 거예요? 에고 생각 감정 오감의 흔적들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양심이 이렇게 생겼나 보다. 하는 그걸 준단 말이에요. 영감을. 그래서 그 분들의 기록이 이제 성경이 되고 바이블이 되고 고전이 되는 겁니다. 경전이 되고. 그걸 우리가 읽어냄으로써 내 양심이 이제 자극 받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도 똑같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자꾸. 그러다 그러다 여러분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에요. 알고 살면 더 잘 살 수 있다. 저는 이겁니다. 자연히 일어나는 건데 모르고 살면요 자기가 어느 길을 가는 지도 모르고요 알고 가면 시간과 지금 그 정력을 아껴야 돼요. 여러분 우리한테 무한한 삶이 있는 게 아니에요. 대부분 100년 안팎의 삶을 살고 계신데 아껴야죠. 그 중에 정신차리고 사는 삶은 얼마 안 돼요, 시간이. 49:16 그 시간 안에 좋은 카르마를 엄청 지어놓고 가자는 거죠. 그게 인간으로서 주어진 그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 최선의 모습 아닙니까? 이 조건을 바꿀 수 없는 한. 나중에 미래가 되면 또 바뀔지도 몰라요. 이제 어떻게 또 의료가 개발돼서 인간의 수명이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냐 그거만 봐야죠. 미래 것까지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죠. 지금 이 시점에서 최선의 모습만 하면 그 우주 양심에 지금 충실하게 우리가 같이 공명해준 게 되잖아요. 그것만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주 양심은 항상 같은 것만 외칩니다. 연구해 보시면 6바라밀, 仁義禮智信만 외쳐요. 仁 사랑하라. 義 정의로워라. 禮 우주와 조화를 이뤄라. 상대방과 조화를 이뤄라. 인의예智, 항상 자명한 지혜를 택하라. 信 성실하라. 예, 또 하나 더 하면 깨어있어라. 항상 양심과 접속하라. 제가 요번에 靈的 와이파이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양심과 접속하라.를 이렇게 실감나게 이해하세요. 영적 와이파이가 안 떠계시면 여러분 지금 소통 안 됩니다. 신성과 소통이 안 돼요. 지금 빨리 이거 체크해 보세요. 몇 개 떠있는지. 이게 지금 이 정도 돼있으면 여러분 전화기가 이 정도 돼있으면 막 사색이 되고 식은땀이 나죠. 근데 靈, 깨어있음이 이 정도면 여러분 느긋하세요. 올리세요. 몰라만 때리시면 자꾸 올라갑니다. 몰라 몰라 몰라 괜찮아 몰라. 다시 딱 돼요. [[파일:천부경14_image09.png]] 50:53 참나가 50% 이상 에고를 지배하면 이 특성이 있어요. 희열이 나타나요. 기분이 좋고 초연해져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이 와요. 그럼 와이파이 제대로 뜬 거예요. 요게 안 떴다. 불안하고 조급하고 뭔가 지금 다급해져 있어요. 마음이. 힘들어요. 그러면 지금 이거 이게 안 떠서 그래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영적 와이파이를 항상 띄워놓고 이걸 띄워놔야 나머지 仁義禮智信이 돌아가죠. 그래서 합쳐서 여섯 개 덕목으로 말 하면 깨어있음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성실입니다. 요거를 잘 활용하셔서 천지가 내 안에서 항상 나도 우주의 무한한 우주의 일부로서 내 안에서 천지가 다 돌아가게. 우주가 잘 돌아가게 도와줄 수 있는 그 힘이 있다는 걸 아시고 그 신성을 계속 쓰시는 게 여러분의 목표란 걸 아셔야 돼요. 신성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고. 예, 여기까지 일단 하구요 뒤에 아직 또 있어요. 제가 이제 기본 설명은 끝냈고 추가적인 설명을 좀 더 드리고 삼일신고로 넘어가겠습니다.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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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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