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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3강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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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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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style="text-align: left;"| 부제 | 나는 온전한 자리에서 온 사람이다 |- !style="text-align: left;"| 강의일자 | 2020. 09. 12. 土. |- !style="text-align: left;"| 게시일자 | 2021. 03. 29. |- !style="text-align: left;"| 동영상 길이 | 32:54 |- !style="text-align: left;"| 강의 중 인용 도서 | 도마복음 |- !style="text-align: left;"|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EZZX0EXRSoc |} 오늘 도마복음 또 이어서 가보죠. 61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많이들 계신데 또 도마복음 함께 공부해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61절부터 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두 명이 한 참상에》 침대에 《누워 있는데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 것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셨나봐요. 이게 기존 마태복음에도 있죠? 마태복음에도 있고, 이 얘기가 좀 많이 나와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 다음 얘기를 보면, 《살로메가 묻기를》 살로메, 여기서 살로메는 누군지 모릅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마치 특별한 분으로부터 오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 같다' 이거겠죠. 《나의 침상에 누워 계셨고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분 댁에 가서 좀 기거를 하신 거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첫번째 얘기한 게 '두 명 중에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거다' 그렇죠? 그럼 이제 우리 바로 알 수 있죠? 혈육의 자녀는 죽을 거고, 하나님의 자녀는 살거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살고, 탐진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 죽을 거다. 이제 이런 메세지라는 건 아시겠죠?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정체가 뭡니까? 이렇게 질문하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이 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절의 제목을 제가 '나는 온전한 자리에서 온 사람이다' 이 말을 한게, 살로메가 질문을 그렇게 한거예요. '특별하신 분에게서 오신거 같아요, 남다르신 근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하니까, 《나는 온전한 자리에서 온 사람이니》 하나님 자리겠죠, 하나님 자리에서 온 사람이니, 성령 그대로 온 사람이니, 《나는 나의 아버지의 모든 것을 허락 받았다.》 온전한 자리가 하느님 아버지겠죠?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 온 사람이다. 아버지의 분신이기 때문에 '난 아버지의 모든 권능을 허락 받았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뭘 얘기하죠? '영생을 주는 권한을 갖고 왔다' 이렇게 얘기 하시죠? '영생 하라는 건 아버지의 명령이다,' 이런 얘기도 요한복음에서 나오는데 도마복음하고 잘 연결돼요. 표현이 좀 달라서 그렇지,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살로메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라》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 온전한 자녀다' 이렇게 얘기하신 거죠. 그러니까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성도입니다. 이런식으로 답을 한거구요. 거기에 대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라' 《만약 하나가 온전하면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 쪼개진다면》 그런데 그 하나가 쪼개진다면, '하나가 온전하다면' 이 얘기는 하나가 더 어떻게 발전하는게 아니라, 오롯이 하나 상태로 있다면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 하나가 빛의 자리 아니에요? 자, 지금 이게 하나입니다. 자, 에고의 세계는 수만가지로 쪼개진 세계겠죠. 그런데 이 하나인 세계, 성령의 세계, 성령은 성부 아버지의 영이니까 아버지 자리입니다. 