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8강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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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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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 부제 || 아라한의 경지 |- | 강의일자 || 2023. 06. 03. 土. |- | 게시일자 || 2023. 09. 02. |- | 동영상 길이 || 1:01:12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mdjXSltM4wk |} 00:07 아라한의 경지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볼게요. 다른 데서는 이런 얘기를 한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데서 지금 아라한은요 좀 상상의 영역이에요. 상상의 영역. 아라한이 과연? 윤회를 진짜 초월한다는 게 어떤 거야? 그러니까 엄청 힘든 수행을 해서 성취하는 아주 극소수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이것도 지금은 상상이에요. 환상의 영역이라고요. 문 앞에 그냥 당연하게 펼쳐져야 될 일들이, 부처님 때는 아라한들이 우글거렸는데 지금 와서 아라한들이 사라진 거는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거의 아라한이 없습니다. 감히 누가 아라한이라고 못해요. 탐진치가 아직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탐진치가 남아 있어도 어떤 조건이 되면 아라한이다 하는 게 있는데, 그걸 선명히 모르는 거예요. 그 얘기 드릴게요. 01:03 좀 더 추가적으로 아까 얘기 핵심은 다 나왔습니다만 1. 부처님 당시 즉각 아라한이 가능했던 이유. 사념처, 팔정도의 핵심이 지금 마음 챙김이잖아요. 자 팔정도 중에 요렇게 이렇게 보면요 여기에 여기다 제가 정견 정사유 이렇게도 했는데요. 여기 자료에도. 여기다 해도 되고. 자세히 뭐 말씀은 나중에 드릴게요. 정정진 정사유 예전에는 요렇게도 얘기해 드렸을 거예요. 그냥 이렇게 다 쓸 수 있습니다. 여기다 정사유 넣어도 되고 아무튼 정념 바른 마음을 챙김이요. 바른 마음 챙김하고 정정 바른 선정하고 이게 선정 쪽이죠. 팔정도는 크게 삼학으로 나뉘어요. 02:03 선정 쪽인 거(정념, 정정). 그다음 지금 정견 정사유는 이 두 개는 지혜 쪽이죠. 지혜 쪽. 또 두 개 정업 정어. 정명 이거는 실제로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그런 바른 생계 수단을 직업으로 삼는 걸 말해요. 살아가는 방식도 올바르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직업을 갖는 것도 올바로 해야 돼요. 팔정도 장난 아니죠. 빡세요. 그러면 이거(정업, 정어, 정명)는 계율 쪽이에요. 이거(정견, 정사유)는 지혜. 이것(정념, 정사유, 정정) 얘들은 선정 그래서 계정혜가 되고요. 02:52 아까 제가 얘기했듯이 열반에 안주해서 진리를 인가한다는 것은 이게 지금 마음 챙김. 선정 쪽이고요. 선정의 끝에 또 지혜가 있죠. 이 진리 인가가 진리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면 이게 지혜가 원만해지고요. 정견, 정사유가 이루어지고요. 이 정견, 정사유에 바탕을 두고 올바른 말 행동 삶이 이루어지면 이게 실천으로 이어지는 거죠. 제가 이렇게 계율 혜 이렇게 이어 놓는 게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래요. 선정에만 들면 지혜가 없을 것 같죠? 깊은 선정에 들면 거기서 자성에 대한 진리의 직관이 일어납니다. 이 직관에 바탕을 두고 언어로 분석할 때 위빠사나가 지혜가 닦여요. 위빠사나가 완성돼요. 03:51 그러면 이 올바른 판단이 없는데 실천이 나올 수가 있나요? 왜냐하면, 이게 둘이 아닌 게 올바른 말을 하려면 판단할 줄 알아야죠. 이게 올바른 말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실천을 하려면 단순히 분석에 기반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어놓은 거예요. 이어놓은 이유가. 이렇게 보실 때 개정혜가 더 원만해집니다. 팔정도가 여러분 삶에 찾아와요. 그래서 항상 마음 챙김이 이 중에 포인트인 게 마음을 챙겨야 열반에 접속을 하죠. 마음을 챙겨야 열반에 접속하죠. 알아차리면 여러분 이미 열반 상태예요. 알아차리면 이미 열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제 몰입책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알아차림은 사실 몰입인데 이 몰입에는 두 가지가 있죠. 04:47 알아차림. 몰입엔 두 가지가 있어요. 대상을 알아차릴 거냐? 나 자신을 알아차릴 거냐? 이건 알아차림 자체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알아차림을 나라고 표현한 거예요. 알아차림 자체를 알아차릴 것이냐? 다른 대상을 알아차릴 것이냐? 그래서 이 알아차림 자체를 알아차릴 때 이때가 가장 순수한 알아차림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럼 이때는요 그냥 아는 마음만 있어요. 대상이 없겠죠. 아는 마음, 내가 나를 알아차린 격이니까. 이때는 대상을 알아차리겠죠. 그런데 문제는 알아차림 자체가, 알아차림 자체가 부처님이 얘기하신 정광명의 마음이라니까요. 빛나는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보세요. 05:34 빛나는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이 순수한 알아차림 외에, 이 자리를 순수한 알아차림이라고 한다면,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오온 중에 식별이 작용합니다. 식별. 이것도 알아차림이에요. 그런데 제약된 알아차림이에요. 지금 배고프다고 알아차리면 배고픔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거잖아요. 순수한 알아차림은 아니죠. 순수한 알아차림이 배고픔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걸로 제약이 일어난 거죠. 제한된 거예요. 이 제한된 알아차림은 오온 중에서 식(識)라고 해요. 그런데 그냥 청정식 자체, 알아차리는 의식 자체는요 제약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이지도 않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다고 하는 게, 빛난다는 게 빛을 뿜어내는 존재겠어요. 아니에요. 빛난다는 건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06:34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다는 게 빛난다고 하는 거예요. 빛도 이미 오감이에요. 그렇죠. 빛도 오감입니다. 그러니까 빛난다는 말에도 속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많이 착각하는 게 명상, 빛의 명상에 드시다가 엄청 빛나는 걸 봤어요. 그게 참나인가요? 그 빛나는 걸 보고 있던 게 참나입니다. 빛난 건 오감 중에 색깔밖에 안 돼요. 그렇죠. 오감 중에 색깔밖에 안 돼요. 신비한 걸 느꼈어요. 참나인가요? 그 느낌을 알아차린 자가 참나예요. 그래서 이게 알아차림이 답이라는 것만 아셔도 여러분 이제 해탈에 이를 수가 있고 아라한이 뭔지 알게 됩니다.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자가 아라한이에요. 탐진치가 와도 이제 겁나지 않아요. 탐진치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린 거죠. 이번에 우리나라가 미사일 요격하는 거 그거 만들어냈듯이 뜨면 알아차린다니까요. 뜨면 알아 알아차려요. 그러면 겁이 안 나는 거예요. 07:34 뭐든지 일어나 봐라. 알아차리면, 마음을 챙기니까 알아차리게 되고, 마음을 챙기게 되면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리겠지만, 알아차리면 뒤따라 뭐가 일어나요? 