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29강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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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2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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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 부제 ||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중관학(귀류논증 중관파)적 분석 |- | 강의일자 || 2023. 11. 04. 土. |- | 게시일자 || 2024. 03. 02. |- | 동영상 길이 || 49:11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W2u3K8n0TiE |} == 진리의 힘 == 0:07 그러니까 아침마다 명상, 몰라! 괜찮아! 자명! 하고. 참나 접속해서 14조 인가하고. 그렇죠. 거기에다 내가 맡기는 삶을 살겠다. 그러면 탐진치(貪瞋癡)가 제압돼요. 날마다 탐진치가 제압돼요. 왜 진리를 인가했으니까, '치'가 제압되니까 '탐진'도 제압됩니다. 진리를 알고 살면요, 탐욕과 분노가 제압돼야 돼요. 진리가 아닌 걸 알면요. 탐욕과 분노가 제압이 안 돼요. 그게 증거겠죠. 진리라야 제압이 되죠. 진리가 아닌 거는 더 부추겨요. 그런데 귀류논증 중관파는 오늘 지금 다룰 거라서 말씀드리자면 이 펜이, 이 펜이 실재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밖에. 일체유심(一切唯心)이나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안 받아들여요. 1:01 이게 이제 경량부(輕量部)쪽 의견과 통하는데요, 부파불교(部派佛敎) 중에. 밖에 실재한다고 봅니다. 유식학(唯識學)은 이게 마음의 작용이라고 보죠. 지금 티베트 저기 유학 가셔서 저기 달라이 라마 '다람살라' 쪽에서 중관학을 배우시면 “아뢰야식도 없다. 일체유심도 아니다. 만법은 실재한다.” 이런 것부터 배우십니다. 기본 전제가 달라요. 자 그럼 그 이론들이 유식학이나 사실은 공종까지 포함해서요. 지금 중관학이 공종 학문인 건 맞지만 귀류논증 중관파가 공종을 대표하지는 않죠.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공종도 사실은 일체유심으로 봐야만 이해가 되죠, 오온개공도. 따라서 공종 상종 성종 다해서 일체가 6근의 세계는 공의 작용으로 봐야만 설명이 되죠, 오온개공이. 이런 관점에서 2:00 지금 저기 귀류논증 중관파 겔룩파 티베트에 거기 남아 있는 그 논리의 입장하고는 안 맞습니다. 따라서 한쪽이 지혜면 한쪽은 어리석음이 돼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화엄종, 유식학, 모든 반야심경이 어리석음이 되는지 귀류논증 중관파만 어리석음일지? 모르죠, 저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아무리 강의를 듣고 수행을 해도 탐진치를 제압하기가 힘들고, 보살도가 힘들고 보리심이 우리 안에 꽉 차 있는 원만한 6바라밀의 마음이 터져 나오면 그냥 보리심인데 보리심 배양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억지로 일으켜야 되거든요. 지혜가 없는데 보리심을 일으키려면 억지로 일으켜야 돼요. “모든 중생이 전생에 내 엄마였다, 엄마였다.” 계속 생각하면서.. 그렇다고요. 그래서 오늘은 중관학파를 3:00 총정리 한번 해볼게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주제로 그러면 반야심경의 연장선상에서 이 오온개공을요, 유식학파 입장에서도 볼 거예요. 뒤에 있어요. 한 페이지 한 장 건너면 “오온개공의 유식학적 분석”도 있어요. 두 분석을 가지고 보면 오온개공 하나만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면 유식학과 귀류논증 중관파로 대표되는 티베트 겔룩파, 중관파 중에 가장 귀류논증 중관파가 최고다고 주장하는 겔룩파의 입장까지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줄씩 가볼게요. [*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중관학(귀류논증 중관파)적 분석 * ‘5온’은 ‘속제’이니 ‘연기’(인연에 의존)와 ‘언어’(분별 망상인 이름ㆍ개념에 의존)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사물이다(상호의존적 발생). 그리고 ‘진제’는 이러한 ‘개별적 사물의 공성’인 ‘5온의 공성’ ‘5온의 무자성’을 의미한다. ‘자성’이란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불변하는 성질을 지닌 존재’ 즉 ‘연기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 개별적 사물이 사라지면 그 개별적 사물의 공성도 사라진다.] 오온개공의 중관학, 귀류논증 중관파적 분석. 5온은 속제이니 연기와 언어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사물이다. 뒤에 이 그림을 그려놓고 설명 드릴게요. 저기 뒤에 있는데요. 속제(俗諦), 연기와 언어가 속제고요. 공성과 무자성 이게 뭐죠? 진제(眞諦). 그래서 이걸 이게 중관이라는 거예요. 중관(中觀)은요 중도관이라는 건데요. == 중도관의 의미 == 4:19 진제와 속제를 딱 꿰뚫어 본다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거예요, 중도 입장에서. 진제와 속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꿰뚫어 보는 겁니다. 이 꿰뚫어 보는 게 핵심이 뭐예요? 연기하는 일체 세계는 연기하고 있고요. 이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세계는. 즉 언어가 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즉 연기와 언어의 세계는 이 5온의 세계죠, 사실은. 우리가 경험한 5온의 세계. 색깔, 지수화풍이 모여서 색을 이루고 그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언어로. 그러니까 정신 작용도 5:00 도움이 되죠. 그래서 이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데 언어도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또 통할 부분도 있어요. 일체의 세계는 우리 마음이 만드는 거다. 근데 경전에 나오는 일체의 세계는 우리 마음이 만든다는 걸 딱 이 정도로 제한합니다. 언어를 붙인다는 차원에서만 딱 허용해요. 실제 우리 의식에서 재구성됐다, 이런 관점이 아니라. 이해되시죠. 이 세계에 대해서 언어화한다. 