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8강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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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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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style="text-align: left;"| 부제 | 갓난아이가 되어라 |- !style="text-align: left;"| 강의일자 | 2020. 08. 08. 土. |- !style="text-align: left;"| 게시일자 | 2021. 01. 03. |- !style="text-align: left;"| 동영상 길이 | 37:36 |- !style="text-align: left;"| 강의 중 인용 도서 | 도마복음 |- !style="text-align: left;"|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x6iw1G8-wyk |} 시작하겠습니다. 44절 부터 하겠습니다. 휴가 끝나고 첫 강의인데 도마복음부터 하고 말씀 나눠야 겠네요. 빨리 한번 보고 말씀 나누죠. 《44절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 이게 기존 복음에도 있죠. 비슷한 말 있는데 좀 달라요. 보시죠. 기존 복음에는 이렇게 되있어요. 누가복음 12장 10절에 [누구든지 인자를 모욕해도] 성자를 모욕해도죠. 인자를 모욕해도, [메시아를 모욕해도 용서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욕한 자는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무시해도 좋은데 성령은 무시하지마라. 이 말씀이 난해한 말씀이죠. 그런데 이해보면 쉬운 말씀입니다만 그걸 이해하기 너무 좋은게 도마복음이에요. 도마복음이 좀더 자세해요. 보시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를 모독하는 자도 용서받을 것이다.》 아버지까지 나와요. 성부도 괜찮다는 거예요. 성부를 모욕해도 괜찮다. 아들을 모독해도 괜찮다. 성자를 모독해도 괜찮다. 도마복음에도 삼위일체적 관점이 나옵니다. 성부, 성령, 성자가 나와요.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이 묘하죠. 성령만은 안된다. 왜 그럴까요? 성부를 모독해도 되는데, 성부를 모욕하고, 모독해도 되는데 성부의 영인 성령을 모독하면 안된다. 이상하지 않아요? 성령은 아버지의 영인데, 본체인 아버지를 모독해도 되는데 그 작용인 성령은 모독하면 안된다. 자, 이거 이해해 보시죠. 각주 2번 보시면 [성부는 우주 만유의 근원인 우주적 하나님을 말한다면 성령은 온 우주와 우리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성부가 본체죠. 자, 보시면 성부라고 할게요. 그러면 이 성부의 작용이 성령이죠. 그런데 성부가 본체고 성령이 작용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볼땐 성령이죠. 우리 안에 있는 성령, 왜 성부는 모독해도 좋은데 성령은 안되느냐? 이렇게도 그릴 수 있지만, 그냥 성령이라고 할게요. 우리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성령, 그러면 우리의 에고의 마음, 그렇죠? 혼과 육의 마음, 여기는 영이구요. 영의 마음,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본질인 우리 각자의 에고요. 수많은 다양한 에고들의 본체는 하나입니다. 우주에서 하나인 성령, 왜 하나의 성령이라고 하냐? 이 성령은 성부의 영이니까, 성부가 본체고, 우주 만유의 근원, 그럴때는 성부, 그 우주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성부 아버지께서 우주 만유와 우리 내면에서, 우리 몸 안에서 역사하실 때는 성령 그러면 이 성령을 그대로 구현한, 혼과 육으로 구현하신 분이 성자, 혈육의 자녀인데, 엄밀히 말하면 혈육을 갖고 있는 자녀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성자, 이렇게 되면 이해가 좀 되시나요? 성자, 성령을 온전히 구현하신 성자, 그리스도를 모독해도 좋다. 성부, 우주 만유의 근원이신 성부를 모독해도 좋다. 그런데 절대 너의 혼과 육에 뿌리인 그 성령은 모독하지마라. 모독할 게 아니라 성령과 접속을 해야죠. 뭐로 접속하냐? 믿음으로 접속합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야 돼요. 믿음이라는 건 성령과의 하나됨 입니다. 성령과의 합일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거는 에고의 믿음이고 성령과 하나로 통하는 믿음은 그게 참 믿음이죠. 