지혜로 이어져요.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려요. 이 친구는 무상이고 괴로운 거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할 게 아니라고 바로 요격해 버려요. 지혜까지 출동하면 어떻게 된다 그랬죠. 지혜는 벼락이다. 금강저(金剛杵)다. 번뇌를 녹이는 번뇌를 때려 부수는 벼락이기 때문에 어떤 번뇌도 이 지혜가 출동하면 정리된다는 겁니다. 다 정리돼요. 내가 아등바등하는 건요 무상 고 무아란 걸 잠시 잊고 거기에 확 빠졌을 때예요. 그걸 집착하고 못 넣을 때. 탐욕이 집착하고 이걸 잃을까봐 분노하고 있고. 이거 잃어버릴까봐 이거 잃어버리면 나는 못 산다 하고 분노하고.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상태가 뭐예요? 어리석은 상태예요. 시야가 확 좁아져요. 그게 어리석은 거예요. 08:33 시야가 좁아지는 게 치(癡)입니다. 이제 다른 게 안 보이고 여기밖에 안 보여요. 이거 잃으면 끝장난다는 게 이게 지금 심정은 분노고요. 탐진(貪嗔)이고 좁아진 시야는 치(癡)예요. 탐욕에 빠질 때도 그래요. 저거가 꼭 있어야 된다. 이게 치고 어리석음에서 시작해서 갈망하는 마음은 집착하는 마음은 탐(貪)이고요. 탐진치가 계속 굴러가면서 우리를 점점 흑화시킵니다. 시야를 콩알만 하게 만들면요 이제 이거 없으면 죽는 게 나은 상태가 돼요. 살 희망도 없어져요 그런데 이 시야만 넓어지면 어떻게 돼요? 시야만 넓혀주면 별거 아닌 게 돼요. 내가 왜 아까 이걸로 죽으려고 그랬지? 여러분 찰나지만 지경까지 가요. 이거 없으면 죽고 싶다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그 여러분 언어 쓰는 거 보세요. 조금만 맛있어도 죽겠다고 그래요. 와 배불러 죽겠다. 많이 먹으면 배불러 죽겠다. 09:33 힘들어 죽겠다. 계속 죽겠다잖아요. 금방 조금만 좋건 나쁘건 금방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탐진치는. 탐진치를 관리하는 게 포인트지 이게 없을 수도 없고요. 또 여기 끌려가도 안 돼요. 탐진치가 주도하면 안 되니까. 어떤 탐진치가 일어나건 나는 바로 요격할 수 있다가 아라한이라니까요. 탐진치가 없다가 아니에요. 부처님처럼 뭐 마음이 다 정화돼 있는 게 아닌데 일어날 때마다 난 때려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중생들이 꿈꿔야 될 건 부처님보다 일단 아라한이죠 사실은. 그거 할 만한 거예요. 할 만하니까 1주일 만에 가능했던 거라니까요.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대상에 대한 보세요. 그런데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대상에 대해서 딱 그 식별하고 있을 때 이 알아차림을 몰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죠. 이 알아차림이, 알아차림이 금방 알음아리로 빠져버려요. 다 분별로 빠져버립니다. 10:30 그게 아니라 대상 하나에 지긋이 마음을 하나 더 모아주는 거예요. 더 모아서 한 놈만 알아차리는 거예요. 한 놈만 알아차리는 게 몰입이에요. 그렇죠. 한 놈만 알아차림. 대상을 더 몰입해서 식별하면요 그냥 알음알이에 빠지질 않게 몰입을 해서 알아차리면 어떻게 될까요? 대상을 알아차려도 여러분 견성합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 자체가 본래 열반이거든요. 정광명이 열반이라면 이 알아차림이 열반이에요. 그렇죠. 정광명이 열반이라면. 이 알아차림 자체는 영원한 거고요. 알아차림을 써서 특수하게 내가 배고픔이니 눈앞에 있는 펜이건 작은 걸 하나 알아차리는 데 썼단 말이에요. 하지만 몰입하면요 몰입하면 대상과 내가 하나를 꿰어지면서 내 안에 있는 본래의 알아차림이 훤히 드러납니다. 11:22 그때 열반을 느껴요. 그러니까 호흡만 알아차려도 열반에 들어가요. 뜰 앞에 잣나무, 잣나무만 알아차려도 열반에 들어가요. 뭐든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관념만 알아차려도 하나만 알아차리면 열반에 들어가요. 왜? 원래 그러니까 이게 지금 태양빛이 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마음 챙김이 돋보기라면 대상에 돋보기를 댈 거냐 나 자신이 될 거냐의 차이지 하나한테 댈 때 왔다 갔다 안 하고 산란하지 않게 지그시 하나에다 돋보기를 계속 대고 있으면 불이 난다니까요. 무조건 불난다 하듯이 무조건 본래의 알아차림 순수한 알아차림이 51프로 이상 내 의식을 지배하면서 드러납니다. 그때 그게 빛난다라고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다라고 얘기하는 거지 본질은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알고 있다는 게 빛입니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태양빛도 나가다가 막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안다는 건 온 우주를 꿰뚫어서 아는 거예요. 이게 빛이에요. 12:22 무한한 빛. 온 우주가 무상 고 무아인 줄 알아버려요. 법공으로 가면 온 우주가 본래 텅 비어 있다는 걸 알아 버렸어요. 이게 빛이라니까요. 안다는 게 빛이에요. 안다. 그래서 제가 이 안다는 거를 태양 자리에다 놓은 거예요. 8괘 중에 태양 자리, 안다. 태양 자리 안다고 옆에는 곤괘(坤卦 ☷)거든요. 그러면 곤괘는요 논리적으로 잘 정리정돈을 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대신에 여기에 또 무한하게 땅처럼 뻗어 나간다는 의미도 있어요. 여기다 정진(精進) 붙여도 되고요. 감괘(坎卦 ☵)는 밖으로는 안 드러났지만 속으로 양기가 품어져 있죠. 결론을 잘 내린 거, 속으로는 계속 판단을 내려가는 거를 지금 감괘라고 하고 또 흐르는 물이니까 정진(精進), 쉬지 않고 쭉 흘러간다는 의미도 있어요. 그래서 이 두 개는 좀 바꿔도 서로 다 말이 되기 때문에 제가 가끔씩 왔다 갔다 쓰는데요. 둘 다 가능합니다. 괘로 얘기하자면. 괘로 한번 해 볼까요? 13:21 그때도 했지만. 선정이라는 건 한 점 에고가 없죠. 건괘(乾卦 ☰)랑 통하고요. 정념(正念)은 땅에서 하늘과 만나면 산(山)이거든요. 땅이 하늘하고 만나는 겁니다. 이게. 그러니까 생각 감정이 다 작동하지만 하늘하고 계속 만나고 있는 상태, 계속 깨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계속 정업(正業)이라는 이것은 이거는 달(月)이죠. 진괘(震卦 ☳)는 간다는 거예요. 실제로 행동한다. 정어(正語)은 말한다고요. 정명(正命)은 손괘(巽卦 ☴)는 하늘의 명령을 잘 따른다는 뜻이에요. 팔괘 배당해 보자면. 저런 짓은 저밖에 안 해요. 딴 데 가서 당연한 듯이 쓰시면 안 돼요. 혹시 누가 이렇게 쓰면 구독자인가 보다 하시면 돼요. 우리만 쓰는 게 많아요. 밖에 나가서 혹시 보시면, 아실 거예요. 14:11 구독자인지 아닌지. 대상에 대한 몰입을 해도 나 자신에 대해서 몰입을 해도 우린 무조건 깨어나게 돼요. 그러니까 사념처(四念處)라는 게 몸뚱이 알아차려도 돼요. 몸의 촉감 알아차려도 깨어납니다. 신(身). 그다음에 수(受) 느낌, 좋다 싫다는 감정을 알아차려도 깨어납니다. 제가 싫어하는 줄 알아차리고 있으면 깨어나요. 왜냐하면, 싫어하는 줄 아는 놈은 싫어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싫어한다는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우리는 감정에서 마음에서 분리되면서 깨어납니다. 그 다음에 심(心)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줄 알아차리고 있으면 생각에서 깨어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법념(法念.) 신수심(身受心) 마음도 알아차리고 마지막 법(法)은 내가 깨달은 진리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깨달은 진리 어떻게 알아차려요? 일체는 무상하다는 거 알아차리고, 일체는 괴롭다는 걸 알아차리고, 일체는 내 것이 아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법념입니다. 항상 염(念), 알아차리고 있어요. 15:11 염(念)이라는 건 돋보기, 마음의 돋보기를 거기에다 향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몸에 향하거나. 