그리고 이 정도, 과학적으로 봤을 때도 우리 뇌에서 재구성한 거 아닌가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지금 경량부 쪽도. 그리고 저기 우리 의식에서 재구성한다 정도는 이해하지만 바깥 사물이 실재한다.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다. 이런 차원에서는 보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데 우리한테 보이는 방식은 그냥 우리 의식에서 왜곡되거나 6:00 제약될 수 있다. 지금 과학적 입장이랑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과학이랑. 이해되시죠? 지금 과학적 입장이에요. 우리 뇌에서 재구성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일체만법이 우리 의식이 만든다고 주장하지는 안잖아요. 그냥 반영한다고 보죠. 바깥 세계를 우리 의식이 반영한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언어화까지 한다. 이해되시죠? 그냥 지금 현재 과학적 입장이랑 같아요. 그런데 이 5온의 세계는 속제니까 연기하고 있고요. 거기에 우리가 언어, 분별망상인 이름을 붙입니다. 이 연기에도 의존하지만 언어에도 의존하고 있죠. 이 2개가 다 지금 상호의존성을 말해요. 결국 이 언어도 연기예요. 연기할 때 언어에 의지해서 이게 펜이 된 거죠. 언어에 의지해서 하늘이 하늘이 되고, 이걸 속제라고 하고요. 7:00 시공간 안에서 인과 작용 속에서 연기하는 세계, 언어화된 세계가 속제고요. 이 세계의 이면이요 그대로 이면입니다. 이면이 연기하다는 얘기는요. 사실은 자성이 없다는 얘기죠. 자성이라는 건 뭐예요? '불변의 존재'라고 해야 더 실감나요. 불변의 실체인데 실체는 모호하죠. 존재. 그러니까 윤회하지 않는 존재가 있느냐? 이거예요. 윤회하지 않는 존재가 있느냐? 없죠. 이해하시기 쉽잖아요. 그럼 이게 이해하기 쉽지 않아요? 불법이. 되게 쉽지 않아요? 불법이. 지금 뭐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거 하나도 요구하지 않아요. 그냥 이 펜 있죠? 펜 보이시죠? 여러분 의식에 펜이 보이고 여러분 의식에 들어온 펜에다가 펜이라고 이름 붙여가지고 여러분이 이 펜을 인식합니다. 근데 이 펜은 무상하겠죠. 연기하겠죠? 펜은 펜 아닌 것들로 인해서 이루어졌겠죠. 8:00 지수화풍이 모여서 거기에 펜이라는 이름만 붙였겠죠. 그럼 상호 연기와 언어 속에 존재하는데 사실은 이거는 영원하지 않죠? 영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성이 없죠. 자성이 없음을 경전에서 뭐라고 했냐? 공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공(空)'하다. 공성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펜은 공한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5온도 존재하지만 연기로 굴러가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5온은 공한 겁니다. 이게 반야심경 풀이에요. 어떠세요? 그때 공종을 진하게 우리가 풀이해 본거랑 좀 다르죠? 공종 안에 있는 귀류논증 중관파식으로 풀어 본 거예요. 연기공으로만 지금 풀어본 거예요. 이건 연기공 이론이에요. 여기 지금 승의공(勝義空) 이론이 없어요. 사실은 이 진제는요, 승의공의 세계여야 되거든요. 진제의 다른 이름이 '승의제'잖아요. 여기 속제의 9:00 다른 이름은 '세속제'고요. 그래서 이 절대계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승의제가 귀류논증 중관파에서는 절대계의 의미보다는 뭐예요? 보이는 세계 이면의 진실을 의미하는 데 씁니다. 좀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거예요. 시공 안의 세계와 절대계의 이야기, 시공 넘어선 세계의 이야기의 느낌이 아니라 귀류논증 중관파에서는 보이는 것과 이면. 왜냐? 지금 여기서 진짜 승의제의 세계는, 승의공의 세계는 무분별지의 세계잖아요. 그런데 무분별지 얘기가 안 나와요, 중관파 이론에서. 그거는 뭔가 신비화 시켜서 나중에 이렇게 이론 공부 다 한 20년 해서 끝나면, 나중에 네가 견도, 견성할 때나 네가 알게 될 거야. 하는 식으로 띄워버려요. 그다음에 우리 한 20년간 분석해 보자. 20년간 계속 이것만 분석하고 있는 거예요. 무분별지의 세계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잖아요. 언어를 떠난 세계기 때문에 그냥 띄워버리고 == 공의 의미 == 10:06 분석의 대상에서 말하는 속제와 진제는 지금 계속 뭐예요? 그냥 지금 이게 그대로 진제이자 속제인 거예요. 속제, 펜이 있다. 펜이라는 언어와 이 펜의 실체, 연기하는 펜의 실상, 그리고 이게 알고 보면 사실은 뭐다? 영원하지 않다. 자성이 없다. 이게 진제이자 속제인 거예요. 지금 속제이자 이쪽 면에서 보면 속제, 이쪽 면에서 보면 진제, 이게 다입니다. 그래서 5온은 그대로 공한 거예요. 이분들한테 5온은요? 공한 거예요, 그냥. 같은 얘기지. 5온의 한 면은 5온, 5온의 한 면은 무자성(無自性). 여기까지 읽고 '반야심경을 알았도다!' 하고 무릎을 치시면 지금 이게 귀류논증 중관파식의 반야심경 풀이입니다. 어떠세요? 이해하기는 쉽죠? 그렇죠, 어떤 면에서. 11:00 왜냐하면 어떤 영적 체험이 지금 전혀 전제되지 않아요. 일상의 체험만 있으면 누구나 아실 수 있어요. 그렇죠? 근데 이게 탐진치 해결에 도움이 되냐? 이거죠. 이게 만약에 진짜 궁극의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의미라면, 탐진치 해결에 도움이 될까? 이거죠. 5온은 속제이니 연기와 언어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사물이다. 이해되시죠, 이 말.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진제는 이러한 개별사물의 공성인 5온의 공성, 5온의 무자성을 의미한다. 개별 사물의 공성이라는 얘기를 한 이유가요. 공이라는 공이 원래 지금 이 승의공은 사실은 이대로 열반이거든요. 열반(涅槃)이고 진여(眞如)의 세계고요. 이게 무분별지라는 지혜의 세계예요. 이 세계가 용수보살한테도 이런 세계인데, 이 세계(승의공, 무분별지) 얘기는 빼버리고 이것만 갖고 지금 얘기하잖아요. 이것만 갖고 얘기하니까 12:00 공성이라는 거를 연기공 차원에서 밖에 이해를 안 한다고요. 연기공은 뭐라고요? 제법무아요. 그래서 오온개공은 그냥 제법무아가 돼버리고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론에서 무자성이라는 거는 제법(諸法). 개별 구체적인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얘기인 거예요, 그냥. “개별 구체적인 모든 사물에는 영원한 자성이 없다.” 끝. 어떻게 하실래요? 지금 지혜를 아셨는데.. 진리를 다 아셨어요. 그럼 이거 이것만 잘 알면 부처까지 가야죠, 원래 이게 다라면. 그래서 개별 사물의 공성인 5온의 공성, 5온의 무자성이라는 게 중요한 게요. 이 말이 왜 있냐면, 단순하게 공성 무자성이 의미가 없다고요. 보세요. 