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9강 문서 원본 보기
←
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9강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도마복음}}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style="text-align: left;"| 부제 |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 |- !style="text-align: left;"| 강의일자 | 2020. 10. 31. 土. |- !style="text-align: left;"| 게시일자 | 2021. 05. 07. |- !style="text-align: left;"| 동영상 길이 | 46:51 |- !style="text-align: left;"| 강의 중 인용 도서 | 도마복음 |- !style="text-align: left;"|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lmNiW6HHtC8 |} 반갑습니다. 도마복음 한시간 하죠. 84절 부터 나가겠습니다. 총 114절 이니까 지금 대충 아실거예요? 어느정도 진도 나갔는지, 진도가 지금 꽤 나가고 있습니다. 《84절 그대들의 영원한 형상들을 보아라》 형상이라는 표현을 예수님이 자주 쓰시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대의 겉모습을 볼때 그대들은 행복해 한다》 겉모습을 보면 행복해 한다, 혈육의 자녀죠, 혈육의 자녀, 《그러나 그대가 그대보다 먼저 존재하며,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그대들의 형상들을 보게 될때 그대들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게 기존 복음에 있으면 죽이겠죠. 보세요.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육이죠. 겉으로 보이는 형상들, 그 육을 경영하는 혼, 그래서 육과 혼으로 이렇게 살아가는데, 지금 이게 겉모습만 보며 사는 삶이죠. 이 육의 지배를 받는 혼, 그게 우리가 말하는 혈육의 자녀입니다. 혈육의 자녀인데, 항상 대비해서 보셔야 돼요. 하나님의 자녀, 성령의 자녀는 어떨까요? 내면의 영원불멸하는, 지금 육혼이 나왔으면 이게 영이 되겠죠. 영, 영은 I AM 이에요. I AM 뒤에 혼, 생각,감정,오감의 혼 작용이 붙는 겁니다. I AM 뒤에, 나라는 현존 뒤에 그 현존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하고, 오감을 느끼는 중에 이제 육이라는 것도 지각이 되고 하는 거죠. 자 그러면 '겉모습을 볼 때 행복해한다' '너희는 겉모습으로 만족하고 살아간다' 혈육의 자녀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이거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당해야 되죠? 뭘 감당 해야 되죠? 먼저 이 혼보다, 혼과 육은 에고의 작용아닙니까? 개체적 자아, 개체적 자아보다 먼저 존재하는 자아, 이게 뭐죠? I AM 이라고하는 우주적 자아죠, 영원한 나의 현존, 먼저 존재하며 죽지도 않아요. 영원한 나의 현존이니까 죽지도 않고, I AM이 우주 창조전, 태초 이전에도 존재했죠. I AM이, 현존, 그 I AM에서 우주가 나왔어요. 현존, 현존하며, 에고보다 먼저 현존했으며, 죽지도 않으며, 불멸하며, 보이지도 않는다. 이건 육의 세계, 오감의 세계가 아니다. 물질의 세계도 아니고 오감의 세계도 아니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물질만 우리 오감으로 인지되는게 아니에요. 꿈속에서 보면 영적인 것도 오감으로 인지됩니다. 보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마저 넘어서 있다는 거죠. 그래서 보이지 않다는 것은 육과 혼의 세계를 넘어가 있다는 거예요. 영의 세계죠. 그게 그대들의 형상들이다. 이게 하나님의 형상들이에요. 재밌는 건, 보세요. 이거 이해하시면 성경의 아주 음밀한 부분을 다 이해하신 거에요. I AM은 원래 하나님 이름입니다. 그렇죠? 창조주 이름이에요. 여호와한테 말하는 하나님이, 여호와가 I AM 이라고 그랬어요. 에고 에이미 그러죠. 나는 현존하는 나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래서 I AM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죠? 이 I AM이 우리에겐 뭐죠? 우리의 존재의 본질인 영이에요. 혼과 육이 작동하려면 영이 있어야 되요. 나라는 현존이 없는데 누가 생각을 하고, 누가 감정을 느끼고, 누가 오감을 느껴요? 그러니까 그대들의 형상들 이라고 한거예요, 그대들 각각의 형상들, 그런데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달이 천강에 비춘다고 그랬죠. 강이 천개가 있으면 여기도 달이고, 여기도 달이고 여기도 달입니다. 본래 하나다. 하나인 성령이 천강에 비춘다. 각각의 에고, a라는 에고, b라는 에고, c라는 에고 내면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니까 그대들의 형상들, '그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들을 그대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건 그대들의 형상들이라고 해준 건 뭐예요. 그대들의 형상들은 그대들 에고보다 먼저 존재하고 불멸, 죽지도 않으며, 보이지도 않는 영의 자리라고 얘기한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다' 예수님이 그랬단 말이예요. 그럼 이게 불교랑 다를 게 없죠. 하나님이 우리 내면에 다 임해계시다. 우리 안에 계시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숨결로 우리가 생각하고, 울고, 웃고, 보고, 듣는,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이 창세기랑 또 맞아 떨어지죠. 이런 얘기를 자꾸 들어야지 성령을 만나지, 이런거 모르면 비싼 앰프 사서 감정뽕 맞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만나려면, 이걸 아셔야 되요. 우리 안에는 우리들의 형상들이 있는데 그게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거에요. 이게 하나라고 보지 않고서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해놓고 그대들의 형상들이라고 했단 말이예요. 