성령 그러면 아버지 자리인줄 알아야 돼요. 자, 아버지, 빛으로부터 이 자리가 또 빛이에요. 빛으로부터 온 에고, 빛으로부터 온 혼과 육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성자죠? 성자가 있고 성도가 있습니다. 지금 성자, 성도 다 나왔죠? 온전한 자리에서 온 온전한,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하게 부여받은 자녀, 성자, 그리고 성도는 그 온전한 성자의 제자, '당신의 제자입니다' 그랬잖아요, 성도, 다 하나님 자녀죠, 다 하나의 온전한 빛으로부터 거듭난 존재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서 더 온전해지려고 노력해야 되죠.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노라 만약 하나가 온전하면' 이 하나가 우리 안에서 온전하면 우리의 혼과 육은 빛으로 가득 찰 거다. 그러니까 영혼육이 다 빛으로 가득차겠죠. 영이 빛이니까, '만약 하나가 쪼개진다면' 《어둠으로 가득 찰 거다》 이 소리는 이 하나 자리를 놓친다는 거죠. 성령 자리를 놓치면 에고의 분열상만 남잖아요. 에고 세계의 특징이 뭐죠? 이원성 이죠. 이원성의 세계에 빠져들면, 이원성 세계에 빠져든 존재를 우리가 뭐라 그래요? 혈육의 자녀, 이 성령의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빛의 자녀, 혹은 하나님 자녀,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각주 좀 볼까요, 두 명이 한 침상에 누웠다, 한명 죽고 한명 살거다. 이런식 스토리가 많이 나온다, 예수님이 주로 하시던 말씀이었다, 싶은게 마태복음에는 뭐라고 되어있는지 보실래요, [인자가 임할 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자, 인자가 임할 때부터 읽을게요. 노아의 방주 사건 얘기하면서 그때도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홍수 온다고 준비하자고 할때 넋 놓고 있다가 다 당했지, 이 소리에요. 인자가 임할때, 진짜 최후의 심판의 날에도 마찬가지야, 메시아가 임할 때도 마찬가지야, [그때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명은 데려가고 한명은 버려둘 거야,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명은 데려가고 또 한명은 버려둘 거야] 이 정도 사건이야, 이런 일이 일어날 거야, 한명은 누구겠어요? 하나님 자녀, 한명은요? 꼭 두명 중에 한명씩 선택한다는 게 아니죠. '둘이 있다가' 상징하는 게 둘이 혈육의 자녀와 하나님 자녀를 상징하는 거죠.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어느 날에 그대들의 주님이 임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임할지 모르기 때문이야' 이거죠.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명은 데려가게 되고, 한명을 버려두게 되고, 그렇죠? 그런데 이 얘기가 누가복음에 가면 또 똑같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보면 이겁니다. 누가복음에 이 얘길 제가 왜 해드리냐면,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 죄수 이야기에 대한 유튜브 강의 제가 올려 놓은 거 있어요. 그거 보신분들 아실텐데 다른 복음에는 없어요. 다른 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좌우에 죄수 둘이 더 매달려 있다가 한 사람은 어때요? 누가복음 이야기에요, [십자가에 매달린 재수 중에 하나는 비방을 해요, 그대가 그리스도 아니냐? 너와 우리를 한번 구원해보라. 그러자 한 죄수가 그 사람을 꾸짖어주면서 옆에 또 한 죄수는 니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런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갑자기 이해하죠?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까지 얘기해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즉, 천국이 임할때 저를 생각하소서] '예수님께서 천국 가실때 저를 생각하소서' 천국이 임할때가 아니라 지금 천국에 가실때죠. 예수님 지금 돌아가시면 천국 가실텐데 저를 좀 생각해주세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르시길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그대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얘기, 이 말 많이 인용하시죠? 그 죄수도 봐라, 마지막에, 죽기 전에 예수님을 인정했더니 낙원 가지 않냐? 이 말이 좀 이상하죠? 이 말이 다른 복음에는 없어요, 다른 복음에 이런 말이 없어요. 그래서 다 비방을 하거나, 아예 다뤄지지 않거나 합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누가복음 얘기는 평소 예수님이 하시던 그 얘기를 여기에 집어넣은 거에요. 돌아가실 때도 '한명은 같이 가고 한 명은 못갔다' 이 얘기하고 싶었던... 아무튼 혈육의 자녀는 지옥 유황불에 던져져서 사망을 맞이하고, 여기서 사망이라는 것은 지옥불에 던져져서 고통받는 걸 말합니다. 영생을 못얻은걸 사망이라고 하지, 그냥 혼 자체가 사라지는 걸 말하는건 아니에요. 또한 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혼은 어떻게 돼요? 천국간다. 누가복음은 이 메시지를 넣고 싶었던 거에요. 