열반이 열반을 의미하는 공을 얘기한다면, 공성 무자성 자체가 열반을 의미하겠죠. 그런데 귀류논증 중관파에서는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요. 공성 13:00 무자성이라는 말은 '뭐뭐에 영원한 실상이, 자성이 없다'라는 말밖에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5온이 무자성하다'라고 할 때만 쓴다고요. 이 무자성과 공성이라는 말을. 공성과 무자성이 하나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냥 그냥 공성과 무자성이라는 건 없는 거죠. 그렇죠? 5온이 없다라고 할 때만 쓴다고요. 5온에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체개공(一切皆空). 일체가 자성이 없습니다. 이 말할 때만 쓴다는 거죠. 그냥 무자성이라는 말은 뭐예요? 의미가 없잖아요. 그냥 영원한 실체가 없습니다. 이럴 때 안 쓰고요. 개별 사물의 공성을 얘기할 때 씁니다. 따라서 자성이란 독립 고정 불변의 실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불변하는 성질을 지닌 존재, 즉 연기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요, 개별 사물이 사라지면요 개별 사물의 공성도 사라집니다. 14:01 이 말 아시겠어요? 5온이 없다면요 “5온에 자성이 없다”는 그 말도 사라지는 거죠. 다 계속 제법에 한정해서만 쓴다는 겁니다. 제법에 자성이 없다. 뭐 뭐에 자성이 없다. 이럴 때만 쓰지, 그냥 자성이 없는 어떤 실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걸 경계하는 겁니다. 공성이 하나의 실체가 될까봐, 형이상학적 실체가.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그런 느낌이에요. 예전에 도올 선생이 항상 저 대학 때도 강의 들으면 동양에서는 신이 실체가 아니다. 신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만 쓰였다. 즉 뭐뭐가 신령하다라고 할 때만 썼지, 신을 하나의 주체로 실체로 얘기하지 않았다. 안 맞는 말이죠. 물론 고전하고.. 주역에서도 다 실체로 쓰이죠. 근데 이런 주장하고 비슷해요. 지금 공을 굳이 실체로 안 보겠다는 거예요. 공은 뭐뭐에 자성이 없다. 뭐뭐가 무상하다. 15:00 정도의 의미밖에 안 갖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개별 구체적 사물이 없다면 그거의 무상함이라는 것도 없는 거잖아요. 이 정도의 의미다라고 얘기를 달라이 라마께서 강조하신 내용 제가 정리한 거예요.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사물’은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가 아니니, ‘자성’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귀류논증 중관파에서 말하는 ‘공성’의 의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객의 이원성에 입각한 ‘공성의 분석’에서도 떠나야, 즉 모든 ‘희론’(戱論, 언어놀음)을 떠나야, 주객의 이원성을 초월한 ‘무분별지’(반야지ㆍ광명심)를 통해서 모든 차별상(시공성ㆍ인과성ㆍ이원성)을 초월하여 오롯이 ‘공성의 진리’만 직관할 수 있다.]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사물은 즉 연기로 발생한다는 건요.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다는 얘기는 상호의존적이라는 얘기죠. 그런 사물은요, 독립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죠. 왜냐하면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라면요. 저것이 있어서 있으면 안 되죠. 그냥 있어야죠. 영원히 불변하는 모습으로 자기 자성 그대로 갖추고. 이거는 형이상학적인 실체인데 이걸 형이하학에서 찾으니 있겠어요? 이걸 형이하의 세계에서 찾아요. 시공 안에서 불변의 실체를 찾으니까 당연히 없죠. 독립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사물은. 즉 연기하는 사물은 절대 불변의 실체일 수 없죠. 그래서 자성이 없다는 거다. 논리적이죠. 16:03 이것이 귀류논증 중관파에서 말하는 공성의 의미다. 즉 이게 남의 말꼬리만 잡아서 날리는 거예요. 그게 자성이 있다고? 열반이라는 건 있지 않아요? 열반? 열반이라는 것도 벌써 보세요. 열반이라는 것도요. 연기 속의 존재입니다, 열반이라는 말 자체는. 이분들은 다 말에만 집중해요. 열반의 실체에 집중하지 않아요, 귀류논증 중관파는. 열반이라고? 열반이라는 건 탐진치가 없다인데 탐진치가 탐진치에 벌써 의존하고 있잖아요. 탐진치가 없어야 열반입니다. 그리고 열반이라는 언어에 의존하고 있어요. 따라서 열반도 무상하다가 됩니다. 결론이 열반도 자성이 없다. 열반도 공하다 끝이에요. 모든 걸 언어의 세계에서만 박살내요. 그리고 끝내요. 뭔가 이상하죠? 그래서 윤회도 열반도 다 자성이 없다. 열반도 공하고 윤회도 공하다. 공도 공하다. '공'하다는 그 개념도 공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자성이 없다. 이해되시죠? == 귀류논증식 발상 == 17:04 이게 지금 귀류논증파식 발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객이원성에 입각한 공성의 분석에서도 떠나야만 이러한 주객이원성에 입각한 공성의 분석에서도 떠나야만 즉 모든 희론, 언어 놀음을 떠나야 주객의 이원성을 초월한 무분별지 반야지 광명심 상태에서 모든 차별상을 초월하여 오롯이 공성의 진리만 직관할 수 있다. 오롯이 공성의 진리만 직관할 수 있다. 이게 또 중관파 귀류논증파가 주장하고 있어요, 자기들이. 결국 이런 분석도 다 떠나야 된대요. 그래야 무분별지에서 진리를 직관한대요. 그럼 이 말이 벌써 모순인 게요. 공성이라는 말을요. 무조건 어떤 개별 사물의 없음으로만 썼기 때문에, 개별 사물이 없으면 공성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무분별지에서는 개별 사물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애초에. 그럼 저기서 직관한다는 공성은 뭘까요? 설명이 안 되죠. 설명을 안 해요, 18:00 그래서. 왜? 무분별지 상태니까 설명을 안 해요. 언어를 떠나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저기. 근데 공성을 직관한다는 말은 계속해요. 근데 결국 뭐겠어요? 부처님이 말한 그거겠죠. 이 청정광명심 안에서는 5온도 없더라. 거기는 지수화풍도 없더라. 이 말이겠죠. 그게 공성직관이겠죠. 오롯이 공성만 직관했지. 자 무분별지 상태에서 5온이 없다는 생각이 들까요? 아니죠. 그냥 텅 빔만 있었죠. 즉 보세요. 무분별지에서 직관하는 공성은 5온의 없음이나 지수화풍이 없음이 아니에요. 그냥 공성 그 자체죠. 이해되시죠? 여기 개별 사물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 즉 말이 안 맞다고요. 