그대들의 형상들이면, 그대들의 본질적 형상이라는 거니까, 영의 자리란 얘긴데 사실은 하나님의 영의 자리, 하나님의 현존이란 말이죠. 이렇게 보시면 재미있죠. 각주 1번 볼게요. [우리 내면에 현존하는 영원한 나의 현존] 우리 내면에 현존하는 영원한 나의 현존, [(I AM)과 그 안에 뭐가 새겨져 있어요?]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 진리, 겸손, 지혜, 성실이 새겨져 있겠죠. 하나님의 형상을 굳이 따지자면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죠. 십자가의 형상, 세피로트의 형상이 우리 영 안에 새겨져 있겠죠? 그러니까 이 영도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 형상을 담고 있는 진리의 영이니까, 진리만 따로 더 구분해 가지고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영을 그냥 형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진리를 품은 영이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영이니까, 그렇죠? 제가 구분해 봤어요. 영원한 나의 현존이 영이라면 그 영 안에, 성령 안에, 우리 개인을 말할 땐 영, 하나님 자리에서 말할 땐 성령, 같은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새겨져있는 영원한 진리,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 뜻, 아버지 진리, 아버지의 형상, [이것은 그대로 영원한 하나님의 현존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내 안에 있는 영의 현존과 영의 형상은 사실 알고보면 아버지의 현존이고, 아버지의 형상이다. 똑같은 I AM 이거든요. I AM에서 무슨 구별이 있어요? 나와 남이 구별된 I AM이 아닌데요. 순수한 나의 현존이죠. 이것은 우리의 에고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불멸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 그대로 빛이니까, 빛의 자녀가 되려면 이렇게 되는 수밖에 없다. 유교 가르침 한번 넣어보았습니다. 자꾸 제가 유불선을 섞어요. 못감당한 분들은 떨어져 나가겠죠. 이겨내셔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종교개벽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어요. '본인의 영적개벽이 그대로 종교개벽 이구나, 종교의 본질이 하나고, 예수님도 이 얘기하려 오셨구나' 이거 깨닫지 못하시면 예수님이 다녀가신 보람이 없습니다. 유교에 볼까요, [하나님이 명령하신 걸 본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 유교에서는 이 성령 자리를 양심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양심 안에 새겨놓은 선천적 프로그램이 '이렇게 살아라, 이걸 이렇게 해야 인간이다'하고 새겨놓은 사랑, 정의, 겸손, 지혜, 성실의 이 본성,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영 자리, 성령 자리, 양심 자리에 명령어 깔아놓은 게, 그게 우리 본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 본성을 따르는 거] 이 본성대로 사는 것, 남을 나처럼 사랑하고, 내가 당해도 싫은거 남한테 안하는 정의를 실천하고, 늘 겸손하며, 나를 낮추며, 늘 자명한 것만 진리로 인가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는, 그리고 늘 성실한 이런 삶을 인간이 걸어야 할 도리, [길이라고 하며, 그 길을 잘 곧게 닦는 것을] 이거는 이사야서에도 나오죠? 하나님의 길을 곱게 닦아라. 그게 뭐예요? 모든 사람들이 쉽게 걸을 수 있게 도우라는 거니까,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다른 사람도 그 길로 쉽게 걸을 수 있게 도우라는 거니까, 그걸 올바른 교육, [가르침이라고 한다.] 유교의 중용 1장에 성경의 제일 엑기스가 다 들어있죠? 불쾌하실지 모르겠어요? '왜 이게 여기 다있지?'하고, 기독교인이 통상 이렇게 진리가 다른 경전에서 발견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사탄이 미리 예비해놨다. 사탄이 진리를 어떻게 알아요. 사탄의 힘을 키워주는 건 기독교인들 이예요.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진리들을 다 부정하려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사탄이 한 짓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사탄이 다 해요. 예수님이 하는 일도 다하고, 하나님이 하는 일도 다 하게 돼요. 나중에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해져요. 이렇게 만드는 것도 잘못된 교인이다. 사탄은 그런 힘이 없습니다. 진리가 갖고 있는 이 빛의 힘을 어둠이 어떻게 가져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중용의 가르침에서 빛이 보이시면 이건 하나님의 가르침 맞습니다. 《85절》 갈께요. 《아담보다 그대들이 위대하다》 기독교에서 아담하면 인류의 시조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담을 사람들이 위대하게 보니까 《아담은 큰 권세와 큰 풍요로움에서 왔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맞죠! 《그러나 그대들 만큼 가치가 있진 않다》 그럼 갑자기 충격이죠. '내가 아담 보다 위대하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해서 창조한 아담보다 내가 더 위대하다고?' 《만약 그가 가치가 있었다면》 진짜 그가 하나님의 자녀였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아담은 죽었지, 해볼만한데' 이렇게 되는 거죠. '내가 더 위대할 수 있겠는데, 나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성부, 성자의 뜻을 따르고 믿기만 하면, 난 죽음을 맛보지 않는 영생을 얻을 텐데, 그래놓고 보면 아담보다 내가 더 위대하고 가치가 있네' 이런 생각도 하게 해준 거예요.