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10강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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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1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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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 | 부제 || 라마나 마하르쉬의 가르침 |- | 강의일자 || 2023. 07. 15. 土. |- | 게시일자 || 2023. 09. 23. |- | 동영상 길이 || 45:24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Pb3Rv9A-s7M |} 00:07 진여와 열반 가르침의 시작부터 끝은 정광명이다. 정광명. 진짜 답은 정광명이다. 이거를 정광명 각성을 하냐 안 하냐? 이게 참나라고, 힌두교에서 참나라고 부르는 실체입니다. 이걸 각성하느냐? 정광명이 뭐냐? 요즘 말로 초의식이다. 인간의 의식 중에 가장 시공을 초월한 의식이 있어요. 요 초의식 자리를 각성하냐 못하냐 예요. 이거 하고 시작하면 제가 얘기했지만 전제가 달라요. 이거 못하는 사람들이 평지에서 달리고 있다면요 하고 시작하면 여기서 시작해요. 여기서 죽을 둥 살 둥 달려도 여기까지 못 옵니다. 근데 바로 여기서 시작해요. 금수저, 영성계의 금수저죠. 여러분 물질계에서는 못 누렸더라도 영성계는 금수저 될 수 있어요. 01:00 아니 부처님 제자면 금수저 아니에요? 같은 제자라도 또 흙 빨고 있다니까요. 뭐 재벌집 뭐 한 몇 억 번째 아들, 거기까지 안 가나 몰라도 흙수저랑 진배없죠. 금수저, 갓수저로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참나 각성하면 경지가 달라요. 여러분 신분이 달라져요. 영적 신분이 달라져요. 기본값이 달라져요. 기본값이 달라요. 그러니까 수저가 다르다 이런 요즘 논리랑 잘 통하죠. 금수저가 노는 거랑 흙수저가 노는 거랑은 기본값이 다르다. 지금 흙수저는 사경을 헤맬 일 아닌가요? 흙수저가 놀면? 자 똑같아요. 견성 안 했는데 지금 견성을 하려고 생각도 못하고 경전의 바다에서 막 기복에서 헤매고 있다. 이번 생에 답 없는 겁니다. 지금 신랄한 얘기 같지만 사바세계에서 우리한테 한정된 시간이요 천만 년이면 모르겠는데 한 만 년 정도 방황하다가 그 이후 공부하면 되는데. 여러분 지금 02:00 입시학원 온 기분이죠? 지금 정신줄 잡고 죽기 전에 승부 봐야 돼요. 견성하셔야 돼요. 견성 안 하면 답이 없다. 견성하면 시작이 다르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가 있어요. 우리가 교학이라는 건 결국 논리 체계인데 언어로 이루어진 논리 체계인데 언어, 개념으로 이루어진 논리 체계인데 이 논리체계는 항상 전제가 있고 전제에서 추론해 갑니다. 다음 논리로 추론해가요. 전제에서 전제가 되는 명제가 있어요. 거기서 추론 추론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정견이라는 거는 전제를 찾아내는 게 정견이에요. 추론을 잘 해가는 게 정사유예요. 부처님의 정견이 뭐죠? 제행무상, 일체는 무상하더라. 그럼 여러분도 동의하시죠? 제행무상, 현상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거. 이 전제라는 거는요 항상 논리의 03:00 밑바닥엔 전제가 있거든요. 따라서 이거는 논리로 입증할 필요가 없는 거여야 돼요. 그럼 전제가 100% 옳다는 게 아니에요. 전제가 잘못되면 다 잘못된다고 했잖아요. 사상누각이 되는데. 전제라는 것들은 뭐가 전제가 되냐? 논리적으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어야 돼요. 너무 지당한 상식이에요. 사람은 죽는다. 더 요구하지 않잖아요. 사람이 왜 죽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시오. 사람은 죽는다에서 시작하죠. 그럼 그 사람이 죽는다가 참이면 자명하게 전개만 하면 다 참이 되는 거예요. 이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태양빛이 확실하면 그 빛을 받아쓰는 달빛도 자명하게만 쓰면 밝다는 거예요. 그런데 달에서 달로 자꾸 가다 보면 태양하고 너무 멀어지다 보면 흐릿해집니다. 개념에서 개념으로 가다 보면요 팩트가 입증을 안 해주니까 팩트가 태양이에요. 팩트가 보장을 해주지 않은 그 개념들은 힘을 잃어요. 우리끼리 지금 외계인은 있다라고 해가지고 엄청난 논리를 전개해서 책을 한 권 쓴들 04:00 그거 쓰고 나서 집에 가시면 자명하세요. 없으면 어떡하지? 끝이에요. 이거 이 한마디에 모든 게 흔들려요. 만약에 없다면? 끝. 전제가 잘못되면 다 작살납니다. 전제가 팩트가 아니면 다 작살난다고요 아무리 멋지게 논리를 전개해도 아무리 최고의 논리학자들이 덤벼도 안 돼요. 이 얘기는 전제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교학을 이해하실 때 다 전제가 있어요. 전제가 달라요. 중론을 쓴 용수보살의 전제는 오로지 현상계만 탐구하겠다는 겁니다. 현상계에서 무상하다. 제행이 무상하다만 가지고 연구합니다. 제행이 무상하다를 전제로 해서 논리를 전개하니까 뭐예요 뭐가 나와요? 영원한 건 하나도 안 나와요. 열반도 무상하다로 끝납니다. 열반이라는 말조차도 하나의 개념이니까 무상하다로 끝나요. 언어의 세계만 탐구하겠다. 용수보살처럼 그럼 중론 철학이 나와요. 언어의 세계는 다 박살낼 수가 있어요. 정광명? 정광명이라는 언어는 박살낼 수 있어요. 05:00 정광명이라는 말 또한 인연의 소산일 뿐 영원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일체는 무상하다에 전제해 버리면 모든 게 무상으로 끝납니다. 이런 교학이 가능해요. 아무리 자기들이 논리적으로 전개해도 전제가 잘못돼 있으면 결론도 잘못된다. 그 전제가 부분적 자명에 빠져 있으면 결론도 부분적 자명에 빠질 수가 있다. 아무리 자명하게 전개를 해도. 마찬가지로 그럼 보세요. 누구나 우리가 머릿속으로 사유를 할 때 전제가 다 있으실 거예요. 여러분 체험한 게 전제가 돼요. 그 체험한 거에 바탕해서 전제를 세워서 논리적으로 추론하세요. 누구나 다. 그렇죠? 이거에 대해서 더 공부할 게 없어요. 그냥 이렇게 살고 계세요.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한번 돌아보시라는 것뿐이에요. 이걸 더 잘하려고 논리학을 배울 수는 있죠. 근데 논리학을 안 배워도요 웬만큼 자명하게 따라와요. 찜찜해요. 이상한 생각을 하면 찜찜하고 또 돌아보게 되고 그러니까 더디건 빠르건 06:00 다들 웬만큼 따라오게 돼 있어요. 기본적으로 타고난 그 지혜가 있어서. 그런데 용수보살의 중관 사상 선불교의 선 언어가 다 다르죠. 경전들이 다 다르죠. 