다른 복음에는 없는 얘기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후대에 누가 넣은 겁니다. 누가복음 저자가 넣으신 거겠죠. 자, 그리고 각주 2번 온전한 자리 한번 볼까요? [온전한 자리는 빛인 하나님이며] 하나님 자리, 성령 자리를 우리가 뭐라고 알죠? I AM 자리이며, I AM은 뭐죠? 여기는 '나는 있다'만 있죠? '없다'가 없죠? '나는 있다'는 경지예요, '나는 있다' 여기서 나는 나만 있지 남이 없죠, '남이 없는 나' '우주적인 내가 있다.' 하는 그 자리입니다. 알아차리는 인식 주체가 있다. 여러분도 지금 에고의 마음의 세계에서, 혼과 육의 세계에서, 생각도 쓰고, 감정도 쓰고, 오감도 쓰는데, 자, 생각하건, 울고 웃건, 자, 생각한다는 건 따지는 거죠. 이게 옳다, 저게 옳다. 따지는 거건, 울고 웃건, 보고 듣고 맛보건 다 이원성의 세계 아니에요? 이원성에서 빠져나온 온전한 하나인 자리, I AM이 우주의 온전한 하나입니다. '이 자리에 에고의 내가 아니라 우주적 내가 있다' 나와 남을 모르는 내가 있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내가 있다. 그 자리, 그 I AM 자리, 거기가 온전한 빛의 자리입니다. [성자 그리스도는 온전한 빛의 자녀고] 온전한 빛의 자녀고, [그러니 아버지의 모든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그의 제자도 성자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전한 자리에서 온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죠, [그러려면 무엇보다] '하나' 이 하나 자리 알아야겠죠, 하나, 성령 자리를 깨달아 [하나가 돼야 된다. 그래야만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나를 깨달은 하나님 자녀는 영생을 얻을 것이요, 욕정을 따르는 혈육의 자녀는 파멸을 얻을 것이다] 이게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인데 이 메시지가 왜곡되서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만 인정하면 낙원갈 수 있다. 이런식 스토리로 변질되어 버린 겁니다. '한명은 죽고 한명은 산다' 이 메세지는 예수님이 계속 얘기하셨던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 메세지라는 걸 생각해 보시구요. 《62 절 비밀스러운 가르침》 도마복음에 아주 예수님의 심법이 나와요. 비밀스러운 가르침, 뭔지 한번 보실래요? 기대 하셨다가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비밀스러운 가르침》 이걸 한문으로 적으면 밀교죠, 은밀한 가르침, 아주 심법, 핵심이 되는 비법이 있는데, 《거기 합당한 자들에게 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드러낼거야.》 '내 비법 들을 수 있는 제자들 한테만 비법 가르쳐줄 거야' 근데 뭐라고 하세요? 그 가르침을 드러낼건데, 그 비법이 이겁니다. 《그대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와 다으세요? 이건 익히 아는 얘기 아니에요? 이게 왜 비법일까요? 비밀스러운 가르침,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게 이원성의 세계잖아요. 이원성의 세계에서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자선을 펼칠때 이원성의 세계의 마음, 이원성의 세계의 마음을 가진 존재가 누구죠? 혈육의 자녀, 혈육의 자녀의 마음으로 자신의 탐진치, 자신의 탐욕과 자신의 분노의 감정에 빠져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마음으로 뭔가를 하라, 이거죠. 그 얘기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남을 나처럼 사랑하면서 황금율을 실천해야지 나와 남을 구분하고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 수를 쓰면 그건 혈육의 자녀의 마음이다. 이게 비법이라는 거에요. 이게 천국가는 비법이라는 겁니다. 왜? 지금 이게 황금율의 핵심이잖아요. 황금율의 핵심이예요. 그 황금율의 핵심, 진정한 사랑, 불교식으로 말하면 뭐죠? 불교식으로 말하면 지금 혈육의 자녀가 있고, 하나님 자녀가 있는데, 혈육의 자녀는 탐진치의 마음으로 살아가겠죠, 마음을 쓰겠죠, 하나님 자녀는요? 이쪽은 육신의 명령을 따르겠죠, 육신의 명령, 먹어라, 분노해라, 이런 명령을 따르겠죠, 하나님 자녀는요?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그 핵심이 뭐예요? 사랑하라, 정의로워라를 하나로 딱 말할 수 있는게? 황금률 입니다. 황금률 안에 사랑과 정의가 다 들어있죠. 네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해줘라,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은, 그 말은 그대로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어요?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은 하지마라, 받고 싶은걸 먼저 해줘라, 사랑, 당하기 싫은 일은 남한테 하지마라, 앞장서서 하지마라, 네가 먼저 하지마라, 이게 정의죠, 사랑과 정의의 비법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황금률의 이 가르침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비와 사랑이죠. 불교에서는 사랑바라밀이라고 그래요, 바라밀, 바라밀은 궁극이라는 뜻입니다. 