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무지와 아집을 깨고, 진리를 수용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이름 방편을 쓰셨겠죠. 각주 2번 [살아서 하나님의 현존과 진리 안에 안주하며] 하나님의 현존인 영과 그 영에 새겨져있는 진리 안에 안주하며 [칭의, 성화, 영화] 이렇게 성령을 각성한게 칭의, 혼을 하나님의 사랑, 정의, 진리대로 거룩하게 만드는 게 성화, 그리고 이 육체, 물질적 육체가 아니라 물질적 육체 안에 있는 지수화풍의 그 원소를 뽑아내서 영적 부활을 이루어서 부활체를 얻는게 영화, 이걸 이룬 하나님 자녀가 죽음을 맛본 아담보다 위대하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보기 좋더라'고 했던 아담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이해되시죠. 《86절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 무슨 말일지 한번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우도 안식할 굴이 있고, 새들도 안식할 둥지가 있는데 사람들은 누워서 쉴 자리가 없다》 안식할 자리가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잘 이해 하셔야 돼요. '그때 그 당시에도 요즘처럼 부동산 문제가 심각했나? 집을 못 구하신 예수님이, 메시아도 집을 구할 수가 없구나, 어디 누울 자리가 없구나' 이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의식주 차원의 얘기를 예수님이 하시겠어요? 의식주 고민하지 말라고 했던 분이에요. 예수님이 오직 뭘 구하라고 했죠? '하나님 나라와 정의를 구하라'고 했죠. 지금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안해요. 안식일이 왔는데 집이나 어디 그 회당에서 안식을 하려고 하지 하나님 자리 안에서 안식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도마복음에 나왔죠? 우물 밖에만 사람들이 우글거리지 한 놈도 우물 안으로 뛰어드는 놈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사람이 없다. 이 얘기 하신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어디서 안식 하겠어요?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에 안식할 곳이 없다. 이 얘긴 '진짜 예수님 힘드셨구나' 이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집도 못구하셔서 힘드셨구나'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했구나, 이 시공간 안에 안식처가 있는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영의 자리가 안식처구나'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밑의 그림은 하나님의 현존과 진리를 그려놨어요. 성령이 하나님의 현존, 사랑, 정의, 질서, 지혜, 성실 이게 하나님의 진리, 이 질서는 하나님 입장에는 질서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겸손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그 질서를 수용하는 거거든요. 그게 겸손이죠. 하나님의 질서의 온전한 수용, 그래서 덕목이 인간 입장에 얘기할 때는 인간의 본성 그럴땐 겸손으로 얘기하면 되고,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본성 얘기할 때는 질서라고 얘기하면 됩니다. 각주 4번, 각주 3번부터 보실래요. 방금 이 구절, 비슷한 구절이 누가복음에 있어요. 누가복음 9장 57, 58절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어떤 이가 물어요, 어디로 가시든지 저도 따라 갈게요] 이 말에서 벌써 아까 제가 얘기한 하나님 안에서 안식이라는 게 이 얘기가 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어디 가세요? 어디 가서 쉬세요? 저도 거기 같이 가서 쉴게요. 여러분한테 누가 이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몰라하세요, 난 아버지 안에서 쉬는데요. 참나 안에서 쉬는데요. 이 세상에 쉴자리 없는데요. 시공 안에는 쉴자리 없는데요. 부지런히 무상하게 늘 새롭게 굴러가지, 아버지 안에서 쉬는데요. 이 얘길 해야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디가시든지 제가 따라갈게요. 하니까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인자는 쉴 곳이 없도다. 선문답이죠. 자 이 화두를 풀어봐라. '아, 예수님은 집이 없으시구나' 땡 '당나귀 해에나 성불할 놈, 천국갈 놈' 이렇게 딱 떨어지겠죠, 이때 뭘 해야 돼요? '머리를 둘곳이 없구나' '몰라'하고 딱 성령 안에서 딱 하나되 버리면 예수님과, 그 자리가 예수님 쉬는 자리 아니에요. 그러니까 잘따라 간거죠. '어디 가시든지 저 따라 갈게요' 이 사람 머리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고 뭐가 있어요? '세상에 나라 안에서 어디가든 내가 따라갈께요' 한 거잖아요. 예수님이 그걸 쳐버린다고요. '내가 가는 곳은 너희가 못 따라오는데' 요한복음에도 이런 말이 나와요. '나간다. 어디 가세요? 제가 따라 갈게요. 아버지 왕국 가는데' 그러면 어떻게 가요? 거기에 갑자기, 그래서 이 얘기를 요한복음에서 해주잖아요. '니네가 지금은 못 가는데' 오순절 사건을 말하는 거죠. '나중에 성령 강림하면 나있는데 올 수 있어'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만나자는 거잖아요. 이해되시죠. 포인트는 그겁니다. 성령 안에서, 천국도 성령 안에서 우리가 천국을 만나는 거지, 그렇죠? 성령이 본질로서의 천국이고, 현상적인 천국을 얘기 하더라도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천국인데 성령 안에서 안식을 못하면 본질의천국도 없는거고, 현상의 천국도 없는 거에요.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각주 4번 보면 [이 세상에는 영원한 안식처가 없다, 세상은 무상한 곳이다] 무상하다를 나쁘게만 보지 마시라고 제가 말씀드려요. 불교에서 무상함을 너무 나쁜 쪽으로만, 버려야할 것으로만, 소승불교, 초기불교 쪽에서 묘사하다 보니까 무상 나오면 벌써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데, 무상의 의미는 뭐예요? 