불교 내에서만 해도 서로 완전히 다르죠. 논리 체계가. 왜 그러냐면 전제가 달라요. 시작이 다릅니다. 유교 경전들은 시작이 또 달라요. 인간은 양심이 있다 해서 시작해요. 그럼 불교 경전 중에 인간은 불성이 있다 해서 시작한 경전은 불성을 체험하고 시작한 경전하고, 불성도 무상하다고 시작한 경전하고는 완전히 다른 결이 나겠죠. 결론이. 이게 지금 불교의 차이인데 이들이 왜 힌두교 경전을 이해 못하는지 설명 드리려는 거예요. 힌두교는 전제가 나는 참나다에서 시작해요. 이걸 불교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모든 경전들은 참나는 없다는 걸 공격하는 데 집중돼 있어요. 힌두교, 그래서 우리가 힌두교 논리 깼다 그래요. 이건 다 허망한 놀음입니다. 불교 말로 일체유심조라 자기 법계에서 07:00 일어나고 있는 에고의 언어적 유희일 뿐이에요. 그걸 가지고 내가 진리를 깨달았느니 뭐 진리가 아닌 걸 타파했느니 다 허무한 소리입니다. 힌두교가 안 깨져요. 지금 전 세계에서 참나 각성은 힌두교가 시키지 불교가 못 시켜요. 왜? 달라이라마 참나 없다고 다 재 뿌리고 다니고 선불교는 뭔 소린지 모를 소리만 하고 다니고. 그나마 아는 것도 박살내요. 선불교가 지나가면요 그나마 잘하던 풀도 죽어요. 뭔가 내가 잘못했나 보다. 아무튼 난 아닐 거야. 이해되시죠? 이래가지고 그럼 누가 거기에서 참나의 싹을 키우나요? 힌두교들이. 힌두교는 애초부터 참나를 전제하고 그거를 설명해 주는, 체험에 기반해서 설명해주는 논리만 발달해 있어요. 그럼 체험에 기반한 이 논리를 체험이 다른 사람이 읽으면 그 전제 가지고 싸우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참나 체험하신 분들은 여러분 오늘 누가 안 시켜도 사유의 시작이 뭐예요? 참나 있다죠. 08:00 이 참나를 어떻게 그러면 늘 유지시키지 이게 고민이에요. 그럼 이 사람이 이 고민을 저기 중관 학파한테 하면 뭐라고 할까요? 참나가 없다는 걸 입증해 줄 거예요. 이상하죠? 난 있는데. 그걸 어떻게 배양할 건지 어떻게 유지할 건지 이게 고민인데 참나가 왜 논리적으로 없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전제가 달라요. 아무리 상담해도 얻을 게 없어요.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불교에서 아무리 힌두교 경전을 까도 불교 법계에 들어온 힌두교를 깨고 있는 거예요. 지가 지랑 싸우고 있다고요. 원래 힌두교랑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힌두교의 언어는 참나 체험을 해야만 보입니다. 선불교의 언어는 참나 체험해야만 보여요. 화두를 푸실 수 있겠어요? 못 풀어요. 근데 이 논리학자들은 다 풀 수 있대요. 왜? 언어로 된 건 우리가 짱이야. 제가 대학교 한 3, 4학년 때 분석 철학 강사가 와서 딱 시작할 때 자기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요 참 거짓을 다 알 수 있대요. 왜? 언어로 돼 있는 한 언어는 논리 체계니까 논리 체계만 분석하면 된대요. 09:00 기호화해요. 내용은 상관없어요. 기호화한 다음에 기호 간에 수학하듯이 풀어서 참 거짓을 찾아내요. 뭔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또 제가 불교 배웠던 그 교수님은 선문답도 언어이지 않느냐. 언어가 된 이상은 언어로 풀 수 있대요. 한 번도 푸는 걸 못 봤어요. 그러면서 푼다고 주장만 하세요. 언어로 된 거니까 언어로 풀 수 있지. 이거 풀어보세요. 딴 얘기만 해요. 못 풀어요. 왜? 아니 전제가 다른데. 아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언어인데 언어만 조진다고 달이 나와요? 제일 훌륭한 사람은 뭐예요? 손가락 가리킬 때 빨리 달 보는 사람이에요. 체험과 개념이 딱 만나면 끝나요. 근데 체험이 없는 사람이 이 손가락만 가지고 아무리 의심을 한들 상상 속의 달과 싸우거나 달은 상상이었다는 결론을 내고 끝냅니다. 존재하는 건 손가락뿐이었다. 제행무상, 참나는 없었다. 결론 끝. 전제가 10:00 달라서 그래요. 여러분은 지금 어느 전제에 서 계시는지 기본값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로 금수저 되는 비결은 참나 체험 한방이면 금수저. 참나 체험 한방이면 화두가 풀리고, 1700 공안이 풀리고, 경전이 풀리고, 불경 성경이 같이 읽히고, 이 기적이 다 일어나요. 왜? 경전은 이거 체험한 사람들이 써는 거거든요.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의 경전 힌두교 경전도 바로 이해됩니다. 저는 그랬어요. 다 이해됐어요. 모든 경전이. 저는 제가 강의를 지금까지 한 게요. 인류에게 많은 제가 얻은 정보를 전달하고자 한 것도 있지만 저는 하나의 실험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입증이기도 했어요. 보시라고. 참나 체험 하나로 모든 종교가 설명되나 안 되나 보시라고 제가 실험한 걸 다 올려놓은 겁니다. 여러분이 보시고 판단하시면 돼요. 되네 안 되네. 뭐야 참나 체험 가지고는 다른 종교 설명은 안 되네. 제 강의 보시고 판단하시면 된다는 거예요. 전 다 올려놨으니까 제가 실험한 거를. 저도 그걸 실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얘기해요. 11:00 진짜로 되는지? 말로만 할 수는 없잖아요. 이겁니다. 전제. 그런데 보세요. 부처님의 전제가 달라요. 정견 열반적정, 열반은 고요하더라. 여기서 그러면 정사유는 여기서 논리를 시작해야 돼요. 따라서 열반에 들면 고요하니까 탐진치가 일어날 때는 빨리 열반을 깨달아 열반에 들어가야겠다. 이 말은 뭐가 문제냐? 열반이라는 걸 지금 체험을 안 해봤는데 이 논리가 아무리 아름다운들 열반이 뭔지 규정도 안 돼 있잖아요. 여기서 헤매는 겁니다. 그래서 중관론의 결론은 열반도 무상하다 예요. 열반도 자성이 없다 예요. 끝. 열반도 언어니까 그래서 열반도 없다. 공공(空空), 공도 공하다 해서 끝나요. 뭔가 그럴싸하죠. 달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이게 좀 먹힐 것 같은데, 아무튼 손가락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이거 이쪽 손이에요. 이겁니다. 이게 언어라고 치죠. 언어와 개념. 그럼 이게 지금 이게 12:00 참나라고 할게요. 손가락에 참나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얘만 언어만 박살내가지고 언어가 일체가 무자성하다는 걸 입증해내요. 중관론 사상은. 이게 중관학파입니다. 여기에만 관심이 있어요. 여기는 말 안 해요. 말을 하면 또 이게 언어화되니까 말을 안 해요. 여기만 다 언어를 다 박살내요. 모든 말이 불가능하다는 걸. 제가 뭘 들었죠? 펜. 근데 제가 든 거는요 실상은요 오온의 인연의 화합물이에요. 