궁극의 자비, 궁극의 사랑, 요즘식으로 말하면 찐자비, 찐사랑이죠. 참된 자비, 참된사랑, 참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참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참된 사랑은 비법이 있어요. 바리새파처럼 하면 안돼요. 바리새파는 혈율의 자녀들입니다. 그쪽은 자기들의 탐욕 때문에, 자기들의 명예 때문에, 자기들의 지위 때문에 베풉니다. 천국 가고 싶어서 사랑을 베풉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녀는요? 남이 나같아서 베풉니다. 남이 나 같아서 베풉니다. 이게 비법이기 때문에, 이게 궁극의 사랑은 결국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거니까 이게 이제 하나됨이죠. 그 안에 하나됨이 들어있죠? 나와 남이 하나라는 걸 깨달아야죠. 하나인 자리는 하나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깨달은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하나님을 깨닫게 되있어요. 사랑이 하나님 이신거죠. 그래서 이 사랑을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임하는 것을 알게 되고, 왜냐? 하나님이 사랑이시니까, 하나님이 원래 사랑이니까, 내가 사랑을 하면 내 마음엔 이미 하나님이 와 계신다. 이게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마음을 쓰면 거기엔 이미 온전한 자리인 성령이 임해있다'는 거죠.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비법이 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건 이원적인 마음으로 하지말라는 거예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한테 뻐기려고 하는 게 우리 에고의 마음이죠. 이원적인 마음이죠. 내가 한 사랑을 남한테 뻐기려고 하죠. 그게 아니라 여기서 오른손, 왼손은 이원적인 세계를 말하니까, 나와 남을 말할 수도 있겠죠. 나와 남을 따지지 말고, 둘이 아닌 마음으로 해라, 이겁니다. 꼭 오른손, 왼손에 집착하지 마시고요, 오른손, 왼손 이 얘기는 이원성의 세계에 빠져서, 둘이 되버려서 하지마라, 둘이 되버리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한테 자랑하게 되있단 말이에요. 이해되시죠? 각주 3번 보실래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4절 얘기에서 이렇게 심각하게 얘기 하시잖아요. '사람들한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정의를 행하지마라. 그대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대들은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한테는 어떤 명예를 얻을지 몰라도 아버지가 원하는 정의가 아니다, 참 정의가 아니다. 또 [그대들이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마라] 자랑하지마라, [내가 그대들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그들은 이미 충분히 보상 받았다.] 명예 얻었지 않냐? 니가 원하는 것을 얻었지 않냐? 그런데 아버지한테 까지 보상을 바라느냐? 이거죠. [그대들이 자선을 베풀때는] 여기서 비법이 나오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러니까 오른손이 왼손한테 나팔 불지 말라는 거예요, 이원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여 그대들의 자선을 숨겨두어라.] 남한테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얘기는 '내가 하는데 어떻게 내 오른손이 하는 일을 내 왼손이 몰라' 이렇게 접근하시면 안돼요. 남한테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팔 불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말씀이 뭐예요? 숨겨두라고 하시잖아요. '남한테 자랑하지마라' 아니 남이 나같아서 했는데 또 남을 세워서 남한테 자랑하고 있으면 그게 온전한 사랑의 베품이냐? 이거죠. [그러면 은밀한 곳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우리 안에 임해 계신데 아버지가 다 보고 계시죠. 아버지가 우리 양심의 본체인데, 우리 안에서 자명, 찜찜의 양심의 신호를 다 보내서 우리에게 갚아 주시죠. 양심으로 하면 뿌듯함을 주시겠죠. 잘못하면 찜찜함을 주시겠죠. 자, 이렇게 보실수 있어야 돼요. 제 설명 좀 붙였어요. [자선을 즉, 보시를]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시, 지금 예수님은 자선이라고 강조했죠. 자선 얘기를 하셨었죠, '자선을' [베풀되,] 오른손이 지금 뭘해요? 자선을 베푸는 거잖아요, '자선을 베풀되' [나와 남을 구별하는 에고의 마음이 아니라,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성령의 마음으로 베풀어야 된다.] 성령의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면 [그러한 자선 즉, 보시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죠?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누가 한 거예요? 그 사랑, 그 자선은? 