일신우일신, 날로 새로운 세계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현상계는 무상한 세계입니다. '아, 우울해' 이게 아니라, 현상계는 날마다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세계입니다. 한 순간도 정체되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계입니다. 기대되죠? '두근두근한데' 이렇게 가게 바꿔야 돼요. 그러니까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열죠. 이 지상에서 그 무상한 걸 버려야 되는 거면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열면 안되죠. 분점 여기다 내면 안되죠. 그렇죠? 여기서도 무상하다는 것은 그거에요, 날로날로 변해가는 세계다. 영원불멸의 세계가 아니다. 그런데 [영원한 안식처는] 영원불멸의 세계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내면의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현존 자리] I AM 자리, 하나님의 그 안에 새겨진 [진리의 자리] 여기만 영원불멸 하겠죠. 이 진리도 영원불멸하고 왜 이 영이 영원불멸 하니까 이 영 안에 새겨져있는 진리도 영원불멸이죠.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주가 다 창조 된거죠. [자신의 안식처를 거기서 찾아라. 안식일은 바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현존과 진리 안에서 안식하는 날을 말한다] 자 이해되셨죠. 그런데 대학에 제가 대학책도 냈었죠. 대학책에 이런 말이 있어요. 공자님 말씀이 있어요. 기독교 분들은 좀 감당하기 힘드시면 잠깐 딴 생각하고 계세요. [시경에 이르기를] 옛날 중국에 대중가요 가사집 이라고 했죠. 되게 인간의 감정을 잘표현한 가사집, 시경에 이르기를 [저기 우는 황조] 누런 새 [언덕 모퉁이에 머무는 구나] 이런식 노래 가사가 있어요. '저기 우는 저 황조 언덕 모퉁이, 자기집에 가서 쉬는 구나'라고 하였는데 [공자께서 이 시를 인용하면서 머무르고자 함에 머물 곳을 알아야 된다] 어디 머무를지 알아야 된다. 사람이면 [사람으로 새만 못하면 되겠는가] 새도 자기집, 머물데 딱 찾아가서 머무는데 사람으로서 새만 못해야 되겠는가? 대학에서 이 구절이 어디 머무르라고 나오는 거죠? 양심의 현존과 진리, 양심있는 자리, 양심의 현존, 그리고 지극한 선, 양심 안에 새겨져 있는 지극한 선의 머무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유교나 예수님 말씀이나 둘이 아니다. '그 영원한 진리에 머물러라'하고 하신 얘기지 공자님도 '지상에 어디서 머무를 건가'가 아니에요. '영원한 진리에 머물러라' 이거죠. 이걸 대학에서 뭐라고 했죠? '지극한 선에 머물러라' 합니다. 그칠 지자해서 지어, 어는 어디에, 어디에 머무르라고 했어요? 대학에 답이 있어요. 지극한 선에, 지극한 선은 뭐예요? 한점 에고의 무지와 아집이 없는 지극한 선을 말해요. 그건 시공을 초월한 자리죠, 진리에 머물러라, 진리에 머물러라. 《87절 다른 육체 의존하는 육체와 영혼은 비참하다》 제목 들으시면 흥미진진 하시죠? 87절까지 왔네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한 육체에 의존하는 육체는 얼마나 비참한가? 또한 이 둘에 의존하는 영혼은 얼마나 비참한가》 끝, 어때요? 이런식이면 도마복음 못해 먹겠죠? 풀어 드릴께요. 각주 5번 보세요. [다른 육체를 먹고사는 육체는 무상하다.] 현상계의 물질적 존재일 뿐이다. 한 육체에 의존해야하는 육체, 얼마나 비참한가, [이 무상한 물질의 육체에 의존하고 있는 그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한 가] 이게 혈육의 자녀예요. 혈육의 자녀의 혼을 말해요. 이 물질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우리가 지금 그러잖아요. 진리에 의해 존재하는 게 본래 모습인데 지금 그걸 모르고, 까먹고, 아담의 원죄 이후 아담과 이브의 원죄 이후 우리 지금 어떻게 살고 있어요? 혈육의 자녀로 육에 의존해 살아요. 그런데 이 육체는 또 다른 육체에 의존해 있어요. 다른 물질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이 물질에 의존해 있는 이 혼, 얼마나 비참하냐? 혈육의 자녀의 그 탐진치로만 살아가는 중생들 얼마나 비참하냐, 불교적으로 말하면, 갑자기 고기먹고 즐거웠는데 이 얘기 들으니까 비참해지시죠. 고기 먹고 살아가는 이 육체 얼마나 비참한가? '고기 끊자' 지금 이런 차원이 아니에요. 그 물질에 의존한 영은 또 얼마나 비참한가, 영생을 못 얻었으니까 비참하다고 하는 거예요. 다른게 아니라, 영생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사실은 보세요. 자 사실 어때요? 이 하나님의 숨결로 인해서 육신도 흙을 빚어 창조했고, 우리 혼도 살아서 생각하고, 울고웃고, 보고듣고 하는건데 성령에 의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육체에 의존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니까 얼마나 비참하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는 게 당연하고 영생은 아예 그 개념 밖이죠. 그런데 성령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이 성령으로 내 혼이 거룩해지고 내 육체는? 사멸하는 육체는 죽더라도 불멸의 육체를 얻어서, 부활체를 얻어서, 자 이 물질의 육체랑, 이 물질의 거친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이 물질과 거친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한 세트죠? 미세한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부활체와 한 세트는 어디겠어요? 미세한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천국이겠죠. 그럼 한 세트인데로 가야되니까 천국으로 갈 수 밖에 없죠. 그럼 영생이죠. 그게 바로 영생이죠. 천국 갈 몸을 만들어 버리면 살아갈 곳이 천국 밖에 없어요. 그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들이죠. 