그냥 연기의 화합물인데 제가 이거를 펜이라고 해버리는 순간 고정불변의 펜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영원한 펜이 있는 것 같다고요. 따라서 실상은 영원한 게 없지 않냐. 다 니가 말한 언어에서만 있지 않았냐. 따라서 언어 개념은 실상이 아니다. 자성이 없다. 박살내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져요. 이때 어떻게 돼요? 이때 할 말이 없어지면서 참나 접속이 일어납니다. 이게 중관식 견성법이에요. 선불교식은 13:00 이거 뭐냐? 손가락이라고 해도 죽여 버리겠다. 손가락이 아니라고 해도 죽여 버리겠다. 뭐냐? 해서 참나, 참나로, 몰라 상태에서 참나로 가게 합니다. 뭐가 쉬워요? 선불교가 쉽죠. 왜냐하면 참나 각성하고 나와서 언어로 또 표현해야 되거든요. 근데 여기는 언어를 다 조져 놔가지고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져요. 중관파는 “없다 없다 병”에 빠진다고요. 다 박살내는 데만 능해집니다. 어떤 것도 세울 수가 없어져요. 세우면 다 이제 방편으로 세운다고 해야 돼요. 결국은 결국 책 미치게 써요. 이 양반들이 결국은 방편으로서의 언어를 수용해야 되기 때문에. 따라서 손가락 가리킬 때 바로 달 보고 바로 나도 멋지게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에서 어디 있건 달을 가리킬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게 맞지 손가락에 달이 없다는 걸 입증해가지고 할 말을 잃게 만들어서 달에 가게 만드는 이런 방식을 써야겠어요? 그렇죠? 이건 부분적 자명에 빠지니까 나중에 14:00 언어 개념 언어와 개념을 박살내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까 부분적 자명에 빠져서 자명한 경전을 못 씁니다. 오히려 언어로 설명을 잘 못 해준다고요. 손가락을 이제 못 들어요. 감히 이 손가락은 손가락이 아니에요. 이제 이러고 시작해야 돼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중요한 거 이런 논리에 한번 빠져버리면 힌두교처럼 바로 달를 가리키는, 참나를 가르쳐주는 이 언어를 오히려 이해를 못하게 되고, “자 봐 저기 참나 있지.” “참나가 있다고? 참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냐?”부터 해가지고 또 언어랑 싸워서 다 조져 놓고는 힌두교를 극복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달이 계속 떠 있다는 거예요. 어떡할 거예요? 이게 정광명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석가모니가 말한 정광명이 그대로 힌두교의 참나고, 실제로 그 참나가 없다면 석가모니는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을 수가 없죠? 이해되시죠? 석가모니가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었다는 게 15:00 그러면 뻥이죠? 참나가 없는데 어떻게 얻었죠? 여기까지 가야 돼요. 이제 라마나 마하르쉬로 가겠습니다. 다들 경전 겨우 이해하기도 바쁜 때 경전을 갖고 노는 법을 제가 가르쳐 드리니까 좀 미안하긴 해요. 지금 그런 강의 듣다가 이거 들으면 더 혼동이 오실까 봐. 근데 자유로워지실 거예요. 제 강의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으시면 쓸데없는 30~40년의 허송세월 낭비가 없고 바로 참나를 만나서 그대로 불보살이 바로 되실 거니까 제가 얻는 이익이 커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라마나 마하르쉬 가르침 들어가 볼게요. 이 책들은요 옆에 있지만 그 대성 스님이 옮기신 라마나 마하르쉬의 저작전집, 탐구사에서 나온 제가 또 강의 많이 했더니 책도 한 세트를 보내주셨더라고요. 신간 가지고 하라고. 16:00 제 책이 오래됐거든요. 10년, 아니 20년 된 책들이잖아요. 제가 예전에 공부하던 책들이니까 한 20년 더 된 책들만 갖고 해서. 아무튼 그런데 저는 이제 옛날 책이다 보니까 옛날 책 가지고 이제 쪽수를 해놨는데요. 라마나 마하르쉬의 저작전집에 있는 겁니다. 1. ‘공’空(‘나’ 아닌 모든 것이 비워진 상태)으로서 스스로(자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의식의 빛에 의해) 빛나고, 중간과 위와 아래, 그리고 안과 밖,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는 진아에 대해서만, 항상 더욱 더 많은 명상을 하도록 하여라.(208쪽) (공처정空處定과 식처정識處定). 공으로서 스스로. 여기서 공하다는 거는 공처정(空處定)이에요. 나 아닌, 참나 아닌 모든 거를 비워버리는 게 공이에요. 몰라 하고 또 몰라 하는 게 이게 공처정을 말합니다. 공. 공으로서 스스로. 자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의식에 의해서라는 뜻이에요. 스스로 빛나고. 자, 텅 빈 중에 스스로 빛난다. 지금 공적영지(空寂靈知)죠. 그러니까 공처정(空處定) 식처정(識處定)은요 공적 영지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공처정 식처정에 의해서 스스로 빛나는 의식, 지금 정광명을 얻은 거죠. 그래서 빛나고 정광명 상태를 말합니다. 중간과 위와 아래와 안팎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는. 17:00 똑같잖아요. 모든 곳에 무한하게 빛나고 있는 진아에 대해서만 항상 더욱 더 많은 명상을 하도록 하라. 석가모니 육성에 더 가까운 건 힌두교라니까요. 석가모니가 그렇게 복잡한 논리를 많이 전개하지 않았어요. 가끔 인도의 논리학자들하고 싸울 때만 논리적인 그런 입장을 취하지 대부분 체험과 바로 결합할 수 있는 자명한 언어를 쓰십니다. 이걸 어렵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쉬운 언어를 오히려 어렵게 했다. 나중에 나중에 스님들이. 이 그림 보세요. 이거는요 알아두시면. 이게 아뢰야식 그린 거랑 똑같지 않으세요? 제가 만법유식도 그릴 때 아뢰야식 이걸 참고한 거예요. 이거랑 청담 스님이 그리신 그림 있어요. 그게 거의 거의 유사합니다. 그래서 18:03 여기 여기가 문이 하나 달렸어요. 웃기죠. 여기서 참나의 빛이 빛나고 있어요. 이게 지금 결국 똑같지 않나요? 이게 부처님의 스스로 빛나는 무한한 그 의식 이거예요. 이게 진아예요. 참나.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다는 분들은 체험이 없는 분들이에요. 글로 배운 분들한텐 달라요. 체험과 글을 합친 분들한텐 같아요. 이 참나의 빛이 그대로 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 문을 닫아버리면. 이 문을 열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그대로 안으로 비치겠죠. 