하나님의 영이 했잖아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인 하나님 뜻에 따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신 겁니다.] 우리의 혼과 육을 통해 자선을 펼친거예요. [이러한 참된 자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은 밝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점점 밝아짐이 바로 보물이 쌓여가는 겁니다.] 공덕이 쌓여 가는 겁니다. [이 보물이 쌓여가면 우리는 무한한 축복] 즉 불교에서 말하는 [무량한 공덕을 받게 됩니다. 이 보물외에 다른 보물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자, 나머지는 모두 도둑 맞고 녹이 슬 보물들입니다] 예수님 다른 말씀하고 제가 연결지어서 설명을 좀 드렸어요.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죠? [무상한 지상의 보물에 마음을 주지 말고, 하늘의 보물, 영원한 보물, 녹슬지 않는 그 보물에 마음을 주어라] 이 얘기는 영원한 공덕을 쌓으라는 얘기죠, 불멸의 공덕, 우리가 공덕 쌓아놓은건 절대 어디 안가니까, 누가 훔쳐갈 수도 없으니까 불멸의 공덕, 영혼의 공덕 쌓아놔라. [참된 자선이 사도가 되는 비결이듯이 보시바라밀은 보살이 되는 비결이다] 아시겠죠?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는 비결을 얘기해 준거예요. '오른손이 한일 왼손이 모르게하라' 이 구절을 좀 자세히 볼까요? 각기 4번,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초월하면] 나와 남을 둘러보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을 통해 곧장 일체의 이원성을 초월한 하나의 자리, 순수한 나,] 성령 자리, 같은 얘기 계속 반복되면 재미없으니까 성령을 순수한 나라고 제가 또 불러봤습니다. [아버지 자리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당하기 싫은 걸 남에게 가하지 않고, 내가 받고 싶은 걸 남에게 베푸는 참된 사랑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한분 하나님과 하나가 되라] 이게 경천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하나님 안에 안주하고]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면, 하나님 안에 안주하고 [보면 모든 인류는 하나가 된다.] 왜?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겠죠. 하나님 한 분을 모르고 보면 에고의 세계에서는 천명 있으면 천명이 다른 구별되는 존재가 되버리겠지만 하나님을 알고 보면, 일체가 하나님 자녀가 되어보니까 전체가 하나가 되버리죠. [그러니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이웃을 내 몸으로 여기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이게 경천이었으면, 아까 하나님 사랑이, 이건 애인이겠죠. 남은 사랑하라. [나와 남을 하나로 여기는 상태에서 뻐기지 않는 자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선을 베풀어야만 참된 사랑이 된다. 이런 둘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다] 지금 이 가르침 안에는 칭의, 성화가 다 들어있잖아요, 사랑을 통해서 하나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영접하고 사랑을 꾸준히 펼침으로써 내 영혼이 성화, 거룩해 집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계속해서 사랑의 역사를 하니까요. 내 혈육이 하나님 역사의 도구가 되게 하는 거죠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고, 기도교에서 말하는 사도의 경지입니다. 자, 요한일서 보실래요, 4장 16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 나와 남을 하나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러면 막연하게 생각하실까봐 제가 설명을 좀 달아놓은 거예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불교에서는 뭐라그러죠? 자, 나와, 타, 남이 불이, 둘이 아니다. 이게 사랑이예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이게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사랑이죠.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그 마음을 여러분이 먹으셔야 돼요.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리에는 나와 남이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안에 머무는 사람은] 나와 남을 구별 안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남한테 자선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시게 됩니다] 자, 그러면 성도는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은 성도 안에 머물게 되는 거죠. 죽이죠, 이게 예수님의 경지 아니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나 있다' 예수님이 대신 비법을 얘기해 주신 거예요. 