지금 가장 잘 느껴지는 것 알아차리면 돼요. 지금 앉아 계신데, 몸에 앉아 있는 엉덩이나 이런 등의 느낌이 있다면 거기 알아차리세요. 그쪽에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 있는 걸 알아차리시면 돼요. 알아차리려고 아우성하는 겁니다. 알아차리면 오히려 거기에 통증도 갈리고 진정도 돼요. 이게 알아차림. 그런데 알아차리다보면 내가 깨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알아차리다 보면 내가 깨어나요. 그런데 아프다 아프다 하고 있으면 못 깨어나요. 알음알이에 빠져요. 아프다 아프다 하면. 그런데 아프다는 감정을 정신을 딱 모아서 알아차리면, 마음을 챙김을 통해서 알아차리면, 마음 챙김이 들어가면요 이때 알아차림은 산란하지 않고 딱 한 놈만 보기 때문에 정순해지면서, 태양빛이 모든 걸 비추지만 돋보기를 통과하면 불이 나죠. 마음을 챙겨버리면, 몰입을 하면 거기서 불이 납니다. 16:09 깨어나 버려요. 무조건 공식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일어나든지 마음 챙기면 돼요. 거기다가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리시면 나중에 뭐까지 알아차려지냐? 처음에는 그게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알아차려지지만 나중에는 무상 고 무아란 진리가 알아차려져요 그러면 거기까지 가면 지혜가 돼요. 얘는 무상하구나. 이건 괴롭구나. 이건 내 것이 아니에요. 자명한 걸 알게 돼요. 그러니까 과학자 이상이지 않아요. 여러분. 과학자들이 오히려 허황된 것 쫓고 있는 게 많아요. 자기가 만든 관념에 빠져서. 정말 육근 과학자예요. 육근 철학자고. 육근 과학자.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육근 작용을 다 직접적으로 거기다 마음 챙겨가지고 돋보기 들이대가지고 일념 집중을 해서 몰입을 해서 거기서 걔들의 실체. 본성을 알아차려야 이 작업은 끝나요? 이게 진짜 팔정도고 이게 진정한 수행입니다. 17:09 진짜 수행을 하실 분들은요, 내 삶에 존재하는 건 육근밖에 없다는 걸 아시고 육근이 작동하는 것을 시시각각, 육근을 다 알아차리려고 하면, 정신이 산만해져서 안 돼요. 그렇게 수행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오히려 정신이 산만해집니다. 지금 가장 주요한 느낌이 있는 거 그거, 그거 하나 알아차리시면 돼요. 왜냐면, 마음을 하나에다 모아줘야 불이 나니까. 이것저것 하다가는 불이 안 나요. 그러니까 하나 딱 모아주세요. 이게 잘못하고 있는 분들이요. 지금 눈 깜빡인다 팔 든다. 다리 이런다 이 지랄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일어나요. 불이 안 나요. 불이 안 납니다. 겁나 열심히 하는데 불이 안 나요. 언제까지 이걸 해야 되는 거야. 생각도 못 해요. 생각을 한다. 알아차린다. 이제 아무것도 사회생활 못합니다. 밥 먹 을 때 이것도 못 마셔요 컵을 본다. 컵을 들고자 의도한다. 컵을 잡는다. 18:04 컵을 들었다. 맛을 보려고 마음을 낸다. 맛을 본다. 맛이 어떻다고 판단한다. 뭐 기분이 어떻다고 느낀다. 이 지랄하고 있으면 이렇게 하면 잘 될 것 같죠? 몰입이 안 일어나요? 고수는 이거 해도 각각 각각이 다 몰입될 수 있어요. 근데 초보자가 이렇게 했을 때 몰입이 되겠어요. 하나에도 몰입이 안 돼요. 부처님도 호흡만 몰입하셨는데 평생. 제자들이 뭐라고 지금 이걸 이러고 있으니까. 여러 문파들이 있어요. 위빠사나 수행도. 그런 거 하지 마시고, 한 놈만. 일단 다른 거 안 느껴도 돼요. 똑같아요. 육근은 다 똑같아요. 그놈이 그놈이에요. 한 놈만 잡아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다 보면 내공이 생겨요. 그러면 뇌에 회로가 깔리겠죠. 더 쉽게 쉽게 알아차려요 그 자리를. 호흡만 조금 알아차리고 주무셔도 잘 때도 알아차려요.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고. 이렇게 몸이 수행을 도와준다니까요. 하나로 몰아가세요. 19:04 그 하나를 집중적으로 알아차리다 보면 얻는 것은 똑같아요. 뭘 알아차리건 결국 육근을 알아차리다 보면 거기서 뭐가 발견되냐면 무상 고 무아가 발견돼요. 그리고 걔네들을 초월할 때, 그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는 자리가 열반인 줄 알게 되니까. 걔네들을 초월해서 열반에 이를 수가 있게 돼요. 다 여러분 의식 놀음입니다. 의식 갖고 하는 거예요. 아라한의 경지가 사념처를 닦는다는 건 이런 거예요. 사념처라는 건 신수심법(身受心法)을 닦는 겁니다. 여기 안 써놨는데요. 신(身) 몸뚱이 수(受) 좋다. 싫다는 느낌. 심(心) 마음이요. 생각 여기도 생각 플러스 여기도 좀 미세한 감정들이고요. 좀 더 거친 감정들을 따로 뺀 거예요. 거친 감정을 수(受)로 따로 뺐고 마음에는 생각과 좀 더 미세한 감정들을 놓는 거예요. 신수심(身受心). 법(法) 이건 진리고요. 20:00 그러니까 여기는 이것들을 알아차리다 보면 여러분 삼매에 들어갑니다. 깊은 삼매, 선정에 들어서 알아차리게 돼요. 몸의 촉감이건 감정이건 생각이건 마음을 챙기다 보면 여러분 깨어나요. 깨어나게 되어 있고요. 이 진리는요? 이 진리는 이렇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염(念)하는 겁니다. 진리는 그러니까 진리를 염하다가도 깨어나요. 똑같은데 약간 구분되죠. 진리라는 것은 여러분이 깨어 있을 때, 깨어 있을 때 자명하게 인가하고 있는, 그게 알아차리고 있는 거거든요.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 그것을 법념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진리를 알아차린다는 것도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결국 선정과 지혜가 같이 작동합니다. 같이 작동하지만 (법은) 이것들(신수심)보다는 좀 더 위빠사나에 가깝죠. 좀 더 지혜개발 쪽 공부고요. 20:56 이쪽들(신수심)은 좀 선정 공부에 다 활용될 수 있는 주제들이고요. 대표적인 게 여러분 몸뚱이(身)는 호흡 알아차리는 것, 호흡의 마음 챙기는 게 대표적이고요. 이 감정(受)은 자비염 하는 것도 감정을 이용한 하는 거고요.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은 생각(心)을 이용하는 거죠. 생각에 몰입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수신법들은 결국 수행에 다 쓰여요. 이거(法)는 진리를 곱씹는 거예요. 진리, 진리를 곱씹는 묵상 같은 데 쓰이는 거죠. 묵상법에. 이런 거죠. 기독교도 그러니까 법념처는 이런 거예요. 성경 말씀에 집중하는 게 법념처예요. 자명한 진리에 집중하는 거. 그렇죠. 예수님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집중하는 거. 그렇게도 쓰일 수 있다. 21:51 이렇게 마음을 챙겼기만 해도 팔정도 중에서는 정념(正念)인데 이렇게 하나만 닦아도 사실 아라한이 가능합니다. 나머지가 따라온다는 거예요. 저거 하나만 가지고 끝까지 간다는 게 아니라 마음 챙김만 주로 닦으면 팔정도가 통으로 이렇게 꿰어진다는 거예요. 아라한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가능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빠른 시간에 아라한이 나올 수 있었다. 마음 챙김만 잘했다면, 마음 챙김을 잘했다면 아라한이 빨리 나올 수 있었다. 부처님 말씀을 듣더라도 마음을 챙겨서 들은 사람들은 아라한이 됐을 거예요. 보세요. 마음을 챙겨서 부처님 말씀에 집중해요. 그러면 법념처가 되는 거죠. 사념처 중에 법념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얘기하는 진리에 계속 알아차리는 거예요 마음 챙겨서. 또 자명한 지혜는 선정을 부르거든요. 자명한 얘기만 계속 듣다 보면 여러분이 아닥이 됩니다. 할 말이 없어요. 너무 지당해서 깨어나요. 자명한 얘기를 듣다가 깨어나 버린 거예요. 22:50 마음 챙김이 깊어지면서 깨어난 거예요. 깨어나니까 또 어떻게 돼요? 선정은 지혜를 부르죠. 깨어나니까 더 자명하게 무상 고 무아가 인가되는 거예요. 그때 부처님 얘기만 열심히 듣던 제자가 꼰단냐라고 처음 부처님 제자 중에서 처음으로 이제 수다원과를 얻죠. 세상이 무상 고 무아라는 걸 깨달아 버려요. 부처님이 신나서. 