이게 거울입니다. 거울. 이 거울에 비춰서 빛이, 또 이 거울에 빛이 반사된다고 지금 가정하자고요. 이 빛이 반사돼서 여기는 오감의 19:00 세계입니다. 그럼 여기가 지금 바깥에 있는 색성향미촉의 세계겠죠. 색성향미촉. 이 바깥 세계까지 다 이 빛이 비춰서 일어난 겁니다. 참나의 빛으로 일체만법이 존재하는 거예요. 만법유식(萬法唯識), 일체유심(一切唯心)이랑 똑같습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그럼 이게 뭘까요? 여기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가 8식의 세계예요. 여기는요 에고예요. 7식. 이 빛 받았는데 시공 밖에서 지금 작동하잖아요. 에고. 이거는요 여기는 이제 6식의 세계죠. 5식과 이걸 이제 통합해서 이해하는 지금 6식이 정확히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에고의 작용이니까 에고가 바깥 세계, 여기는 6식이면 여기는 6경이죠. 불교식으로 말하면 여기는 8식이고요. 8식의 세계고 여기는 업보의 세계죠. 업보가 저장되는. 이 자리는 지금 우리가 흔히 9식으로 20:00 말할 수 있겠죠. 이해되시죠. 여기는 진아입니다. 힌두교식으로 볼까요. 여기는 무지예요. 무지. 그래서 이 문 닫아버리면 어때요? 깊은 잠의 세계. 여러분 주무실 때 여기 들어가 계십니다. 무의식, 8식 무의식 세계에 들어가 계세요. 7식의 세계, 여기는 에고예요. 여기는요 꿈의 세계예요. 요 문밖이 생시예요. 깨어 계시다는 건 바깥세계 지금 색성향미촉과 소통하는 거죠. 여기 문이 닫히면 꿈속에서 오감을 누리시면서 에고가 생생하게 움직여요. 그러다 여기 문이 닫히면 에고도 사라지고 깊은 잠에 들어가 버려요. 깊은 잠이 참나랑 가깝다는 건 에고가 작동을 안 해서 그래요. 근데 무의식 상태 깊은 무의식 상태에 있기 때문에 참나의 빛과 하나 된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참나에 가까운 상태일 뿐이죠. 이 논리를 이해를 못해요. 제가 중관이나 저기 유식학파한테, 중관론도 아니에요. 유식학파한테 “이게 지금 너네 8식설하고 통하네.” 그러면 이제 난리 납니다. 21:00 왜 참나가 없는가부터 또 시작이에요. 유식학이나 똑같아요. 다 인도에서 나온 학문들이다 보니까요. 유식이건 중관이건 언어 개념을 통한 논리 싸움에 능합니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인도 학파들하고 또 끝없이 논리로 서로 싸우면서 학문이 발전해 왔어요. 근데 왜 승부가 안 나느냐? 제가 한마디로 얘기합니다. “우리가 이겼네, 졌네”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해서 논리가 전개되다 보니까 전제가 다르면 논리가, 서로 논리로 싸워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전제가 다르니까. 이쪽은 지금 이 체계를 체험적으로 경험하신 분들이 논리를 전개하면요 자세한 설명을 안 합니다. 이것만 해도 보세요. 공적영지(空寂靈知).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세요? 텅 비었는데 신령하게 알아차린대요. 이것도 설명이 안 돼요. 근데 체험하신 분들은 여러분 공적영지 이해되시죠? 22:00 네. 끝. 체험 안 된 분들한테 이거 죽을 때까지 설명해도 설명이 안 되겠죠? 전제가 다르면 아무리 설명한들 설명이 안 된다. “아니 그러니까 공이면 공하다는 거잖아. 그게 뭘 아냐고 공이.” 그렇죠? 이것도 설명이 안 돼요. 체험 없이 논리로 승부 보겠다는 거는 말이 안 되는 소리니까 그런 논리를 중시하는 교학들의 함정에 빠지지 마시라 이겁니다. 거기서 “힌두교 논리 엉망이라던데요.” 동양은 더 엉망이에요. 동양은 자세히 설명도 안 해줘요. 애초에 언어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요 손가락질만 잘해요. 현란하게 탁탁 쳐주고 끝이에요. 더 이제 더 그래서 동양에 논리가 없다는 학설까지 있었는데. 저 대학 다닐 때 저희 과의 교수님이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나” 이런 책을 쓰셨던가 거기서 이제 그분이 오히려 더 고급 논리라는 주장을 해요. 변증 논리. 뭐냐 하면 달과 손가락의 변증법적인 관계요. 23:01 적절한 그러니까 손가락에서는 자명하게 손가락이 설명하는 것 같지 않은데 손가락이 지적하는 거랑 달이 만나다 보니까 그 논리를 듣는 사람 내면에서는 더 실상이 잘 떠오르는 거죠. 그게 선문답 같은 거예요. 선문답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그 얘기를 알아들으면 견성을 해요. 달이 내 안에 떠버린다니까요. 손가락의 기능은 달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거지 달의 완전한 복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요. 언어의 세계에서 완벽하냐 아니냐가 실제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근데 거기에 함정에 빠져버리면, 교학에 빠져버리면 자기 언어의 세계에서 논리로 끝내려고 한다고요. 이걸 서양 철학자들이 그렇게 잘했어요. 그러니까 설명을 잘했다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접근을 잘했어요. 그래서 칸트, 헤겔을 보시면 여러분이 한 페이지 넘기기 전에 주무시고 계시는 거죠. 체험을 떠난 언어의 유희는요 내 안에 아무런 자명한 빛과 감동을 못 줘요. 오히려 한 구절 들은 명언이 더 자명해요. 24:00 그건 내 체험하고 딱 만나거든요. 그 언어 하나가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자명해져요. 그래서 신나서 그 책을 사면 그 구절 하나 얻어요. 어차피 다른 구절은 나랑 상관이 없었어요. 이해되시죠? 명언 하나가, 원래 자명한 언어 하나가 책 한권 급입니다. 딱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한마디가, 제가 은근히 꾸준히 몰아가라고 하듯이 정확히 몰고 가주는 언어가요 빠져나갈 수 없게 양쪽을 탁 치면서 몰고 가요. 실상을 완벽히 설명해주는 언어는 의미가 없다니까요. 전제가 다르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내가 체험할 수 있도록 진리를, 양면을 치면서 몰아가주는 게 좋아요. 공한데 알아차려. 끝. 공한데 알아차린대요. 이걸 여러분이 푸셔야 돼요. 공한데 어떻게 알아챌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입증해 주십시오. 그러면 뭐예요? 비행기가 활주로를 더 잘 달리는 법을 25:00 얘기해 달라는 거예요. 날아야 비행기인데 날지는 않고 활주로를 더 열심히 달리겠다는 거예요. 언어로 끝내고 싶은 거예요. 언어로. 왜 지금 중관이나 이런 분석 철학 이런 게 지금 전 세계에서 인기예요. 언어로 끝내고 싶거든요. 