그래서 [육체와 함께 사라질 뿐인 그 영혼] 실제로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만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그 영혼, [죽음이 자신의 것을 찾기 이전에] 자신의 것이 뭐예요? 육체, 죽음이 육체 찾으러오기 전에 [불멸의 영을] 즉 성령을 [각성하고 자신의 혼을 지혜와 사랑과 실천으로 거룩하게 성스럽게 만들고 다른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 불멸의 영적 육체를 이루어야 영생 얻을 거 아니에요] 여기 힌트가 있어요. 육체에 의존한 육체란 말을 왜 하셨겠어요? '다른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 육체를 만들어라' 이겁니다. 그럼 채식하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식물의 육체에 의존해야 되는 거죠. 채식도 다른 육체에 의존하는 거죠? 다른 물질에 의존하는 거잖아요. 그게 아닌 몸뚱이가 뭘까요? 그게 영적인 몸이고 부활체예요. 에너지의 몸, 천국갈 몸을 만들면 천국 갈 수밖에 없다. 요즘 몸 만들기가 유행이죠. 식스팩, 우리는 식스팩 이긴한데 육바라밀의 몸을 만드세요. 영적인 몸 《88절》 갈게요. 《성령을 깨달은 이가 천사들, 선지자를 보다 위대하다》 예수님이 한번씩 쏠 때는 진짜 쏴주세요. 사실 천사나 선지자들도 다 성령 깨달은 이잖아요. 그런데 무시하고 사람들이 천사와 선지자들만 너무 높게 보니까, 한번씩 무시할 때가 있어요. 무시하고 얘기할 때, 이건 좀 방편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천사들과 선지자들이 그대들에게 와서 그대들이 소유한 것들을 줄 것이다》 또 엄청난 힌트들이 많이 들어있어요. 천사와 선지자가 와서 우리에게 성령 깨달으라고 해줘서 깨달아도 사실 뭐라는 거예요? 원래 내 거라는 거에요. 원래 그대들 소유라는 거예요. 성령이 원래 그대를 소유인데, 그대들이 원래 갖고 있다는 거라는 거예요. 성령이 없으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몸뚱이가 굴러가요? 어떻게 더우면 땀구멍 열고 추우면 닫고 이짓을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원래 그대들의 것인데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혈육이 자녀죠. 천사와 선지자가 와서 그대들에게 뭘 줘도, 사실은 성령을 부여해주겠죠. 성령을 받게 해줘도 '사실 원래 네 것이다, 네가 가진 걸 다시 각성하게 도와준다는 것 뿐이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이 가진 것을 그대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이 가진게 뭐예요? 성령, '그걸 천사, 선지자들에게 다시 주어라'는 거예요. 너희도 이렇게 메신저 역할만 하지말고 너희도 더 큰, 예수님과 같은 위대한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라. '더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라'하고 그들을 인도해 주어라. 완전 건방진 소리죠? 아까는 아담 무시하더니 이젠 선지자와 천사도 무시해요. '하나님 자녀가 제일 위대해'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약간 방편인데 조금 무리한 얘기도 있습니다만 감안해서 들으세요. 왜 이런 얘기를 하시는지, 업되시죠? 기분 업되시죠? 그리고 그 천사들도 대단하지 않아요? 천사와 선지자들이 와서 너희를 구원시켜주면 너희도 천사와 선지자를 좀 구원시켜줘라. 불교식으로 말하면 천사와 선지자도 좀 건져줘라, 성불시켜줘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라 《그들은 언제 그들이 소유한 것들을 와서 가져갈 것인가》 나한테 와서 언제 배워서 천사와 선지자들도 본래 자기가 갖고 있던 성령을 더 온전히 깨달을 것인가? 안깨달은 사람은 아닌데, 마치 못깨달은 사람처럼 예수님이 얘기하고 계신데, 이건 좀 과장법입니다. 6번 각주 보시면, 도마복음 46절에 이런말도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담에서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여자에게 태어난 사람들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진 않죠, 이것도 좀 과장이에요. 왜냐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최고의 선지자로 아니까 '봐, 세례요한이 지금까지 선지자 중에 제일 짱아냐?' 사람들이 수긍하겠죠. '그런 것 같아요' 왜? 다른 선지자는 본적이 없고, 세례요한 밖에 못 봤으니까,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서 좀 과장해가면서 얘길 하시는 거에요. '짱이지? 맞어, 그에게 눈길을 돌리면 안돼, 세례요한 열심히 추종하고 바라봐, 그런데 내가 이 얘기해줄까 그대들 중에 갓난아이가 되서 거듭난 자, 성령으로 거듭나서 부활해버린 자는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해. 이것도 쫌 막상 비교하면 진짜 위대할지 아닐지 말할 수 없죠? 이렇게 과장법을 예수님이 좀 쓴다고요. 뭔 얘길 하고 싶으신 거에요? 선지자보다 칭의, 성화, 영화 얻어서 부활한 하나님 자녀가 훨씬 더 위대할 수 있어. 이거죠. 마찬가지로 천사, 선지자들도 성령의 존재들이잖아요. 무시할 존재가 아닌데, 예수님 하는거 이상으로 신통력, 초능력 다 부렸던 엘리야, 엘리사도 있었어요. 곰곰이 따지면 이 말이 이상하다고요. 그런데 따지지 마시고 당시 사람들에게 뭔 말을 하려고 하는지, 방편으로 하신 얘기니까 꼬실려고, 너희가 천사, 선지자들 보다 더 위대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어요. 그렇죠? 각주 6번 볼게요. [천사들과 선지자들이 그대들에게 찾아와서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대들이 성령을 깨닫도록 해준다 하더라도 그대들은 그것이 본래 부터 그대들의 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거 놓치면 성령을 밖에서 주입받은 줄 알아요. 그러면 천사, 선지자들 한테 매달리겠죠. 그런데 안매달려요. 나한테 원래 있던거를 깨닫게 도와줬을 뿐인 거에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왜 자기 성령을 그렇게 열심히 안찾지? 이렇게 고민할 수도 있는 큰 그릇이 되는 거죠. 통큰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대들이 가진걸 그들에게 베풀어 주어라] 이 얘기는 왜 하셨겠어요? 