성자가 되는 비법을 성도들에게 얘기해 주신 게 요한일서에도 이렇게 잘 남아서 전한겁니다. 사도니까 이런 말할 수 있죠. 사도를 통해 전해진 말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하는 소리, 자, 불교경전 볼까요? 금강경에 [형상에 머무름이 없는 자리에 응하여] 자, 형상이란건 이원성의 세계입니다. 이원생의 세계를 초월하는 자리에서 응하여, 거기서 형상, 마음을 내봐라. 형상을 초월 하라고만 안해요. 온전한 하나님 자리에 머물면서, 하나님 안에서 머물면서, 이게 칭의의 경지죠. 하나님 안에 머물면서 [형상을 내봐라] 이게 뭘까요? 이 형상이라는건, 적어 놓으세요, 보시바라밀 이예요. 육바라밀 이예요. 육바라밀 중에 대표적으로 금강경에서는 보시바라밀을 육바라밀 중에 맨 앞에 있으니까 강조하는데 실제 금강경이 강조하는건 육바라밀 중에 반야바라밀이 제일 강조되지만 실천적 바라밀로써, 덕목으로써 강조되는건 보시바라밀 입니다. 그러니까 자 이 말이에요. 어떤 형상에도, 마음과 물질의 [모든 형상을 초월한 자리에서 머물면서] 거기 머물기만 하면 안되고 거기서 뭘 해야돼요? 기독교식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뭘 해야돼요? 아버지의 영과 하나되서 아버지의 뜻에 맞게 뭘 해야돼요? [사랑을 베풀어라]는 거예요. '참된 사랑을 베풀어라' 이게 금강경 핵심입니다. '마음을 내라' 하는건 막연하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육바라밀을 하라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적인게 뭐예요? 보시바라밀, '사랑바라밀을 베풀어라' 이거죠. 자비, 사랑을 베풀어라. 대표적인게 기독교에서는 자선, 불교에서는 보시입니다. 사랑은 네가 바라는것 남한테 먼저 줘봐라. 그게 사랑이죠. 자, 금강경에 이 구절을 좀더 다시 자세히 풀이한게 이거예요. [형상에] 이원성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서 뭘 하라? 이제 구체적으로 얘기 해주잖아요 . [보시를 해봐라] 그러니까 지금 '거기서 마음을 내라' 할 때는 육바라밀을 통으로 얘기했다면, 그 중에 구체적으로 말할 때는 보시 얘길 해준단 말이예요. '보시를 하라' '만약 보살이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이 얘기가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가 뭐예요?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보시, 이게 뭐예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자선을 말하는 겁니다. 같은 거잖아요. 그러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다]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 이게 '하나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받는다' 이 소리라는 겁니다. 같은 얘기입니다. 자, 노자 얘기 두개 가져왔어요, 한번 봐보세요. 노자 이야기 한번 봐보세요. 도마복음 할 때 노자 얘기도 간간히 나옵니다. 노자는 어떻게 얘기 하셨을까요? [성인은 쌓아두지 않는다.] '성인들은 절대로 자기 재산을 쌓아두지 않는다' 왜? [남을 위하니 자기 것이 더욱 불어나며,] 남을 나처럼 보니까 남을 도와줘요, 이 재물이 쌓이면 남을 도와줘요. 왜? 그러면 남이 나랑 둘이 아니니까 남이 기분 좋으면 내 재산이 불어나는 거라는 거에요. [남에게 베푸니 자기 것이 더욱 많아진다.] 남한테 주는 것도 본래 근원이 하나니까, 하나의 도의 자녀들이니까, 근원이 하나니까, 도가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게 노자 주장이죠? 그러니까 다 똑같은 도의 자녀들이니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니까, 나를 위해서 쌓아두지 않다는 거예요. 필요한 사람한테 베풀어서 오히려 자기 것을 더 불린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늘의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되 해롭게 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만물을 위해주되 다투지 않는다] 만물하고 싸우지 않는다. 왜? 참된 사랑을 베푸니까, 참된 자비를 베푸니까, 노자가 이렇게 얘기해요, '나한테 보물이 세개 있다.' 그 첫째가 뭐예요? 사랑이예요, 자애로움, 자비가 사랑이죠? 자비, 사랑에 해당되는 자비, 정의에 해당되는 절제, 그리고 겸손에 해당되는, 천하에 앞서지 않음, 남 앞에서 뻐기지 않음, 이 3가지가 노자의 보물이라고 노자에 나옵니다. 성인들의 세계는 다 똑같아요. 그럼 노자는 하나님 자녀 입니까? 혈육의 자녀 입니까? 기독교 분들, 크리스천 분들 생각해 보세요, 노자는 하나님 자녀예요? 혈육의 자녀예요? '그래도 교회 안 나오면 아닌데' 이러시면 혈육의 자녀예요. 그런 생각하시는 분들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한테 꼭 뻐기고 자랑하실 분입니다. 자, 노자 이야기 [성인은 만물을 위하되] 성인은 만물을 위하되 [나만 믿으라고 하지 않으면] 성인은 만물을 위해되 나만 믿으라고 하지 않으며 [큰 공덕을 세우고도 내 공덕으로 삼지 않는다] 성인은 만물을 위해주되 나만 믿으라고 하지 않으며, 큰 공덕을 세우고도 내 공덕으로 삼지 않는다. 만물을 위해주는 게 당연한 거에요. 또 다른 나한테, 또 다른 나한테 베푼 거에요. 남이 나 같아서 베푼 거에요. 그러니까 배풀고도 내가 잘났다고 안해요. 