진짜 믿음, 그 믿음을 통해 성령과 온전히 하나되야만 우리 혼과 육이, 혼과 육으로만 살던 혈육의 자녀가 영인 성령을 알고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 거든요. 그러니까 성자를 욕해도 좋고, 성부를 욕해도 좋은데 성령을 모독하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용서받지 못한다. 너가 구원받을 길이 없다.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과 만나야지 너희 안에있는 하나님은 모욕하지마라. 이 소리입니다. 성부가 우주 만유의 근원이신 우주적 하나님을 말한다면 성령은 내안에 하나님이에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예요. [성자는 성령의 진리를 온전히 구현한 빛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본체에요. 우리의 본체인 영이예요. 하나님이, 그렇죠? 흙으로 육을 빚으시고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을 넣어 주셔서 우리가 살아있는 혼, 생각, 감정, 오감을 일으키는 혼이 되었다. 이게 창세기 말씀이죠. 성령이 우리의 본체니까 성령을 모른다, 성령을 모독한다, 이거는 이제 구원받을 길이 없어진다. 이겁니다. 그래서 기존 복음 보다 도마복음은 아버지까지, 성부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게 달라요. 신성모독 같지만 이렇게 말씀 하신 뜻을 이해 하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본체인 I AM 영 자리다.] I AM이 영이죠. 그리고 거기 뒤에 생각, 감정, 오감이 붙으면, 물질이 붙으면 혼과 육이 됩니다. [우리의 에고의 참나가 되는 자리다. 우리의 에고가 나라면] 여기 에고도 나죠. 나라면 그냥 나가 아니라 더 참다운 나가 되는 자리다. 왜? 여긴 I AM 자리니까 나는 나죠. 나는 난데 우주적인 나죠. 신성한 나죠. 자, [우리는 성령의 각성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으며 영적인 육체도 이룰 수 없다] 그러니까 칭의가 없이는 성화도 영화도 없다. 뭐 이 소리죠. 그래서 자 이렇게 보시면 44절 이해가 잘 되실 겁니다. 《45절 속마음을 선하게 하라》 이거 보시면 이것도 지난 시간 했던 거랑 이어지네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수확할 수 없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수확할 수 없으니 이는 그것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쌓아 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 악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에 쌓아 놓은 것에서 악한 걸 내놓고 악한 것들을 말한다》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게 밖으로 표현된다' 이거죠. 《이는 그 마음으로 넘쳐나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악한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속에 꽉 찬게 밖으로 터져 나온다. 동양 유교경전 대학에서도 지난 시간에 살펴 봤었죠. 나무가 선해야 열매도 선하다. 나무가 악하면 열매도 악하다. 이런 얘기도 했었구요. 그 정도 떠올리시면서 한번 보죠. 속마음을 선하게 하라. 각주 3번 보시면, [이 독사의 족속들아] 예수님은 이렇게 욕을 되게 잘 하세요. 속마음 얘기를 할꺼면 우리 지난번처럼 여기를 성령 그러구요. 우리의 에고의 마음이라면, 욕심의 마음이라면, 우리 안에서 이렇게 샘솟는 양심의 마음, 한번 보죠. 여기는 인간의 욕심의 마음이라면, 여기는 양심의 영역이라고 보구요. 이렇게 그림 그려놓고 볼게요.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꽉 찬게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았다가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내놓는 법이다] 똑같죠. 마태복음 12장 34절, 35절 말씀이에요. 이건 되게 상식적 이잖아요. 속에 선한 마음이 밖으로 나온다. 악한 마음이 밖으로 나온다. 이때 우리 속마음 관리가 중요한데, 속마음을 들여다 봤을 때 이 속마음에서 뭐가 어떻게 돼야겠습니까? 성령의 작용으로 터져나오는 이 양심의 마음이 우리 속마음에서 51% 이상 차지하고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게 이제 사실은 선한 나무죠? 평소에 밖으로 말과 행동, 밖으로 표현하는 게 언행이라면 언행으로 표현되기 전에 속에 뭐가 꽉차있냐? 