개별 사물의 자성의 부재를 공성으로만 설명하다 보면, 그럼 무분별지에서 직관하는 공성은 뭐냐고요? 설명이 없습니다. 19:00 설명을 안 해요. 이상하죠. 설명이 없습니다. 설명을 안 해요. 이상하죠. 밑에 4번 각주 보실래요? [4) ‘자량도資糧道’와 ‘가행도加行道’를 수행하는 동안 당신은 ‘지혜’(주체)와 ‘깨달은 공함’(객체)의 이분법적 방식으로 ‘공함’을 획득한다. ‘공함을 깨닫는 명상’으로부터 일어난 ‘지혜의 상태’를 성취한(지관쌍운止觀雙運의 성취) 그때부터 당신은 ‘가행도’에 들어간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함’을 직접적으로 깨닫는다. 이 직접적인 깨달음에는 이분법적인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심지어 아주 미세한 염오조차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상의 진면목’을 밝히는 진실의 깨달음의 초입인 ‘견도見道’의 시작이다.] 달라이 라마께서 다 지금 한 얘기들을 제가 뽑아놨어요. 이게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 같아요.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읽어볼게요. 자량도와 가행도를 수행하는 동안.. 자량(資糧)이요, 자량이라는 말이 밑천이라는 뜻이에요. 밑천. 식량과 자금, 자금과 식량. 그러니까 여행을 가려면요. 자금하고 식량이 있어야 되죠. 그게 자량이에요. 보살도를 떠나려면요, 이제 먼 길 떠나려면 두둑하게 지금 준비를 해놔야 돼요. 그래서 이 자량을 쌓으라 하는 건데요. 이 자량은 결국 뭐냐면 6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쌓아져요. 얼마나 6바라밀을 많이 했느냐 예요. 완전한 순수한 바라밀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때 한 거를요 20:00 6행이라 그래요. 그냥 바라밀은 아니고 보시 베풀어보고 그러니까 6바라밀에 해당되는 덕목들을 많이 실천한 거예요. 베풀기, 인욕, 참아보기, 빡쳐도 좀 참기, 상황 분위기 봐서 좀 참기, 이런 인욕이죠. 보시, 오늘 내가 쏜다. 한번 쏴보기. 못 쏴본 사람은 절대 못 쏴요. 여러분 술집 가도 절대 쏴본 적이 없어서 못 쏩니다. 쏴본 놈이 또 쏘고 또 쏘고 하죠. 뭐라도 해본 사람, 그쪽에 이제 조금씩 자량, 그게 밑천을 쌓는 거예요. 제대로 된 바라밀은 아닌데 보시 쪽 밑천을 쌓아요. 지계, 룰 지켜보기. 내 욕심이 나도 룰 지키는 이런 삶을 자꾸 살다 보면 이 업이 쌓이겠죠. 지계 쪽에 업이 쌓여요. 그게 자량이에요. 지계자량이 쌓여요. 보시자량이 쌓여요. 인욕, 그래도 잘 참고 상황에 맞추려고. 무조건 참는 게 아니라 나는 화나는데 전체 조화를 위해서 내가 좀 참아야 할 때 21:00 참고 했더니 이것들이 쌓여서 인욕자량이 돼요. 정진자량, 게을렀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아니면 안 돼 하고 또 일어나서 뭔가 했던.. 정진자량. 명상에 자꾸 들었던 선정자량, 경전 공부하고 자꾸 진리를 탐구했던 지혜자량, 이 자량들을 쌓아가는 시기입니다, 자량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요. 가행도, 가행도가요 가행이라는 게 용맹정진을 말해요. 뭔가 더 정진하는 도예요. 자량에서 이 뒤가 견도입니다. 견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리가 가행도인데요. 가행도(加行道)가 되면요, 뭘 얻냐면 정혜쌍운(定慧雙運)을 이때 얻어요. 자량은 6가지 덕목을 성실하게 닦다가, 닦다가 명상도 하고 그러니까 명상도 하고 경전 공부도 하고 베풀기도 하고 인욕도 해보고 하고 다녔을 거 아니에요. 그게 22:00 쌓이다 쌓이다가 어느 날 선정과 지혜가 잘 돼가지고요. 명상 속에서 딱 그 직관이 일어나는 거예요. 명상 속에서 진리에 대한 직관이 일어나요. 그런데 이 정혜쌍운이 언제 극치를 얻냐? 견도(見道)에서 극치를 얻어요. 견도에서 이 정혜쌍운이 결국은 순수 직관으로 들어가는데 이때는 뭐냐 하면요. 직관도 있는데 분석이 아직 강해요. 분석이 강해요. 그래서 이때를요 이 정혜쌍운을 얻었다 하더라도요. 결국 분석이 강하다고 봅니다, 분석이. 그래서 이때 완벽한 직관, 즉 한 점 가림 없이 참나를 그대로 본다는 거예요. 정광명(淨光明)을 그대로 봐요. 이때(가행도)는 아직 즉 명상이 잘 돼가지고 아공법공에 대한 지혜가 영감으로 막 오는데 아직 분석이 강해요, 직관도 있지만. == 자량도 수행 == 23:02 그러다가 이때(견도) 오면요, 본성을 온전하게 봐요. 조금도 가리는 거 없이, 가림 없이. 이때는 아직 가림이 있다는 얘기죠. 이게 가행도, 견도입니다. 원래 그래서 이 가행도 들어가면 한 1주보살 이상이에요. 견도가 1지예요. 그러니까 우리 이 불성 안에 쉽게 말하면 불성 안에 6바라밀이 있잖아요. 뭔 차이냐면요. 정혜쌍수만 해도 엄청난 경지인데 참나 안에 6바라밀이 들어있죠. 이거를요 남김없이 다 보려면요. 6바라밀도 엄청 닦아야겠죠. 그래야 남김없이 내 안에 공성이자 자성을 다 봐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때는요 정혜쌍운만 얻으니까 아직 뭐가 뭐가 부족해요? 여기서 여기 견도까지 오는 동안 뭘 닦느냐? 그래서 6바라밀을 신나게 닦아야 돼요. 24:00 그래서 복혜쌍운(福慧雙運)을 닦습니다. 지혜와 더불어서 6바라밀를 총체적으로 닦는 연습을 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 본성을 시원하게 하나도 가림 없이 봐요. 본성과 자기 자성, 공성을 다 봐요. 그래서 아공 법공 구공을 다 봐요. 3공을 다 봐요. 그때 견도입니다. 이때 어떤 이제 그런 분석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직관으로 시원하게 보는 겁니다. 자기 본성을. 내가 이렇게 생겨 먹었구나? 하는 걸 봐요. 그래서 이전에는요 직관도 있지만, 분석이 지금 강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만 감안하고 보세요. 자량도와 가행도를 수행하는 동안 당신은 지혜와 깨달은 공함의 이분법적 방식으로 공함을 획득한다. 즉 가행도까지는요, 분석이 강하다고 보는 거예요. 즉 지혜, 지혜는 항상 주체입니다. 그리고 깨달아지는 게 뭐예요? 지혜가 알아차리는 게 공성이에요. 지혜가 공성을 보는데 25:00 주체가 객체를 볼 때 아직 주체와 객체가 나눠져 있다는 거예요. 주객이 딱 하나가 되는 게 못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세요. 이때 무분별지 상태는요, 무분별지 상태는 이렇게 제가 그린 거 기억나세요? 이렇게.. 이쪽이 주체입니다. 이쪽이 객체. 무분별 지혜가 직관해요. 뭐를요? 이런 진리를요. 공성의 진리를 그대로 직관해요. 공성의 진리를 진여라고도 합니다. 지혜가 진여를 직관하고 있는 상태, 자기가 자기를 보고 있는 상태, 이때는 이원성이 없어요. 그런데 순수하게 아직 볼 수 없을 때는 때가 묻었을 때는 주객이 찢어져 있어요. 내가 뭘 깨달았다. 내가 공성의 진리를 깨달았다 하는 주객의 이원성이 있어요. 즉 분석이 아직 작동한다는 거예요. 