이게 오른손이 왼손한테 안뻐기는 겁니다. '큰 공덕을 세우고도 내 공덕으로 삼지 않아요.' 모두를 위하는 것은 이 도의 자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에요. 도가 나를 통해 역사한 거니까 내 자랑이라고 할게 없는 거죠. [자신의 현명함을 밖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나 잘났다' 안 한다는 거에요. 아시겠죠? 자, 여기까지, 63절 볼게요. 《63절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다》 이 구절 들으시면 좀 우울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돈을 많이 가진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나의 돈을 투자해서 씨를 뿌리고 거두고 심어서, 나의 창고를 수확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면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다.》 대박, 이게 혼자 계획을 세우신 거죠. 《이런 생각들을 심중에 두었으나 그날 밤에 죽었다》 완전 우울하죠? 힘 쪽 빠지죠? 《들을만한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쎄죠? 각주 6번 볼까요, 그런데 이 메세지는 뭘까요?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거 아니에요? 제목이? 이제까지 도마복음 읽어 온 일관된 메시지가 있죠. 뭐겠어요?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지금 여기서 영생을 빨리 얻어라' 이거예요. 기약하지마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언제 죽을지 모른다, 자, 예수님 말씀은 이겁니다. 그동안 뭔 얘기를 했죠? 죽으면 답없다, 살아서 답을 얻어라, 저, 여기다 메세지 하나를 추가한 거에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자, 죽으면 답없다, 살아서 영생을 얻어라, 거기다가 이제 쎈거 때렸어요. '내일 죽을 수 있다' 오늘밤 죽을 수 있다, 그러면 답이 뭐예요? 지금 당장에 얻어라죠, 각주 6번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34절, 이 얘기 한번 볼까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러분 이것도 지난 번에 한번 나왔죠? 이 얘기 하고 싶으신 거 아니겠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지금 이 얘기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라. 빨리 영생을 오늘 얻어라' 이정도 메세지라면 거기에 이제 이런 메시지도 있다, 이런걸 제가 또 설명 드리려고 마태복음 6장 31절 34절 이야기를 가져왔어요. 무슨 메시지냐? 그러니까 지금 씨 뿌리고 거둬서 돈 벌고 이런 계획에 올인하면 안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마라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도 찾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대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대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 그대들은 무엇보다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로움을 구하라] 그분의 왕국은 성령 자체도 왕국이고, 성령의 구현도 왕국이고, 이 땅의 성령이 구현되는 것도 왕국이고, 그분의 정의로움 이라는 것은 성령의 진리죠. [그러면 이 모든 것들도 함께 받게 될 것이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도록 해라. 그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내일 일로 미리 오늘밤새 이렇게 내일 어떻게 해서 돈벌것인가 연구하지 말고, 우리는 혈육의 자녀니까 연구 아주 안하면 안되죠. 혈육의 자녀도 사실 우리의 정체성이죠? 하나님 자녀가 되려면 이런 일보다 어디다 더 비중을 두라는 얘기에요? 하느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구하는데 더 몰입해라. 저같으면 이쪽 완전히 버리고 이쪽해라. 이렇게는 말 못 드리겠어요. 51% 이상 이쪽에 공을 들이시면 하나님 자녀 맞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로움에 몰입하는 정도가 51%가 넘어야 그래도 명색이 사도요 보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렇게 저는 정리해 드릴게요. 여기 너무 말이 쎈데, 먹을거, 입을거 하나도 걱정하지 말라는 거냐? 근데 그렇게 걱정하지말라 그러면 더 걱정이 되서 답이 안나와요. 그러니까 거기에 투자하는 삶은 혈육의 자녀의 삶이요, 육의 삶이요, 영의 삶은 하느님 나라와 정의를 구하는 삶이니까 영의 삶에 51% 이상 투자 하셔야 그래도 사도가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성도라고 할 수 있지 않냐? 이 얘기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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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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