욕심이 51%냐? 양심이 51%냐? 이렇게 쉽게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그 양심이란 건 근본적으로 성령의 열매로 우리 마음 안에서 이렇게 샘솟는 거룩한 마음일거 아니에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써의 마음이고, 사랑의 마음, 양심의 마음,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서 늘 샘솟아야 된다. 지금 그러시는지? 그러면 이게 왜 이렇게 성령으로부터 나와야 양심이란 말씀을 드리냐면, 우리도 기본적으로 양심을 느끼거든요. 우리가 무의식 중에도 지금도 성령이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어요. 성령은 우리의 영 이니까,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혼, 욕심이나 양심은 다 혼의 세계죠. 혼 안에서 영으로서 계속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영의 상태, 영을 모르고 살더라도 계속 양심은 솟구칩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우리 안에서 미세하더라도 계속 우리를 자극하고 인도하거든요. 욕심도 솟구치지만 양심도 솟구칩니다. 그래서 본인이 양심의 뿌리가 성령이라는 걸 모르고 살기 쉬워요. 무의식적으로 '난 양심적이야 나만큼만 하라 그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양심이 내 마음 같단 말이예요. 그냥 에고의 마음, 그냥 혼으로 느끼니까 내 에고의 마음 아닌가? 이 뿌리를 알아내야돼요. 양심이 어디서 올라오나, 이걸 알아내야지 칭의, 성화의 단계를 밟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 모든 선의 근원이라는 거 알아야 돼요. 에고라는 것은 탐진치가 본성이고 지혜와 자비의 마음은 성령에서 솟구치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제가 표시를 해드리는 거예요. 십자가에 진리가 내 안에서 솟구쳐서 지혜와 사랑으로 내 마음을, 내 혼을 공명시켜 놓는다. 자, 기억나시죠. 차가운 쇠공, 여기는 뜨거운 불 그 자체라면 타오르고 있는 쇠의 영역, 여기까지가 우리 속마음이다. 이걸 사도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늘 식어있는 이 욕심은 겉사람 이라고 불렀다. 탐진치의 마음이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마음이라면 반대로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겠죠.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안에 늘 쌓여 있어야, 선한 게 쌓여 있어야 밖으로도 말과 행동으로도 선한 게 나온다. 악한 게 쌓여 있다는 얘기는 속에 욕심이 51% 이상, 이 영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타오르고 있는 지혜와 사랑의 마음을 핍박해서 최소화 시키면서 욕심으로 마음을 관리 해놨다. 이거죠. 그게 밖으로 나오면 악한 열매를 맺는 법이죠. 이 정도 얘기가 중요해요. 다른 얘기들은 다 아시는 얘기 일거고, 그러니까 사도바울 얘기 좀 들어볼까요. 에베소서 3장 16절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해] 성령을 통해서 입니다. '성령을 통해' [여러분, 즉 성도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길] 성령이 계속 여러분들 안에서 역사해서 여러분 내면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 놓기를,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계속 기도하는 게 '여러분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양심이 51%가 되기를' 이 소리랑 지금 똑같은 소립 입니다. 제가 '양심 51% 꼭 되야 됩니다.' 라고 외치는 거나, 사도 바울이 성령을 통해 여러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같은 소리입니다. 속사람이 라는건 기독교식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이예요. 굳이 말하면 혼, 성령으로 거듭난 혼, 양심의 혼을 말합니다. 다시 태어난 혼이란 뜻으로 바울이 새사람 이라고도 해요. 속사람, 새사람, 그럼 겉사람은요? 옛사람이죠. 혈육의 자녀로서의 마음, 탐진치의 마음, 그게 겉사람이자, 옛사람이고, 새사람 이예요. 왜? 옛사람이라고 하느냐? 