지금은 언어로 끝내려는 시대지 실상을 체험하는 시대가 아니에요. 모든 걸 정보화해서 언어로만 끝내려고 합니다. 근데 진짜 정보는요 살아있는 정보가 되려면 체험과 만나야 돼요. 그래서 힌두교는 논리가 치밀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겁니다. 불교분들이 착각하시기 쉬운 부분이라 제가 이렇게까지 얘기해 드려요. 실상을 담고 있냐 진짜로 이러냐는 거예요. 중요한 거는요 이게 논리적이냐가 아니라 팩트가 이러냐 예요. 여러분 의식이 실제로 이렇게 생겼다니까요. 이거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데 논리적으로 아름답지 않다. 논리 전개에 오류가 있다.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럼 뭐랑 똑같냐면 중세 스콜라 철학이 26:00 논리의 함정에 빠지다 보니까 말의 이빨 개수가 몇 개가 제일 논리적이냐로 방 안에서 싸워요. 한 놈도 나가서, 마구간 가서 까볼 생각을 안 해요. 이게 논리 함정입니다. 팩트에서 멀어져버리면요 말의 이빨은 몇 개여야 제일 합리적이냐를 가지고 싸우게 돼요. 이 지랄하다가 스콜라 철학도 망한 거예요. 무슨 느낌인지 팍 오시죠? 실상과 맞지 않는 논리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지금 힌두교의 이 논리 보세요. 이게 얼마나 논리가 있는 말일 것 같아요? 공으로서 스스로 빛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진아에 대해서만 명상해라. 깨달은 사람한텐 이보다 설명 잘하기가 어렵다라고 할 수 있는데 깨닫지 못한 사람한텐 이보다 불친절할 수가 없죠. 두 번째 볼까요? 2. ‘마음’을 ‘무의존無依存’(생각할 어떠한 대상도 없음)으로 만들고 나서, 생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것(진아)에 대해 항상 명상을 해야 한다.(209쪽) (무소유처정 無所有處定). (대성 옮김, 라마나 마하르쉬의 저작 전집 탐구사). 마음을 무의존. 생각할 어떤 대상도 없는 상태로 만들고 나서 생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 27:00 항상 명상을 해야 된다. 어떤 생각의 대상도 없게 만들어라.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입니다. 무소유처정으로 들어가는 거야. 생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참나만 현존하는 거, 이게 무소유처정에 들어가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힌두교식 수행법이라는 거예요. 공처정, 식처정, 무소유처정 지금 다 나왔습니다. 텅 비워라. 그리고 진아만 빛나게 하라. 그리고 어떤 생각의 대상도 다 날려버려라. 무소유처정, 소유하지 마라. 무의존하라는 게 이게 무의존처정(無依存處定)이에요. 무소유처정. 3. 그것(진아)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상념(생각 혹은 마음)이 아니나, 그 자체가 상념(의식)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그러나 도처에 평등하게 관계하는) 지고의 실재인 자아에 대해 항상 명상을 하여라. (209쪽)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그리고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상념이 아니지만 그 자체가 상념이기도 하다. 의식도 또한 참나의 작용이거든요. 그러니까 참나가 작용을 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것도 웃기잖아요. 생각이 참나의 작용인데. 생각이 참나는 아니지만 동시에 참나의 작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28:00 그러나 도처에서 평등하게 관계하는 지고의 실재인 자아에 대해 항상 명상을 하라. 지금 이 명상법들이 그대로 불교에서 말한 사무색정(四無色定)입니다. 어떠세요? 맞죠? 그대로. 제가 억지 부리는 것 같지 않으시죠? 예.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미 다 나왔죠. 비상비비상처정. 석가모니께서는 출가하자마자 이미 여기까지 깨달으셨습니다. 여기서 전개해야지 석가모니가 보이지 이걸 이해 못한다는 건요 석가모니가 어떤 경지에 갔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아라한이 어떤 경지인지도 모르고요, 석가모니가 어떤 경지인지도 모르고, 힌두교가 어떤 경지인지도 모르면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근데 떠들어요. 왜? 나도 글은 읽을 수 있다 이거예요. 언어에서 언어로 글을 읽어가지고 떠듭니다. 4. ‘지복至福’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활동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잠과 비슷한 명지(明知)의 상태에서 갖는 기쁨(혹은 평안)의 체험입니다. 이것을 또한 ‘합일合一무상삼매’(개념 없이 머무름)라고도 합니다.(98쪽). 네 번째 지복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활동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잠과 비슷한 밝은 지혜의 상태에서 갖는 29:00 기쁨의 체험이다. 이겁니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지복이에요. 이 8식의 세계를 말해요. 무지, 깊은 잠 속에서 참나와 완전히 하나 된 이 상태. 이때는요 이때가 지금 뭐냐면은 모든 것을 떠났잖아요. 이게 지금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 없어요. 멸진정(滅盡定) 상태, 멸진정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거기 이제 힌두교식으로는 합일무상삼매(合一無想三昧) 무소유처정 아까 그거랑 똑같아요. 합일무상이라고 한다. 문 닫아버리고, 그러니까 문 닫아버렸으니까 에고가 작동을 못 하죠. 에고가 작동을 못하니까 생각을 일으킬 수가 없어요. 한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 상태에서 지복감 밖에 없어요. 그 상태에서 깨어 있는 거, 이거를 합일무상삼매라고 한다. 개념 없이 머무름, 이렇게 푸는데요. 각주 보실래요? 8번 합일무상삼매는요 일시적인 무상삼매(無想三昧)라고 합니다. 들어가면 나와야 돼요. 합일무상삼매의 제일 특징은 이렇게 에고마저 작동 못하게 30:00 깊게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러면 다시 나와야 됩니다. 이 삼매는 오래가진 못해요. 그래서 일시적인 무상삼매라고 하고요. 