천사, 선지자만 남 도와주는 거 아니야. 이 말을 하고 싶으니까 이런 무리한 얘기한 거예요. 너희도 천사, 선지자 다 구원해 줄 수 있어. 얼마나 이 사고의 혁신입니까? '제가요?'하는 그런 얘기잖아요. '내가 엘리야, 엘리사를 구원해 준다구요?' 말도 아닌 얘기죠. '아담보다 위대하다구요?' 생각도 안해본 얘기죠. 이런 얘기로 막 치고 있는 거예요. 이건 방편입니다. 이 얘기 듣고 목에 힘주고 다니시면 그것도 땡입니다. 천사와 선지자처럼 성령을 깨달아서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게 맞죠. [그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베풀어줘라.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보라. 도대체 왜 그들은 성령의 메신저 역할만 하는가? 그들은 왜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령을 찾으려 하지 않는가?] 좀 허접한 천사는 이럴 수도 있죠. 이렇게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모든 천사와 선지자들 보다 본래의 신성인 성령을 회복한 그대들이 더 위대하다] 이렇게도 생각해보라 이겁니다. 어떠세요? 이 마음만 전달 받으면 돼요. 이거 가지고 꼼꼼히 따져시면 좀 이상할 거예요. 천사 중에 그러면 이렇게 상품천사, 중품천사 막 따지면 '제가 몇 레벨이라는 거죠?' 이러면 땡이예요. 애기들 눈높이 맞춰줬더니 바로 건방져지는 수가 있죠. 그럼 안됩니다. 《89절 속을 만드신 분이 바깥도 만드셨다》 이건 뭐 유명한 얘기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은 왜 잔의 바 깥만 닦고 있는 것인가? 속을 만든 분이 바깥도 만드신 분이라는걸 왜 깨닫지 못하는가?》 하나님 어떻게 속여? 겉만 이렇게 외식한다고 그러죠. 겉만 위선자가 되서, 겉만 성령의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자녀인 것처럼 꾸미고 다니면 뭐하냐 속에 탐진치가 꽉 차 있는데, 이 소리죠. 그러면 겉 만드신 분이 속 만들었다는 거 모르냐? 속마음을 방치해놓고 겉모습만, 몸가짐만 그렇게 성스럽게 하고 다니면 그 속은 하느님이 그거 만드신 분이 모르겠냐? 이거죠. 마태복음 23장 25, 26절에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더 센 말이에요, 들어보세요. [재앙이 있을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이 위선자인] 이 위선자들인 서기관들, 율법학자 들이에요. 율법 학자들하고 바리새파들이요. [잔과 접시의 같은 깨끗이 하되] 사실은 몸뚱이를 깨끗이 하는 걸 말하죠.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탐진치가 [꽉차 있다. 눈먼 바리새인아 너희는 먼저 잔과 접시의 안을 깨끗이 하라] 너희 속마음부터 바로 잡아라. 속마음부터 아버지 뜻에 따라라. 겉만 따르는 시늉, 율법만 따르는 시늉하면 안된다. 율법은 지켜요. 속이 더럽다. 이겁니다.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속을 먼저 깨끗이 해라. 그럼 겉도 깨끗해질거다. 이게 또 유교경전 대학 가져왔습니다, 도마복음 너무 좋은게 자연스럽게 어느 구절은 유교쪽이 또 많이 나오고, 어느 구절은 도교나 노자, 장자, 도교쪽 많이 나오게 되고, 더심한 경우 도교의 내단이론이 나올때도 있고, 또 어떨때는 선문답과 불교경전들이 자연스럽게 인용됩니다. 제가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결이 가는 거예요. 제가 억지로 하는거 아닙니다. 다 아버지의 뜻이에요. 왜 대학을 인용합니까?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세요.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마시고, 제가 비켜드릴테니까, [소인이 한가로이 있을때] 대학에 이거 보세요, 예수님하고 얼마나 뜻이 맞는지? 소인배들, 소시오패스들 이에요, 위선자 들 이예요. 위선자들, 위선자들이 한가로이 있을때, 이 바리새인들이, 위선자들이 한가로이 있을때 [온갖 악한 짓을 다하다가 군자를 본 뒤에는 슬그머니 그 악한 짓을 숨기고 선함을 드러낸다] 겉은 선한척 율법, 예법을 따르고 있더라. 이거죠. [남들이 그 사람을 들여다 볼 때 폐부] 저 속을 몸뚱이 속까지 [다 들여다 보듯이 할 것이니] 겉만 닦아놓으면 뭐하냐 속도 다 보인다. 이것들아. 이거죠.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거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거죠. 너희 해로울 것이다. [이것을 일러 속마음이 정성스러우면 밖으로 형체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게 예수님이 하신 거에요. 안을 깨끗이 하면 밖도 깨끗해질 것이다. 이게 속마음이 정성스러우면, 양심을 따르고, 성령의 뜻을 따르면, 밖으로도 다 빛이 나게 돼있다. 빛의 사람이 되게 되어있다. 이거죠.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겉보다 [홀로 아는 자리] 가 속마음이죠. 나만 아는 자리 속마음, 여러분만 아는 자리가 어디에요? 속마음이에요. 꼭 육체가 혼자 있는 자리를 말하는 게 아니예요. 거기도 포함하지만 나만 아는 자리는 어디에요? 속마음이요. 속마음을 [진실하게 해라] 이게 '접시 안을 깨끗이 닦아라' 똑같은 소리죠. 공자님은 유교 공부도 하신 것 같은 느낌이죠. 유불선을 다 꿰뚫으신 공자님이, 예수님이, 아까도 공자님이라고 했나요? 느낌이 안좋은데 예수님으로 수정할게요. '윤홍식, 공자가 예수다' 이런거 아니에요.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예수님은 유불선을 다 꿰뚫고 있다. 늘 감동입니다. 저도 이렇게 공부하다가 눈물나게 감동적인 분입니다. 하나더 할까요? 다해버릴까요? 《90절 나와 연합하여 안식을 찾아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에게 오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다스림은 온유하다》 온유하다, 늘 자비롭다. 《그대들은 자신을 위한 안식을 찾게 될 것이다》 진짜 안식 얻고 싶냐? 아까 안식 얻을 방법 물어보고 그랬죠, 내가 주는 안식은 이 세상 안식이 아니야, 저 세상 안식이야, 천국의 안식이야, 시공을 초월한 그 성령에서 오는 안식이야, 근데 '성령의 안식을 얻으려면 나랑 접속하자' 이거예요. '나의 멍에를 매라' 소를 수레랑 연결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소 목덜미에 대는 나무가 멍에예요. 