혼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혈육으로만 살아가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세속의 영,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는 탐진치라면,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성령으로 인해서 거듭난 거에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지만 일반인도 성령이 안에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해 숨쉬고 움직이기 때문에 성령의 양심을 못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일반적으로 양심을 다 자각하는 거예요. 다만 본격적으로, 의식적으로 성령을 체험한 뒤에 성령에서 솟구치는 그 에너지로 타오르는 우리의 양심이라는 건 다르죠? 그래서 거듭난 양심, 이건 거듭난 양심이라고 불러주는 게 좋습니다. 거듭난 양심, 성령으로 인해 거듭난 양심, 속사람, 새사람, 이렇게 성경을 보실 때 이런 관점에서 보시면 이해가 아주 쉬우실 겁니다. 맛이 좀 달라요. 그래서 더 보실래요?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참 잘했어요. 속사람, 겉사람, 이게 유교로 오면 양심, 욕심의 얘기입니다. 유교로 오면 이 욕심을 사람 마음이라고 인심이라고 불러요. 그러면 이 속사람에 해당되는 양심을 유교에서는 뭐라고 부르냐? 도심 이라고 그래요. 도는 진리란 뜻이잖아요. 진리의 마음 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적인 마음, 탐진치의 인간적인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한테서 온 진리의 마음, 진리 그대로의 마음이란 뜻으로 양심을 도심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다 지금 잘 통합니다. 속사람, 겉사람이나 도심, 인심, 욕심, 양심, 이게 잘 통해요. 자, 고린도후서 볼게요. [우리는 낙심하지 않으니 겉사람] 육체를 따르는 혼, 이 혼이 육체적 만족을 추구하는, 쾌락을 추구하는 혼을 말합니다. 혈육의 자녀로써의 혼은 [시들어가고 우리의 속사람] 성령을 따르는 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어요. 양심의 혼은 [날로 새로워 집니다] 이게 지금 혈육의 자녀냐? 하나님 자녀냐? 결정하는 게 이렇게 설명해 놓으면 간단한 것 같지만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여러분 이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럼 양심만 있을까요? 아니에요. 욕심이 있어요. 사도 바울도 힘들어 했어요. 자, 반대로 욕심이 있는 사람은 양심 없나요? 아니요. 양심이 있어요. 성령이 욕심으로 꽉 찬 혈육의 자녀도 그 안에 성령이 임재해 계십니다. 그래서 양심은 솟구치게 되어있어요. 뭐가 문제죠? 이거죠. 뭐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느냐를 가지고 혈육의 자녀, 하나님 자녀가 구분되고, 이긴자와 진자가 구분 됩니다. 이 51%는 이긴자예요. 하나님 자녀의 마음이 혈육의 자녀의 마음을 이겼잖아요. 이게 이긴자 입니다. 그럼 이겼으면 영원히 이기냐? 아니에요, 왔다갔다해요. 지면 또 이겨 놓고, 지면 또 이겨 놓고, 이게 이긴자라고 했죠. 이게 칭의, 성령을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에서 나오는 이 진리의 마음을 이해해서, 진리의 마음, 이 도심으로 살다보면 뭘 알겠습니까? 도심, 내 마음 이미 도심이 됐으면, 도심으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성령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뭘 알겠어요? 도를 알겠죠. 처음에 이해가 안되도 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진리이자,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뭔지를 이해하게 돼요. 자기가 살아가는 중에 이해해요. 이론으로만 아는게 아니라, 살아가는 중에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자기 마음이 타오르니까, 차가운 쇠공으로 살다가 어느날 부터 불이 들어와서 내 마음이 타오르니까 찬 부분은 여전히 있어요. 하지만 뜨거운 부분이 많다 보니까 차갑게 살 때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불이 뭔지를 이해하게 되겠죠? 여러분이 차가운 쇠공으로 사는데 아무리 이론서를 들고 오고 경전을 들고 와서 불이 뭔지? 따뜻함이 뭔지? 열기가 뭔지? 공부해도 남 얘기죠. 자기가 타오르니까 알게 돼요. 이렇게 하면 타오르고, 불이 뭔지? 