무상이라는 건 어떤 생각도 없고 참나랑 합일됐다는 거예요. 참나랑 완전히 합일됐는데 보세요. 문 닫고 합일된 거는 합일무상삼매라고 하는데 이건 오래 못 간다고요. 다시 문 열어야 돼요. 우리는 세상을 살아야 되니까 문이 열립니다. 그러니까 오래 가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참나랑 합일된 상태라는 겁니다. 그게 멸진정에 해당되는 무소유처정의 특징이에요. 인도식으로 합일무상삼매. 그러니까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하는 게 맞죠. 불교에서도 무소유처정을 다른 말로 무상정이라 그래요.생각이 없는 삼매. 그래서 8) 일시적 무상 삼매 : 이는 깨달음 이전의 단계다. 라마나 마하르쉬는 이걸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안 해요. 이 단계에서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노력이 없이도 진아를 각성하는 상태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노력도 없이 에고를 초월해야 되니까 에고를 초월해서 진아랑 합일된 상태가 이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에고가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라 31:00 다시 문이 열리면서 에고가 다시 작동해요. 이 단계의 특징은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비록 진아를 일시적으로 각성하긴 하지만, 감각을 느낄 수도 없고 제대로 생활할 수도 없다. 육체에 대한 의식이 되돌아오면 에고가 다시 나타난다.(라마나 마하르쉬, 나는 누구인가, 청하). 그래서 마하르쉬가 어떤 비유를 드냐면요 이 합일무상삼매가 궁극이 아니고 비상비비상처정이 더 궁극이라는 근거로 이 얘기를 얘기해요. 어떤 위대한 요기가 딱 합일무상삼매에 10년 들어갔대요. 들어가기 직전에 “목마르다” 하고 들어갔대요. 10년간 합일무상 상태에 있다가 딱 나오면서 첫 소리가 뭐예요? “물.” 카르마가 조금도 바뀐 게 없다는 거예요. 정지만 해놨지 다시 작동하더라. 그래서 이건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마하르쉬가 비판합니다. 잠시 참나와 합일됐을 뿐이다. 문 열어놔도 아무 상관없어야 되는데 문 닫을 때만 이루어지는 참나 각성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다음 보세요. 5. ‘지복을 넘어선 상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대적 침묵’, 즉 움직이지 않는 깊은 잠과 비슷한 ‘생시-잠’(깨어있는 잠)의 상태에서 발견되는, 끊임없는 ‘마음의 평안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육체와 감각 기관은 활동하고 있지만, (엄마가 주는 음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잠에 빠진 아이 같이 그 사람에게는 전혀 외부적 자각이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요기는 행위를 하고 있을 때에도 행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본연本然무상삼매’라고도 합니다. (99쪽) (이 경지는 힌두교 요가의 최고의 경지이다.) 지복을 넘어선 32:00 상태란 무엇입니까? 그럼 그 더 넘어선 상태가 있을 거 아닙니까. 지옥에 빠져 있는 상태보다 더 궁극의 상태는 뭡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절대적 침묵, 즉 움직이지 않는 깊은 잠과 비슷한 생시-잠의 상태에서 발견되는. 깨어있는 잠은요 몸은 깨어서 다 움직이는데 의식은 자고 있대요. 의식은 참나를 떠난 적이 없대요. 생각을 하고 말하고 별짓 다 해도 완전히 참나랑 합일돼버린 상태, 참나를 놓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그 상태에서 발견되는 끊임없는 마음의 평안 상태다. 이 상태에서 육체와 감각 기관은 활동하지만. 다 활동을 해요. 오온이 작동하지만, 엄마가 주는 음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잠에 빠진 아이처럼, 주면 계속 먹는데 자고 있는 애 있죠? 젖 빨면서 자는 애, 그런 애들처럼 계속 움직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자각이 없습니다. 이 말은요 자각이 없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참나에 합일돼 있다 보니까 참나 자리에서는 자각을 못한다는 거예요. 근데 밖으로는 활발하게 의식과 육근이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33:01 이분 관점은요 참나 관점이다 보니까 “그럼 진짜로 잠자면서 뭘 해야 되나?” 이게 이렇게 오해하면 안 돼요. 이 상태에서 요기는, 요기는 요가하는 사람이죠. 요기는 행위를 하고 있을 때도 행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옛날 선문답이에요. 빗자루로 이렇게 청소하고 있으니까 한 스님이 “열심히 청소하고 있구나” 하니까 “청소하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해요. 선문답에. 요거예요. 열심히 움직이는데 참나는 안 움직이고 있는 자리도 있다. “나 참나 상태에서 지금 청소하고 있는 거다”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 선문답 책에 나와요. 그 선문답. 이거를 본연무상삼매(本然無想三昧)라고 해요. 이게 뭐냐 하면요, 뭐가 차이인지 아셔야 돼요. 멸진정(滅盡定)보다 더 궁극의 선정이, 무상정(無想定)보다 더 궁극의 선정이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힌두교가 주장하는 근거는 이겁니다. 문을 닫았을 때만 누리는 삼매라는 건요 문을 닫고 이 상태에 있을 때만 선정이 유지되고 문 열면 깨진다는 거예요. 근데 문을 열어놔도, 육근(六根)이 다 작동해도 일체가 34:01 참나의 작용인 줄 알고 참나가 항상 내 안에 광명하게 빛나고 있으면 참나는 본래 삼매 상태이기 때문에 본래무상삼매라고 하는 거에요. 뭔 짓을 해도 본래 삼매다와 이게 이 사상이 그대로 불교에서는 본래 열반이라고 합니다. 뭔 짓을 해도 본래 열반이다. 이게 법공의 핵심이에요. 만법은 본래 열반에 들어있다 하는 게 법공사상의 핵심이다. 육근도 본래 참나 작용이니까 본래 무상한 거예요. 본래 열반인 거예요. 대승기신론 가면 본래 열반이라는 말을 써요. 힌두교랑 불교가 이렇게 같이 가고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논리 체계는 다른데 같이 가고 있다는 거. 그리고 실상을 알고 체험한 사람은 이게 같이 가고 있는 다른 논리라는 걸 알 수 있어야 돼요. 