시원하게 딱 아는 게 아니라서 영감도 있지만 직관 부분도 있지만 분석이 아직 작동해야 돼요, 다 이해가 안 되니까. 딱 내 참나를 깨달았지만 내가 26:00 참나를, 내가 진여를, 내가 공성을 깨달았고 아직 공성에 있는 그런 자성들이 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럼 내가 진짜 보시의 본성이 나한테 있다고? 나한테 인욕의 본성이 있다고? 머리로 이해해야 되는 영역이 아직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진여와 나 사이에 지금 거리가 있는 거죠. 하나로 통할 수 있어서 가행도예요. 통하지도 않으면 자량도예요. 참나각성 자체가 없으면 자량도입니다. 참나각성이 생겨서 그래도 가행도에 들어온 거예요. 근데도 아직 진여와 나 사이에 벽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객이 찢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요 나랑 내가 깨닫는 공함. 이게 이분법적 방식으로 공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이때는 계속 활발하게 뭘 하겠어요? 연기공 식으로 분석한다니까요. 아직 분석이 남아서 계속 돌아가는 거예요. 아! 이래서 이 자성이 없으니까 공이다. 그 공에 대해서 계속 분석이 아직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아직 이해가 시원하게 안 된 거예요. 공에 대해서 이해가 시원하게 안 되니까 계속 27:00 분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함을 획득하는데 공함을 깨닫는 명상으로부터 일어난 지혜의 상태를 성취한다. 지관쌍운(止觀雙運)을 성취한다는 겁니다. 공함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일어난 지혜의 상태, 뭔가 직관은 왔어요. 그래서 지관쌍운을 얻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가행도에 들어간다. 이게 그러니까 자량도에서는 정말 나와 남이다가 가행도에서는요. 뭔가 하나로 회통돼서 직관이 와요. 그래서 가행도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함을 직접적으로 깨닫는다. 이 직접적 깨달음에는 이분법적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이 부분은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부터는 견도를 말합니다, 견도. 그러니까 가행도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공함을 직접적으로 깨닫는다. 이 직접적 깨달음에는 이분법적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심지어 아주 미세한 염오조차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상의 진면목을 밝히는 진실의 깨달음의 초입인 견도의 시작이다. 28:01 이해되세요? 이제 나 사이에 자량도 때는 벽이 두터웠고 나와 지금 지혜랑 이때는 연기공 분석을 자량도에 미치게 하는 거예요. 지금 반야자량 지혜자량 키우려고 하는 게 연기공 분석이에요. 지혜의 자량을 키우려고 연기공 분석을 계속 해가지고 이 지혜로 공성을 깨달으려고 하는데 여전히 주객이 찢어져 있고 이걸 내가 공성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인 거예요, 지금 공성이. == 공성의 이해 == 28:33 그러다가 정혜쌍수 가면 선정 속에서 지혜, 지혜는 이 직관이죠. 선정 속에서 이게 직관이 오다 보니까 주객이 딱 합일될 때가 있는 거예요. 있긴 한데 아직 그래도 아직, 분석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많은 거예요. 그러다가 분석 필요 없이 그냥 그대로 내 공성을 볼 때가 있다는 거예요, 내 자성을. 그때 견도가 시작되는 거예요. 29:00 견도로 들어가요. 이해되시죠? 말은 이해되죠. 일단 말을 이해해야 돼요. 자량도, 가행도, 견도. 이 3단계가 구분되시면 됩니다. 자량도는요 아직 참나체험 못할 때예요. 가행도는 참나체험을 했어요. 참나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지금 이제 그 이 참나에 대한 직관에 기반해서 분석을 하는 겁니다. 어! 그러면 내 참나자리에서 왜 6바라밀, 왜 보시바라밀이 안 나오지? 왜 일체가 공하다는데 왜 나는 아직 지계가 안 나오지? 일체가 공하다면서 나는 왜 인욕이 안 되지? 공한데 왜 안 참아질까요? 그래서 지금 공성과 나 사이에 계속 벽이 있는 거예요. 그러다 견도에 가면요 딱 자기 자성, 공성과 이 지혜가 하나가 돼서 무분별지 상태에서 내가 그대로 공성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내 마음에서 그대로 6바라밀이 나옵니다, 그때부터. 6바라밀이 별게 아니라 30:00 뭐예요? 내 참나의 작용일 뿐이에요. 여전히 아직 업장이 많아서 닦아야 할 게 많지만 6바라밀이 그냥 등장, 총출동하는 거를 막지 못해요. 내 본성을 정확히 봤기 때문에, 여러분이 견성을 정확히 하셨다면 여러분 본성이 6바라밀로 항상 발동하는 걸 알아야 돼요. 그렇죠? 그게 계속 내 마음에서 터져 나와야 돼요, 보리심이. 그래서 진짜 참된 절대적 보리심이 터져 나오면 견도라 그래요. 견도에 대한 다른 설명입니다. 이게 티베트 불교에서 똑같아요.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승의의 보리심”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자량도부터 닦아가는 6바라밀을 실천하는 거 있죠. 이거는요, 이게 저기 세속의 보리심입니다. “세속의 보리심.” 이해되시죠? 6바라밀을 계속 단계적으로 닦아 올라가는 건 세속의 보리심이고요. 승의의 보리심은 6바라밀의 31:00 본체를 말하거든요. 이거 바로 깨닫는 거. 그럼 보세요. 가행도 때 아니죠? 내 안의 6바라밀의 자성을 온전히 깨달을 때는 견도 때죠. 견도 때 이르러서야 자동으로 보리심이 터져 나와요. 그래서 초발심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1지 보살을. 그때 가야 진짜 보리심이 터져 나와요. 억지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이제 본성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상시.. 예전 아쿠아맨 영화에서 삼지창에서 윙윙하고 계속 에너지가 발출되던 그 장면이 이제 떠오르는데 여러분 참나에서 6바라밀이 윙윙하고 계속 나오고 있어요. 그게 발보리심이에요. 그걸 지금 모르시죠? 내 본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는데 본성이 계속 6바라밀를 내뿜고 있다는 걸 모르실 거예요. 불교도 그걸 알아요. 32:00 옛날 고승들이 있었으니까 알아요. 그래서 1지 보살. 견도위의 특징이 뭐냐? 그러면 승의의 보리심을 얻었다. 이렇게 얘기해요. 다른 말로는 지금 이렇게 본성을 조금도 미세한 염오(染汚), 때도 없이 선명하게 자기 본성을 다 봤다. 