첫 성공 제자잖아요. “와 꼰단냐가 깨달았다. 깨달았다. 진리의 눈을 얻었다”고 칭찬해 줘요 그러니까 수다원과만 딱 되면 열반 체험을 한 거예요. 열반 체험하면서 무상 고 무아, 즉 사법인을 체험한 거예요. 육근의 세계는 무상 고 무아요 열반은 고요하다는 걸 안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한테 구족계(具足戒)를 줘요. 구족계라는 게 당시에는 제대로 된 구족계가 없었겠죠. 23:41 아무튼 너 이제 넌 진리를 알았으니 더 열심히 닦으라는 의미로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칭의면 성화가 있듯이 더 열심히 율법을 닦아라. 이제 너 실천을 더 열심히 해라. 그래서 더 거기 안착하라고. 그러니까 뭐랄까 돈오했으면 점수면 이제 갓 돈오라 수다원이 제대로 돈오에 안착한 것도 아닌데도 돈오했으니 점수의 요결을 주는 게 구족계를 준다는 거예요. 만약에 학당 같으면 어떻게 하냐면 참나 체험하시면 저희가 뭘 주겠어요? 14조. 14조가 구족계예요. 그러니까 절에서 말한 구족계가 14조예요. 보살계를 주는 거예요. 우리는 대승이니까 보살계를 줘요. 참나 체험 딱 하면 보살계를 줘서 당장 참나 체험에 뭐 안주한 건 아니지만, 같이 닦으라고 주는 거예요. 같이 닦으라고. 부처님 때 딱 그랬어요. 우리는 부처님 때 하던 방식대로 하는 겁니다. 딱 첫 깨달음 얻으니까. 24:39 수다원 딱 나오니까 구족계를 준 전통이 처음 그때 서요. 그때. 그래서 아라한이 가능했다. 마음 챙김만 해도 되니까. 아라한은 다름 아니라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 정념(正念). 정지(正知)는 팔정도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냥 정념과 묶어서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마음 챙김을 알아차림이라고도 번역하는 거예요. 같이 보는 거예요. 근데 구분하자면 굳이 마음 챙김이 선정 쪽이면 알아차림은 지혜 쪽이에요. 그런데 같이 작동하니까요.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이 굳건히 확립된 경지이다. 애쓰지 않아도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에 머무는 경지이다. 즉 이 얘기는 뭐냐 하면, 두 개를 같이 보면 뭘까요? 알아차림인데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린다는 거죠. 몰입을 해서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이라고만 불러도 이제 몰입해서 알아차린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25:34 그러면 마음 챙김이라고만 말해도 몰입했다는 건 알아차린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때 오온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아공의 진리를 인가하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면, 마음 챙김이 깊어지면서 아공의 진리를 자명하게 알아차리게 되어 2. 열반 안주자, 결국 아라한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초월해요. 왜? 열반이 삼계를 초월하거든요. 열반, 정광명의 이 마음은 광명, 정광명, 광명심의 이 마음은 육근의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게 모든 곳에서 빛난다는 건 모든 걸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삼계라는 건 이 열반의 세계 밖의 존재예요. 삼계는 다 에고의 세계거든요. 삼계는요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예요. 생각 감정 오감이 삼계예요. 26:34 사실 본질이에요. 삼계의 본질은 생각 감정 오감입니다. 오감이 강하냐? 하면 욕계. 이 생각과 감정이 버무려져 있는 세계가 색계 오감도 있지만, 더 미세한 생각과 미세한 어떤 감정만 남은 세계가 무색계예요. 그러니까 결국 생각 감정 오감을 재료로 해서 나눈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저는 욕계 색계 무색계보다 생각 감정 오감으로 삼계를 나누는 걸 더 선호해요. 오감은 물질계, 감정은 서양식인데요, 신비주의식인데 물질계, 그 감정의 세계를 아스트랄계라고 합니다. 아스트랄, 생각의 세계를 멘탈계라고 그래요. 27:27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냥 생각체(무색계/멘탈계) 감정체(색계/아스트랄계) 이건 물질체(욕계/물질계) 이렇게는 나누는 걸 저는 더 선호해요. 이게 구분하기가 더 자명해요. 근데 이거는 이것대로 또 이제 부처님의 선정을 닦다가 구분되는 미세한 단계들이거든요. 그것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같이 설명드립니다만,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는 물질이냐 감정이냐 생각이냐. 에너지대가 다르거든요. 이렇게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라한은 삼계를 아무튼 똑같아요. 결국 생각 감정 오감이나 욕계 색계 무색계나 거기를 초월해 들어가면 열반 안주자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삼계를 초월한다는 말도 맞아요. 그리고 생멸을 떠난 세계니까 열반은 윤회를 초월했다는 말도 맞아요. 여러분도 1주일 만에 마음 챙김을 통해 아공의 진리를 꿰뚫고 딱 열반에 항상 안주해 있다. 28:26 즉 다른 말로 항상 알아차리는 경지에 들어가셨다면 여러분 삼계 초월하신 거고, 윤회 초월하신 해탈자, 열반에 든 아라한이 되셨다는 거 맞아요. 이걸 인가 못하니까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해드려도 본인이 “내가?” 감당 못 할 거예요. “더 엄청난 경지가 있지 않을까요?” 그럼 이제 환상 속의 수행으로 들어가시는 거죠. 더 엄청난 경지를 찾아서. 이해되시죠. 사실은 더 엄청난 경지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라한인 줄 알고 이후는요 차라리 부처님의 경지를 닦아야 되는데 아라한을 벌써 알 수 없는 경지로 만들어 버리면 부처는 언제 되고? 답이 없어지죠. 힌두교의 생존 해탈자와 선불교의 확철대오의 경지와 상통하는 경지입니다. 이게 대승불교식으로 하면 1주보살 정도예요. 1주보살. 참나 안주를 1주보살이라고 하거든요. 진여 안주한 양반들을. 진여에 안주한 1주보살밖에 안 됩니다. 29:26 아라한이나 확철대오는 모두 1주보살(진아안주자)을 의미한다. 석가모니도 아라한이시다. 그런데 이때 아라한이라는 건요 석가모니도 진여에 안주하신 분이고 열반에 안주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아라한이라는 거지 1주만 아라한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아라한도 여러 레벨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근데 일단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안주해야 아라한이라고 불립니다. 석가모니도 분명히 아라한이에요. 아라한이 석가모니의 공식 명칭 중의 하나입니다. 이거는요 석가모니는 열반에 늘 들어앉아 계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 중에 다른 공덕은 짧은데 열반에만 어떻게든 들어앉으면 아라한이라고 한다고요. 열반에 들어앉았다는 걸 부처님과 공유하니까. 공덕에 따라 다양한 계제(階梯)나 등급이 있으나 열반 안주자라는 점에서 모두 동일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오온에 대한 보호복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30:20 그래서 이제 오온이 더 이상 나한테 두렵지 않고 불탄 재와 같으며 이미 버튼 꺼진 선풍기의 도는 날개랑 같아서 힘이 없다라고 보는 겁니다. 아라한한테는 탐진치도 힘이 없다. 3. 10가지 족쇄. 열 가지 족쇄가요 이걸 가지고 보통 아라한을 구분하거든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초기경에 나온 열 가지 족쇄를 볼까요? ①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견해 유신견(有身見)이요.