이걸 모르니까 논리끼리 싸우고 있는 겁니다. 서로 논리가 다르다고. 실상에 대한 체험이 빠져버린 채 싸우면 이거는 그냥 뭐죠? 탐진치 놀음밖에 안 돼요. 35:00 본연무상삼매 각주 보실래요? 9) 본연적 무상 삼매 : 이는 안전하게 자신의 에고를 제거한, 깨달은 사람의 상태다. 근데 이게 지금 저도 마하르쉬의 언어에 반대하는 거 하나가 정확한 손가락이 아니라고 비판한 건 오히려 이겁니다. 이렇게 본연무상삼매에 들어간 사람은 에고가 죽었다고 생각해요. 이 논리가 좀 비약이죠. 이거는 이거는 실상과 비추어서 비약이라는 거예요. “지금 마하르쉬가 이렇게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에고가 왜 죽어요?” 그럼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거는 깨달은 에고인데 그걸 깨달은 에고라고 부를 수는 있지. 에고가 있긴 있지.” 이렇게 인정해요. 단, 또 이런 이상한 논리를 시작한다고요. 이런 게 힌두교 도인들의 이상한 논리인 거예요. “니가 볼 때는 에고가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편의상 깨달은 에고가 있다고 해줄게. 사실 난 에고가 죽었어.” 이 논리 어떠세요? 개소리죠. 지랄하고 있는 거지. 무슨 에고가. 왜 그런지 아세요? 힌두교 도인들은 참나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니까 36:00 참나 발견한 즉시 에고가 죽었다고 하고 놔버려요. 에고가 하는 모든 짓거리는 카르마의 어쩔 수 없는 발현이라고만 얘기하고 “난 이번 생이 끝이고 이게 발현돼야 나는 죽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별짓 다 합니다. 그래서 미친 짓도 해요. 그것도 인정해줘요. 그거는 기존 잘못된 업보로 살아왔던 그 업의 마지막 발현이기 때문에, 선풍기는 분명히 껐지만 몇 바퀴 더 돌다 끝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이미 카르마가 아니라는 거예요. “카르마 같지만 카르마가 아니다. 에고 같지만 에고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려고, “깨달은 에고는, 에고라고 있을 수 있는데, 그러니까 말은 쓸 수 있는데 니가 볼 때는 있지만 내가 볼 때는 없어. 왜? 나는 지금 잠자고 있어.” 이 소리예요. “내가 지금 떠들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의식의 작용까지도 다 카르마의 소산이지 내 책임은 없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나온 거예요. “이 새끼들 이상하다.” 뭐가 포인트인지 아셔야 돼요. 막연히 힌두교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37:00 막연히 힌두교가 잘못 알고 있고 막연히 힌두교가 참나를 주장한 게 다 그릇된 게 아니라 이상한 포인트가 있어요. 석가모니는 그걸 깨닫고 나오신 거예요. 왜냐하면 이 논리에 빠져버리면 탐진치를 닦을 생각을 안 하겠죠? 아예 안 하겠죠. 탐진치가 죽었다는데 그 스승이 그랬겠죠. 생략돼 있지만 “이 경지까지 오면 이제 자넨 죽었네. 자네 에고도 죽고 나의 에고도 죽었네. 오직 참나만 현현하니까 이 상태에서는 더 닦을 게 없으니 이게 최고의 해탈일세.” 했는데 석가모니가 “아닌데.” 한 거예요. “아닌데. 내가 볼 땐 너 에고 지금 성성한데.” 그럼 그 스승이 뭐라고 했겠어요? “자네가 볼 땐 에고로 보일 수 있을 걸세.” 이지랄 했겠죠. 석가모니 나왔죠. 자 이렇게까지 우리가 거의 “그것이 알고 싶다” 수준 아닌가요? “그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 상태에 38:00 도달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어울려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나갈 수가 있어요. 근데 내가 아니래요. 이제 나는 진아래요. 고생해서 가난한 집 부모님이 키워줬더니 어느 날 재벌집 진짜 부모가 찾아오니까 이제, 이제 이쪽 부모는 부모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거죠. 나는, 나의 본색은 참나다. 에고로서의 내 모습은 잊어 달라 지금 이런 거예요. 이게 힌두교의 문제점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깔 걸 까야 힌두교도 “아야” 하지 터무니없는 걸 까면 힌두교도 “아야”가, 타격감이 하나도 없죠. 다 참나 상태인데 참나 없다 그러면 힌두교인들이 뭐라 그래요. 그런데 이런 부분을 지적하면 힌두교도 “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삼매를 얻은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신과 세상 사이에 어떤 차별도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아 아닌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라마나 마흐르쉬의 ‘나는 39:00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각주도 다 책의 내용이에요. 어떠세요? 이제 갑자기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주장합니다. 나와 남을 하나다. 근데 힌두교 성자들이 또 문제가 뭐냐 하면 라즈니쉬니 뭐니 또, 또 이상한 문제를 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럼 뭐라 그래요? “그것도 묵은 업의 발현일 뿐이다.” 힌두교에 기적의 논리가 있습니다. 참나가 있죠. 여기 둘러싼 업이 있어요. 업보가 있어요. 이 업보가, 업보 중에 일부가 발현돼서, 이번 생에 발현됐어요. 이번 생에. 그러면 이걸 발현업이라 그래요. 발현업. 그럼 기존 업보 중에 발현된 거 빼고 뭐가 남았죠? 오래 묵은 업, 첫 번째 오래 묵은 업하고 두 번째 이제 앞으로 발현될 업이 남았죠. 다음 생부터 발현될 업. 요 두 개가 참나 각성하는 순간 다 깨진대요. 소멸. 이렇게 믿는 거예요. 이러면 좋겠죠? 이러면 좋겠죠? 두 개가 박살납니다. 40:00 자 이제 뭐만 남아요? 그럼 업은? 아니 이게 박살날 정도면 이것도 박살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게 박살나면 죽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걸 살려둡니다. 그래서 이 업은, 이번에 이미 발현된 업은 박살이 안 난대요. 이미 작동이 시작해버린 업은 박살이 안 난대요. 그럼 언제 끝나요? 이 발현업은 죽을 때.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기당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살 건 다 살겠다는 거예요. 