본성을 아직 다 본 게 아닌 거예요, 1주 보살은. 정혜쌍운은요 본성의 일부만 본 거예요, 선정과 지혜 측면만. 6바라밀를 총체적으로 보기에는 아직 부족하죠. 그래서 계속 분석을 더 해야 되는 거예요. 연기공 차원의 분석이 계속 아직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딱 떨어지면은 완벽하게 이제 진리와 하나 돼요. 그러니까 오롯이 그러면은 오롯이 거기 둘이 아닌 자리에서 바라보는 공성은 뭔지 설명이 안 돼 있죠. 제가 지적하는 거 아시겠죠? 연기하니까 개별 사물이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분석만 지금 실컷 강조하고 있지. 무분별지에서 지금 어떤 가림도 없이 투철하게 보는 33:00 그 공성이라는 건 뭘까요? 전혀 다른 설명이라고요. 지금 연기공과 다른 얘기잖아요. 미세한 염오조차 사라져버렸을 때 현상의 진면목을 본다는데 그 진면목으로서 보여지는 게 뭘까요? 그 공성이라는 게? 개별 사물의 공성이 아닌데요, 그때는. 개별 사물 자체가 없으니까, 이 자리에는. 이게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걸 설명하고 나면 사실은 똑같다는 겁니다. 귀류논증 중관파도요 다른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연기공을 강조했을 뿐이지 무분별지에 들어가서 공성을 논하는데 석가모니랑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석가모니가 말한 공성은 연기 공성이 아니에요. 그렇죠? 관자재보살이 말한 반야심경의 공성도 연기공성이 아니에요, 무분별지에서 나온 공성이기 때문에. 이거 이해되시죠? 좀 더 가 볼까요? [이것이 바로 모든 희론을 떠난 4대ㆍ5온ㆍ모든 이원성을 초월한 열반의 증득이다.] 이게 지금 께왓다경이죠. 보세요. == 정광명이 공성의 핵심 == 34:01 께왓다경은 늘 읽었으니까 한번 가볍게 보시고요. [5) “‘의식’(열반의식, 광명심, 반야지, 무분별지)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무분별, 공성空性),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지혜, 영지靈知). 여기서 ‘지수화풍’(4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아름답고 더러운 것(선善과 불선不善), 즉 ‘정신과 물질’(5온, 명名과 색色)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5온의 식별)가 소멸하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한다(5온ㆍ4대ㆍ이원성의 무자성ㆍ공성, 무분별지로 공성ㆍ무자성의 직관, 열반의 증득).” 께왓다경 디가 니까야] 이 의식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이 나는데 이게 그러면 무분별 상태에서의 지혜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수화풍도 어떤 이원성도 그리고 5온도 다 사라진다고 했죠. 그럼 이게 무분별 상태에서 무분별지로서 바라보는 공성이죠. 무자성의 직관이죠, 이게. 이 무자성의 직관은 그냥 없음이었겠죠. 보세요. 나와서 분석을 하니까 5온의 없음이라고 하지, 무분별지 상태에서는 그냥 무분별지만 있었던 거잖아요. 무분별지, 정광명만 있었다니까요. 그 정광명이 공성의 핵심인 거예요. 정광명 안에는 어떤 개별 사물 이원성도 없더라가 공성직관의 핵심인 거예요. 따라서 그럼 그 얘기는 뭐예요? 이 정광명이 영원한 거예요. 이 정광명이 그대로 공성, 그 자체인 거예요. 이 얘기를 하기 싫은 겁니다, 35:00 귀류논증 중관파는. 그러면 정광명은 영원한 존재가 돼 버려요. 공성이라는 진리를 인식하는 무상한 연기적인 의식연속체로만 보려고 해요, 정광명을 지금 달라이 라마는. 그럼 지금 다 안 맞아요, 말이. 무상한 정광명이, 석가모니 말씀대로라면 그 정광명만 존재하는 건데, 사실은. 어떤 이원성도 어떤 존재도 없고, 대상도 개별 구체적 사물도 없고, 그래서 공하다는 말이 나온 건데 지금 정광명 때문에 공이라는 말, 정광명이 공하다는 말을 한 건데 공은 정광명의 인식 대상으로서 공을 따로 정해놓고, 정광명은 오히려 무상하고 공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진제의 진리요, 정광명은 오히려 그 진리를 인식하는 무상한 의식일 뿐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고요. 주객을 지금 다 틀어놓고요. 이해되세요? 그러면 그 무분별지 상태에서 인식하는 그 공이라는 거 뭐냐고요? 설명도 36:00 못합니다. 개별 구체적 사물의 공, 연기공만 얘기했기 때문에. 뭔가 그럴싸한데 지금 잘... 근데 이게 재밌어요. 그러니까 정광명이, 정광명이 본체인 거예요. 정광명이란 실체를 얘기 안 하려다 보니까 이 모든 사단이 난 겁니다. 사달이 난 거예요. 정광명이 공입니다. 정광명이 영원불멸의 실체고요. 정광명이 텅 비었다는 얘기를 하려고 공이 나온 건데 지금 어만 얘기들이 자꾸 붙어서 그래요. 보세요. 방금은 지금 정광명 얘기를 했고요. 우다나 읽어볼까요? 우다나. 밑에.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지수화풍과 모든 이원성의 소멸).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알면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열반의 증득).” (전재성 역, 바히야의 경, 우다나-감흥어린 시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지수화풍이 없다는 얘기죠.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수화풍과 모든 이원성의 소멸입니다. 어둡다 밝다도 없어요, 거기에는.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알면, 이 자리를 체험하면 37:00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즉 5온의 세계죠. 5온의 세계와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탐진치에서 완벽히 벗어난다. 탐진치에서 완벽히 벗어난다. 지수화풍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만 탐진치에서 벗어난다고 얘기했죠. 거기가 열반이다. 그럼 열반과 정광명이 둘이겠어요? 하나죠. 정광명이 열반이고, 열반이 진여고, 진여가 공입니다. 이 도식을 잊지 마세요. 정광명이, 이 승의공은 그냥 무분별지의 정광명이고. 정광명이요, 열반이고 진여고. 뭐예요? 승의공이라는 건 이 공성이라는 거죠. 이 무분별지가 뭐예요? 정광명. 정광명이 진여요, 열반이요, 공성입니다. 그리고 영원불멸의 실체예요. 영원불멸한 자성을 지니고 있죠. 청정광명이라는 자성을 지닌 영원불멸의 실체입니다. 생멸이 없고 부증불감합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했듯이. 