내가 이미 타오르는 쇠공이니까 나를 만나는 애들은 다 타버릴 거 아니에요. '이런게 불이구나' 하고 쇠공일 때 모르던 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성화, 거룩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혼이 거룩해지는 거예요. 칭의, 성화 얘기를 드렸어요. 또 고린도후서 5장 16절, 17절 말씀 볼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사람이 됩니다, 새로운 영혼이 됩니다. 이거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을 말합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새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말한 바울도 뭐라 그랬어요? '내 몸의 한 부분은 여전히 혈육의 자녀로써 사망의 법을 따르고 있다. 욕심의 법을 따른다' 고 했거든요. 이 말씀은 좀 과한 말씀입니다. 완전히 지나간 건 아니에요. 헤게모니 뺐겼다는 거지, [성령의 열매] 또 갈라디아서 5장 22절, 25절 말씀 성령의 열매는 뭐예요? [사랑] 자, 이것도 한번 볼까요? 이건 이렇게 볼까요? 불교랑 육바라밀 합쳐 볼까요? 저희 학당에서 강조하는 가르침 이기도 하죠. 이쪽이 사랑 쪽이면, 사랑, 정의, 불교의 육바라밀과 유교의 인의예지신을 합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쪽은 인욕, 이쪽은 정진이니까 성실, 이쪽은 깨어있음, 몰입, 이쪽은 지혜, 이렇게 양심의 6가지 덕목, 이게 꽉찬 마음이 불교에서는 보리심, 유교에서는 양심, 지금 기독교에서는 속사람인 거에요. 똑같아요. 중생심이 욕심이고, 기독교에서는 겉사람이고, 똑같아요. 유불기가 똑같아요. 한번 보실래요? 성령의 열매는 사랑, 사랑 나왔어요. [기쁨] 이건 깨어있음 이니까 몰입 입니다. [평화도] 몰입 이구요. 불교에서 말하면 선정이죠. [인내] 인욕이죠? 유교의 예절이고, [자비도] 역시 사랑의 다른 모습이죠. 자비, [선량한 게] 항상 악을 거부하고 선을 지향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 선을 알아내는 게 지혜의 제일 중요한 역할이죠. 그 다음에 정진은 [성실] 성실, [온유도] 사랑 쪽 이구요. [절제가] 정의 쪽이죠. 자기를 단속하는 절제, 자, 성령의 열매 안에 육바라밀 다 들어있는거 아시겠죠? [어떤 법도 이것들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탐진치는 양심 못 막아, 보리심 못 막아, 성령의 열매, 성령의 마음 못 막아 이거에요. 성령과 공명하는 마음 못 막아, 성령을 따르는 혼을 못 막아, 성령으로 거듭난 혼을 못 막는다. 이겁니다. 이렇게 하면 말이 쉬운데 성령이 충만할 때, 51% 일때, 탐진치는, 욕심은 절대 못 막습니다. 이건 맞는데 이 힘이 약해지면 어떻게 돼요? 또 이깁니다. 그래서 이건 이거에요. 물이 '불을 끌순있어' 이건 진리죠. 그런데 불이 너무 많으면, 물 양이 적으면 못 끄겠죠. 그러니까 지금 이 말씀은 '어떤 법도 이것들에 저항하지 못해' '어 그럼 이것만 찾으면 끝이네요' 이렇게 쉽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자기 내면에서 끝없이 관리해 가야 돼요. 성령의 마음이 51% 이상이 되게, 그 고민을 써 놓은게 로마서예요. 바울의 고민을 써 놓은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도들은, [자신의 육체를 그것의 욕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가야 되니 성령을 따라 갑시다] 그래서 이 소리는, 혈육의 자녀로서의 겉사람의 마음을 십자가에 우리 예수님 못 박힐 때 우리 같이 다 못 박았다고 생각해야 된다. 이거죠. 예수님이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듯이 그러면 우리도 우리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 '못 박아야 되는데 못 박았다' 라고 생각하고, 성령을 만나면, 성령을 만난다는 게 이미 이 욕심을 제압하는 행위 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은 행위입니다. 다만 못 박았다고 아주 끝나는게 아니다. 우린 예수님의 경지가 아니니까. 끝없이 욕심은 다시 살아 나온다. 우리 마음이 조금만 방심해도 다시 치고 올라온다. 한번 못 박아서 끝났다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예수님 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못 박듯이 우리도 못 박아야 된다. 실제로 우리도 부분적으로 못 박았다. 이 말은 맞습니다. 왜? 성령 안에 있을 때는 이 성령과 공명하는 성령의 이 9가지 열매를 누리는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 차면 탐진치는 자취를 감추거나 제압되서 힘을 못쓰니까요. 분명히 못 박은 맛이나죠. 다만 또 살아 나온다. 