업은 박살났는데 살 건 다 살겠다는 거예요. 갑자기 죽을 수 없으니까. 근데 기존 업은 다 끝났으니까 뭐가 일어나요? 앞으로 내생(來生)은 없어요. 이 논리가 아라한 사상에 그대로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윤회를 할 수가 없어졌어요. 업이 다 파괴됐습니다. 근데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야 돼요. 논리도 아라한 논리랑 똑같아요. 이게 아라한들이 생존해탈자라고, 유여(有餘)아라한, 아직 오온이 죽을 날까지 기다려야 되는, 남은 게 있는 아라한, 오온이 남아 있는, 오온을 갖고 있는 열반에 든 아라한이고, 여기서 발현업이 41:00 끝나면 뭐가 돼요? 힌두교식으로 발현업이 끝나면, 무여(無餘)아라한, 이제 남은 게 하나도 없는 아라한이 돼요. 완전히 열반에 들어가 버려요. 이 논리가 똑같이 힌두교의 생존 해탈자입니다. 진아를 얻었는데 아직 남은 생은 있어요. 발현업, 발동한 업은 끝나야 되니까. 지금 선풍기 버튼은 눌렀지만 아직 좀 더 돌아가야 돼요. 그거 멈출 때까지 기다려줘야 돼요. 근데 더 돌지 않아요. 앞으로 일어날 업은 다 박살났어요. 어떠세요? 미래의 업과 기존에 쌓인, 과거에 쌓인 업과 미래에 이루어질 업은 박살나요. 근데 이번 생에 구현되기 시작한 업만은 남아있대요. 이런 논리들이 이상한 거예요. 이상한 거는 힌두교예요. 이럼으로써 이번 생이 끝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런 게 실제로 아라한 사상과 그대로 잘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아라한과 이 해탈자는 같은 경지라는 거예요. 진아가 정광명이고 정광명이 열반이라면 정광명에 안주한다는 의미에서는 둘이 똑같아요. 42:00 그렇죠? 언어만 다르지 스스로 빛나는 의식에 안주해 있다는 점에서 진아 안주자와 열반 안주자는 똑같고 보이는 행태까지 똑같은데 다르다고 보는 게 옳을까요? 논리가 다를 뿐이지 언어가 다를 뿐이지 다르다고 보는 게 옳을까요? 같다고 보는 게 옳을까요? 만나서 얘기해 보면 떠드는 수준도 똑같아요. 이해되시죠? 둘 다 부처님 경지는 못 돼요. 아라한들도 부처님보다 거리가 있고 이쪽 힌두교 스승들도 부처님하고 거리가 있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게 불만이어서 더 닦은 사람이에요. 다만 차이라고는 부처님이 터득한 탐진치 그 제압법을 아라한들은 들어서 알고 있다와 이쪽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 차이죠. 그렇죠? 아라한들은 경지는 같아도 정보가 더 있다고요. 아라한들은 석가모니한테 배웠으니까. 답이 있는 사람한테 배웠으니까 답이 더 있을 뿐이지. 여러분 학당 강의 들어서 답을 다 안다고 여러분이 다 여러분 게 아니죠? 43:00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부처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거지 자기 게 아니니까 시바경에서 “아라한들도 탐진치 뿌리를 더 뽑아야 된다”라고 얘기하신 거라고요. 여기까지 다 이해되시죠? 납득이 돼야 끝납니다. 이게 다 납득이 돼야 돼요. 납득이 되시면 된 거예요. 하나 더 볼까요. 6. ‘진아의 체험’은 지속적인 명상의 결과로 미묘하고 움직이지 않게 된 마음에게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미묘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진아의 체험’(진아를 체험하는 에고가 존재)을 가진 사람을 ‘생존生存해탈자’라고 합니다. … 미묘한 마음마저 해소되고 ‘자아의 경험’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지복의 바다’에 잠겨 어떠한 차별화된 존재도 없이 그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런 사람을 무신無身해탈자’라고 합니다. (64~65쪽). 진아의 체험은 지속적인 명상의 결과로. 이거 엄청 훈련해야 됩니다. 단박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지속적인 명상의 결과로 미묘하고 움직이지 않게 된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미묘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진아의 체험을. 즉 진아를 체험하는 에고가 존재한다는 얘기죠. 이 말 자체가 이거 제가 써놓은 거예요. 진아의 체험을 가진 사람을 생존해탈자라고 합니다. 이게 유여아라한입니다. 남을 여(餘)자, 남은 게 있는, 오온이 남아 있는 아라한. 오온이 남아 있으니까 색수상행식이 계속 작동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고가 작동해요. 그런데 에고가 44:00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이미 열반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거고, 힌두교에서는 에고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죠. 미묘한 마음마저 해소되고 자아의 경험이 사라졌을 때. 즉 에고가 이때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 사람도 자아의 경험이 있단 얘기잖아요. 있는데 “이거는 깨달은 에고고 실제로는 죽었다” 이런 주장인 거예요. “너희가 볼 땐 있을 거라서 내가 이렇게 얘기해 준다.” 그리고 지복의 바다에 잠겨 어떠한 차별화된 존재도 없이 그것과 하나 됐을 때. 완전히 문 닫고 이제 딱 마지막에 여기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돼요? 진아합일, 요게 무신해탈자. 이게 불교에서는 무여열반(無餘涅槃), 마하열반(摩詞涅槃)입니다. 대반열반(大般涅槃) 이렇게도 얘기하죠. 그래서 이런 사람을 무신(無身)해탈자, 몸이 완전히 사라진 해탈자라고 한다. 요게 앞 책 64, 65페이지에 있는 거네요. 여기까지 어떠세요. 재밌으시죠. 45:00 마하르쉬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공부해 봤습니다. 한 5분 쉬고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우파니샤드 또 들어가 볼게요. 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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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1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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