옆에 이렇게 해서 연결 됐잖아요. 그러면 수레랑 소가 접속되죠. 예수님하고 우리가 하나로 접속 되려면, 그렇죠? 우리가 멍에를 매야죠.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매라' 예수님의 멍에를 매면 우리도 예수님하고 연합이 됩니다, 접속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하고 우리가 한 덩어리가 돼요. 왜그러냐? 타는 듯한 불 자체인 이 성령으로, 우리 에고는 쇠공과 같이 차가운데,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데, 전체가 불덩어리가 되버린 존재가 인간 중에 있어요. 성 자, 그럼 성자가 없으면 모르겠는데 성자가 계시면 어떻게 하는게 제일 빨라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성령 찾기보다 일단 빨리 가서 옆에 붙어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나로부터 떨어지면 차가워지고 가까이 있으면 뜨거워질 거라고 했죠. 일단 붙으면 나도 같이 뜨거워져요. 뜨겁다 보면 내 안에 있는 불씨가 점화됩니다. 나도 내 안에 성령을 이런식으로 찾게 돼요. 무조건 나랑 일단 붙어라. 내 가까이 있어라, 그러면 너도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된다. 네 안에서 오는 성령의 안식을 너도 체험하게 되고, 결국은 너나 나나 다 한 성령에서 빛과 열을, 빛, 진리와 열, 자비, 에너지를 끌어다 쓰게 된다. 됐죠? [예수님의 인격은 쇠공이고 예수님의 안식처인 하나님 아버지는 타오르는 불이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 안에서 안식하니까, 아버지 안에서 안식하다 보니까 성령에서 오는 이 평안이 예수님 존재를 꽉 채우고 있어요. 가까이 가면 나도 같이 평안해진단 말이에요, 뜨거워진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면 우리도 아버지 안에서 안식하는 법을 알게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즉 예수님의 안식처인 하나님 아버지는 타오르는 불이고 예수님은 쇠공인데 우리랑 똑같은 혼과 육을 지니신 존재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늘 하나이신 예수님은 늘 뜨겁게 달궈진 쇠공 상태 아니에요?] 그러면 진리와 평안 안에 살아가실 거 아니예요? 진리와 평안이 충만해서 살아가실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하면 그 열기를 전해 받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의 불씨, 즉 자신 내면의 성령] 우리들의 영원불멸의 형상, 우리 안에 있는 영원불멸의 현존 자리를 [찾겠죠.] 이 소리입니다. [멍에란 수레와 소나 말을 연결한 도구고요. 소의 목덜미에 얹어서 사용하는 구분 나무입니다. 멍에 를 통해 수레와 소나 말은 한 몸이 됩니다] 예수님, 유명한 마태복음 말씀 11장 28, 30절 아시죠.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진 그대들이여 모두 나에게 오라] 지금 멘탈이 붕괴되어 가는 그대들이여, 돌아버릴 것 같은 그대들이여 나에게 와라. [그러면 내가 그대를 안식하게 해줄 거다. 그대들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나랑 연합이 되라' 이거죠. 한 성령 안에서 연합해야지 결국에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게 돼요. 일단 가까이 와라. 내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들어라.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점점 자명해지다 보면 그리고 자명함 속에서 나를 믿고 한편으로 믿고, 믿음이 커지고 한편으론 자명해지고 하다보면 불교의 정혜쌍수처럼 기독교는 믿음과 진리가 자라나다 보면 접속이 되버려요, 성령이랑, 그래서 성자땜에 불붙었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 불을 찾게 돼요. 성령을 찾게 돼요. 진짜 안식을 얻게 돼요.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자비를 말합니다. 나와 남을 하나로 본 자비, [그대들의 영혼이 안식을 찾게 될 것이다.] 결국은 어디서 안식을 찾아요? 한 성령 안에서 안식을 얻게 돼요. 예수님과 우리는 다같이 한 성령 안에서 안식을 얻게 됩니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일단 내 멍에 메면, 보통 소가 멍에를 메면 무겁죠. 오히려 짐을 떠안는 건데, 나랑 접속하면 안식과 진리를 떠안게 되니까 그건 차원이 다르다. 요한복음 14장 27절 보면 [나는 그대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갈 건데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평화] 나를 믿고 나랑 연합함으로서, 나를 믿고 내 말, 내가 전하는 말을 따르고 실천하다 보면 평화를 얻게 되는데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다] 이 세상 평화가 아니다. 저 세상 평화죠. 성령에서 오는 평화예요. 성령이 주는 평화기 때문에 [걱정도 말고 두려워도 말라] 이 세상 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그대들이여 그러지 말라, 그냥 내 이름 부르면서, 예수님 이름 부르면서 나랑 접속하면 그대로 성령하고도 접속이 되버립니다. 이 소리죠. 이 접속하는 자세한 얘기는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강의 참조하세요. 요한복음에는 나랑 연합하라는 얘기를 가장 주안점을 두고 얘기해요. 그래서 성부, 성령 안에서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 성령 안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 안에서 성부 아버지와, 이렇게 그려 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가 되는 걸 얘기해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성령이 아버지 영이예요. 아버지 영 안에서, 결국 아버지 영의 본질은 성부니까, 이 자체는 성령인데, 성령 안에서 성부 아버지를 알게 돼요. 