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견해입니다. ② 회의적인 의심, 과연 진리가 있을까? 내가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의심. ③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 계율만 지키면 된다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견해, 해탈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고요. ④ 탐욕, 욕계의 탐욕이 있고요. 그러니까 욕계의 탐욕은 이렇게 몸뚱이 있는 세계에서 강한 오감에 끌려가면서 우리가 욕망을 내는 탐욕을 말하고요. 31:18 분노, 그다음에 ⑤ 분노는 이제 욕계 색계 안 나눠 놨고요. 그다음에 ⑥ 색계에 대한 탐욕이 또 따로 나오죠. 그래서 아까 구분한 거예요. 색계에 대한 탐욕이 있고요. ⑦ 무색계에 대한 탐욕이 있어요. 그러니까 색계 무색계는요 깊은 명상에서 나옵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갔는데 색계는요 나의 몸이 영적인 몸이 느껴지는 거예요. 색계라는 건 물질이죠. 영적으로 되게 나한테 빛나는 몸이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 빛나는 몸을 색(色)이라고 해요. 빛나는 몸만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이제 욕망에서 깊은 욕망에서 빠져나온 정화된 감정이나 생각들이 있어요. 그게 색계고요. 무색계는요 이제 몸뚱이도 사라지고 의식만 있어요. 의식만 있는데, 아직 미세한 감정이나 미세한 생각이 남아있어요. 그래서 아직 온전하게 열반에 합일을 못 하고 있는 상태예요. 그러니까 거기서도 분명히 탐욕이 있겠죠. 빛나는 몸에 대한 탐욕이 있을 거고. 그런 미세한 생각들에 대한 집착이 있겠죠. 32:17 그게 아직 욕계나 무색계에 대한 탐욕입니다. 그다음 ⑧ 아만(我慢), 자만심. ⑨ 들뜸, 산란한 마음. 마지막 어리석음이죠. ⑩ 무명(無明), 무지(無知). 이 열 가지를 가지고 볼 때요 자 4. 수행의 4단계인데요. 1. 수다원과(預流)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알아차림, 자연스럽게 흐르는 알아차림이 열반입니다. 이 열반을 짧게 체험합니다. 그래서 1번에서 3번을 벗어나요. 진짜 여러분 이러나 보세요. 1번에서 3번이 뭐냐 하면, 견해들이에요. 견해. 견해가 벗어나져요. 그러니까 참나만 딱 체험해도 알게 돼요. 뭘 알게 돼요? “와 진짜 열반이 있구나!” 알게 됐죠. “그럼 내 몸뚱이가 내가 아니었구나!” 유신견이 자동으로 날아갑니다. 33:01 열반만 딱 짧게 체험해도 유신견(有身見)이 벗어져요. 내 몸뚱이가 나라고 알고 살았는데, 그러니까 “에고가 나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열반이 따로 있구나.” 그다음 회의적 의심, “진짜 진리가 있구나. 없는 줄 알았는데.”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 “계율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이게 기독교랑 뭐가 달라요? 그렇죠. “율법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이게 알아진다니까요. 딱 성령을 만나면. 성령 처음 딱 체험했을 때 경지예요 이게.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유신견이라는 게, 내 몸뚱이가 이게 나의 전부인 줄 알았더니, 성령을 만나 만나고 나니까 확 깨져버리는 거죠. 거기에 대한 집착이 날아가고, 의심이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에 대한 의심이 날아가고, 율법만 따르면 구원받을 줄 알았던 나의 잘못된 견해가 다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만 내면 천국 갈 줄 알았던 게 날아간다는 얘기예요. 이게. 이 세 개가 날아가 버려야 수다원입니다. 33:59 다음 2. 사다함이 되면 예류과(預流果), 수다원은 예류과라고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섰다고 예류과(預流果)입니다. 사다함은 일래(一來) 한 번 더 와야 된다. 한 번 더 태어나야 된대요. 사다함에서 공부가 끝나면 한 번 더 태어나셔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철저히 해탈 기준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에 안주하는데 환생이 더 필요하다는 거예요. 부처되는 데가 아니에요. 이 사람은 열반에 안주하는데 아라한 되는데 한 생이 더 걸린다. 사다함은? 이 사람은 열반 안주가 좀 더 길어지긴 했어요. 길어지긴 했기 때문에 4~5가 약해집니다. 욕계에 대한 탐욕이나 분노, 탐진치가 좀 약해져요. 이 정도가 사다함이고요. 3. 아나함은 불래(不來)예요. 아나함은 다시 안 와요. 지구에. 이 양반들은 태어나면 어디 태어나냐면 죽은 뒤에 정토에 태어나요. 색구경천에 있는 정토에 태어나요. 34:53 그 정토에서 공부하다가 아라한에 들어가요. 이 아나함만 돼도 불래, 지구 안 오고요. 열반 안주가 쭉 이어지는데요. 아직 애씀이 있는 경지라는 거예요. 이건 뭐냐면 노력해서 지금 있는 거지 힘 빼도 절로 알아차림이 흐르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방심하면 알아차림이 멈춰진다는 거예요 이 양반들은. 이 양반들은 4~5에서는 벗어나요. 그래도 색계나 무색계에 대한 탐욕에서는 벗어나요. 열반을 깊이 맛봤거든요. 그런데 뭐가 아직까지 마지막까지 막고 있어요? 아만(我慢) 들뜸. 그러니까 아직 열반에 안착을 못 했기 때문에 에고가 아직 작동하고요. 아만이라는 건 에고가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고요. 에고가 자꾸 주인이 되려고 하고 들뜸이라는 건 아직 진리에 확실히 못 쉬고 있다는 얘기예요. 자꾸 튕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고요. 35:51 무지(無知)라는 건 아직 아공의 진리에 대해서 딱 떨어지게 지금 인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가 있으면 안착할 텐데. 이런 얘기 제가 한 적 있죠? 이런 확철대오는 지혜로 갑니다. 자명해야 돼요. 의심 하나가 없이 자명하면 여러분은 확철대오나 이런 아라한의 경지에 쉽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지혜에서 아직 의문이 안 풀린 게 있다는 거예요. 그 세 가지가 아직 남아 있다가 아라한 때 되면 이게 딱 떨어져요. 4. 아라한은 열반 안주가 자연, 물 흐르듯이 흐르고 늘 열반에 안주해 있고 항상 무상 고 무아의 진리에 안주해 있는 거예요. 자기를 섬으로 삼았다는 건 열반에 안주해 있다는 얘기고요. 진리를 섬으로 삼았다는 건 자등명 법등명 있죠? 자등명은 열반의 마음에 안주했다는 얘기고요. 법등명은 진리가 항상 함께한다는 거예요. 36:48 아공의 진리를 항상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 항상 마음이 챙겨져 있고 항상 아공의 진리가 알아차려진 상태. 항상 마음이 챙겨져 있고 항상 알아차림이,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 이 상태가 아라한이에요. 그럼 이 상태라고 해서 탐진치가 다 떨어진 건 아니라고요. 일어날 때마다 전혀 거기에 끌려가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앞의 얘기도 오해되겠죠. 지금 이 얘기도 오해되겠죠. 이 얘기만 들으면 탐진치 다 떨어졌다는 거 아닌가요? 열 가지 족쇄가 다 풀렸다는 얘기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한 탐욕이 다 떨어졌다라고 판단할 수 있겠죠. 이렇게 판단해 버린 이후로 아라한이 어려워진 겁니다. 원래 이게 의미한 것은요? 이 족쇄에 걸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는 거지 이게 다 떨어진 게 아니에요. 이게 다 떨어졌다면 아까 시바경(尸婆經)이 잘못된 거죠. 이해되시죠? 아이 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한 탐욕이 다 떨어졌는데 뭔 탐욕을 또 뿌리 뽑아요? 