예수님처럼 온전히 못 박았다는 건 진짜 온전한 경지의, 천주교에서 말하는 완덕의 경지에 들어갔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 부분도 생각해보시고, 또 하나 더 있네요. 하나 더 있죠. 에베소서 4장 22절, 24절 말씀, [여러분은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구습에] 이게 이제 옛사람이죠. 겉사람, [젖은 옛 사람을 버리고] 옛 사람을 못 박아 버리고,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예수님처럼 혈육의 자녀의 마음을 아주 못 박아 버리자. 제가 볼 때는 그 못 박음이라는 것도 역시 51%에서 헤게모니를 예수님은 완전히 제압했다는 거지 예수님이 이런 욕심이 아예 없다. 저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왜? 이 영혼육을 지닌 존재가 욕심이 없을 순 없거든요. 다만 못 박았다는 건 예수님은 영원히 헤게모니를 뺏기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갔다. 그렇게 보시면 좋겠어요. 여러분도 영원히 양심이 헤게모니를 욕심한테 뺏기지 않는 경지에 가시면 그게 죄없는 존재가 되고, 성자가 되는 길이고, 예수님처럼 완덕을 이루는 길이라고 보시는 게 좋겠어요. 욕심 자체를 완전히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시면 오히려 가르침이 더 왜곡 됩니다. 노파심에 말씀 드렸고요. 지금 바울 말은 좀 쎄요. 옛 사람을 못 박아 버리고, 옛 사람을 버리고,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데 속사정을 알고 들으시는 게 좋겠어요. [여러분은 혼과 영을 새롭게 하여] 어떻게 혼과 영이 새로워지죠? 내 영이 성령 이라는 걸 깨닫고 나면 내 혼이 성령과 공명하는 혼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영과 혼이 새로워져요. 이게 새 사람이예요. 그 영혼은 어때요? 성령 안에 있는 이 진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바라밀의 진리, 지금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성령 안에 있을 땐 9가지 진리 아니에요? 9가지 진리를 그대로 구현한 혼, 성령의 진리를 구현한 혼이죠. 그래서 이게 9개죠. 8방 두르고 가운데 점하나 찍으면 9개 아닙니까? 9개의 진리를 내 혼으로 온전히 구현해 낸다면 엄청나죠. 그게 이제 새 사람이에요. 새로워진 영혼 [진정한 정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진리를 실천하는 게 정의죠? 정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난 영은 속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 영혼이 새사람이 되야 된다. 이 소리는 입니다. '새사람을 입는다' 라고 표현하는데요, 여기까지, '속마음 선하게 해라' 에서 제가 멀리 가봤어요. '속 마음 선하게 하라' 에서 좀 멀리 가봤습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셔야 속마음이 선하다는 게 뭔지 좀 감이 오실 것 같아서요. 오늘 46절 까지는 해볼까요. 46절 까지 한번 보겠습니다. 《갓난 아이가 되어라》 이런 얘기는 익숙하시죠? '갓난 아이가 되라' 근데 정확히 '갓난 아이가 되라' 는 게 뭔 소리인지는 또 낯서실 수 있어요. 같이 보시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담에서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 많이 쏘신 거죠. 더 큰 사람이 없겠어요? 근데 이 얘기를 고지 곧대로 따라가지 마시고요. 세례 요한한테 상당히 쏴 주고 있다. 이런 느낌으로 들으세요. '립 서비스가 좀 있으시다.' 라고 들으셔야 돼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 '너희가 본 사람 중에 세례 요한이 제일 대단해' 이정도 느낌으로 받아들이세요. '모든 역사, 모든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제일 최고야' 이렇게 이해하지 마시고, 그 당시 이런 화법이, 좀 이렇게 풍이 들어가는 거죠.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 '너희 아는 사람들 중에 세례 요한이 엄청 위대한 사람이야' 이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니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서는 안돼》 세례 요한이 뭐라고 했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 메세지, '회개하라'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해줬죠. 