더럽힐 수도 없고 깨끗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죠? 38:00 태어나게 할 수도 없고 소멸시킬 수도 없는 그 자리입니다. 이 얘기를 안 하려고 안 하고 돌다 보니까 모순의 모순에 계속 빠지는 겁니다. 한 번 이렇게 사기를 치면요 계속 계속 사기를 쳐야 돼요. 다 안 맞거든요. 한 번 자명해지면요 다 자명해집니다. 화두 하나를 통하면 1700공안이 다 통한다는 얘기는요. 자명한 거는요, 자명한 거는 여러분 자명하게 깨달으면 자명한 세계에 갖다 대면 다 통해요. 찜찜한 거는요 갖다 댈 때마다 말을 바꿔야 돼요. 아, 오늘은 뭐가 좀 안 좋아서 어디가 안 좋고 뭐.. 사기를 치려면 그래야 돼요. 이번에 거기 있잖아요. I am 뭐 이렇게, “창조경제가 아니라 청조경제”라고 그러더라고요. 끝없는, 대단하더라고요. 중학교 때부터 기억 상실됐다고 하고 다녔대요. 누구냐고? 나 이름 뭐냐고? 이렇게 평소에 꾸준히 연습해 온 사람이 크게 됩니다. 39:00 잠 안 자고 연습한 사람이 크게 된다고 했죠, 제가. 소시오패스도 잠 안 자고 연습하는 사람이 크게 된다. 끝없이 중학교 때도 기억상실 걸렸다고 막 다 속이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찜찜한 거는 계속 모순이 드러나고요. 자명한 거는 계속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걸 잡고 나가면. 또 가보죠. [이때 ‘광명심’과 ‘공성의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시공ㆍ생멸ㆍ주객’을 초월하나, 이렇게 되면 ‘광명심’이 ‘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자성)가 되어 힌두교의 ‘아트만’과 유사해지니, 귀류논증 중관파는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 ‘광명심’은 ‘연기하는 의식의 연속체’일 뿐이라고 본다.] 이때 광명심과 공성의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죠. 어떻게 공성의 진리와 광명심이 둘일 수 있겠어요? 그렇죠? 근데 자꾸 분리시키려고 한단 말이죠. 귀류논증 중관파는 광명심을 무상하게 보려고 해요. 왜 이유도 쪼잔해요. 왜? 진리냐 아니냐에서요 보세요. 반야지(般若智)라는 거는 여실지(如實智)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실상과 똑같은 지혜예요. 즉 있는 그대로만 알면 돼요, 반야지는. 40:01 있는 그대로만 말하면 돼요. “그러냐? 안 그러냐?” 예수님이 그 성경에 나오죠. “예 할 건 예하고, 아니오 할 건 아니오 하라. 그 외에는 다 악에서 나온 소리다.” 꼼수에서 나오는 소리다 이거예요. “맞긴 한데...” 뭐 이러면 다 그게 꼼수입니다. “아니긴 한데...” 다 나머지는 탐진치에서 나오는 거예요. 자, 그냥 “정광명이 왜 무상해야 되나요?” 간단해요. “그게 영원하면 힌두교의 아트만과 구별이 안 되잖아.”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탐진치죠. 아니 진실이, “진실이냐 아니냐?” 인데 “실상 그대로냐 아니냐?”만 얘기해야죠. “하지만 그렇다면 힌두교와 우리는 같아지잖아.” 그 같아지는 게 두려워서 진실을 거부해요?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그게 그 타당한 주장입니까? 애초에. “저기 왜 왜 성령을 41:00 참나라고 안 보나요?” “성령을 참나라고 하면 우리가 불교랑 같아지잖아요.” 막 이러면 쪼잔하지 않아요, 듣기에도? 그거 같아질까 봐 두려워서 지금 그 문파 의식 때문에, 그 종파 의식 때문에 지금 진리를 외면해요? 이 말이 아니에요? 보세요. 증거들이 있습니다. 광명심과 공성의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시공 생멸 주객을 초월하나 이렇게 되면 광명심이 독립 고정 불변의 실체가 돼버려서 자성이 돼버려요. 그렇게 자성 없다고 했는데 자성이 돼버려요. 자성청정심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애초에. 자성청정심이 돼버려서 힌두교의 아트만과 유사해지니 귀류논증 중관파는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 광명심은 연기하는 의식의 연속체일 뿐이라고 본다. 이게 비판입니다. 6번 가보실래요? [6) ‘가장 미세한 의식’은 우리가 이전 생, 현생, 다음 생의 기반이 되는 의식입니다. 이 미세한 의식은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 의식은 ‘연속적인 흐름’(심상속心相續)일 수밖에 없습니다.(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화를 말하다, 62~63쪽)] 달라이 라마 '화를 말하다'에 뭐라고 하셨나요? 가장 미세한 의식은 이게 정광명이거든요. 가장 미세한 의식은, 우리가 이전 생 현생 다음생의 기반이 되는 의식입니다. 이 미세한 의식은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모든 경전에서 이 가장 미세한 의식은요 == 가장 미세한 의식 == 42:09 밀교 경전에서도 인과를 초월해 있고, 생멸을 초월해 있다고 얘기하는데 갑자기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입니다”라고 때려버렸어요. 마음이 급하신 겁니다. 맹자가 지언(知言), “나는 말을 참 잘 알아.” 그럴 때, 이런 거예요. “둘러대는 말이면 둘러대는 말인 줄 알고, 몰려서 하는 말이면 몰려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이상한 견해, 무지에 빠져 있으면 무지에 빠진 걸 알고, 욕망에 빠졌으면 욕망에 빠진 줄 알고. 난 다 꿰뚫어 봐.” 맹자가 “나는 말을 잘 알아.” 이 말할 때 이런 말 하거든요. 보시면 뭔가 이상하죠.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일어난다고요? 가장 미세한 의식이? 밀교 경전 어디에도 그렇게 안 돼 있는데.. 일시적인 현상이라고요? 의식은 연속적인 흐름, 심상속(心相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쳤죠. 그다음 또 보실래요? 그다음은요. 달라이 라마의 '불교강의'라는 책에 나옵니다. [‘가장 미세한 마음’은 지극히 청정한 상태의 마음이며, ‘선천적 광명심’이라고도 부른다. … 이것은 영혼이나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매순간마다 변하며, 무아이며, 독립된 존재가 없다.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 421쪽)] [만일 우리가 영원하고 안정되고 항구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무아’에 대한 가르침과 모순되고, 오히려 비불교도들이 주장하는 ‘자아’와 비슷하지 않는가? (달라이라마,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 424쪽)] 43:02 가장 미세한 마음은, 저자마다 번역이 달라서 그래요. 가장 미세한 마음은 지극히 청정한 상태의 마음이며 선천적 광명심이라고 부른다. 정광명 말하는 거 맞죠. 