부처님 말씀이 이상하잖아요. 37:45 아공의 진리를 인가하고 애쓰지 않아도 늘 열반에 안주하기에 열 가지 족쇄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지 열 가지 족쇄를 영원히 남김없이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이 경지는 부처님의 경지입니다. 그래서 시바경에서 아라한들에게 탐진치를 영원히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해 더욱 공부하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은 한 생으로는 부처님의 경지만큼 업장을 벗길 수가 없다는 거죠. 따라서 한 번 더 태어나야죠. 나아가 더더더 태어나야죠. 이게 보살 사상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대승 사상은 소승 사상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 여기까지 이해하시겠어요? 아니 열반에 안주해서 이제 탐진치에서 자유로워졌는데 이생이 끝이래요. 그런데 부처님처럼 가려면 아직 더 닦아야 되는데요. 뭔가 다 모순적이지 않아요? 이게 모순적이에요. 이 모순이 대승을 낳은 거예요. 모순이 있으면 이걸 뚫고 가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38:43 이걸 회통해가지고 어떻게든 답을 찾아보려는. 화두를 던진 격이 된 거라고요 이게. 아라한이 되고 났더니,오히려 화두를 던진 격이, 화두를 받은 격이 된 거죠.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상한데. 그러면 더해 보자” 그러다 나온 사상이요 해탈에 들지 않고 계속 이 세상에 윤회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 세상에 계속 남아서 중생을 도와준다는 아라한이 나옵니다. 이상하죠? 이런 아라한들. 지금 절에서 모시는 아라한들이 16 나한, 18 나한이요 그 나한들은요 지금 부처님 제자들 중에 아직까지 남아서 계속 중생을 도와주고 다니는 아라한들입니다. “너네는 열반에 들지 말고 계속 중생 도와주라”고 그랬어요. 다음 부처님 나올 때까지. 그럼 이상한 아라한이죠. 보살이잖아요. 이미 보살이죠. 그러니까 이게 절에서 보시는 16 나한 18 나한들이에요. 39:42 그러다 이제 그게 확장돼서 500 나한을 모시고 하는 거죠. 저를 근데 그때 나한들한테 기도하는 건, 나한이 이미 나한이 열반에 들었다고 보지 않는 거예요. 그 나한들이 중생을 계속 돕고 있다고 보고 우리가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겁니다. 보살 사상과 만나는 부분들이에요. 아라한이 보살화 돼요. 아예 이럴 거면 그냥 아라한하고 별개로 보살을 등장시켜 버리자 하는 게 지금 대승불교가 이렇게 나온 겁니다. 아예 보살불교로 나온 겁니다. 5. 아라한과 석가모니 차이 보실래요. 아라한과에 도달한 뒤에도 무루(無漏)의 팔정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이제 탐진치에서 자유롭게 팔정도를 실천합니다. 이걸 무루, 번뇌성이 없는 팔정도라고 그래요. 삼학으로, 삼학을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번뇌를 초월한 거죠. 열반 안주를 기반으로 무루의 팔정도,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할 수 있다. 사무량심이라는 건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이거든요. 40:40 중생을 사랑하고 자(慈),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연민 의식으로 느끼고 같이 슬퍼해주는 비(悲), 중생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느껴지는 희(喜), 언제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捨). 자비희사면 거의 사랑의 끝판 왕입니다. 자비희사를 그냥 자비니 우리가 그냥 자비심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걸 그게 기독교식 사랑이에요. 사랑. 자비(慈悲) 인(仁) 유교의 인자(仁慈)함. 이게 자비희사 안에 충분히 설명이 잘 돼 있습니다. 남한테 좋은 걸 주는 자(慈) 남한테 나쁜 걸 안 주려고 하는 비(悲) 남의 슬픔 덜어주려고 하는 비(悲) 그다음에 히 남이 기뻐하면 같이 기뻐해 주는 희(喜) 이거 쉽지 않거든요. 고시원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나만 떨어졌는데 자비희사 하기 쉽지 않을걸요. 자(慈) 와 너 좋겠다. 41:38 축복해주고 내가 받고 싶은 거니까 남도 해주고 자(慈). 비(悲) 남의 슬픔, 지금 나만 슬프지 뭐 남의 슬픔 따질 게 아니지만, 거기 남의 기쁨 같이 기뻐해주는 희(喜), 사(捨) 이러면서도 평정심 유지하는 게 사(捨). 장난 아니죠. 자비희사만 해도 여러분 이거 엄청난 수행이에요. 자비희사도 깨어서 아니면 못해요. 그래서 자비희사만 해도 원래 정토에 태어난다고 초기 불경부터 나오는 겁니다. 자비희사만 해도 저기 천계에 태어나니 정토에 태어나니 하는 거예요. 그게 고도의 수행이거든요. 그래서 자비희사는 명상 수행의 일종으로 봅니다. 초기 불교부터. 그러니까 정신을 고도로 몰입해야만 나오는 거예요. 자비희사.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어떻게 하냐면 자(慈) 수행을 할 때 고도로 깨어난 다음에 정신을 모아서 선정해 든 다음에 선정에 안 들고는 이 짓이 안 되니까요. 42:33 자(慈) 가까운 사람부터 상상해서 그 사람한테 베푸는 걸 하다가 나중에는 저기 가까운 사람 이제 좀 먼 사람 웬수, 다 해보는 거예요. 저기 시방(十方) 온 우주에 있을 나도 모르는 중생들한테 베푸는 것까지 해 봐요. 무한하게. 그래서 이게 무량심(無量心)이라는 거예요. 온 우주에까지 이 마음을 확장해 봐요. 무량하게. 이 수행을 하면 비(悲) 이제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같이 안타까워해줘요. 덜어줄 생각을 해보고 또 먼 사람 웬수. 또 나도 모르는 수많은 중생들. 이걸 또 경전에 보면요 동쪽으로 무량하게 한번 가보고요. 서쪽으로 무량하게. 이쪽이 동쪽인가요? 무량 이렇게 시방으로 무량하게 하라고 수련을 시켜요. 어마어마한 수행이겠죠 이거는. 이걸 염하면서 하는. 그래서 이건 깊은 수행입니다. 43:25 그래서 팔정도나 사무량심을 실천했다는 거 자체가 이게 힌두교보다 대승사상이라는 근거입니다. 사무량심이 있다는 거 자체가. 부처님은 이렇게 체계적인 자비심 개발법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라한들한테 윤회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 불러다가 “윤회 떠나게 해줬지. 자 이제 무량심 닦자” 해가지고 사무량심으로 계속 자비 덩어리를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그 아라한이 죽을 때 쉽게 “나 이제 해탈하고 가겠어요” 하겠어요? 이게 자비심이 엄청 지금 배양됐는데. 이 중생들 어떡하지? 이게 보살 사상으로 이어진 거라니까요. 그러면 “내가 지금 해탈이 급한 게 아니잖아. 44:07 이미 열반에 들었다는 게 이미 해탈인데. 난 이미 해탈했는데. 중생을 도와주면서 계속 존재하는 게 맞지 않나?” 여기서 보살도가 나오는 거예요. 뭔 대승과 소승을요 이렇게 대승을 완전히 무슨 부처님하고는 완전히 다른 얘기라고 생각하시면 그건 아니에요. 분명히 결이 다른 가르침은 맞지만, 이렇게 또 이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다른 종교로 보고 접근하는 게 좋아요. 서로를 이해하려면. 일단 섞어 버리면 이해가 잘 안 되거든요. 다르게 놓고 보면 오히려 또 이어지는 게 보여요. “아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는 게 오히려 보이실 겁니다. 현실적으로는 공덕의 차이 업장의 차이에 따라 역량 차이가 납니다. 열반에 안주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아라한의 그것은 석가모니의 팔정도 사무량심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자비심이 벌써 다르죠. 