그런데 그 물로 씻는다고 기분은 좀 낫겠지만 뭐 얼마나 변하겠어요? 뭐 물도 깨끗한 물인지 알 수 없는데, 다만 물로 세례를 하듯이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거예요. 그 물로 세례 받는 것을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거라고 본 거죠. 여기서 물이냐? 불이냐? 따지지 마시고 이렇게 물로 우리는 씻어내고 우리 혼, 더러운 혼을 물로 씻어내고 하나님한테 회개한다는 게 이거 아니에요, 세례를 통해,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물의 세례를 받듯이, 우리 혼에서 더러운 부분이 아예 사라지진 않겠지만 힘을 잃고 이 거룩한 마음이 헤게모니를 잡겠죠? 이게 회개죠. 이게 지금 또 회개이자 뭐예요? 천국이 이미 우리 마음에 왔잖아요. 사도 바울이 그랬죠 '천국 이라는 건 성령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런 기쁨과 감사와 정의로움이다. 진리다.' 이 소리죠. 이 안에 다 들어있죠. 천국이 이미 왕림하는 거예요. 세례 요한의 그 말씀들을 예수님이 그대로 받으신 거에요. '야 너희 세례 요한 무시하지 세례 요한이 내가 볼 때 인간 중에 제일 뛰어난 인간이야. 그에게서 눈길 돌리지마' 이 소리는 그의 가르침 무시하지마. 《그러나 나는 말하노니 그대들 중에 갓난 아이가 된 자는》 그대들 중에 갓난 아이로 거듭태어난 자는 다시 태어나라는 얘기죠. 갓난 아이의 마음을 갖춰라, 다시 태어나라. 그런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왕국을 깨닫게 될거야》 지금 같은 소리 입니다. 누구나 갓난 아이가 되라는 것은, 갓난 아이가 상징하는 건 일차적으로 이거예요. 갓난 아이들은 우리랑 뭐가 다르죠? 갓난 아이는 탐진치 없나요? 있어요. 젖 달라고 하고 젖 빨리 안주면 성내고, 그렇게 지혜로워 보이지도 않죠. 갓난 아이도 탐진치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랑은 다른 모습 뭘 보는 거죠? 지금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상태예요. 지금 천지분간이 안돼요. 천지가 나인 상태예요. 그 마음, 갓난 아이의 마음에서 배울 것은 그겁니다. 그 순수한 에고가 고의적으로 탐진치를 부리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지금 나와 남을 구분 못하면서 본능에 따른 탐진치만 부리고 있어요. 그게 우리랑 차이죠. 그래서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이원성을 초월한 그 마음, 우리 학당식으로 하면 뭐죠? 모르는 마음이죠. 우리 나은이 봐도 아직도 천지분간이 안됩니다. 나와 남이 분간이 안되는 마음이 더 많죠. 조금씩 분별을 해내는 거죠. 처음에 천지분별을 못하는 마음이죠, 온전한 마음이죠, 가장 순수한 마음에 가깝다는 거예요. 탐진치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 마음을 회복하라' 이겁니다. 갓난 아이 마음만 너희가 회복하면, 그럼 이게 그거에요. 오직 하나인, 나와 남이 없는 성령 자리, 하나인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다면, 하나인 자리에서 안주할 수 있다면, 천국을 깨닫게 될 것이요, 거기가 천국이죠, 성령과 하나가 된 그 마음이 천국이잖아요. 천국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 왕국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요한보다 더 위대해 질 것이다》 이 얘기하려고 요한을 띄운 거에요. '요한, 너희가 함부로 다룰 사람이 아니야. 요한이 지금까지 인류 중에 제일 뛰어나' 그럼 벌써 질릴 거 아니에요? 약간 이건 방편 입니다. 그랬다가 뭐라고 딱 해요? 너희가 갓난 아이의 마음, 오직 하나인 그 자리에 만들어 갈 수 있다면, 너희가 요한보다 더 뛰어나다. 이해하시겠죠? 갓난아이 한번 보실래요. 이게 아까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종교에서 갓난아이가 강조됩니다. 또 하나 이유가 있어요. 갓난 아이때는, 자 어때요?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나이들수록 저도 이제 에너지가 축나는 게 보이는데, 에너지가 충만한, 애기들 보면 부러운 거 있죠? 정기가 충만해요. 울어도 지치지도 않아요. 인간적 에고로 우는게 아니라서, 오직 하나인 마음, 천지분간 못하는 모르는 마음, 몰라의 마음과 정기가 충만한 상태, 이게 결국 합치면 중국 도교식으로 말하면, 정, 정액과 기, 에너지와, 신, 마음이 조화로운 상태입니다. 나중에 에고가 이걸 다 작살 내놔요. 정신 피폐해지죠, 몸에 정기 소모되죠, 그렇죠? 