아버지와 성자인 아들과 그 제자인 성도, 하나님 자녀가 하나로 꿰지는거, 이게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최고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추구하는 게, 이 땅의 지상천국을 열려고 오신 분이 뭘 목표로 하고 계시냐?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나랑 성도들도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성도들도 아버지랑 하나가 되요. 우리 모두 하나가 된다. 이게 지상 천국 입니다. 지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부, 성자를 알고,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것, 어디서? 성령 안에서... 게임 끝입니다. 그게 지상 천국입니다. 자세한건 요한복음을 들어보세요. 《91절 그대를 면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뿌듯 합니다. 《그들이 그분에게 말하기를》 저도 이렇게 다 해버리면 다음주로 빡세집니다만 할게요.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 사는 입장인데, 전날 준비해서 오늘 하는 입장인데, 금요일 준비 토요일 강의, 다음 주가 빡세겠네요. '그들이 그분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말해 주세요.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해요》 여기 또 멋진 선문답이 나옵니다. 《그대들은 하늘과 땅의 형세는 분별하지만》 딱 하늘땅 형세를 보고 보편법칙을 깨달아서 '내일 비오겠는 걸, 뭐 바람이 불겠는 걸' 이거는 기가 막히게, 거죽들은, 오감의 세계에서는 잘 읽어 내면서, 육의 세계에서는, 물질의 세계는 되게 밝은데, 《그대들 면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른다.》 이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 이거 있었죠? 돌맹이를 들어봐라. 거기 내가 있다. 그때 어떻게 제가 설명 드렸죠? 이 돌맹이가 I AM이라고 하는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작품이라는 걸 깨달아야 돼요. 이게 불교 일체유심조 거든요. 일체가 내 마음, 참마음, 참나의 작용인 줄 아는게 견성이듯이 기독교에서는 성령을 아는 사람은 일체가 성령의 작용으로 보여요. 에고 눈에는 에고 따로 있고 돌맹이 따로 있습니다만 돌맹이를 봤는데 내가 보인다는 건, 에고가 돌맹이를 봤는데 돌맹이 본질이 뭐예요? 성령이에요, I AM이라고 하는 성령, 내가 현존하니까 에고가 생각, 감정, 오감을 일으키면서 대상을 접하고 있다. 이 전체를 꿰뚫어보면 에고건, 대상이건 모두 성령의 작품이구나, 이게 보여야 돼요. 바꿀게요. 대상 이건, 에고의 세계건 이 모든게 성령의 작용이구나, 여기 주관 세계고, 여기 객관 세계죠. 내가 남을, 내가 대상을, 이렇게 알아차리는 이 모든 행위들이 성령으로 인해 가능하구나, 내가 돌맹이를 집었는데, 돌맹이를 집어 든 나, 이걸 초월한 I AM이 있어요. 나라는 게 현존하니까 이 모든 것이 현상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일체가 성령의 신비다, 하나님의 신비다, 이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보세요, 그런데 이걸 모르고 대상, 하늘과 땅은 잘 연구해서 법칙을 찾아내요. 혈육의 자녀들은 에고로 하늘과 땅은 잘 연구에서 법칙은 찾아내요, 이 짓은 잘하는데 이 모든게 성령의 작용이라는걸 모르니까 눈앞에 보이는 대상이 지금 예수님이죠. 이 예수님이 성령의 신비로 존재한다는 걸 에고가 어떻게 알아요? 성령을 모르는데, 자기 안에,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나를 모르는구나' 이 말은 성령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대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나를 모르는 거다' 나의 본질이 성령의 작용인걸 모르는 거다. 《그리고 그대들은 지금 이 순간을 분별할 줄 모른다》 영원한 이 현존자리를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을 모르고 계속 뭐예요? 과거, 미래 속에서 헤매고 다니고 있다. '너희 시간 잘 분석하는 것 같지?' 오늘 이러니 내일 비 오겠구나, 과거이 이랬으니 오늘 이런 현상이 일어나니, 미래는 이러겠구나, '막 과거, 현재, 미래를 다 꿰뚫는 거 같지? 지금 이 순간을 모르는구나, 영원한 현존을 모르는구나' 이 소리입니다. 제가 풀이한 걸 읽어보세요. [혈육의 자녀는 오감에 포착되는 하늘과 땅의 형세를 관찰하여 법칙을 발견할 수 있으나, 자신의 눈앞에 현존하는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자신의 면전에 현존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성령(영원한 나의 현존, I AM)의 신비한 작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르니 이 말이 이해가 안되죠. [성령을 모르는 혈육의 자녀는 면전의 존재를 알 수 없으며, 영원한 현존인 지금 이 순간을 분별할 수 없다. 상황이 이러니 성령의 온전한 분신인 성자를 어떻게 알아 보겠는가] 예수님이 내가 성자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만 '니네가 성령을 모르는데 어떻게 성자를 알아?' 이거에요. 성령을 모르는데 눈앞에 내가 서 있는 이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모를 거고, 더더구나 내가 성자라는 걸 어떻게 알거며, 그 얘기는 뭐냐? 지금 이 순간을 모르는도다. 과거, 현재, 미래 왔다갔다 다 빠삭하게 사는 것 같지? 영원한 이 순간을 모르는구나, 늘 현존하는 이 영원한 순간을 모르는구나, 죽이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도마복음
(
원본 보기
)
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9강
문서로 돌아갑니다.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
이름공간
문서
토론
한국어
보기
읽기
원본 보기
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