팔정도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이 달라요. 45:04 부처님한테는 아라한들이 “부처님한테는 내가 못해 봐” 하는 대표적인 실제 예들이 부처님은 어떤 제자가 와서 질문해도 그 근기에 맞게 대답을 해 줘요. 아라한들은 그걸 못해요. 딱 나 공부한 거밖에 말 못 해요. “마음 챙겨가지고 아공의 진리 깨달아서 너도 열반에 들 수 있어” 이 얘기는 해줄 수 있지만 부처님은요 다양한 근기에 맞춰 방편을 써주거든요. 방편 응용 능력이 떨어진다고요. 아라한들은 정법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다양하게 가르쳐요. 그리고 부처님 초기경 이런 데 보시면, 왕이 와도 정치 얘기를 물으면 정치 얘기로 가르쳐주고 다양한 방편을 구사하실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인간의 모든 걸 꿰뚫어보면서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면서 인도해 주지만 아라한들이 꿰뚫고 있는 진리는 무상 고 무아밖에 없어요. 45:57 인간도 무상 고 무아라는 걸 알고 있는 거지 인간성의 다양한 사바세계의 맛에 맞춰서 교화시켜주는 능력이 떨어져요. 그래서 우리는 못한다 하는 18 가지 부처님하고 우리가 같이 겸상할 수 없는 능력에 그런 게 다 있어요. 중생 근기를 아는 거. 3세를 꿰뚫어 보면서 얘기해 주는 거, 교화하는 거. 이런 거 우린 못한다. 아라한들은 딱 배운 것만 할 수 있어요. 아라한은 부처님 학당의 멘토들이죠. 멘토들이 할 수 있는 건 되게 딱 제한되어 있는데 제한된 데는 나도 해요. 내가 거기는 성취했으니까. 학당 같으면 만약에 정사면 정사가 얻은 걸 얘기해 줄 수 있죠. 수사는 수사가 얻은 걸 얘기해 줄 수 있죠. 그런데 부처님 보니까 너무 다양하게 하더란 말이에요. 중생교화를. 저건 우리가 못한다. 이런 역량 차이가 공덕 차이, 업장 차이라고 제가 푼 겁니다. 대승 불교의 문제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46:54 대승 불교는 아라한과 석가모니 차이를 분명히 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넘어서 진여 안주를 기반으로 무루의 육바라밀과 사무량심을 실천하는 보살도로 나아간 것이다. 이해되시죠? 어차피 생사를 초월한 진여에 안주했다면, 영원히 시공 안에서 시공 자체가 본래 그러면 일체 알아차리는 진여의 작용이니까 그 안에서 이 3세를 하나로 통으로 꿰뚫어 보면서, 중생도 나와 둘이 아니라고 보면서 신나게 육바라밀과 보살도를 펼치면 어떨까? 이런 발상이 나온 거라는 거예요. 그게 대승이다. 6. 사무량심은요 출입식념경 깔라마경 삼명경에 나오는데요. ① 시방의 우주로 사랑(慈)의 마음을 확장하여 가득 채우는 거고요. ② 시방의 우주로 연민(悲)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거고. 제가 얘기 드린 거죠. ③ 시방의 우주로 기쁨(喜)의 마음을 확장해 보고요. 47:51 ④ 시방의 우주로 평정(捨)의 마음을 확장해 보는 겁니다. 이게 수행이면서 그대로 자비의 실천이 됩니다. 열반 자리에서 자비희사를 끌어내나 열반 자리에서 팔정도를 끌어내나. 이게 이제 부처님 가르침의 대승성입니다. 초기 불교 때도 이미 대승 사상이 있었다는 게 이겁니다. 팔정도나 사무량심에서. 이거는 대승해 와도 이거 부정할 수가 없어요. 육바라밀이라는 것도 팔정도의 다른 버전이에요. 그냥. 그렇죠? 선정 지혜 계율에다가 보시 인욕 정진만 더 추가한 거거든요. 그렇죠? 정진은 또 팔정도에도 이미 있었잖아요. 정진. 그러니까 팔정도의 좀 새로운 대승 버전일 뿐이지 같은 진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와 사무량심 특히 사무량심은 대승불교에서도 최고로 중시합니다. 48:49 사무량심. 초기 불교 때부터 대승성이 이미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보시면, 제가 열반이라는 공성 안에 이런 팔정도와 사무량심의 진리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린 거거든요. 이게 뭘 말하게요? 부처님 때 이미 구공이 있었다는 거예요. 텅 빈 열반 공 안에 진리가 꽉 차 있다는 게 이미 부처님 때부터 드러났다는 거예요. 텅 빈 열반 공 안에 진리가 꽉 차있다는 게 이미 부처님 때부터 드러났다는 거예요. 이게 힌두교와의 차이입니다. 이미 구공 사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다 열반에서 벗어나기만 원하니까, 당시 문화가 그러니까 솔루션을 제한하면서 곁들인 게 벌써 거기에 구공이 들어가 있습니다. 법공의 기초도 있어요. 왜? 부처님은 일체 존재하는 것 모두 육근밖에 없다고 그랬잖아요. 법공의 기초도 이미 나오고요. 모든 곳에서 알아차리는 빛나는 마음이 있다고 했고 존재하는 것은 알아차려지는 그 육근밖에 없다고 했고. 거기서 너희는 팔정도와 사무량심을 구현해야 된다고 했고. 이러니까 부처님이 4대 성인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49:48 아라한들은 4대 성인에 못 들어가요. 이런 걸 원만하게 깨달은 게 아니기 때문에. 이해되시죠? 아라한의 한계가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7. 마하데바의 다섯 가지 일(5事). 부처가 열반에 든 뒤 약 200년 뒤에 아쇼카 왕 때요 마하데바, 대천(大天)이라는 대중부 아라한이요 아라한의 경지에 대해서 다섯 가지 주장을 합니다. 아라한들 이상하다. 아라한이 부처님에 비해 너무 턱없이 모자란다는 다섯 가지 주장이 나와요. ① 아라한도 유혹당할 때가 있다. 아라한도 여기 나오시면 분명히 흔들린다. 막 부정관(不淨觀) 때리고. 부정관 때린다는 게 흔들린다는 거죠. 그렇죠. 부정관 안 때리겠죠. 딱 봤는데 이성(異性)이 다 참나의 작용으로 보면 부정관을 굳이 안 하겠죠. 아라한도 유혹당할 때가 있다. ② 아라한이 이룬 걸 본인이 모르기도 한다. “야 너 아라한이야.” 그러면 “내가?” 이럴 수 있다. 실제로 이래요. 50:47 실제 이렇기 때문에 이미 아라한 되신 분들이 아라한인지 몰라요 지금. 제가 볼 때는 아라한인데. 제가 처음부터 불교 강의할 때 얘기했어요. “절에요 이미 견성하셨는데 견성하신 줄 모르는 분들이 많다.” 왜 상상 속의 견성을 쫓느라고 이미 이룬 견성을 못 알아봐요. 글로 배우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③ 아라한에 이른 걸 알기까지 시간적인 유예기간이 있기도 하다. 바로 아라한이 된 줄 좀 모르기도 하더라. ④ 타인이 알게 해줄 때도 있다. 오히려 남의 도움 받아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더라. ⑤ 아라한도 괴로움이 있고 이를 통해 더 성스러워진다. 아라한도 진화하더라는 거예요. 계속 진화하려면 탐진치를 겪어야 되거든요. 여러분 탐진치 없이 여러분 영적 렙업 없습니다. 보살은 탐진치를 왜 수용하는지 아세요? 그거 없이는요 일단 공부에 있어서, 중생과 소통은 떠나서요, 공부에 있어서 렙업이 안 돼요. 여러분 렙업하고 싶다는 게 탐욕이에요. 51:44 어제와 같은 나 자신의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나 자신한테 분노하는 게 진(嗔)이에요. 탐진치(貪嗔), 치(癡) 어리석으니까 나아질 수 있는 거예요. 이미 어리석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셔야 돼요. 말이 안 돼요. 여러분이 렙업을 날마다 성장하신다는 건 날마다 탐진치를 쓰고 계신 거예요. 그거 없이는 성장이 안 돼요. 그러니까 결국 아라한들도 이런 부분을 솔직히 인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전히 탐진치 속에 있고 괴로움도 겪고 유혹도 당한다. 이러한 마하데바의 다섯 가지 일의 주장에 대해 찬반이 갈립니다. “우리는 안 그래” 이런 사람 나왔겠죠. “너나 그러지. 난 안 그래. 나 유혹 안 당해.” 그러면 알 길이 없죠. 이후 아라한은 더 이상 부파불교의 분열이 너무 가속되다가 더 이상 이상적 목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팽배해지며 아예 부처가 되자. 아라한은 부처님 계실 때 아라한은 더 대승적이었는데. 52:45 이렇게 보시면 돼요. 부처님 가시고 200년도 되니까. 아라한들이 너무 소승적이 된 거예요. 그렇죠. 딱 들어앉아서 상 잡으라는 게 장로들이거든요.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이에요. 장로라는 건. 엉덩이 무거운 아라한들이 잔뜩 나오니까 대접만 받으려고 하지 부처님 때 아라한들은요, 부처님부터 전도 다니시는데 아라한이 감히 안 다닐 수 있어요? 