이것은 영원이나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굳이 아니라고 말을 먼저 해요. 매 순간마다 변하며 무아이며 독립된 존재가 없다. 이 또한 무자성이다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해요. 이상하죠.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 부분도 달라이 라마의 '불교강의'에 나와요. 만일 우리가 영원하고 안정되고 항구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무아에 대한 가르침과 모순되고.. 모순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무아라고 할 때는 항상 제법, 현상계 속제의 대상, 6근을 가지고 5온을 가지고 무아라고 하셨지. 청정광명심이 무아라고는 안 했어요. 그런데 무아에 대한 가르침과 모순되고.. 또 청정광명심도요, 이 무아를 에고의 44:00 초월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도 무아 맞고요. 오히려, 보세요. 이 무아에 대한 가르침과 모순되고 오히려 비불교도들이 주장하는 자아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 말은 스스로 인정한 겁니다. 청정광명심이 아트만과 유사하다라는 걸. 계속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유사하다는 거를 내부고발 같은 거죠. 그래서 “사실은 유사해! 속보! 달라이 라마 청정광명심 사실 아트만과 유사해!” 어떠세요? 여기까지 보시면. 이게 귀류논증 중관파의 현 실상입니다. 그래서 이제 뭐 거기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들한테 제가 힘 빼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그 학파에 이 한계가 있어요. 그 학파에 치우친 부분을 말씀 안 드릴 수가 없어요. 왜냐? 그 학파 살리려고. 지금 공종 성종 상종의 핵심 진리, 석가모니 부처님의 핵심 진리를 훼손할 수는 없잖아요. 45:01 석가모니 부처님의 핵심 진리는 “영원불멸한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청정광명심, 스스로 빛나는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이 의식이 열반이라는 겁니다. 열반이라서 이 의식 상태에서는 탐진치도 없고 지수화풍도 없고 오온도 없고 어떤 이원성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자리가 무분별지의 상태고, 이 무분별지에 직관되는 진리가 공성과 자성, 텅 비어 있으면서 6바라밀의 자성으로 꽉 차 있는 자리라는 거고, 이 공성과 텅 비지 않은 측면과 텅 빈 측면을 다 청정광명심의 자성으로 삼아서, 우리가 공성도 우리 자성으로 삼고 6바라밀도 자성으로 삼아서 우리가 이 견도를 해가지고, 이 자리를 깨달아가지고, 한 점 의심 없이 깨달아서 이 무분별지 상태에서 진리를 끌어내고, 보리심을 끌어내 가지고 우리가 보살도를 해야 된다는 게 지금 핵심이죠. 지금 부처님 때부터 이어져온 가르침의 핵심. 46:01 이 얘기에 뭔가 이 얘기를 방해하는 “그러면 힌두교랑 같아지잖아!”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온갖 방해 작업이 있는데요. 그러면 청정광명심이 훼손됩니다. 청정광명심이 갑자기 무상하고 일시적인 존재가 돼버리면 어떡해요?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제가 비판합니다. 꼭 집어서 이 파만 비판하는 게, 꼭 집어서 이 파만 이런 소리를 하니까. 그래서 이걸 비판해야만 우리가 앞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는지를 짚어야 불교가 제대로 보여요. == 불교의 공성의 세계 == 46:35 이제야 불교가 보입니다. 그럼 공종(空宗)도 사실은 일체유심조였고, 상종(相宗)도 일체유심조였고, 성종(性宗)도 일체유심조고, 공성은 청정광명심의 공한 부분을 얘기한 거고, 상종은 청정광명심의 나툼을 얘기한 거고, 성종은 청정광명심 안에 있는 자성의 진리들을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공성상(空性相)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서 46:59 진공(眞空)의 세계에서는 텅 비어 있다가, 청정광명심이, 묘유(妙有)의 세계에서는 6바라밀의 자성을 알아차리고 있다가, 인과(因果)의 세계에서는 6근작용을 통해서 6바라밀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이거 지금 그대로 써놓은 게 체상용(體相用) 해가지고 대승기신론이에요. 대승기신론에 이 모든 걸 해서 정광명을 뭐라고 했어요? “한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마음이 정광명심이에요. 이 한마음의 본체는 텅 비어 있고, 한마음 안에는 진리의 묘한 상들이 들어있고, 한마음의 작용이 온 우주를 굴리니까 위대하도다 해서, 체상용이 위대하다 해서, 이 한마음만 믿고 따라가면 모든 보살들이 이 길을 갔으니까 이게 진짜 '대승의 길이다'가 대승기신론 시작 부분에 써있습니다. 한마음교예요, 대승기신론은. 이 한마음교라는 거를 날려버리려고 이 한마음은 무상하고 일시적이요 공성의 진리만 영원한데, 그런데 왜! 무분별지의 자리에 들어가서, 일체 거긴 아무것도 없는데 48:01 거기서 직관하는 공성이 뭔지에 대해서는 왜 설명을 안 하고, 계속 연기공, 개별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만 설명할 수 있는 공성을 논하면서 무분별지의 세계까지 왜 함부로 이렇게 간섭해가지고 수를 놓냐고요. 왜곡을 시키냐고요. 무분별지에서 직관하는 공성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못 하면서. 연기공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요. 연기가 없는 세계인데. 그런데 청정광명심까지도 연기의 세계를 끄집어 내려버리고, 한편으로는.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공성을 오롯이 직관한다고 하면서 그 공성을 설명을 못 해주면 진리가 구현될 수가 없죠, 현실에서. 이런 측면에서 비판했습니다. 이제는 비판 거의 끝났어요. 이제는 달라이 라마가 잘 등장 안 하실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이제 유식학의 세계로 넘어갈 겁니다. 이제 쉬는 시간 좀 갖고요. 유식학의 세계에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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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2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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