살다보면 에너지 탁해지죠, 그래서 처음의 순수한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자, 한번 보실래요? [갓난 아이는 나와 남을 둘로 나누지 않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존재] 기독교식으로는 칭의의 경지죠. 이런 경지를 말하기도 하고요. 영화 차원에선 뭐예요? [영적 부활을 이루어낸 그런 거듭난 존재를 말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기가 충만하다는 게 뭐예요? 이게 부활체예요, 부활체, 지수화풍공에 낙원의 다섯 그루 나무, 즉 낙원에 있다는 생명의 열매를 먹은 상태에 가장 가깝다는 거예요. 그걸 상징하는 거에요. 애들이 부활체 상태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순수한 에너지, 성령 에너지 상태가 부활체 거든요. 그래서 부활체에 가까운 정기를 갖추고 있고 가장 성령의 마음에 가까운 모르는 마음, 하나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갓난 아이로 그걸 상징합니다. 그래서 지난번처럼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다시 거듭태어나라고 말할 때 갓난 아이가 되라고 할 수도 있는거구요. 이 경우는 지금 어떤 경우인지? 지금 그냥 갑자기 갓난 아이라고 나왔으니까 두 경우를 다 보자구요. 칭의 차원에서 즉 정신적 차원에서 성령을 깨달은 성령과 하나된 경지, 성령과 하나가 되서 진짜로 나와 남의 이원성을 초월해서 하나가 된 경지, 아니면 부활체까지 온전히 이룩한 아주 벌거숭이의 갓난 아이의 마음을 가진, 벌거숭이, 온전한 영혼육을 갖춘 경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영화의 경우죠. 보실래요? 유교 경전 맹자에 이루 하편 보면요 [대인은] 위대한 대인은, 위대한 군자예요. 위대한 군자는 [갓난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이다] '철없는 자다' 이런 뜻이 아니고요. 나와 남을 가르지 않는 참나의 마음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자이다. 기독교식으로는 성령의 마음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성령을 평생을 통해 구현해내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고요. 논어에 보시면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모를 뿐이다] 공자님의 평소 삶의 모습입니다. 나는 모른다예요. 나는 모를 뿐이다. 재미있죠? 무지하라. 공자님도 몰라의 달인입니다. 난 몰라, 내가 뭘 알아? 나는 아는거 없는데, 몰라, 노자 볼게요. 이게 갓난 아이의 마음 이구요. 또 바울도 갓난 아이의 마음을 얘기해요. 바보가 되라고 그래요. 하나님 앞에서는 바보가 되라. 아는 체 하지마라. 안다고 하지 말고 모른다고 해라. 바보가 되라. 같은 소리구요. 지금 노자에는 뭐라고 나오면, [덕을 두텁게 머금은 자는] 영혼육이, 정기신이 원만한 자는 [갓난 아이랑 비슷하다. 벌, 전갈, 독사가 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이 덤비지 않는다] 벌, 전갈, 독사가 안쏠까요? 뭔 말을 할까요? [사나운 새가 공격하지 않는다.] 정기신이 충만하다는 거예요. 손상을 입지 않는다. 노자는 부활체를 이룬 경지를 말합니다. 영화의 경지까지 말하는 거예요. 마음만 이원성을 초월한 게 아니라, 몸까지도 이원성을 초월한 충만한 에너지 상태라는 걸 얘기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과 접속해서 성령 에너지 충만한 상태예요. 누가 감히 성령 에너지를 공격하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노자가 한 말입니다. 또 각주 5번은 되게 재미있어요. 보세요. 인간 중에 요한이 제일 뛰어나다. 그런데 당신들이 갓난 아이만 되면 요한보다 뛰어날 것이다. 자, 이거 이거의 유사한 구절이 장자에 대종사 편에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군자는 하늘나라에 소인이다.] 인간 중에 뛰어나다는 군자들, 인간 중에 뛰어나다는 도 닦은 존재들, 저 하늘나라 가면 소인이야. 작은 사람들이야. 하늘나라에 가면 더 위대하고 큰 사람들이 많아. 이 소립니다. 요한이 인간 중에 제일 대단한 거 같지? 너희가 깨달아서 아버지 왕국, 천국에 가면 요한같은 사람들은 그냥 천지에 널렸다. 이정도, 어떠세요? 도마복음오늘 3편 읽어 봤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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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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