부처님부터 완전 군장하고 다니시는데 밑의 아라한들이 감히 어떻게 그래요. 그러니까 부지런히 전도 다니고 살아있었단 말이에요. 아라한이 대승 제다이가 됐다고요. 그런데 이제 딱 들어앉더니, 대접만 받으려는 거예요 아라한이라고. “우리는 해탈한 존재다. 우리한테 기도하고 복을 빌면 너희가 복을 받을 거다. 우리가 아라한이 복 밭이다. 복전이다. 우리한테 잘해라.” 하는 게 지금 내려와서 남방불교만 지금 가서 보셔도 스님 대접이 장난 아니죠. 그게 출가한 자들이 그렇게 대접받으면 될까요? 53:48 아니 집도 버리고 출가 뭐 무소유하겠다고 무집착하겠다고 출가한 사람들이 먹는 것만 해결하겠다고 탁발하던 자들이. 지금 탁발하는데 거기서 복을 받으려고 수많은 중생들이 밥을 쏴야 내가 복을 받으니까 산해진미를 해놓고 기다려요. 스님들 보면. 그러니까 이렇게 대접받으니까 좋겠죠? “공부하기 좋네” 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방편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뭔가 이상해졌죠? 부처님 때랑 전혀 달라요. 지금 남방불교는요 부처님 때 그대로 수행한다고 하지만 전혀요 일부 수행법에 있어서 부처님 때 거를 지금 재현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승려의 마인드가 글러먹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한테 잘해서 복 받아라” 하는 식으로 도를 닦으셔서 어떻게 윤회를 벗어나시고 해탈하시겠다는 건지? 그네들 주장이니까. 남방 불교 주장이잖아요. 54:45 업을 초월해서 해탈하시겠다는 분들이 왜 대접받으려고 하죠? 결국 당연시 여기죠. 저 같으면 그래갖고 못 견딜 것 같은데. 요런 거는 부처님 때 가풍 아닙니다. 그러니까 혹시 “부처님 가풍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남방불교야”라고 주장한다면요 아닙니다. 그거는 그러니까 어느 일부는 그럴지 모르지만 부처님 때 가풍이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이해되면. 그래서 그런 거 저런 거 다 떠나려면요 보살도를 닦으시라. 인정하라. 솔직히 탐진치 인정하라. 보살도를 닦자. 그러니까 재벌 스님들이 나와요.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재벌 스님들의 등장이 가능해집니다. 그렇죠. 남방불교도 그런 부분에서 반성해야 될 부분이 많아서 말씀드렸고 이제 다시 앞으로 가볼까요? 55:42 12페이지, 이제 힌두교 쪽 좀 더 볼게요. 힌두교 쪽. 그럼 이렇게 부처님이 주장하신 정광명심이 힌두교, 당시 힌두교는 우파니샤드 시대거든요. 우파니샤드 시대라는 건요 우파니샤드가 지금 라마나 마하리시니 우리가 아는 전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모든 힌두교 도인들 있잖아요. 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의 계승자들입니다. 그 전은 베다 시대라고요 철저히 브라만 계급만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고요. 브라만 계급이 베다경으로 욀 때 더 신분 낮은 계급이 만약에 우연히 들었다고 그러면 데려다가 귀에다 쇳물을 붓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브라만 계급 외에는 진리를 들으면 안 돼요. 이 정도로 철저한 잘못된 계급의식으로 신한테 귀의하는 학문이, 종교가 브라만교였는데 베다 시대라고 하고요. 56:41 브라만교가 우파니샤드 시대로 오면요 직접 신을 내 안에서 찾는 시대로 갑니다. 내 안에서 신을 찾는. 진여와의 열반 오늘 저기 아라한들까지 한번 알아봤어요. 정광명 안에서 아라한도 존재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제 다음 시간에는요 힌두교 파보게요. 부처님이 스승으로 삼았던 우파니샤드 시대의 성자들 두 분 이야기랑 힌두교의 대표적 성자인 라마나 마하리시의 가르침,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구절들을 가지고 부처님이 얘기하신 정광명이 당시 우파니샤드 시대에 어떻게 나온 말인가도 알아본다면요 힌두교랑 불교가 싸울 게 아니에요. 감히 얘기합니다만 지금 불교는 힌두교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요 힌두교와 불교가 함께 가야 됩니다. 문파별로는 힌두교를 아주 적대시하는 불교 문파들이 존재할 수 있지만 불교 자체가 힌두교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57:42 부처님은 우파니샤드 시대의 성자예요. 그리고 그 스승들도 우파니샤드의 아주 도인들이었고요. 그런 게 부처님께 그대로 영향을 준 거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 입에서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그게 우파니샤드 시대에 참나를 말하는 대표적인 술어예요. 똑같은 말을 하신 거예요. 똑같은 말을 했는데 우파니샤드는 틀렸고 부처님만 맞다고 주장하실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 이후 되게 문파별로 편협해지다가 부처님 가르침 내부에서도 서로 싸워서 부파불교(部派佛敎)잖아요. 부파(部派)들끼리 싸우잖아요. 그 부파랑 싸우다가 또 힌두교랑 싸우다 하면서 자기들 문파들의 이론들이 정립되거든요. 근데 그때 문중의식을 가지고 지금 불교를 보고 있습니다. 힌두교를 까야만 우리가 진짜 불교인 것처럼. 아니에요. 힌두교를 통 크게 이해할 때 진짜 불교가 돼요. 그래서 대승 열반경에서 이미 통 크게 힌두교에서 말한 참나도 맞다. 58:40 다만 걔네들이 참나를 잘 몰랐기 때문에 부처님이 뭐라고 했던 거지 열반을 참나라고 부르자라고 아예 제안까지 합니다. 부처님 말씀으로 하니까 제안도 아니죠. “참나라고 불러라. 그리고 공부해야 잘 될 거다”라고 대승열반경에서 이미 주장해요. 그게 오래됐지만 지금도 힌두교하면 벌벌 떨고 적으로, 6.25 겪은 세대의 빨갱이 대하듯이, 공산당 무서워하듯이 힌두교를 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웃기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지금 어느 종교 구별 없이 진리를 향한 여정에서 자명하면 흡수할 생각을 하고. “탐진치만 없으면 흡수하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쳤거든요. 부처님 때 제자 하나가 브라만교 학원 갔다 와가지고 “거기 스승이 이런 말 하던데 진리인가요?” 59:32 할 때 부처님이 이랬죠. “그 스승이 탐진치 없으면 믿으라”고, 맞다고, 탐진치가 없다면. “스승을 네가 관찰해 봐라.” 인도 도인들을 봐서 탐진치 있어 보이는 스승은 빼고요. 탐진치 없어 보이는 스승 말은 들어보자고요. 라마나 마하리시 같은 성자는 대단한 성자니까 그분한테 탐진, 치(癡)는 몰라도 탐진이 있다고는 안 할 거예요. 그러면 그분이 그럼 탐진치가 01:00:00 없는 성자인지 모르는 거니까 그분 말씀도 경청해 볼 필요가 있죠. 알고 보면 많은 스님들은 마하리씨의 “나는 누구인가?” 옛날에 히트 친 책이거든요. 사실은 그 책 보고 출가한 분들 많아요. 그 책 보고 또 출가해 놓고, 또 교리 상은 힌두교 까야 되는 이런 모순된 상태에 있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제 불교는 힌두교를 통 크게 수용해서 같이 가야 된다. 우리가 그동안 오해했다. 지엽적인 문자 놀음에 빠져서 싸웠던 게 오해가 많은 것 같다. 체험에 기반해서 우리 소통해보자. 아니 불교, 기독교도 소통하는 마당에 불교, 힌두교가 원래 지금 어떻게 보면 한 뿌리에서 나왔는데 그거 소통이 안 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렇게 대화해 볼 때가 됐다. 제가 이렇게 봅니다. 거기에 좀 도움이 되는 강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봬요. 1: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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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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